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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진만록(甲辰漫錄)
갑진만록(甲辰漫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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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진만록(甲辰漫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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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서 윤국형(尹國馨) 찬
○ 이 제독(李提督)이 평양을 평정한 뒤, 우리 나라는 제독 및 아장(亞將) 장세작(張世爵)ㆍ이여백(李如栢)을 위해서 화상(畫像)을 안치(安置)하고 살아 있는 사람의 사당을 세워 춘추로 제사지냈는데, 사당은 평양 안 현복현(玄福峴)에 있고, 이름을 ‘삼대장사당(三大將祠堂)’이라 하였다.
영상 이원익(李元翼)이 임진년(1592, 선조 25) 가을과 겨울 사이에 평안 감사로 병마를 거느리고 순안현(順安縣)에 진을 쳐서 평양의 적을 방어하였다. 계사년 정월에 적이 물러간 뒤, 성중에 들어가 불탄 나머지를 수습하여 백성을 어루만지고 구제하기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이 사랑하고 존경하여 화상을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의 생사(生祠)를 세웠으니, 사당은 삼대장사당 옆에 위치하였다.
○ 무술년(1598, 선조 31) 겨울에, 남쪽 변방에 남아 있던 적군이 다 달아난 뒤, 대평관(大平館) 서편에 형군문(邢軍門)의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는데, 전하께서 크게 ‘재조번방(再造藩邦)’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금으로 칠하여 걸어 놓았다. 성상의 필적에 신운(神韻)이 감돌고 웅건하여 이것을 본 중국 사람들이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중국 사람들은 관왕(關王 관우(關羽))을 존경하여 국가에서 사당을 세우는 외에 집집마다 화상을 그려 놓고 생활하거나 음식을 먹을 때에는 반드시 제사를 올리고, 특히 전쟁에 출동할 적에는 더욱 정성을 드린다.
무술년 봄과 여름 사이에 명 나라 군사가 많이 왔을 때, 남대문 밖 도제고현(都祭庫峴)에 관왕묘(關王廟)를 세웠는데, 대소의 장수들이 예를 드리지 않는 이가 없었고, 심지어는 성상께 예를 드리도록 청하기까지 하였다. 기해년 전쟁이 끝나 군사가 돌아갈 적에, 성지(聖旨 중국 천자의 분부)를 받들었다 하고, 동대문 밖에 사당을 세우는데 관원 한 사람을 두어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그 비용을 비록 중국에서 지급한다고 하지만, 그 액수는 얼마 되지 않았고, 공사가 커서 모두 우리 나라에서 재력(財力)을 동원하게 되니, 그 수는 만 냥도 넘었다. 공사가 끝난 다음에는 국가에서 관리를 두어 지키도록 하였다.
도제고에는 소상(塑像)을 세웠고, 동대문 밖에는 동상(銅像)을 세웠다. 관왕이 비록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장수라고는 하나, 남의 손에 죽음을 당한 사람이고, 공이 후세에 끼쳐진 사람도 아닌데, 중국에서 이처럼 존경하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의 말에는,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을 가리킴) 때에 신병(神兵)을 내어 도왔다.’ 하나, 알 수 없다.
○ 중국 사신으로 우리 나라에 온 사람들 중에 태감(太監 환관)은 으레 많은 뇌물을 요구하고, 문관은 혹 청렴하고 간결하여 법도로 처신하고, 혹은 시주(詩酒)와 풍류(風流)로 그 이름을 남기기도 하며, 그렇지 않다면 그저 평범할 따름인데, 아무리 청렴치 못하다는 비난을 듣는 사람이라도 태감의 무리들보다는 나았다.
내가 본 사람으로는, 정묘년에 온 사신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이 재주가 있고 기품이 맑고 근신하여 출중하게 뛰어나 사람들이 모두 기린이나 봉황새처럼 높이 우러러보아 중국 사신이 나온 이래로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지금까지도 일컬어진다. 난리 후에 나온 설번(薛藩)과 사헌(司憲) 두 사신은 한창 질서가 없을 때였으므로 접대함이 모양도 이루지 못하였으니, 말할 것도 없지만, 한림 고천준(顧天峻)과 행인(行人 중국 벼슬 이름) 최정건(崔挺健) 같은 사람들은 태자(太子)를 봉한 조서 반포를 위해서 임인년 봄에 왔는데, 이때는 적군이 물러간 지 이미 오래여서 접대하는 예절이 거의 예전 법도를 회복하였는데도 고천준의 탐욕이 비길 데가 없어 음식과 공장(供帳)의 아주 작은 물건들까지 모두 내다 팔아서 은자로 바꾸었으니, 말하면 입만 더러워진다. 데리고 온 맹인(盲人)을 상공(相公)이라 부르면서 교자를 나란히 하고 다니기까지 하니, 더욱 웃기는 일이었다. 최정건 역시 고천준과 마찬가지였지만 약간 나았다. 2백 년 이래 중국 사신의 체면이 여기에 이르러 다 사라졌으니, 애석한 일이다.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고천준이 중귀(中貴 환관)와 체결하고서 당시의 명망을 사서 장차 유덕(諭德) 자리에 올라 멀지 않아 정승이 되리라.”하니, 그렇게 된다면 더욱 놀라운 일이다.
○ 중국의 문무 장신(文武將臣)으로 전후에 우리 나라에 나온 자가 매우 많은데, 그 중에 양 경리(楊經理)는 대범하고 우뚝하여 남의 칭찬을 잘 하지 않고 몸가짐을 아주 엄하게 하였으며, 양 포정(梁布政 이름은 조령(祖齡))은 청렴하고 검약하여 스스로 삼갔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비록 군문(軍門)의 높은 지위라 하더라도 번거롭고 비루하다는 비평을 면치 못하였다.
만경리(萬經理 이름은 세덕(世德))가 양호를 대신하여 나와서는 태만하여 법도가 없고, 구차스럽게 이익만 추구하여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었다. 귀국할 때 짐바리가 길을 메웠다.
어떤 사람은 이르기를, “안찰사(按察使) 두잠(杜潛)도 매우 대범하고 진중하였다.”하나, 이는 가장 뒤에 나온 사람으로, 나는 양조령을 따라 영외(嶺外)에 있어서 미처 만나보지 못하였으므로 꼭 그러했는지 믿을 수는 없다. 만경리는 총독군문(摠督軍門)에 승진하여 군문에 유진(留鎭)한 지 오래지 않아 죽었다.
○ 임인년 한여름에 내가 황강(黃崗)으로 근친(覲親)을 갔을 때, 성영(成泳) 영공(令公)이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왔다. 서로 만나 이야기하던 중에 그가 말하기를,
“조정(명 나라)에 있을 적에 새로 간행한 《조선시선(朝鮮詩選)》을 보았는데, 바로 오명제(吳明濟)가 편찬한 것이었소. 그 안에는 영공이 오명제와 작별하며 지은 율시 한 수가 있었소.”
하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내가 무술년 서울에 있을 때 어느 장군의 막하(幕下)인지는 모르나, 오명제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문장에 능한 사람이었다. 나의 임시로 사는 곳과 가까워서 때로 찾아오기를 서너 차례 하였으나, 앞에 말한 이별하는 시에 대해서는 내가 지을 수도 없었거니와 실로 그런 일도 없었다. 그 책이 서장관 조성립(趙誠立)의 처소에 있다는 말을 듣고 구해 보려 하니, 짐보따리 속에 깊이 들어 있어 서울에 가면 보여 주겠다고 하였다. 내가 서울에 돌아와 가져다 보니, 〈회감(懷感)〉이라는 제목 아래에 ‘어ㆍ오 참군께 드림[呈于魚吳參軍]’이라 하였다. 시에,
삼베옷 온통 길 먼지에 날리고 / 麻衣偏拂路岐塵
수염은 텁수룩하고 얼굴은 늙어 아침 거울마다 다른 모습일세 / 鬢改顔衰曉鏡新
상국의 좋은 꽃은 근심 속에 아리땁고 / 上國好花愁裏艶
고향의 꽃다운 나무 꿈속의 봄이어라 / 故園芳樹夢中春
편주는 안개 달 속의 바다에 뜨기를 꿈꾸고 / 扁舟煙思浮海
필마는 관하에서 나루터 묻기에 지쳤다네 / 匹馬關河倦問津
칠 년 전쟁에 이별을 서러워하는데 / 七載干戈嘆離別
푸른 버들의 꾀꼬리 소리가 나의 애를 태우는구나 / 綠楊鶯語太傷神
라고 하였다. 내 마음에 적이 이상히 여겨 친지들에게 물으니,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는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는 것인데, 7년 간의 전쟁이란 말이 마침 오늘날의 사실과 비슷하므로, 오명제가 이것을 따 가지고 아무개가 그와 작별하는 시라 하여, 중국에 가서 과시하기 위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하였다. 오명제의 허황됨이 이와 같으니, 그와 잠시나마 만나서 그 얼굴을 알고 있다는 것이 매우 한탄스럽다.
이른바 《조선시선》이라는 것은 시만 뽑아 놓았을 뿐 아니라, 그 권수(卷首)의 목록에는 우리 동국의 역대 역성(易姓)의 시말을 기록하였는데, 최치원(崔致遠) 이하 오늘에 이르기까지 재상ㆍ조사(朝士)ㆍ규수(閨秀)ㆍ승가(僧家) 등 백여 명의 성명을 나열하고 그들의 출처(出處 나가 벼슬하거나 집에 들어앉음) 등을 소상히 밝혔으니, 이는 길에 떠도는 말을 들어서 쓴 것이 아니고 필시 사실을 아는 문인(文人)이 지도한 것일 테지만, 정확하게 누구의 손에서 나왔는지는 알 수가 없다. 내 이름 아래에는 벼슬이 형조 참판에 이르고, 지금은 연로하여 한강(漢江)에 물러가 있다 하였고, 끝에 “임인년(1602, 선조 35) 봄 정월 초하루에 속보(續補)하였다.”하였다. 그가 말한 한강이라 한 것은 필시 내가 그때 서강(西江)에 살고 있던 것을 가리킨 것인데, 신축년 10월 27일의 일이니, 이날부터 임인년 정월 초하루까지는 겨우 63~64일밖에 안 된다. 오명제가 중국에 있으면서 나의 거취를 어쩌면 그리도 이처럼 빨리 듣고 있단 말인가. 기해년(1599, 선조 32) 철병 이후로는 중국인이 나오지 않았고, 비록 북경에 간 역관(譯官)이 있기는 하였으나 나의 거취와 같은 아주 작은 일에 대해서 어찌 서둘러 저쪽에 전한 것인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으니, 정말 괴이한 일이다.
○ 옛 사람이 음식을 먹을 때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한 사실이 전기(傳記)에 나온 것이 역력히 말해 주고 있고, 우리 나라의 풍속 또한 그러하였다. 그런데 임진란 이후로 중국의 대소 장관과 정동(征東 일본 정벌)의 사졸들이 전후에 몇천 만이나 나왔는지는 알 수 없는데, 모든 음식을 먹을 때 마르고 국물이 있는 것을 가릴 것 없이 전부 젓가락만을 사용하고 숟가락은 전혀 사용하지 않으니, 어느 때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의 말에는, ‘대명 고황제(大明高皇帝)의 유훈(遺訓)에 진우량(陳友諒)을 평정하기 전에는 음식을 먹을 적에 감히 숟가락을 쓰지 말라 하여 그 꼭 취하려는 뜻을 보인 것이 그대로 습속이 되었다.’고 하나, 그런지 사실 여부는 알 길이 없다.
○ 임진년 여름에 신성여 점(申聖與點) 영공이 북경에 가서 옥하관(玉河館)에 유숙하고 있었다. 그때 병부(兵部)에서 급히 사지통사(事知通事)를 불렀다. 일행이 생각하기를, “외국에 관한 일은 예부에서 전적으로 관장하고 병부에서는 상관하지 않는데, 웬일인지 알 수 없다.”하고, 급히 서둘러 나아갔더니, 상서(尙書) 석성(石星)이 이르기를,
“왜적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그대의 나라를 침범하여 국왕이 쫓겨 지금 의주(義州)에 이르렀소. 그대들은 듣지 못하였는가?”
하였다. 통사들이 놀라서 통곡하고, 성여 등도 병부로 달려가 뜰 아래에서 통곡하며 구원병을 청하니, 상서도 의자에서 내려와 만면에 눈물을 흘리며 응당 출동하여 구원해 주겠다 하였다. 그래서 모두 우리 나라를 위해 주선하는 데에 갖은 성의를 다하였으며, 황제도 우리 나라 일을 보통보다 만 배나 걱정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봉왜 천사(封倭天使) 이종성(李宗城)이 왜의 진지에서 도망하자, 중국 조정의 논의가 주화(主和)를 그르게 여겼다. 상서가 마침내 하옥되어 1년이 지나 죽으니, 매우 가슴 아픈 일이다. 상서는 일찍부터 직간(直諫)으로 명성이 알려졌는데 늘그막에 와서는 더욱 당시에 중망을 얻었다 한다.
○ 중국의 방방 곡곡에는 모두 점포가 있어 주식(酒食)과 거마(車馬) 등의 물품이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다. 비록 천리 먼 길을 가는 사람일지라도 은자 한 주머니만 차고 있으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지 못할 것이 없으므로 그 제도가 매우 편리하였다. 우리 나라 백성들은 모두 가난하여 저자나 행상 이외에는 사고 파는 것이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오직 농사로 생활을 꾸려갈 뿐이다. 호남과 영남의 대로에 주점이 있기는 하나 행인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술과 꼴ㆍ땔나무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여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여행 물품을 가져가는데, 멀리 가는 사람은 두세 마리의 말에 실어가고, 가까워도 한두 마리의 말이 필요할 정도여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 병통으로 여겨 온 지가 오래되었다.
양 경리(楊經理 이름은 호(鎬))가 우리 나라에 와서 중국을 모방하여 연로(沿路)에 모두 점포를 설치하고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각기 물건을 대도록 하였으니, 뜻은 매우 훌륭하였으나 습속이란 고치기 어렵고 재력도 미치지 못하여 사람들이 그대로 따르려 하지 않았다. 수령들이 죄를 면하기 위하여 중국 장수가 지나갈 때면 관에서 물건을 준비하여 길 왼편에 늘어 놓고 매매하는 듯이 하다가, 지나간 다음이면 거두니, 도리어 아이들 장난만도 못하여 중국 사람에게 비웃음만 샀으니 한탄스러운 일이다.
○ 주사(主事) 서중소(徐仲素)가 우리 나라에 있을 때 어버이 부음 소식을 듣자 대소의 중국 장수들이 다 조문을 하였고, 우리 전하께서도 조문을 가셨다. 성복(成服)한 후에 서중소는 소복(素服) 차림으로 소교(素轎)를 타고 대궐과 중국 장수의 각 아문(衙門)에 나아가 문 밖에서 감사의 절을 드리고는 곧장 아문에 돌아갔다. 성복을 한 며칠 뒤에는 유격(遊擊) 등이 술과 안주를 장만하여 가지고 가서 위로를 하니 먹고 마시기를 태연히 하며, 성복(成服)에 드리는 것도 어육(魚肉)을 제외하지 않았다 하니, 매우 괴이한 일이다. 일찍이 소 안찰(蕭按察 응궁(應宮))과 양 포정(梁布政 조령(祖齡))의 접반사로 2년을 지내는 동안 한 번도 아문에서 ‘육식을 피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그 까닭을 또한 알 수가 없다.
○ 병신년 7월 8일에 충청도 순찰어사(巡察御史) 이시발(李時發)의 장계가 도착했다. 그 장계에 이르기를,
“정산 현감(定山縣監) 정천경(鄭天卿)의 보고에 의하면, 현에 사는 첨지 이정양(李廷揚)의 고발에, “고을 사람 윤천기(尹天機)와 조충걸(趙忠乞)이 와서 말하기를, 「이몽학(李夢鶴)이 선봉장으로 본현의 쌍방축(雙方築)에서 군사를 모아 거의 6백~7백 명이나 되는데, 장차 홍산현(鴻山縣)을 침범하려 한다.」 하며, 윤천기와 조충걸 역시 그 당에 들어갔다가 도망쳐 나온 자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날 저녁에 시발의 장계가 또 왔는데, ‘6일 새벽에 몽학이 홍산에 쳐들어와 현감 윤영현(尹英賢)을 사로잡고, 임천(林川)으로 향하여 또 군수 박진국(朴振國)을 사로잡으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여기에 붙어서 도당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내용이었다. 조정에서 크게 흔들리어 비로소 선전관(宣傳官)을 보내 형편을 탐지하도록 하고, 또 적을 잡는 일로 감사ㆍ병사ㆍ어사에게 아울러 지휘하게 하였다.
적이 7일에 정산(定山)을 함락하니, 그 고을 수령 정천경(鄭天卿)이 뛰쳐 달아나고, 8일에는 청양(靑陽)을 함락하니 그 고을 수령 윤승저(尹承渚)가 또 도망을 하였다. 수일 동안에 무리가 수천에 이르고 시골의 서민들은 산중에 도망가 숨으니 마치 왜란을 피할 때와 같았고, 흉도들의 기세는 대단히 치열하였다.
9일에는 대흥(大興)을 함락하니, 그 고을 수령 이질수(李質粹)가 또 산중으로 도망가 첩보(牒報)를 써서 사람을 보내되, 신평(新平)과 대진(大津)을 거쳐 서울에 이르러서 비변사에 바쳤으니, 큰 일이 이미 막혀서 통행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보고에 의하면, 적이 본현을 점거하였는데, 무리는 3~4천 명쯤 되고, 병기를 가진 군관과 무사들 수백 명 이외에는 모두가 맨손인 촌 백성이라는 것이었다. 첩보를 가지고 온 사람은 면천시켜 주고, 사복(司僕)으로 삼아 내려보냈다.
9일에는 적장이 홍주를 침범하니 주의 관속 이희수(李希壽)와 신씨(申氏) 성을 가진 두 사람이 목사 홍가신(洪可臣)에게 고하기를,
“우리가 거짓 항복하고 상세히 적의 형편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하고, 함께 광시역(光時驛)에 가서 노상에 꿇어앉아 그들에게 붙기를 원한다고 말하니, 적은 대흥(大興)에서 서로 만나자고 하였다. 그 고을에 이르니, 적은 대청의 교의에 걸터앉아 있었다. 이희수와 신씨가 들어와 뵈니, 적이 교의에서 내려와 재배를 하고 말하기를,
“오늘은 아직 이르니 홍주로 쳐들어가고자 한다.”
하니, 이희수와 신씨가 말하기를,
“홍주는 성을 굳건히 지켜 함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가서 허실(虛實)을 다시 살펴보고 와서 보고한 뒤에야 갈 수 있으며, 우리도 내응할 것입니다.”
하니, 적이 그대로 머물고 출발하지 않았다.
다음날 회보를 기다렸으나 회보가 오지 않아 늦게야 출동하였다. 이희수와 신씨가 돌아와 목사에게 보고하니, 목사는 변란을 듣고 성을 지킬 방비를 한데다가 이 보고를 듣고 더욱 방비를 치밀하게 하였다. 주(州)에 사는 무장 박명현(朴名賢)이 처음부터 성에 들어왔으므로 목사가 그를 중히 여겼는데, 박명현은 본디 용맹스럽기로 유명하였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이름 있는 무사들을 많이 모았다. 체찰사(體察使)의 종사관(從事官) 신경행(辛敬行)이 마침 내포(內浦)에 왔다가 변을 듣고 달려와서 이웃 고을 수령들에게 영을 전달하고, 수사(水使) 최호(崔湖)도 와서 지키게 하니,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왔다. 그래서 미처 조치하지 못했던 모든 일이 비로소 완비되게 되었으니, 이는 이희수와 신씨가 적을 늦추게 한 힘이었다.
적의 행군이 주의 경계를 침범하자, 박명현은 무사를 많이 보내서 맞아 싸워 포로를 많이 잡으니, 모두가 적의 선봉(先鋒)이었다. 적이 주(州)의 성 2~3리 되는 곳에 주둔하니, 모두 다섯 진이고, 한 진에는 각기 천여 명씩이었다. 저녁이 되어 적장 몇 명이 성 아래로 달려와서 호통하기를,
“천운(天運)이 이와 같은데 성중 사람들은 어찌 나와서 호응하지 않는가?”
하며, 좌충우돌 날뛰며 업신여기는 듯하였다. 밤에 성중에서는 화포를 쏘고 또 불화살을 쏘아서 동문 밖 성 근처의 인가(人家)를 불태우니, 화염이 하늘을 밝혔다. 병사(兵使) 이시언(李時彦)은 온양(溫陽)에서 곧장 홍주로 향하여 이미 예산(禮山) 무한성(無限城)에 이르렀고, 어사(御史) 이시발(李時發)은 유구역(維鳩驛)에 진을 치고 장차 홍주로 향하려 하고, 중군(中軍) 이간(李侃)은 청양에 진을 치고 홍주로 향할 차비를 하니, 사기가 크게 떨쳐졌다.
11일 새벽에 적은 스스로 붕괴되어 달아나니, 박명현은 성중의 병사를 독려하여 거느리고 청양까지 추격하였다. 적이 주둔하고서 항거하고 대적하는데, 최호와 여러 장수의 군사가 또 많이 도착하였다. 적의 휘하 김경창(金慶昌)ㆍ임억명(林億命)ㆍ태근(太斤) 등 세 명이 이몽학(李夢鶴)의 머리를 베어 바치므로, 길 아래에서 기시(棄尸)하니, 오합지졸의 무리가 일시에 흩어졌다. 많은 군사들이 추격하여 혹은 체포하고 혹은 참수한 것이 부지기수였다.
서울에 사는 겸사복(兼司僕) 한현(韓絢)이 몰래 역모(逆謀)를 꾀하여 몽학에게 지시하여 군사를 일으키게 하고, 자기는 면천(沔川) 농장에 가 있으면서 성패(成敗)를 좌시하고 있던 것이었다. 붙잡힌 적당(賊黨) 중 많은 사람들이 한현이 역모의 주모자라 하였다. 한현을 체포하여 국문하니 정상이 다 밝혀져서 곧 처형되었고, 함께 모의함이 뚜렷한 자들은 모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애초에 역모의 보고가 매우 급하자 훈련도감 대장(訓鍊都監大將) 조경(趙儆)이 자기 휘하의 경병(京兵) 8백 명을 거느리고 가서 치기를 자청하였다. 경립(敬立 저자(著者) 윤국형의 아들)이 그때 훈련도감 도청(都廳)으로 있었는데, 또한 따라갔다. 11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진위현(振威縣)에 이르자 적이 패했다는 소식이 이르렀으므로 왕명에 의해 회군하였고, 황해(黃海)ㆍ강원(江原)ㆍ경기(京畿)의 병마를 모두 징발하였으나, 이때에 이르러 모두 정지하게 되었다.
김경창과 임억명은 상으로 가선대부에 특진되었고, 태근은 6품의 실직(實職)에 제수되었는데, 얼마 못 가서 대간(臺諫)이 경창은 두 번째 가는 공이 된다고 하여 통정대부로 강등되고, 윤천기와 조충걸은 모두 6품의 실직에 제수되었으며, 이희수와 신씨 등도 6품의 실직에 제수되었다. 제장(諸將)들로 말하면 이시언이 첫 번째 공으로 가의대부에 오르고, 최호가 다음으로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이시발은 통정대부로, 홍가신(洪可臣)은 성을 지킨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으니, 모두 성상의 명에 의한 것이다.
박명현의 공은 모두들 특출하다고 여겼으나 상을 받지 못하다가, 조정에서 여러 번 청한 뒤에 가선대부에 추승(追陞)되었다. 대간이 이시언과 이시발은 공이 없다고 논계하여 상을 고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당시에 혜성(彗星)이 자미성(紫微星)의 황제 자리에 매우 위급하게 범하였으나, 적이 평정되고는 바로 없어졌으니, 천변(天變)이 위에서 응함이 이와 같은 것이었다.
○ 임인년(1602, 선조 35)과 병오년(1606, 선조 39) 두 차례에 중국 사신이 나왔는데, 조정에서는 은자(銀子)가 부족함을 염려하여 은을 바치는 자에게 벼슬을 주었으니, 금관자와 옥관자의 장식이 실로 많아져서 관직의 천함이 전일보다 더욱 심하였다. 대개 처음에는 나이 60세 이상인 자로 은을 바친 차이에 따라 자급을 주었는데, 나이를 속이는 자가 많아져서 폐단이 무궁하였으니, 모르겠거니와 거둬들인 은자가 과연 얼마나 소용되었단 말이냐!
○ 을사년(1605, 선조 38) 겨울에 황제의 원손(元孫)이 탄생하자 천하에 널리 알렸다. 주지번(朱之蕃)이 정사(正使)가 되고, 양유년(梁有年)이 부사(副使)가 되어 병오년 4월에 비로소 우리 나라에 이르렀다. 주지번은 술을 좋아하고 시를 즐겼으며, 또 현판 글씨도 잘 썼는데, 우리 나라의 재상들과 연회할 적에 친구처럼 지내고, 심지어는 붙잡고 장난까지 하였다. 현판 글씨를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귀천을 막론하고 곧장 붓을 휘둘러 써주니, 그의 필적이 거의 중외 인가의 창이나 벽에 퍼지게 되었고, 비갈(碑碣)을 청하는 사람이 있어도 응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양유년은 재주와 명성이 주지번보다 훨씬 떨어졌지만, 대개 모두들 돈을 좋아하는 병폐는 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고천준(顧天峻)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또 부하를 단속하지 못하여 자못 방자한 폐단이 있었으나 10일 동안 머물고 돌아갔다.
○ 난리가 평정된 뒤에 평행장(平行長)과 평의지(平義智)가 사람을 보내 강화를 청하기를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으나, 조정에서는 질질 끌면서 허락하지 않다가, 끝내는 지금은 적이 국내에 있을 때와는 사정이 다르다고 하여 허락하였다. 그간의 곡절은 매우 많아서 다 기록할 수 없다.
정미년(1607, 선조 40) 초봄에 여우길(呂祐吉)을 상사(上使)로, 경섬(慶暹)을 부사(副使)로, 정호관(丁好寬)을 서장관으로 삼아 회답사(回答使)라는 명칭으로 파견하니, 이는 통신사(通信使)라는 이름을 피하고 왜국의 청에 회답한다는 명분으로 그런 것이다.
을사년(1605, 선조 38) 여름에 조정의 의론이 그들이 왕릉을 도굴한 도적을 반드시 잡아 보내야만 사신을 보낼 수 있다 하여 행장 등에게 연락하였더니, 두 명의 왜인을 잡아 보내며 말하기를,
“이들이 왕릉을 도굴한 도적입니다.”
하였다. 조정에서는 감사와 병사(兵使)로 하여금 제장들을 거느리고 군대의 의용(儀容)을 갖추고 포로를 바치는 의식을 행하고서 받아들이게 하고, 금오랑(金吾郞 금부 도사)과 선전관을 보내어 잡아 오게 하여 금부에 가두었다. 삼공과 모든 대신이 사복시에 모여 앉아 두 왜인을 국문하였다. 그 중 하나는 임진년(1592, 선조 25)에 나이 겨우 10여 세이고, 하나는 원래 나오지도 않았다고 진술하여 누차 국문하여도 끝내 정상을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는 묘정(廟庭)에 바치려 하였으나, 결국 참형만 행하였다. 그리고 행장들의 기만을 책망하고, 사신은 전의 의식에 따라 보냈다.
국문할 때에 원임대신(原任大臣)이 다 참가하지 않고, 혹 삼공이 모였다가 그냥 파하거나 혹은 불러도 여전히 참석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 갑진년(1604, 선조 37) 가을에 사간 문려(文勵), 지평 채형(蔡衡), 이조 정랑 강주(姜籒)가 옥에 갇혔다.
당초에 문관 김여순(金汝純)이 장흥 판관(長興判官)으로 있을 때, 읍인들이 병영을 본부(本府)에 설치하는 것을 싫어하여 품계를 가진 벼슬아치들이 민간에서 은값을 모아 여순의 중방(中房 부관(副官))인 송응기(宋應琦)를 빙자하여 비변사의 여러 재상에게 뇌물을 주고, 또 대간(臺諫)에게 뇌물을 써서 논계(論啓)하도록 하였는데, 그때의 대간이 바로 이 세 사람이었다.
그간의 곡절이 매우 복잡하게 이리저리 뻗어 나가서 세 사람이 모두 옥에 갇히고, 여순 등도 하옥되었으며, 연루된 선비와 서인들이 수십여 명이었다. 정미년에 이르기까지 4년 동안 형을 받기 수백 번에 문려는 금년 봄 옥중에서 병사하였다. 이해에 큰 가뭄이 들어 억울한 옥사에 대해 심리하게 되었다. 삼공이 계사를 올려 석방하기를 청하였더니, 윤허를 받아 모두 석방이 되었다. 송응기도 지난해에 옥사하였다. 문려는 나의 족인(族人)이다. 며칠만 더 살았더라면 다시 태양을 볼 수 있었을 터인데, 지레 죽었으니 가련하다.
이 옥사가 있은 뒤로 세상에서 언관(言官)을 욕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은대간(銀臺諫)’이라 하였다. 맑은 조정에 욕을 끼침이 막심하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 병오년(1606, 선조 39) 여름에 성균관 동무(東廡)의 동쪽 벽에, 익명서가 있어 돌고 돌아 옥사가 성립되었는데, 그날 밤 숙직한 관리와 유생과 성균관의 노비들로 연좌된 사람이 많았다. 이는 사헌부ㆍ사간원ㆍ형조의 관리가 함께 모여 앉아 수개월간 국문하였으나 끝내 정상을 캐내지 못하였고, 고경오(高敬吾) 이하 죽은 자가 7~8명이었다. 위관(委官)은 우상 심희수(沈喜壽)였다.
○ 무신년(1608, 선조 41) 5월 무렵에 광녕총병(廣寧摠兵) 이성량(李成樑)과 순무어사(巡撫御史) 조즙(趙楫)이 차관(差官) 두 사람을 보내어 조문하고 빈전(殯殿)에 제를 드렸다. 그 뜻이 성의(誠意)에서 나왔으므로 본국에서는 후대하여 보냈다. 얼마 안 되어 들으니, 이성량과 조즙이 글을 올려 우리 나라에 국상이 있어 국세가 쇠약한 틈을 타서 엄습해 취하기를 청하였는데, 황제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또 대론(臺論)이 일어나 이성량과 조즙을 탄핵하여 그 임무를 바꾸게 하였다 한다. 그 후 통보(通報)에 계속하여 탄핵이 있다 운운하니, 우리 나라의 다행이다.
○ 경술년(1610, 광해군 2) 2월 빈청에서는 묘정(廟庭) 배향에 관한 일을 의논하였는데, 이준경(李浚慶)ㆍ이황(李滉)ㆍ노수신(盧守愼)ㆍ유성룡(柳成龍) 등을 의정(議定)하여 입계(入啓)하였더니, 비답은 대개“노수신과 유성룡은 끝까지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다른 사람이 없겠는가. 꼭 하겠다면 이준경과 이황으로 하라.’는 것이었다. 드디어 이 두 재상으로 결정하였다.
봉상시(奉常寺)에서는 두 분의 위판(位版)을 만들어 봉상시 관원이 이준경의 양손(養孫) 이사수(李士脩)가 다스리는 의성현(義城縣)으로 받들고 갔으며, 또 예안(禮安)의 이선생(李先生 퇴계 이황을 지칭) 본가로 받들고 가서 혼백을 인도하는 것처럼 하여 돌아와서 부묘일(祔廟日)에 위판을 써서 묘정에 안치하였다.
○ 정해년(1587, 선조 20) 겨울에, 내가 조유보(趙裕甫 인후(仁後)의 자(字))ㆍ이공호(李公浩 양중(養中)의 자)와 같이 승지가 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사건이 있어 모두 갈렸다. 나는 부제학이 되고, 조유보는 대사간이 되었으며, 이공호는 판결사가 되었다가 곧 의주 목사(義州牧使)에 제수되었다. 나와 조유보가 서교(西郊)에 나가 전송하는데, 그때에 정승 정입부(鄭立夫 언신(彦信)의 자)가 병조 판서로 있었고, 다른 재상들도 많이 와 모였다. 이야기가 최성준(崔成峻)의 일에 미치자, 모두 말하기를,
“죽음을 당하면 극히 원통한 일이니, 어찌 구원하기를 생각하지 않겠는가마는 선전관이 이미 떠난 뒤라 지금은 소용이 없다.”
하였다.
대개 최성준은 서쪽 변방의 변장(邊將)이었는데, 각 진보(鎭堡)에 공사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중국 지방에서 재목을 베어다 쓰곤 하였다. 그래서 성준도 전례에 따라 나무를 베어 썼다. 요동에서는 마음대로 국경을 넘어 목재를 베어 갔다고 트집을 잡고 우리 나라에 문책하는 공문을 보내 왔다. 그래서 성준을 체포하라 명하고, 곧 이어 국경에서 참수할 것을 명하였다. 이것으로 여론이 모두 원통하게 여기고, 나와 조유보로 하여금 논변하도록 권하였다. 짧은 해가 거의 떨어져 가는데 유보가 합의(合議)에 서면으로 의견을 통하자면 반드시 밤이 깊어질 것인데, 옥당에서는 차자로 논할 수 있다 하여 내가 먼저 이공호를 전송하고 옥당으로 달려가 입직한 관리와 상의하여 다른 부서의 동료 관원 수삼 명에게 요청하여 차자를 드리니, 시간은 초경 말에 이르렀다. 비답에 이르기를,
“뜻밖의 쇠소리를 듣고 틀림없이 변방의 급보가 왔으리라고 여겼는데, 차자를 보니 최성준의 일이었다.”
하며, 말씀이 매우 엄격하였으나, 윤허하고 죽이지는 않았다. 대궐 안에서 야간에 올릴 일이 있으면 사알(司謁)이 으레 문에 걸린 조각쇠를 쳐서 소리를 내고 계사를 드리기 때문에, 성교(聖敎)가 이와 같이 내린 것이다.
○ 《가례(家禮)》의 〈상례제주(喪禮題主)〉를 보면, 그 아래 왼편에, ‘효자 모 봉사(孝子某奉祀)’라고 씌어 있는데, 이는 사람의 왼쪽을 가리켜 말한 것이므로 그림도 사람의 왼쪽에 쓴 것이다. 김모재(金慕齋 안국(安國)의 호) 선생과 허국(許國)ㆍ위시량(魏時亮) 두 중국 사신이 말하기를,
“마땅히 신주(神主)의 왼쪽에 써야 한다.”
하였으니, 바로 하씨(河氏)의 《소학집성(小學集成)》에, “신주 좌방(神主左傍)’이라고 한 말과 동일한 것이다.
퇴계(退溪)는 ‘《가례》에 씌어 있는 것이 매우 정중하다.’하여, 변론한 것이 많은데, 자세한 것은 《퇴계집》 28권의 ‘김부인 3형제에게 답하는 편지[答金富仁三兄弟書]’와 27권의 ‘정자중에게 답하는 별지[答鄭子中別紙]’에 있으니, 한 번 보면 명확할 것이다.
김경부(金敬夫 우굉(宇宏)의 자)와 김숙부(金肅夫 우옹(宇顒)의 자) 형제도 상을 당하여 하씨의 도식(圖式)을 따랐는데, 비로소 그 잘못을 깨닫고 다시 《가례》를 따랐으니, 이 일 역시 《퇴계집》 소에 나온다.
경산 구씨(瓊山丘氏)의 《가례의절(家禮儀節)》에 개장의(改葬儀)가 있는데,
“상례(喪禮)의 복기(服記)에, 개장(改葬)에는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
하였고, 그 주석에,
“시마복을 입는 것은 아들이 아비를 위해서 입고, 아내가 남편을 위해서 입는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소건(素巾)을 쓴다.”
라고 하였다. 김부인 등의 문목(問目)에,
“어미를 개장함에 있어 복(服)이 없는 것은 의심스럽습니다.”
하니, 퇴계의 대답이,
“나의 생각에, 자식이 부모에 대한 정은 차이가 있을 리 없으나, 성인(聖人)이 예를 지음에 있어서는 아비 때문에 많이 눌려서 어미를 내리게 되니, 집안에 두 높은 이가 없다는 뜻이 가장 중하기 때문에 삼갔던 것이다. 그 뜻은 오복(五服)에 있어서 가장 가벼운 것이 시마복인 만큼, 시마복 아래로는 복이 없는데, 이제 참최(斬衰)에 시마복을 입으니 재최(齊衰) 이하로는 거기에 해당하는 복이 없으므로 다만 소복(素服)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임의로 복을 더 입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하였다.
정 서천(鄭西川 서천(西川)은 곤수(崑壽)의 봉호)의 문목에,
“개장에 있어 이전의 것을 파내고 미처 장사지내기 전에는 마땅히 조석으로 상식(上食)을 지내야 합니까?”
하니, 퇴계가 답하기를,
“상고할 길은 없으나, 이미 널[柩]을 본 뒤의 일은 초상(初喪) 때와 같은 점이 많으니, 상식을 드림이 옳을 것 같다.”
하였다.
중국 사신 염등(冉登)이 떠날 적에 전하께 원접사 이하 여러 관원에게 모두 상으로 가자(加資)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원접사 박홍구(朴弘耈), 관반(館伴) 황신(黃愼), 차비통사(差備通事) 표정로(表廷老)와 진예남(秦禮男) 및 종사관 등이 모두 가자되었다.
중국 사신이 돌아간 뒤에 양사(兩司)에서 모두 개정하기를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곽재우(郭再祐)가 상소하여 극구 논하니, 상은 사신이 압록강을 건넌 뒤에야 개정을 윤허하였다.
이조 판서 이상의(李尙毅)는 전년에 중국 사신 유용(劉用)의 원접사여서 그의 청으로 가자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스스로 편치 못하여 개정해 줄 것을 아뢰었으나, “이미 지난 일을 제기할 필요가 없다.’고 비답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곽재우는 그 후 재삼 상소를 하였는데, 말이 모두 원접사와 역관(譯官)에 관계되는 것으로, 상으로 가자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원접사와 접반(接伴)이 여러 번 사퇴를 하였고, 오랜 뒤에야 진정되었다.
○ 경술년 10월에, 송도(松都) 유생 하위량(河偉量) 등이 상소하여 서경덕(徐敬德)을 문묘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니, 임금께서는 예조에 내려 대신들과 의논하도록 하였다. 회계(回啓)에,
“좌상 이항복(李恒福)은 ‘일찍이 듣건대, 서경덕은 총명이 월등한 자질로, 학문이 끊어진 황무지에서 태어나 학문은 철저히 연구함을 힘쓰고 지식은 사색에서 얻어졌다 하니, 이야말로 단번에 도를 얻은 사람이라 할 수 있고, 또한 당대의 호걸지사(豪傑之士)라 하겠습니다.
같은 고을의 여러 선비들이 그의 유풍(遺風)을 듣고 칭찬하는 것이 또한 이런 까닭이겠습니다. 오직 유감스러운 일은 신이 어려서부터 게을러 학문을 잃었고, 늦게야 후회하여 조금 경전(經傳)을 익혔으나, 애를 써도 능하지 못하고, 다만 바로 앉아 허물을 반성하는 지엽적인 일과 청소하고 응대(應對)하는 법에 불과할 뿐, 그 고인(古人)을 벗으로 하고 옛것을 품평하는 견식은 모두 어두운 바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런 내용의 논의에 대해서 비록 한두 가지 얕은 소견이 있다 하더라도 망령되게 제 의견을 주장할 수 없으므로 일체 전인(前人)들의 설을 따라서 근거를 삼고자 합니다. 선왕(先王) 초년에 사대부의 습속이 크게 변화되고 석학들이 다 모였으니,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그때에 의론한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모두가 신처럼 지리멸렬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국조(國朝)의 여러 학자 중에서 네 명의 신하를 표출해서 문묘에 배사(配祀)하기를 청한 것도 그 말이 허술한 것이 아니고, 그 뜻도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드디어 깊이 믿고 의심치 않았습니다. 항상 오현(五賢)의 숫자에 대해서는 감히 많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적다고 감히 꺼리는 것도 아닙니다.
뒤에 근세 유학자들의 논의를 보면, 서경덕이 자득(自得)한 기미가 많다 하여 이황(李滉)과 같이 거론하며, 그 존숭함이 극에 달했다 하겠으나, 담일청허(淡一淸虛)하다는 논의에 이르러서는, 전적으로 일기장존(一氣長存)의 설에서 나와 기(氣)를 이(理)라고 인식한 병폐가 있기 때문에, 이황이 서경덕을 공격한 이론은 매우 그의 병폐에 적중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어찌 그 첫머리의 사색이 너무 지나쳐 그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에 있어서 《대학(大學)》이나 선유(先儒)들의 설과 서로 달라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깊은 뜻은 신이 천박한 학문으로 귀로는 비록 얻어 들은 바가 있으나, 미처 터득함이 있지는 못하니, 지금 어찌 감히 망령되이 운운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애당초 문묘에 종사(從祀)할 사람을 논정할 적에 당시 선비들이 그토록 많았는데도 당시 어떠한 의견에 근거하여 이 네 사람을 정하고 다섯 명으로 하지 않았는지 신이 알 수 없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으므로 지금도 감히 함부로 정론(定論)할 수가 없습니다. 관직에는 비록 크고 작은 것이 있으나 견식에는 높고 낮은 것이 있으니, 유림의 큰 일은 자급을 따라서 높게 된 자의 독단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지금 이 상소로써 널리 묻고 찾아서 결정한다면 부족할 것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우상 심희수(沈喜壽)는, “신이 어려서부터 죽은 교리 강문우(姜文佑)에게 구두(口讀)를 배웠는데, 문우는 일찍이 자기의 스승 화담(花潭) 서경덕의 도덕과 학문에 탄복하여 말하기를,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마음이 고명(高明)하여 실로 열심히 노력하여 천지를 두루 보는 깊은 식견이 있다.」 하였습니다. 신은 지금도 어리석어 아는 것이 없는데, 하물며 당시에야 어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살필 수 있었겠습니까. 차차 장성하여 선생과 장자(長子)들이 이 사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조금 듣게 되었는데, 모두 「효제 충신(孝悌忠信)하고 청명 순수(淸明純粹)하며, 스승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은 철저히 연구하기를 힘써 한 가지도 빠뜨림이 없고, 굳건히 힘써서 신명(神明)에 감통(感通)하며, 높은 덕과 넓은 업적이 독실하고 빛이 났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화담집(花潭集)》 중의 원리기(原理氣) 등의 여러 설을 보면, 깊이 들어가서 자득(自得)한 묘리는 전현(前賢)이 밝히지 못한 바를 밝혀서 사문(斯文)에 끼친 공이 크옵니다. 우리 나라 유생들이 태산과 북두칠성처럼 받들기 지금까지 오래된 것은 마땅한 일이가 하옵니다.
우리 선종대왕(宣宗大王)께서 크게 존숭하여 포증(褒贈)을 추행(追行)한 것이 지극히 높았으니, 지난 여러 현자들을 돌이켜 보건대, 마땅히 종사(從祀)의 전례(典禮)에 함께 의논하여 서로 차이가 없게 하여야 할 터인데, 끝내 그렇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후생 말학(後生末學)으로 그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오나, 대개 한때의 크고 넓은 의론이 이 사람의 학문은 상수(象數)를 주로 삼아서 사색(思索)이 너무 지나쳐 현묘(玄妙)하고 적멸(寂滅)한 데에 가까운 것 같고, 일생을 이 일에 힘을 기울여 스스로 이르기를, 궁극심미(窮極深微)하였다고 하나, 마침내 이(理) 자의 해석이 불투명하여 기이하고 오묘한 것을 이야기하여도 형기(形氣)의 거칠고 약한 한 편에 떨어져 있음을 면치 못하여 주렴계(周濂溪)나 정이천(程伊川) 형제 등 여러 학자의 설과 자못 서로 부합하지 않는 점이 있는가를 의심하는 이가 있다고 하여 숭상하는 일이 이처럼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 기(氣)가 있기 전에 이 이(理)가 먼저 있다고 하니, 본연의 성(性)에 따라 철저히 연구하는 공부를 다한다면 필경에는 성(誠)과 정(正)의 경지에 똑같이 들어가게 될 것이오니, 무슨 크게 《대학》의 가르침과 어긋남이 있겠습니까. 소강절(邵康節 옹(雍)의 시호)의 학술과 덕행을 겸비한 내성외왕(內聖外王)의 학문이 비록 두 정씨(程氏 정명도(程明道)와 정이천(程伊川))의 매우 귀하게 여기는 바는 되지 못하였으나, ‘원회운세(元會運世)’ 네 글자만으로 천지 만물을 꿰뚫었으니 어찌 일세에 뛰어난 호걸이 아니며, 백세에 남을 명유(名儒)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소강절이 주렴계ㆍ정명도ㆍ정이천ㆍ장횡거(張橫渠)ㆍ주회암(朱晦菴)과 함께 공자의 사당에 배향되지 못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이제 새로 큰 법을 세워 크게 교화(敎化)를 밝히는 날을 당해서, 취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는 차별이 없을 수 없으니, 과연 유림에 있어 하나의 흠이 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다만 이는 실로 국가의 중대한 일이오니 어찌 40년 이래에 모든 사람이 같은 소리로 하루가 급하다고 서두른 5현신(賢臣)의 일을 끌어대어 다만 몇 사람의 대신에게만 물어서 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널리 조정의 의론을 모아 여러 사람의 찬성을 기다린 뒤에 일체 거행함이 타당하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 영부사(領府事) 윤승훈(尹承勳),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한응인(韓應寅) 등이 모두 널리 조정 의론을 모을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일이 중대하니, 서서히 뒷날을 기다리오.”
하였다.
○ 신사년(1581, 선조 14) 2월. 경복궁 옛 성 밑에 몇 천 마리인지 모르는 많은 개구리가 등에 새끼를 업고 나왔는데, 성 안의 남녀 노소가 몰려와 구경하는 자의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모두 말하기를,
“이는 어린 아이를 업고 피난하는 형상이니 상서롭지 못하다.”
하더니, 거의 반 달 남짓하여 그쳤다.
○ 대가(大駕 임금의 수레)가 평양에 있을 때 김명원(金命元)이 도원수가 되어 군사를 거느려 임진(臨津)에 진을 치고 적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6월 초에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거둥하여 임시로 머무는 곳)에서 서울에 있는 적을 공격하지 못했다 하여 한응인(韓應寅)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 임진에 와서 전쟁을 독려하도록 하였다.
오래지 않아 적이 임진의 동북안(東北岸)에 나타나자 장수를 보내 교전하였으나 대패하였고, 원수 또한 무너져 달아났다. 적이 드디어 서쪽 길로 향해 이달(6월) 열흘 뒤에 대가가 의주로 옮겨 갔다.
이보다 먼저 무자년(1588, 선조 21) 무렵에 일본은 우리 나라에 사신을 보내 중국에 조공을 드리기 위해서 가는 길을 빌려 주기를 요청하였다. 그 속뜻은 길을 빌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는 허락을 하지 않았다. 일본은 우리 나라 속이는 것을 그래도 그치지 않고, 또 통신사를 청하기까지 하므로 조정에서는 부득이 허락하였다.
경인년(1590, 선조 23) 여름에, 황윤길(黃允吉)을 상사로, 김성일(金誠一)을 부사로, 허성(許筬)을 서장관으로 삼아 일본에 보냈는데, 신묘년 봄에 돌아왔다.
김응남(金應南)은 절사(節使)로 북경에 가서 적의 정세를 갖추 아뢰었다. 그런데 복건(福建) 땅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나온 자가 있어 통신사를 보고 항복하기를 애걸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중국 조정에 고하기를,
“조선이 3백 명을 보내어 당나귀를 조공하였습니다.”
하였다.
우리 조정에서 이 말을 듣고 한응인을 보내어 또 적의 정세를 중국에 알리니, 중국 조정에서는 처음에 우리를 의심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이것을 듣고야 의심이 풀렸다.
이때 와서 중국에서는 조선이 적의 앞잡이가 되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이 때문에 우리를 의심하고 차관(差官) 황응양(黃應暘)을 보내 의주에 왔는데, 우리 임금의 얼굴을 자세히 살핀 후에야 비로소 적을 피해 서쪽으로 피난하고 다른 뜻이 없음을 알았다. 황응양은 임오년(선조 15, 1582) 무렵에 중국 사신 황홍헌(黃弘憲)을 따라와서 임금을 뵈온 일이 있기 때문에 특별히 보내어 탐지하게 한 것이다.
또 중국 사신 설번(薛藩)을 보내어 은폐(銀幣)를 내려 위로하였고, 우리 나라에서는 군사와 식량을 청하는 사절이 전후로 계속 이어졌는데, 황제는 모두 허락하였으니, 성상께서 평소에 중국을 섬기는 정성을 다하여 황제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않았던들 어찌 이처럼 원조하여 주었겠는가. 마침내 중국 조정의 위력을 힘입어 삼경(三京)을 다시 회복하였고, 무술년(1598, 선조 31)에 이르러 적의 모든 무리들을 다 물러가게 하였으니, 온 동한(東韓)의 수천 리 억만 창생은 무엇으로 황은(皇恩)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으리오.
○ 우리 나라 사대부는 평시에 조복(朝服 조정에서 입는 옷)ㆍ공복(公服 공무 집행 때 입는 옷)ㆍ시복(時服 관복의 한 가지)ㆍ상복(常服 평소 생활복)ㆍ제복(祭服 제사 때에 입는 옷) 등이 있었는데, 임진년 난리 이후로는 이러한 각종 복장의 형식이 없어져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의주에 있을 때, 어전에 출입할 때나 시위(侍衛)할 때에 공경 이하가 모두 갓을 쓰고 칼을 찼으며 철릭과 사대(絲帶)를 걸치고, 가죽신이 없는 사람은 삼으로 만든 신을 신었다. 황상(皇上)이 마침 은폐(銀幣)를 하사하여 상은 호종하는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중국의 물건도 차차 나오게 되었다. 검푸른 빛깔의 석새베를 사다가 만든 철릭을 상품복(上品服)이라 하였다.
계사년(1593, 선조 26) 환도 후에는 중국 장수를 접반(接伴)하는 사람은 사모(紗帽)와 품대(品帶)로 시복(時服)을 입었고, 묘사제(廟社祭)의 헌관(獻官)도 시복을 입고, 집사(執事)는 모두 철릭을 입었다. 갑오년 이후로는 조정 관리의 철릭에 간혹 색이 있는 비단을 썼고, 석새베는 아전들의 옷이 되었다.
무술년(1598, 선조 31)에 중국의 대군이 나온 뒤로는 중국 상인들이 물건을 많이 가져와서 전후로 계속 이어졌고, 종로(鍾路) 거리에 가게를 열고 물건을 늘어놓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이에 중국 물건이 도리어 천하게 되었고, 모양을 조금이라도 꾸미는 사람은 직물이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고 겉옷 이외에는 혹 순전히 비단과 양갖옷을 입는 사람도 있고, 또한 귀천 노소를 통틀어 입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비록 법관이라도 이것을 금하지 못하였으며, 상의 하교가 때로 혹 간곡하였지만, 한 사람도 두려워해서 입지 않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진하게 물들인 초록 주의(紬衣)는 당상관의 연복(燕服)인데, 유생들이 공공연히 착용하니, 심하다. 사치의 유행이여!
송 나라가 남쪽으로 내려간 뒤에 사대부들이 자착삼(紫窄衫)을 입어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도 고치지 않았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수년이 지나지 않아 석새베를 버리고 입지 않으니 한탄할 일이다.
기해년 무렵에 조정에서는 모자와 띠의 제도를 복구하여 흑색을 착용할 것을 의논하여 결정하였는데, 이는 중국인들이 아직도 다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착용하는 것을 모방한 것이다. 경자ㆍ신축(1600~1601, 선조 32~33) 연간에 다시 담홍색의 복색을 입으니, 이는 우리 나라에서 유래된 옛 제도이다. 얼마 못 가서 조복ㆍ제복ㆍ시복은 모두 복구되었으되, 공복만은 복구되지 않았는데, 새로 급제한 사람은 입었다.
○ 중국 사람은 우리 나라 사람이 모자(帽子 속칭 감두(敢頭)라는 것)를 쓰지 않고 갓을 쓴다고 비웃었는데, 난리 후에 조정에서 누차 영을 내려 갓을 벗고 모자를 쓰도록 하였다. 지방의 시장이 서는 날이면 관리들과 역졸들이 관청의 금령을 빙자하고 함부로 빼앗았지만, 명령에 따르지 않아 시종 6~7년 동안 끝내 금하지를 못하였으니, 심하도다. 이같이 습속을 고치기 어려움이여!
더구나 이 금지는 천민에게만 하고 양반에게는 하지 않으니, 따르지 않음도 당연한 일이다. 간혹 명령을 따르는 사람이 있기도 하였으나 서울 사람은 망건(網巾)을 쓰고 모자를 그 위에 쓰고 또 검은색의 옷을 입으니 그래도 괜찮지만 시골 사람들은 망건을 쓰지 않고 검은색의 베로 조잡하게 모자 모양을 만들어 쓰고, 또 다닥다닥 기운 누더기 옷을 입는 바람에 남루한 모양이 도리어 패랭이를 쓴 것만도 못하니, 다른 사람과 상대할 적에 부끄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더러는 상투 머리로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혹은 탈옥하였느니 혹은 도적이니 하여 비웃으니, 이러한데 어찌 명령에 좇을 리가 있겠는가.
○ 나는 계묘년(1543, 중종 38) 6월에 출생하였는데, 그때 할아버지께서는 이성(利城) 원으로 계셨고,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계셨다. 꿈에 정릉동(貞陵洞) 집 서당 앞뜰에 해바라기꽃이 만발한 것을 보고, 꿈이 깬 뒤에 창 벽에 그 날짜를 기록해 두었다. 조금 뒤에 서울에서 소식이 왔는데, 그날이 바로 내가 출생한 날이었다. 드디어 국형(國馨)으로 아명(兒名)을 삼았으니, 꿈에 본 해바라기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아버지께서 일찍이 나에게 그 곡절을 이야기해 주셨다.
병신년(1596, 선조 29) 가을에 이몽학(李夢鶴)의 역변이 일어났는데, 그 무리 중에 오선각(吳先覺)이라는 자가 있었다. 나는 그가 내 이름과 같은 것을 싫어하여 이름을 고치려고 하였다. 그때 나는 비변사의 직책을 맡고 있었는데, 날마다 공(公)들과 이 일을 말하며 한탄을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오선각의 죄를 알 수 없으니 우선 국문이 끝나기를 기다려 죄가 과연 무거우면 갈지 않을 수 없으나, 만약 가볍다면 꼭 그 이름을 피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의 형벌이 급기야 적몰(籍沒)로 결정이 난 것을 보고는 이름을 고치기로 결의하였다. 가만히 생각건대, 나의 아명이 또한 뜻이 있어 취한 것이니, 새로운 이름으로 고치는 것보다는 예전대로 하는 것이 낫다고 여겨 마침내 국형(國馨)으로 예문관에 올려 입계(入啓)하여 첩지를 받았고, 자는 고치지 않았다. 후손으로 하여금 소상히 알도록 하기 위해 기록을 하는 바이다. 정릉 집이란 곧 나의 외가를 말한다. 조정암(趙靜菴) 선생은 내 외조부의 매부(妹夫)이다. 정릉동 집은 곧 외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집이다. 외증조가 살아 계실 때 정암 선생이 서당을 지어 세월이 오래도록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이른바 앞뜰의 해바라기꽃이 있던 곳이란 그 서당을 말한다.
○ 판서 홍사신(洪士信 여순(汝諄))은 난리 전에 동대문 안에 새 집을 짓고 화초를 많이 심고 못을 파서 연꽃을 심었는데 대단히 깨끗하였다. 난리 후에 옛 터에 다시 집을 짓되 규모를 전보다 조금 더 늘리고 화초나 나무ㆍ돌 같은 완상물을 평시보다 더욱 욕심내어 많게 하였다. 의자 사이에도 티끌 하나 없고, 음식물과 의복 또한 매우 사치스럽게 하였는데, 겨우 4~5년을 누리다가 탄핵을 받아 진도(珍島)로 귀양가서 1년 만에 죽었다. 게다가 아들이 없고 외손 하나만이 있었으나 또한 나이가 어리고 귀양 중에 재력이 없어 초상을 치르는데 극히 초라하였다. 상여 위에는 장식이 없고, 다만 베보자기로 널 위를 덮으니, 길가는 사람이 모두 생전의 기쁜 일이 모두 허사라고 탄식하였다.
장사를 지내는 데에도 속관과 덧널의 크기가 서로 맞지 않고, 겨우 대충 매장하였으니, 차마 들을 수도 없도다.
일생을 늘 남의 입에 오르내려 세상에서 좋지 않게 여기더니 죽어서도 슬퍼하거나 애석해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집을 다시 지을 때 제조(提調) 노릇 하던 각사(各司)의 아랫사람들에게 원성을 들었으니, 사람이 일생을 사는 데는 모름지기 화평과 용서를 위주로 하여 살았을 때나 죽을 때에 남의 구설을 듣지 않도록 할 일이다.
○ 무신년(1608, 선조 41) 2월 초하룻날에 선종대왕(宣宗大王, 선조)이 승하하였다. 병세가 몹시 위중하여 궐내의 상하가 매우 다급한 중에 임해군(臨海君)이 홀연 그의 집에 돌아갔다가 조금 후에 다시 돌아오니,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생각하였다. 10여 일 후에 한 사람이 등에 사람을 업었는데, 홑이불로 머리를 싸고 차비문(差備門)을 나와 궐문을 막 나가려는 참에 위사(衛士)와 병랑(兵郞) 등에게 붙잡혔다. 바로 임해군이었고 업은 사람은 재인(才人)이라 한다. 이들을 비변사의 상직방(上直房)에 옮겨 두고, 대장 이시언(李時言)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지키도록 하였다.
진도에 정배(定配)되어 금부 낭청(禁府郞廳) 2명과 선전관 및 무사 몇 명이 압송해 가는데, 전주(全州)에 이르자 다시 교동(喬桐)에 정배하고 장수를 정하여 그 담장을 높이고 많은 군사로 지키도록 하였다.
임해군은 의롭지 못한 짓을 많이 하여 백성의 땅을 빼앗는 등 죄악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감히 역모를 꾀하여 재인이나 잡배 등 날랜 자들로 손발이 된 자들의 수효가 헤아릴 수 없고, 무장(武將)으로 서로 결탁한 자들 또한 많았다. 그래서 추국청(推鞫廳)을 군기시(軍器寺)에 설치하여 관련되어 체포된 자로 하대겸(河大謙) 같은 사람은 공초를 받고 처형되었으며, 고언백(高彦伯)ㆍ박명현(朴名賢)ㆍ민열도(閔閱道)ㆍ양집(梁諿) 등 약간 명도 장형(杖刑)으로 인하여 죽었다. 기유년 봄에 이르러 임해가 병사하였다. 그가 배소에 있을 때에 상(광해군을 이름)은 계속하여 안부를 묻고 끊임없이 먹을 것을 내려보냈다.
○ 무신년(1608, 선조 41) 2월 24일. 청봉책사(請封冊使)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이호민(李好閔)과 부사 오억령(吳億齡)이 북경에 갔더니, 예부에서는 전하가 둘째 아들이라 하여 허락하려 하지 않았다. 연릉군이 여러 번 글을 올려서, ‘큰아들 임해가 병이 있어 중책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선왕께서 전하를 택하여 세자로 삼아서 난리 초에 주문(奏聞)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성지(聖旨 중국 천자의 분부)를 받들어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적을 막아 공로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대비전(大妃殿)과 문무 백관도 주청(奏請)하였더니, 중국 조정에서는 차관(差官) 엄일괴(嚴一魁)ㆍ만애민(萬愛民)을 보내 6월경에 우리 나라에 들어와 직접 임해의 병상의 진위를 살폈다. 임해를 양화도(楊花渡)로 내보내 나룻배에 앉혔는데, 두 차관이 대신 및 모모 재상을 거느리고 임해를 접견하였다. 그 일행 중에는 임진왜란 때 임해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끼어 있어 그 틀림없음을 알고 갔다.
다시 이덕형(李德馨)을 주문상사(奏聞上使)로, 황신(黃愼)을 부사로 삼아 두 차관을 따라 재빨리 북경에 가서 힘껏 변명하여 비로소 성지를 받았다. 연릉군은 먼저 돌아오고, 이덕형은 뒤따라 나왔다.
중국에는 사제 사시 조사(賜祭賜諡詔使) 행인(行人) 웅화(熊化)를 보내 기유년 4월에 와서 명을 반포하고, 뒤이어 태감(太監) 유용(劉用)을 보내어 왕으로 봉하니, 6월에 서울에 와서 책봉례(冊封禮)를 행하였다.
웅화는 문사(文士)로 자처하였는데, 비록 몸가짐이 얼음이나 황경나무처럼 깨끗하지는 못하였으나, 대체적으로 혼잡하고 근신하지 않는 일이 없었으니, 임인년(1602, 선조 35)의 고천준(顧天峻)이나 최정건(崔挺健)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이고, 또한 병오년(선조 39, 1606)의 주지번(朱之蕃)이나 양유년(梁有年)보다도 나았다.
전후로 주청(奏請)한 상사와 부사에게는 차등을 두어 밭과 종을 상주었다. 정승 이덕형의 아버지 민성(民聖)에게는 특명으로 당상관에 올려 판결사(判決事)로 삼고, 오억령은 가의대부에, 황신은 자헌대부에 올렸다. 지난 달에 오억령을 판윤(判尹)으로 승진시켰다.
○ 전에는 중국 조정에 관계되는 일이면 문신 중국 사신 두 명이, 본국의 일이면 태감(太監 환관) 중국 사신 두 명이 나왔는데, 연릉군이 중국에서 예부에 글을 올려 본국의 피폐된 상황을 낱낱이 알렸다. 그리하여 성지를 받들어 제시 천사(祭諡天使) 한 명과 책봉 천사(冊封天使) 한 명을 보내 왔으니,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유용은 재물을 탐하기 한이 없고, 긁어 모으는 것도 형용할 수가 없어 보물을 전하께 헌납함도 많기는 하였으나 모두 그 대가를 받았다. 처음 국경에 발을 들여 놓으며 기필코 10만 냥의 은을 모으리라 하더니, 마침내 왕래하는 길과 서울에서 얻은 은자가 거의 5~6만 냥에 이르렀는데, 도중의 음식 제공도 모두 은으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고 비록 차나 식사 대접이 없어도 가하다고 하였다.
○ 엄일괴(嚴一魁) 만애민(萬愛民) 두 차관(差官)이 우리 나라에 들어올 적에, 의주에서 벽제(碧蹄)까지 백성이 길을 메우고서 전하(殿下 광해군을 이름)의 현명함과 역적 임해군 이진(李珒)의 형편없음을 말하였다. 도성에 들어오는 날 경기(京畿) 근방의 사민(士民)이나 도성 안의 사대부에서 아래로 선비나 백성의 노소에 이르기까지 무려 수만 명이 서교(西郊)를 메우고, 왕자군(王子君) 역시 상복을 입고 길가에 서서 기다리며 모두들, ‘선왕이 세자로 정한 지 이미 오래되어 누차 봉해 주기를 주청하였으며, 역적 이진은 사람의 도리가 없고 또 심장병이 있어 중책을 감당할 수 없다.’는 뜻으로 호소하였다. 차관이 객관(客館)에 들어간 후에는 백관들이 또 정문(呈文)을 갖추어 본국 인심의 소재를 알렸다.
세 곳의 대궐이 모두 난리에 불타서 대가가 계사년 환도한 뒤에, 정릉동 양천도정(陽川都正)의 집과 계림군(桂林君)의 집을 대내(大內)로, 심의겸(沈義謙)의 집을 동궁(東宮)으로 삼았으며, 또 부근의 대소 인가는 궐내의 각사(各司)로 썼다. 을미ㆍ병신년(1595~1596, 선조 28~29) 무렵에 이르러 길 동편에 문을 세우고 서편에도 문을 세웠으니, 동쪽은 정문(正門)이고, 서쪽은 서문(西門)이다.
이전에는 사면에 담장이 없어 나뭇가지로 울타리처럼 에워싸고 이름을 시어소(時御所)라고 하였다. 계림군의 집 동쪽 담이 한혜(韓蕙)의 집과 나란히 있어 처음에 비변사로 썼는데, 대내가 협소하여 비변사는 궐외(闕外)로 내보내고 한혜의 집까지 통틀어 대내로 썼다. 목책(木柵)이 아주 허술하였는데, 좌상 이항복(李恒福)이 병조 판서로 있을 때 비로소 긴 담을 쌓아 대궐의 모양이 되었다.
병오년 무렵에 이르러 종묘와 대궐을 다시 지을 계획으로 경복궁 터에 공사를 시작하려 하는데, 전 현령 이국필(李國弼)이 상소하여 경복궁이 그다지 좋지 못하니, 마땅히 창덕궁을 먼저 짓는 것이 좋다고 극언하므로 조정에서는 그 의론에 따라 결정하였다.
팔도의 백성에게 토지 한 목[結]에 무명 반 필씩 내도록 하여 합치니 약간의 동(同)이 되고, 바닷가 고을은 쌀로 만들어 배로 운반하여 기와 굽고 일하는 삯으로 삼았다.
삼공을 도제조로 삼고, 또 제조 약간 명과 도청(都廳)ㆍ낭청(郞廳)ㆍ감조관(監造官)을 내어 묘궐영건도감(廟闕營建都監)이라 불렀는데, 호조 판서와 공조 판서가 으레 겸임하였다.
○ 무신년(선조 41, 광해 즉위년인 1608. 선조가 승하한 해) 국상에 산릉 때나, 기유년 조사(詔使) 접대에는 마련할 길이 없어 쌀과 포목을 내어서 썼다. 종묘는 무신년에 공사가 끝났지만 대궐은 국상에도 공사를 쉬지 않고 하여 기유년 겨울에 공사를 마쳤다. 종묘에는 무신년 초가을에 신주(神主)를 받들어 안치하였고, 대궐은 연기(年忌)에 구애되어 아직도 옮기지 못하였다. 혼전(魂殿) 또한 창경궁 통명전(通明殿) 옛터에 새로 건설하고 부묘(祔廟) 후에 대비전이 옮겨가도록 하였다.
도감은 비록 없앴지만 영건청(營建廳)은 그대로 두고, 또 제조 1명, 도청(都廳) 1명을 두어 호조 판서와 공조 판서가 으레 겸하여 감독을 하였다. 전각(殿閣) 두 곳을 지었고, 소소한 당실(堂室)과 군사들이 머무를 곳 몇 칸은 지금 바야흐로 짓고 있는 중이다. 제조 1명을 더 두고, 도청 감조관(都廳監造官)도 약간의 인원을 증설하였다.
○ 기유년에 사제 사시 천사(賜祭賜諡天使)를 새 대궐의 인정전(仁政殿)에서 접대하였는데, 신주를 혼전에서 모셔 와서 예를 행하였고, 책봉 천사도 인정전에서 예를 행하였다. 경술년 태묘(太廟)에 부묘한 다음에는 상이 인정전에 납시어 하례를 받고 반사(頒赦)를 행하고, 이어서 음주연(飮酒宴)을 행하였다. 유생은 헌축(獻軸)만 하고 결채(結綵)는 하지 않고 기로(耆老)들은 결채도 하고 헌축도 하였다.
○ 난리 후에 선왕이 기악(妓樂)을 폐지하도록 명하고 오직 6진(六鎭)에만 그대로 두었는데, 금년 봄에 다시 기악을 하도록 명하였으니, 이는 상전(上殿)에게 풍정(豐呈)을 올릴 때에 쓰려는 것이었다. 삼사에서 하지 말도록 논계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경술년 2월경에 상이 대비전에 휘호(徽號)를 더 올리려 하니, 대신 중에서 심 우상(沈右相 이름은 희수)이, ‘이미 네 글자의 휘호를 올렸으니 지금 더 올릴 필요가 없다.’고 고집하며 사직서를 올리기까지 하고, 또 차자(箚子)도 올렸으나 끝내는 조정에서 휘호를 의론하게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대신들과 육조의 2품 이상 관각(館閣)의 당상관이 모여 의논하였으나 논의한 바가 같지 않은 것으로 입계하였는데, 마침내 성상의 하교대로 휘호 두 글자를 더 올렸다. 그리고 또 공빈(恭嬪 광해군의 생모)에게도 호(號)를 올리고 사당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대신들이 의계(議啓)하여, ‘공성왕후(恭聖王后)’라는 호를 올리고, 신주는 효경전(孝敬殿)의 옛 방으로 옮겨 ‘별묘(別廟)’라 칭하고, 제전(祭典)은 효경전의 전례대로 행하게 하니, 지사(知事) 허성(許筬)이 병들어 누워 있는 중에 상소하여 후(后)라 칭하고, 사당을 세움은 불가하다고 극론하여, 마침내 미안한 전교까지 내리게 되었다. 또 작년에는 김치원(金致遠)이 정언으로 있을 때, 계사(啓辭)가 매우 강직하였는데, 성상의 하교가 지극히 온당치 못하였다.
허공(許公)의 상소가 아주 간절하였으므로 상은 관대한 비답을 내리고 또 초피(貂皮) 열 장을 내리니, 그는 은혜에 감사하여 한강가에 땅을 사서 정자를 짓고, 이름을 ‘십초정(十貂亭)’이라고 하였다.
○ 정경임(鄭景任 경세(經世))은 무신년 무렵에 대구 부사(大丘府使)로 있었다. 새로운 왕(광해군)의 정사 초기에 시정의 폐단을 극론하였더니, 임금이 매우 엄격하여 죄를 주려고까지 하였는데, 대신이 아뢰어 파직에서 그쳤다. 기유년에 다시 서용되어 성절상사(聖節上使)로 북경에 가서 글을 올려 화약을 많이 사 가지고 왔기 때문에 부사 여유길(呂裕吉)과 함께 논상되어 가선대부에 올랐다. 이것은 수년 전에 정협(鄭協)과 이상신(李尙信)이 상사와 부사가 되어 화약을 많이 사 온 상으로 모두 가선대부에 올랐으니, 이 또한 전례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파직된 뒤에 이처럼 등급이 올려지는 것은 사람들이 헤아리지 못한 바이니, 등급이 오르내리는 것은 실로 운수가 있는 것 같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또 대사성에 제수되었다.
○ 임진년 난리에 우리집은 곡산(谷山) 지방으로 피난을 갔는데, 9월이 되어 내가 있는 충청도 신평(新平)으로 오려고 파주(坡州)에 왔을 때에 밤에 덕립(德立 윤국형의 아들)을 잃어버렸다. 그 후에 백방으로 알아보았으나 끝내 찾지를 못했다. 을미년(선조 28, 1595)에 유격(遊擊) 심유경(沈惟敬)이 왜국 진영에 출입하였는데, 황신(黃愼)이 중국 조정의 명으로 “적당배신(的堂陪臣)’이라는 이름으로 부산(釜山)에 머물렀다. 중국 사신이 일본으로 들어갈 때에 황신은 그대로 근수배신(跟隨陪臣)으로 차임되어 수행하였다. 내가 종을 시켜 물화를 싸서 왜국 진영으로 들여보내고, 황신의 행차를 따라 왜국에 들어가도록 하여 힘 닿는 대로 널리 알아보게 했지만, 끝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정유ㆍ무술년 경에 내가 평양(平壤)에서 심유경을 만나 잃은 아이의 일을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종을 보내 탐문해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다만 잡혀 있는 사람 중에 비록 상인(常人)이라도 소식을 알 수 있는데, 이 아이는 소식이 감감하니, 필시 사망하였을 것입니다.”
하였다.
정미년 회답사(回答使)가 돌아올 때, 돌려보낸 우리 백성이 매우 많았는데 우리 아이의 소식은 까마득히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은 우리 부부의 나이 이미 70으로 죽을 날이 가까워 그만 말할 것도 없으니, 망극하기만 하도다.
○ 정축년(1577, 선조 10)에 나는 부수찬이 되었다. 그때 날마다 차자를 올려 을사년 위훈(僞勳)에 대해서 논하였다. 교리 정윤복 개석(丁胤福介錫 개석은 자)과 윤현 백승(尹晛伯昇 백승은 자)이 서로 입직을 미루다가 끝내 귀결을 짓지 못하고 회합이 끝날 때에 정윤복과 윤현이 모두 서문(西門)을 나서서 여러 동료들과 같이 가버렸다. 책리(冊吏) 등 3~4명이 쫓아가 간절하게 호소해도 모두 듣지 않고, 선공동(繕工洞) 어귀까지 가서도 다투어 마지 않았다. 그런데 개석(介錫)은 바야흐로 입직중이었으므로 비록 일이 생기더라도 죄는 마땅히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도로 들어왔으니, 이는 옛날에 듣지 못하던 일이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후에 배여우(裵汝友 삼익(三益)의 자)도 입직하지 않고 나왔는데, 틀림없이 대신한 사람이 있었을 터이나 잊어버려 적을 수가 없다. 난리 후에는 교대를 기다리지 않고 지레 나와버리는 사람이 흔하였고, 근래에는 더욱 심하여 입직하지 않음이 빈번하고 추고(推考)하여도 여전히 고치지 않으므로 명패(命牌)를 내어 불러 들이기까지 한다. 일회(一會)에도 명패를 내어 소집을 하는데도 간혹 나오지 않는 자가 있더니 드디어는 보통 일로 여기게 되었으니, 탄식할 일이다.
지난 가을에 내가 대사헌이 되었는데, 동료들이 발의하여 시관(試官)이 패초(牌招)에 나오지 않거나 옥당이 입직하지 않아 추고를 받게 되면 모두 법에 의해 파직하도록 논계하였으나 그 뒤에 시행되는 것을 볼 수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내가 옥당의 하번(下番)으로 입직하여 교대할 사람이 없어서 오래도록 나오지를 못하였다. 성사중 낙(成士中洛 사중은 자)은 부수찬이었는데 이 사람은 입직하려 하지 않기로 유명하였다. 그때 창기(娼妓)를 데리고 살았는데, 그 처가 매우 투기하였으므로 입직을 핑계대고 몰래 갔다. 그 처가 모르게 하려고 이부자리를 항상 책방(冊房)에 두고 세월이 오래도록 그 출입하는 자취를 모르게 하였으므로 사우(士友)들이 전해 가며 웃었다.
그런데 이때에 사은(謝恩)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인데도 당직에 걸릴까 염려하여 하리(下吏)가 가서 어느날 사은하려는지 물으면 아무 대답이 없었으니, 내가 그의 동정(動靜)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나의 인배사령(引陪使令)이 가만히 고하기를,
“성 학사(成學士)가 내일 꼭 사은할 것을 살펴 알았습니다. 제가 종과 말을 은밀한 곳에 감추어 둘 것이니, 그가 입궐하기를 기다려 곧장 나가시면 입직을 교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므로, 나도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이튿날 일찍 성낙의 하인이 와서 사은할 것이라고 말하더니, 해가 높이 뜬 뒤에는 다시, ‘병으로 사은하지 못하겠다.’고 하길래 나 역시 그 말을 믿고 인배사령으로 하여금 도로 말을 끌고 가게 하였더니, 조금 후에 성낙이 와서 입궐하였다. 내가 그에게 속아서 나가지 못하게 된 것을 자탄하노라니, 인배사령이 말하기를,
“말을 아직 보내지 않고 은밀한 곳에 깊이 감추어 두었습니다.”
한다. 나는 혹 아전들이 누설할까 염려되어 몰래 인배사령을 시켜 승정원에 가서 숙배단자(肅拜單子)를 살펴보고 차비문으로 들어와서 나에게 알리게 하였다.
인배사령이 돌아와 보고한 뒤에 나는 관대(冠帶)를 갖추고 금란문(金鑾門)을 나서서 서문(西門)으로 향하였다. 성낙이 공복(公服)을 입고 보루문(報漏門)에 앉아서 장막 틈으로 나를 보고 급히 나를 불러 ‘잠깐만 자기를 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바쁜 일이 있어 속히 나가는 길이라고 대답하고 그대로 나오려 하니, 성낙이 쫓아와 붙들고,
“내일 이현(而見 유성룡(柳成龍)의 자)이 남쪽으로 돌아가므로 사은한 뒤에 나가서 보고 곧 도로 들어올 것이니, 그대는 조금만 기다려 주게.”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나도 이현을 만나야 하겠으므로 그대의 말을 들어주지 못하겠네.”
하고, 그대로 서문으로 나아가니, 성낙은 내 손을 잡고 놓지 않고 서로 힐난하는 동안에 서문 안 상의원(尙衣院) 문앞에까지 이르렀다. 아전들이 말하기를,
“숙배단자가 차비문에 들어간 지 벌써 오래되었으니, 빨리 돌아가야 합니다.”
하니, 성낙이 할 수 없어 돌아갔다. 당시 교류하던 선비들이 포복 절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새로 급제한 사람의 축하연에 선임관을 초대할 적에 꼭 가까운 일가나 혹은 아주 친한 사람만을 골라 청하는데, 많아야 열 사람 남짓에 불과하였고, 혼인할 때의 상객(上客)도 그러하였으므로 조신(朝臣)이 부족하면 종친도 관대를 갖추고 혼인 자리에 나가기도 하였다. 그런데 근래에는 풍습이 아주 변하여 상급관이나 상객을 반드시 많이 청하기를 힘써 많을 때에는 70~80명이고, 적어도 20~30명은 넘는다. 어쩌다 많이 청하지 않으면 곧 남과 자신을 구별한다고 지목하여 때때로 나무라기도 한다. 그러므로 불가한 줄을 알면서도 억지로 많이 청하게 되니, 번잡함이 싫을 뿐 아니라, 그릇과 음식을 장만하기도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만약 세도 있는 집이면 초청하지 않는 사람도 많이 가니, 더욱 이상한 일이다. 옛날에는 대신은 아주 친한 처지가 아니면 찾아가지 않았는데, 지금은 청하는 것도 꺼리지 않고, 가는 것도 사양치 않으며, 취해서 농담하는 사이에 아무 등급도 없이 혼란해짐을 면치 못하니, 실로 작은 일이 아니다. 어찌하겠는가.
○ 내가 젊을 때에 무오년 순회세자(順懷世子) 책봉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때 태감(太監) 중국 사신 두 명이 나와 오직 팔고 사는 일만 했을 뿐, 지나친 정도까지에는 이르지 않았고, 또한 오래 머무르지도 않았다. 그 후에 태감 중국 사신이 나온 숫자가 얼마인지 알 수는 없을 정도였으나 토색질을 심하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전년에 금상(今上 현재의 임금, 즉 광해군)의 책봉 때에 태감 중국 사신 유용(劉用)이 처음으로 은을 몹시 요구하여 5만 냥이나 뜯어 갔다.
금년 세자 책봉 때엔 태감 염등(冉登)이 은을 요구함이 유용보다 배나 더하여 5~6만여 냥을 뜯어갔다. 앞으로 나오는 사람은 반드시 이를 본받아 더 뜯어 가려 할 것이니, 국가가 장차 어떻게 지탱해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은은 토산물이 아니다. 중국에 바치기는 고려 말기부터인데, 몇 만 냥에 이르므로 정포은(鄭圃隱)이 힘을 다해 주선하여 중지시켰고, 우리 나라에서도 토산물을 바치는 데 그쳤다. 임진란 이후 중국 장수들이 계속 나오자 은의 사용이 점차로 광범위해져서 중강(中江)에 시장을 개설하니, 우리 백성들로 제 이익만을 꾀하는 자도 많았다. 시장에서 매매하는 데에도 그대로 사용되자, 중국 사신의 요구가 있으면 벼슬을 팔아 모아 들이기도 하고, 혹 모집하고 혹은 사들여서 계속 긁어 모으므로, 드디어 무궁한 폐단이 되었으니, 아주 작은 걱정이 아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근래 부산(釜山)에서는 왜인의 접대를 허락하여 은의 판로를 금하지 않는데, 중국 사신의 요구하는 은도 여기에 의지하여 구해서 바친다.”
고 한다.
○ 신해년 봄, 시어소(時御所 임금이 현재 거처하고 있는 곳, 여기서는 덕수궁)가 있는 정릉동(貞陵洞) 입구에 나무로 사람의 머리를 만들어 처형하는 형상으로 세 개를 만들고, 각기 그 귀에 목패(木牌)를 달아 그 이름을 써서 인가의 벽 위에 걸어 놓았으니, 곧 박이서(朴彛叙)ㆍ정협(鄭協)ㆍ최유원(崔有源)이었고, 죄명까지도 썼는데 확실하게 전해지지 못하여 그 죄명이 어떤 것인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이보다 앞서 익명서(匿名書)에 호조 판서 황신(黃愼)의 이름이 씌었는데, 원한을 품은 사람은 바로 금군(禁軍)과 의관(醫官)들로, 녹(祿) 줄 때가 지나도 녹을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뒤에 나온 익명서에는 지사(知事) 김수(金睟)의 이름이 씌었는데, 그 나무란 내용은 종이가 찢어져 전해지지 않아 상세한 것을 모른다. 말세 인심의 패악하기가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으니, 귀로 차마 들을 수도 없고, 입으로 차마 옮길 수도 없다. 이 다음 또 어떤 일이 있을지 알 수 없다.
○ 신해년(1611, 광해군 3) 3월, 별시(別試)의 문과 전시(文科殿試)에 유생 임숙영(任叔英)이 지은 네 가지 대책문(對策文)이 내용은 매우 엉성하였으나 편말(篇末)에 별도로 포장하여 조금도 회피함이 없이 시사(時事)를 극론하여 필세(筆勢)가 광대하였다. 시관 중에 어떤 이는 규정에 맞지 않으니 뽑는 것이 타당치 못하다고 하였으나, 우상 심백구(沈伯懼 희수(喜壽)의 자)가 강력히 뽑기를 주장하여 방말(榜末)에 놓았다. 비망기에,
“책사(策士)의 응제문(應製文)은 본래 정식(程式)이 있다. 옛 사람이 더러 곧은 언론을 펴기도 하였지만, 모두 질문한 제목에 이욕(理欲)이나 공사(公私)의 분변을 논할 뿐이었는데, 근래에는 인심이 극도로 악해져서 오직 군주를 꾸짖는 일을 능사로 삼으니, 사리에 어그러짐이 심하다.
내가 과거 응시자 임숙영의 글을 보니, 그 대책이 질문에 대답한 것이 아니고, 따로 글 제목 외에 패악한 말로 거리낌이 없이 방자히 하였는데, 시관이 또 따라서 뽑았으니, 숙영의 임금 노릇하기 괴롭지 않겠는가. 그가 만약 소회가 있다면 글을 올려 극언함은 가하지만 시험장에서 감히 제목 외의 글을 지어 거리낌 없이 욕을 하였으니, 이 글을 뽑는다면 말류(末流)의 경박한 무리들이 반드시 앞을 다투어 임금을 욕하는 글을 미리 지어서 시관의 눈을 현혹시키고, 이어서 등급을 결정하는 소지로 삼을 것이므로, 그 폐단을 장차 금하기 어려울 것이다. 임숙영을 삭과(削科)하라. 내가 눈병으로 곧장 보지 못하였으므로 이제야 말하는 것이니, 이 뜻을 해조에 말하라.”
하였다. 정원과 삼사에서 모두 여러 날을 두고 아뢰어도 윤허하지 않았고,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여러 달을 두고 합계(合啓)하기에 이르렀는데, 6월에 대신을 인견할 때, 영상 이덕형(李德馨)이 계청하여 윤허를 받아 급과(給科)를 허락하였다.
○ 경술년(1610, 광해군 2) 겨울. 별시의 문과 전시에 발책독권관(發策讀券官)은 좌상 이자상(李子常 항복(恒福)의 자)이고, 참시관(參試官)은 모모였는데, 그 중에 허단보(許端甫 균(筠)의 자)가 들어 있었다. 단보는 글은 잘하지만 성품이 경솔하여 시관이 되기만 하면 으레 사람들의 말이 있었다. 이번 과거에 합격한 사람 중에는 단보의 형 지사(知事) 허공언(許功彦 성(筬)의 자)의 아들 허보(許보), 사위 박홍도(朴弘道), 그리고 다른 참시관 박승종(朴承宗)의 아들 자흥(自興), 이이첨(李爾瞻)의 사돈 이창후(李昌後), 승지 조탁(曺倬)의 아우 조길(曺佶), 단보의 집과 친밀한 변헌(卞獻) 등 약간 명이 있었다. 외부에서는 단보가 허씨ㆍ박씨ㆍ변씨에게 사정을 두었다고 지목하여 은밀히 사사로이 봐 준 정상을 지적해서 의론이 분분하였고, 사위ㆍ조카ㆍ사돈의 방(榜)이라고 하기까지 하였다. 여론이 크게 일어나자, 좌상이 대죄하여 아뢰기를,
“허보의 글은 신이 뽑은 것입니다.”
하니, 상은, “그가 사정(私情)을 둔 것을 경이 어찌 알겠는가.’라고 비답하였다.
단보와 지동관(枝同官) 허용(許鎔)이 모두 하옥되어 달이 넘도록 오래 갇혔다가 마침내 형을 받고 귀양을 갔으며, 허보와 변헌은 삭과(削科)되고, 홍도(弘道)는 끝내 면제되었다.
○ 지난 겨울 허균의 옥사(獄事)가 한창일 때, 어떤 사람이 소시(小詩)를 짓기를,
과거 등급에 사정을 둔다 한다면 / 假令科第用私情
자제 중에 조카가 가장 가볍다네 / 子弟之中姪最輕
허균만이 홀로 이 죄 당하게 하니 / 獨使許筠當此罪
세간의 공도 실로 행하기 어려워라 / 世間公道信難行
라고 하였다. 금년 임숙영이 삭과될 때에 또 시를 짓기를,
궁버들 푸르르고 꽃은 한창 나부끼는데 / 宮柳靑靑花正飛
온 성의 벼슬아치 봄빛에 아첨하네 / 滿城冠蓋媚春輝
조정에서 바야흐로 태평 세월 축하하는데 / 朝廷方賀昇平樂
누가 곧은 말이 선비에서 나오게 하는가 / 誰遣危言出布衣
라고 하였다. 자자한 소문은 혹 권필(權韠)의 작품이라 한다.
○ 무신년 봄에 중시(重試)를 보이게 되어서 전시(殿試) 하루 전에 시관이 모두 명패(命牌)를 받고 왔는데, 저녁에 선조(宣祖)가 승하하여 행하지 못하였다.
가을과 겨울 무렵에 조정에서는 과거를 시행하고자 하여 이미 의론이 정해졌는데, 사간원에서 발론하여, “책명(冊命)을 받기도 전에 과거를 먼저 보이면 중국 조정에서 듣고 장차 뭐라고 하겠습니까. 중지하기를 청합니다.”하여 윤허를 받았다. 그런데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아직 책봉은 받지 못했지만, 선왕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는 것이니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하여, 마침내 윤허하여 행하였다.
이때 대사간은 유간(柳澗)이고, 대사헌은 나였다.
○ 동서(東西) 운운하는 말은 을해년(1575, 선조 8) 무렵부터 일어나 서로 나왔다 사라졌다 하다가 드디어 온 세상이 다 동서간에 지목하는 중에 들어 문호를 나누어 세워 마치 대대로 원수인 것처럼 되었다. 그래서 조정의 사대부들 사이에 서로 협동하고 공경하는 미덕이 아주 없어져 국세는 쇠약해지고 인심과 풍속은 극도로 야박해져 마침내 다른 나라의 침략으로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는 참변을 보게 되었으니, 당고(黨錮)와 청담(淸談)이 어찌 유독 한 나라와 진(晉) 나라에만 화를 끼치겠는가.
의주 한 구석에 몰려 있을 때에는 서인(西人)이 국정을 담당함 조정이 그래도 옛 투를 벗어났으나 환도한 후에는 남인과 북인의 일맥이 잇달아 일어났고, 무술ㆍ기해년(1598~1599, 선조 31~32)에 와서는 그 화가 극도에 달했다.
이른바 남북(南北)이라는 말은 애초에 별다른 사람이 아니라, 실은 동인에서 갈려 둘이 되었는데, 햇수가 쌓여 마침내는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사림의 수치라 하겠다. 남인이 이미 물러났는데, 북인도 스스로 보전되지 못하고 이어서 대북(大北)ㆍ소북(小北)ㆍ골북(骨北)ㆍ육북(肉北)이란 이름이 생기고, 끝내는 어그러져서 엎어짐을 면치 못하자, 그들이 잡고 농락하던 권세가 자연히 서인에게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신축년 겨울 말기 가소로운 일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북인 중에 약간 명예를 좋아할 줄 아는 사람들이 남인에게 공이 있음을 변명하려다 도리어 그것이 심해져서 그 부류에게 매수당하여 그 주론자를 제거하려는 것이 격변하여 결국 서로 공격하게 된 것이다.”고 한다 얼마 안 가서 자칭 남인도 북인도 아니라는 자들이 나오자 국정을 담당하던 서인이 다시 물러나게 되었다.
북인으로서 지금 있는 사람들이 비록 국정을 담당한 자들과 약간의 이합(離合)은 있지만, 그 기미(氣味)와 하는 일을 따져보면 그다지 다를 것이 없으니, 그 종국이 어찌 될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남인으로서 조정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혹 현달하기도 하고 혹 은둔하기도 하였으나, 그럭저럭 구차하게 지내면서 주견 없이 무리지어 나왔다가 무리지어 물러가기는 거의가 일반이니, 필경 국가에 무익하기는 매한가지이다. 나처럼 늙고 병든 사람은 빨리 죽어 이런 꼴을 다시는 보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것도 쉽게 되지 않으니, 애통하고 애통할 따름이다.
○ 나는 어려서부터 본시 사우(師友)의 도움이 없고, 다만 과거보는 문장의 찌꺼기로 출신의 소지를 삼았으니, 공명(功名)을 쌓으려는 한 선비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상의 공명에 뜻을 가진 사람을 보면 역시 되는 대로 지나버리는 것이 아니고, 근신하고 스스로 단속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잘 보전하는데, 나는 성품이 찬찬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데다가 자신을 위해 꾀하는 지혜가 가장 부족하여 가려 사귀려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혹 선택한 상대가 바라는 사람이 아니며, 화기가 목전에 닥쳐도 어리석어 피할 줄을 몰라 흰 머리가 된 노년에 이르러 몸이 천 길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으니, 이른바 공명을 바라는 선비 중에 나처럼 졸렬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나는 공명을 얻을 수 있는 자리에서 본래 순조로운 일이 적고 잘못되는 일이 많아 등과(登科)하던 다음해부터 이습(肄習)하는 데 가장 낮은 성적을 받은 것이 3년, 전랑(銓郞)이 되었다가 물러나고, 청주 목사(淸州牧使)가 되었다가 실패한 것이 전후 2년, 임진왜란 때는 백의 종군하여 비록 죄는 즉시 풀렸으나 죄명이 중대하여 실로 매우 송구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삭탈 관작(削奪官爵)된 것이 3년, 여주 목사(驪州牧使)가 되었다가 병으로 파직되기를 반 년, 이번에는 파직되어 서용되지 못한 지가 6년이니, 이는 죄명이 가장 중하여 기간이 특히 오래인 것이고, 종전의 죄는 특히 가벼웠기 때문이다. 그런즉 벼슬한 37년 동안에 죄를 입은 것이 15년이고, 상중에 있은 3년까지 합치면 18년이 된다. 그러나 아무 사고 없이 조정에 있은 것도 19년이나 되는데, 국가에 털끝만치도 보탬이 없었으니, 장차 무엇에 쓰겠는가.
기해년 초봄에 죄를 입은 소식을 역로(驛路)의 먼지 속에서 들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조보(朝報)에 기록된 내용을 더러는 기억하고 더러는 기억하지 못하나, 때때로 생각하면 망연하여 그 단서를 찾을 수가 없으니, 참으로 한퇴지(韓退之)의 이른바,
아득하여 알 수가 없으니 / 汗漫不省識
황홀하기가 마치 뗏목을 탄 것과 같다 / 怳如乘浮槎
라고 하는 것이다.
○ 신축년 겨울에 우연히 서호(西湖)로부터 성안에 들어오니, 의립(義立)이 내가 죄를 입게 된 승전초(承傳草)를 얻어 나에게 보였다. 한 번 본 뒤에 역시 그 곡절을 따지지 않았다가 올봄에야 그 초안을 가져다가 다시 살펴보니,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죄목이 적혀 있었다.
“아무개는 본시 권력을 탐하고 세도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유성룡(柳成龍)ㆍ우성전(禹性傳) 등과 결탁하여 사림이 서로 갈라지는 단서를 맨 먼저 열어 놓은 사람이다. 신묘년(1591, 선조 24) 무렵에 성전이 정철(鄭澈)을 두둔하려 하다가 되지 않고 공론(公論)을 막았다 하여 대간의 탄핵을 거듭 받았는데, 아무개는 이것 때문에 감정을 품었으며, 유성룡이 다시 정승이 된 뒤에는 기회를 타서 보복하고, 사류(士流)를 배척하고 남의 손을 빌려서 모해하여 드디어 남인과 북인이란 이름을 만들어 내어 조정 사대부들이 안정되지 못하여 모함하고 불화하는 환란을 끼치게 하였다.
유성룡이 얽어매는 설을 제창하자 간사한 의론을 부추겨 종시 적극 찬성하고, ‘예를 논할 겨를이 없다.’는 주장을 하기까지 하였다. 소응궁(蕭應宮)의 접반사가 되어서는 응궁의 말이 심유경(沈惟敬)의 일에 미치자, 곧 ‘다만 공이 있는 줄만 알고 죄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고 대답을 하니, 응궁이, ‘어찌 서로 만남이 이리도 늦었는가?’ 하며, 비로소 마침내 허락하여 합심해서 강화하였으니, 유성룡이 나라를 그르친 것은 이 사람의 부추김 때문이 아님이 없다. 왕륜(王倫)과 손근(孫近)이 진회(秦檜)에 대한 관계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일찍이 임진년에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군사를 잃은 채 머뭇거리고 군주의 위급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이미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었다. 같은 죄를 지은 이광(李洸)은 법에 따라 폐기되었는데, 아무개는 홀로 청현직(淸顯職)을 거쳤으나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권세와 서로 얽혀 맺은 정상은 통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은 죄가 이러한데도 아직도 관작을 차지하고 있으니, 조정의 관원들이 입을 다물고 있을 때에는 요행히 보전이 될지 모르나, 공론이 이미 나온 뒤에야 어찌 다시 용서할 수가 있으랴! 오직 파직불서(罷職不敍)를 청한 것만도 가볍게 처분한 것이라 하므로 파직불서한다. 기해년 정월 □일 승전(承傳)함.”
처음에, 유성룡이 무술년 겨울에 삭탈 관작을 당하였을 때, 김우옹(金宇顒)이 글을 올려 자못 논변한 적이 있었고, 기해년 정월에는 정승 이원익(李元翼)이 중국에서 돌아와 역시 차자를 올려 해명하기에 힘썼는데, 또 친후(親厚)ㆍ이론(異論) 등을 지적한 말도 있었다. 옥당에서도 차자를 올려 이원익의 말을 공격하고, 이어서 ‘화의(和議)를 적극 찬성하고 간사한 의론을 고무시킨 자도 이미 탄핵하였다.’는 말을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는 누구인가?”
하니, 옥당이 회계하기를,
“아무개는 바로 우성전과 유성룡의 심복이고, 또 이성중(李誠中)의 일가입니다. 당초 신묘년간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한창 정철을 탄핵하는데도 옥당에서는 여러 날 동안 발론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이 정철을 두호하려고 부제학 김수(金睟)를 자기 집으로 불러 붙잡아두고 의론하는 모임에 보내 주지 않으니,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공론을 막는다 하여 성전을 논박하고, 이성중도 정철의 모의에 참여하였다 하여 탄핵을 받았습니다.
아무개는 성전의 처남 허성(許筬)의 무리 등과 감정을 깊이 품고 때를 타서 보복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가 유성룡이 재차 정승이 된 뒤에 손뼉을 치고 일어나 사림을 구별하는 일을 맡았으니, 자기에게 붙는 사람을 남인이라 하고,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을 북인이라 하여 드디어 분쟁의 실마리를 크게 열었습니다. 유성룡이 사당(私黨)을 심고 사류를 배척한 것은 모두 아무개 등의 도움입니다. 강화에 관해서는 시종 강력히 주장하여“예는 논할 겨를도 없다.’는 주장을 하기까지 한 것은 이미 매우 잘못되었는데, 소응궁의 접반사가 되었을 때 심유경이 공이 있다고 하여 응궁 앞에서 칭찬하고, 또 응궁의 말을 빌려 비변사에 큰소리쳐서 다시 강화를 요청하는 계책을 쓰고자 하였습니다. 유성룡의 전후에 걸친 주화(主和)는 아무개 등이 찬동한 것이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강화를 적극 찬성하고 간사한 의론을 고무시켰다.’는 것으로 차자에 언급한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비답하기를,
“그들의 하는 일은 모르는 일이고, 옥당에서 여러 날 발론하지 않았다는 말은 옳은 말이고, 우성전 등이 탄핵을 받은 일도 들은 말이고, 예는 논할 겨를도 없다고 한 말도 들은 말이나, 심유경이 공이 있다고 소응궁에게 칭찬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한 것이니, 대단히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라고 하였다. 이때, 부교리 이이첨(李爾瞻), 수찬 송일(宋馹)ㆍ이경전(李慶全)ㆍ임수정(任守正) 등이 회계하였다.
회계의 초안도 근래에 와서야 얻어 보았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탄핵을 받게 된 근원이다. 내 도리로는 마땅히 그대로 지나치고 말 일이지, 책에 기록하고 또 한두 가지 사설을 쓸 필요도 없지만, 자손들로 하여금 내가 죄를 입게 된 곡절을 알게 하고자 감히 말을 하는 것이다.
우경선(禹景善 성전의 자)은 평생 침체된 생활을 하였는데, 그 빌미가 동료 몇 사람에게 있었는데도 원망하는 말이 그 입에서 한 마디도 나온 적이 없었다. 나의 소견만이 이러할 뿐 아니라, 유이현(柳而見 성룡의 자)ㆍ김자앙(金子昻 수(睟)의 자)ㆍ정여인(鄭汝仁 곤수(崑壽)의 자) 등 몇 사람도 그런 말을 들은 일이 없다고 하였다. 정계함(鄭季涵 철(澈)의 자)이 우경선과는 과거 동기생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평생 잘 알지 못하는 처지였다. 사람들은 기축ㆍ경인년 무렵에 사귄 일로 그들이 친밀한 사이라고 의심을 하는데, 그때 나는 지방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 까닭은 상세히 알지 못한다.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그가 사인(舍人)으로 있을 때, 마침 정철이 정승 자리에 있었으므로 공적인 일로 몇 번 왕래한 일은 있으나 둘이 다 술을 좋아하여 만나면 심하게 취한 일이 있을 뿐, 실지로는 서로 두터운 관계는 없었다.”한다. 경선에게 묻고 싶었으나 난리로 서로 어긋나서 드디어 유명(幽明)을 달리하여 물을 기회가 없었다. 경선이 정철과 본래 친한 사이가 아니었으니, 두호하려는 마음이 어디서 생긴단 말인가.
일찍이 계미년(1582, 선조 15) 가을에 응교로 있을 때, 차자를 올려 박순(朴淳)과 정철을 논핵하였는데, 말이 매우 분명하여 중숙(重叔 김응남(金應南)의 자)도 그 논핵이 옳다 하였으니, 어찌 말년에 가서 도리어 서로 친밀하게 될 리가 있겠는가. 비록 한때 술잔을 나누는 기쁨은 있었을지라도 그 마음이 서로 맞는 처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늘 이 일을 괴이하게 여겨 자앙에게 물었더니, 그 역시 말하기를,
“친밀할 리가 만무하오. 신묘년에 정철을 공격할 때에 옥당이 장서각(藏書閣)의 번고(反庫)로 관원이 연고가 많아서 개회하고 폐회할 때에 세 명이 다 참석하지 못했소. 나는 부제학으로 참여하였는데, 당시에 경선이 응교로 입직하여 병이 들어 매우 고통스러워 나가지 못하기에 그의 간청에 따라 입직을 바꿔 주었을 뿐이오. 이른바 “그 집에 잡아두고 의논하는 모임에 보내지 않았다.’는 말은 실로 맹랑한 소리오.”
하였다.
공저(公著 이성중(李誠中)의 자)도 정철의 모의에 참여하였다 하여 탄핵을 받았다 하는데, 이른바 모의라는 것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다. 이를테면 경선이 정철을 두둔하려 하였다고 하는 것은 인간 세상에서 흔히 있는 일이라, 여러 말할 것도 없이 일소(一笑)에 붙여야 할 일인데, 하물며 경선의 폐기됨이 공저보다 심함에랴. 또 공언(功彦 허성(許筬)의 자)과 내가 서로 만난 것이 몇 번인지는 모르지만, 한 마디도 이 일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는데 어찌 홀로 내가 앙심을 품고 음모를 꾀할 리가 있겠는가. 천부당 만부당한데, 사람들이 이처럼 말들을 하니, 참소하는 말이 망극하다 하겠다.
이는 이현이 우리들 중에서 명망이 매우 높고 작위(爵位)도 가장 높으니, 이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고금 천하의 악한 사람을 비유하지 않는 데 없이 함정에 빠뜨렸던 것이다. 그 계획이 이루어졌으면 그만이지, 경선에게 친분이 있다 하여 함께 우두머리라 칭하고, 나까지 지목하여 결탁하였다 한단 말인가. 아, 사람이 친구를 사귐에는 끼리끼리 어울리는 것인데, 남을 교묘히 해치는 자가 반드시 ‘결탁’이란 두 글자를 가지고 함정으로 삼는 것은 예부터 그러하니, 말한들 무엇하리오. 또 공언과 나를 마치 경선과 공저에 나누어 짝을 지어 아울러 한 그물에 몰아넣는 것 같음이 있으니, 어찌 이리도 심하단 말인가. 공언이 홀로 끝내 면하게 된 것은 다행이다.
이른바 ‘이현이 다시 재상되었다.’ 한 것은 반드시 난리 후를 지목해서 한 말인데, 조정이 황무지가 되어 상하가 위급하여 중국 구원병을 맞아 왜적을 막기에도 힘이 모자랐는데 무슨 여가에 사사로이 보복하기를 생각했단 말인가. 이른바 ‘사류를 배척하고 남의 손을 빌려 모해했다.’는 것은 한 집안간의 일이 아니므로 그러한 사건이 있었다면 반드시 그 장본인이 있어 귀가 있는 자는 누구나 듣고 눈이 있는 자는 누구나 보았을 것인데, 어찌 분명히 말해서 곧바로 지적하지 않고 애매한 말을 하는 것인가. 이야말로 분명한 것을 속여 스스로 죽음을 당할 자들이다.
홍사신(洪士信 여순(汝諄)의 자)은 처음에는 나에게 후하게 대하다가 늦게는 저쪽편에 붙은 사람이다. 근래에 머리를 돌려 나와서 나를 찾아와 죄를 입은 원인을 묻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나도 조보에 난 것을 알 뿐, 그 은미한 곡절은 실로 알지를 못하오.”
하고, 이어서 묻기를,
“그대는 그때 저들과 관계하지 않는 일이 없었는데, 어찌 그것을 모르고 나에게 되묻는단 말이오?”
하니, 대답하기를,
“저들도 정확하게 어떤 일이라고 지적하지 않고, 다만 아무개가 음험하다고만 하였으며, 음험한 내용은 또한 명확히 말하지 않았소. 다만 내가 무술년 7월에 형조 판서로 논핵을 입었을 때, 최관(崔瓘)이 대사간으로 몰래 그대의 사주를 받아 내가 탄핵받게 되었다 하는데, 이것이 구실이 되었지 다른 것은 들은 바가 없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최관이 비록 내 자식과 동서간이기는 하나 나와는 나이도 현격하고 본시 교분도 없는 터여서 그가 하는 일도 나에게 묻지 않았는데, 하물며 내가 지시하여 사주함에랴. 또 내가 후배들과 어울려 머리를 맞대고 일을 모의하지 않는 것은 그대도 아는 바이오. 만약 또 이런 일이 있었다면 그대가 손가락을 꼽아가며 세어 보오.”
하니, 홍도 웃었다.
“우리집 자식들이 그때 조정에 있었다면 혹 최관의 의론을 듣고 나에게 말했겠지만, 경립(敬立)은 그해 5월에 승지로 양 경리(楊經理 이름은 호(鎬))의 분부를 받고 하삼도(下三道 경상ㆍ전라ㆍ충청도)에 식량을 독촉하러 갔고 의립(義立)은 그해 4월에 북경에 갔으며, 권반(權盼) 역시 교하(交河)의 임소에 있었으니, 어찌 시론(時論)을 들었을 리가 있겠소? 만약 알았다면 나도 형조 참판으로 한 자리에 있었는데, 어찌 숨기고 통지하지 않았겠소?”
하니 홍이 이 말을 듣고 의문이 풀려 말하기를,
“그때에 소리(小李)가 내게 말하기를, “최관이 경립 및 그대와 같이 자면서 모의하였다.’ 하였는데, 지금 살펴보건대, 그때 경립이 집에 없었으니, 그 말이 거짓임을 바로 알 수 있다.”
하였다. 내가 다시 묻기를,
“그렇다면 “사류를 배척하고 남의 손을 빌려 모해했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일을 가리키는 것이오?”
하니, 대답하기를,
“그대에게 이런 일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알겠소?”
하였다.
“내가 반복해서 생각하건대, 당상이 된 이후로 한 번도 언관(言官)이 된 일이 없었고, 난리 후에 비록 대사헌이 되었다 하나 임명되자마자 바로 갈렸다. 이 뿐만 아니라 그때 조정에서 다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류간의 일로 배척을 받은 사람이 없었으니, 혹 그대가 형조 판서로 논핵당한 것을 내가 사주하였다 하여 남의 손을 빌렸다 하고, 이른바 사류라는 것도 그대를 지목한 것이 아니오?”
하니, 홍 역시,
“그들이 만들어낸 일이 그대가 의심하는 것과 같지 않음을 어찌 알겠소? 만약 그렇다면 더욱 분한 일이오.”
하고, 떠들기를 마지않았다.
이른바 남북이란 말도 유래가 있다. 무자년(1588, 선조 21) 가을에 문소(聞韶)에 가서 부모님을 뵙고 돌아오니, 중숙(重叔)이 나에게 말하기를,
“근래 남북이란 말이 있는데, 그대는 들은 일이 있소?”
하므로, 내가 놀라 묻기를,
“그것이 무슨 소리오?”
하니, 대답하기를,
“남은 이현을 우두머리로, 그 다음이 경선ㆍ자앙, 그리고 그대 등 몇 사람이며, 북은 여수(汝受 이산해(李山海))를 우두머리로, 중겸(仲謙 백유양(白惟讓))ㆍ경함(景涵 이발(李潑)) 형제 및 나까지 몇 사람이오.”
하였다. 내가,
“누가 이런 터무니 없는 말을 만들어 벼슬아치들을 얽어넣소?”
하니, 대답하기를,
“나도 잘 모르는 일이오. 아마 임인수(任仁叟 영로(榮老)의 자)에게서 나온 말 같은데, 그가 현달하지 못함을 분히 여겨 상서롭지 못한 말을 만들어낸 데에 불과하오. 그대는 이것을 미리 알고 말하지 마오.”
하였다. 비록 인수를 말 만들어낸 단서로 삼기는 하였으나, 그 주장하는 바는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중숙 역시 감히 스스로 지적하지 못하고 남에게 핑계대어 말한 것이나 아닌가?
기축년 내가 지방관에 보임된 후에 중겸 역시 정국(庭鞫)에서 남북이란 말을 발설하였다. 이 말은 평시에 나온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어찌 이현이 재차 재상이 되고 사신(士信)이 논박을 받은 뒤에 와서 내가 처음 시작한 것이겠는가. 10년 전의 일을 가지고 오늘날 나의 죄명으로 삼으려 하니, 그 또한 참혹한 일이다.
처음 시작한 것을 중숙 또한 어찌 모르고 경솔히 말하겠는가. 내가 만일 스스로 해명하기에 급해서 죄를 구천(九泉)에 있는 중숙에게 돌린다면 내가 누구를 속이리오. 하늘을 속일 것이다.
사론(邪論)을 고무시키고 얽어매는 설을 적극 찬성하였다는 말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갑오년 봄 내가 문소에서 서용(敍用)의 명을 받고 환조(還朝)한 것은 4월 20일 후의 일이다. 5월 초승에 과도관(科道官)의 원접사로 의주(義州)에 갔었다. 3년간 버림을 받았다가 환조한 지 겨우 10일 만에 곧바로 원행을 하였으니, 조정의 의론은 까마득히 듣지 못하였다. 그때 고 시랑(顧侍郞)이 참장(參將) 호택(胡澤)을 보내어 우리 나라에게 강화를 재촉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어렵게 여겨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두어 달 뒤에야 따르기로 하였다. 7월 말에 호택은 요(遼)로 돌아가고, 나도 의주에서 돌아오다가 선천(宣川) 도중에서 서로 만났으나, 이 일은 종시 진실로 지방에 있는 사람으로 참여해 들을 수 없었던 일이다. 이른바 사론을 고무시키고 얽어매는 설을 적극 찬성하였다는 말은 역시 날조된 것이다. 비록 이 논의에 참여하였다 하더라도 큰 잘못에까지 갈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정이 이러한 이상, 말이 없을 수 없다. 이해 겨울에 나는 처음으로 비변사 당상이 되었는데, 그때는 강화의 일이 결정된 지 이미 오래되어 다시 논의에 제기하지 않았는데, 무슨 서로 도울 일이 있었겠는가.
을미년에 이르러 봉왜 천사(封倭天使)가 나왔을 때 논쟁한 것은 근수 배신(跟隨陪臣)을 보낼 것인지의 여부를 논하는 것뿐이었다. 조정에서 의견을 수렴하였는데, 그 중 보내는 것이 불가하다고 주장한 자는 윤승훈(尹承勳)과 유자신(柳自新)이었고, 김응남(金應男)과 유영경(柳永慶)은 중국에 주문(奏聞)한 뒤에 보내자고 주장하였으며, 그 외에는 모두 마땅히 보내야 한다 하였으니, 모두 같이 의견을 올린 것이지 나 혼자 보내자고 한 것은 아니다. 만약 이것을 가지고 고무시켰다느니, 적극 도왔다느니 한다면 더욱 근거 없는 말이다.
다만 인견하는 날에 상께서 이르기를,
“중국 사신이 우리 나라 국경에 있을 때에는 우리가 마땅히 따라가야 하고, 적의 국경에 들어갈 때에는 적이 마땅히 따라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한 뒤에야 사신을 접대하는 예가 될 것이다.”
하니, 좌우가 모두 보낼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고 아뢰므로, 나 역시 중론에 따라 아뢰었다. 다만,
“중국 사신이 이미 적지에 들어갔으니, 일이 몹시 급하옵니다. 접대하는 예의는 그러하오나, 이런 판국에 예를 논할 겨를은 없을 듯합니다.”
하였더니, 상께서는 부당하다 하고, 하교의 사연이 몹시 엄격하였으므로 나 역시 황공하여 물러나왔다. 이 한 마디는 과연 내가 한 말이므로 이것으로 나를 죄준다면 감히 말할 수 없지만, 내가 말한 ‘예(禮)’ 자는 접대하는 일에 대해서 말한 것인데 논의하는 자는 예의(禮義)의 예 자로 지목하여 논하고, 원수를 잊고 원한을 푼 것에 죄를 돌리니, 이는 나의 본심이 아니다.
소응궁(蕭應宮)이 평양에 있을 때, 심유경(沈惟敬)이 서울에서 요동으로 돌아가면서 소응궁을 찾아 뵙고, 평양과 서울에서 적을 물리친 일이 모두 자기가 한 일이라고 갖추 말하였다. 소응궁은 이 말을 듣고 심유경으로 계책을 써서 적을 늦추고자 하여 경리의 접반사 이덕형(李德馨)과 평양 감사 한응인(韓應寅)을 불러 심유경의 공과 죄가 어떠한지를 물었다. 모두들 그가 공만 있고 죄는 없다고 대답하였는데, 실은 묻는 뜻이 어디에 있는지는 몰랐다. 경리가 상경한 후에 소응궁 역시 상경하려 할 때 이덕형과 한응인에게 묻던 내용을 나에게 물었다. 나의 대답도 이덕형ㆍ한응인과 같은 것이었으나, 이덕형과 한응인은 그 주고받은 말을 임금께 알리지 않았고, 나는 상께 알렸을 따름이다. 옆에 있던 자가 이것을 보고 나에게 한 가지 죄목을 덧붙여 마치 까닭 없이 발언한 것처럼 하였으니, 가소롭다.
정유년 초가을 소응궁이 태평관(太平館)에 갔을 때에는 중국 장병들이 성안에 가득하였는데, 국가의 재력이 고갈되어 모든 공급이 말이 아니었다. 소응궁이 문득 책망하기를,
“만약 권위 있는 재상이 나를 대접한다면 일을 이룰 수 있을 터인데, 이 배신(陪臣)은 나를 잘 대접하지 못하니, 반드시 가짜 재상으로 구차하게 대접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임하기를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들이 나를 가짜 재상이라고 비웃었다. 그가 평양에서 재차 왔을 때에 비변사에서 나를 불러 소응궁이 올라온 연유를 물었다. 나는 계책을 써서 적을 늦추려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소응궁의 말을 빌려다가 화친을 요청한 것으로 허물을 삼으니, 해괴한 일이다. 하물며 소응궁은 서울에 들어온 다음날 계책을 행하는 일로 주상께 첩문(帖文)을 보냈으니, 내가 소응궁의 말을 빌린 것이 아님은 더욱 뚜렷한 일이다. 그때에 서천군(西川君) 정여인(鄭汝仁 곤수(崑壽)의 자)이 자리에 있다가 틈을 타서 나와 보고서 장난으로 나에게 말하기를,
“소응궁이 일찍이 그대를 가짜 재상이라 하더니, 지금도 그러한가?”
하기에, 나는,
“동행하는 것이 이미 습관이 되었지만, 때때로 불러 보고 의심하는 뜻을 상당히 보인다.”
고 하였더니, 서천군이,
“그렇다면 소응궁이 반드시 그대에게 어찌 그리도 서로 만난 것이 늦었는가고 할 것일세.”
하여 한 차례 웃고 말았는데, 서천군의 농담이 도리어 나의 죄목이 될 줄이야! 그 뒤에 서천군을 만나 이 일을 말하니,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이는 필시 그때 동석한 자가 전한 것이 옮겨져서 이처럼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하였다. 인심이란 이처럼 두려운 것이다.
임진년 난리 초에 적을 토벌하지 못한 죄는 진실로 면할 수 없는 일이니, 이것으로 구실을 삼는다면 감수하고 감수하겠지만 금강(錦江)에서 파병(罷兵)한 사무(士武 이광(李洸)의 자)에 비유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만약 죄를 응순(應順 김명원(金命元)의 자) 이하 여러 사람과 공평하게 나누어 진다면 난들 무슨 말을 하랴. 남이 나를 헐뜯는 것을 보면 오직 스스로 반성하고 고쳐 힘써 나갈 따름이고, 변명하는 것은 실로 군자의 할 바가 아니다. 다만 남과 서로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자손들에게 알려 주고자 간략하게 할 수가 없어 지루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부득이한 일이다.
[주-D001] 형군문(邢軍門) :
군문이라는 말은 총독 군무아문(總督軍務衙門)이라는 말의 약칭으로, 여기서는 그 당시 군무를 맡은 형개(邢玠)를 가리킨다.
[주-D002] 양 경리(楊經理) :
경리(經理)는 경략사(經略使)의 약칭으로, 그 당시 우리 나라에 온 명 나라 군사의 총지휘관이다. 양(楊)은 그 경략사의 성이고, 이름은 호(鎬)이다.
[주-D003] 영공(令公) :
영공(令公)은 영감(令監)이란 말과 같은데, 관직이 정3품과 종2품 된 사람에게 존칭으로 쓰는 말이다.
[주-D004] 어ㆍ오 참군께 드림 정우어오참군[呈于魚吳參軍] :
원문에 정우어오참군(呈于魚吳參軍)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어씨와 오씨 두 참군에게 올린다는 말이다. 여기서 참군은 지금의 참모 장교다.
[주-D005] 진우량(陳友諒) :
몽고족이 건국한 원(元) 나라가 멸망될 때에 중국 강서(江西) 지방에서 일어나서 양자강 좌우를 점령하고 호북성 무창(武昌)을 수도로 한(漢)이라는 나라를 건국하였다가 명 태조에게 패해서 죽었음.
[주-D006] 신성여 점(申聖與點) :
신(申)은 성(姓), 성여(聖與)는 자(字), 점(點)은 이름. 이후에도 이런 예가 많음.
[주-D007] 목[結] :
세금 제도에서 쓰는 용어로 제일 낮은 것이 뭇[束], 10뭇이 한 짐[卜 혹은 負], 1백 짐이 한 목[結]이다. 즉 1목[結]은 벼 1백 짐이 생산되는 면적의 토지이다.
[주-D008] 상전(上殿)에게 풍정(豐呈) :
상전은 임금의 어머니나 할머니를 말하고, 풍정은 음식물을 풍부하게 마련한 성대한 잔치.
[주-D009] 휘호(徽號) :
휘호는 공덕을 표시하기 위하여 살아 있고 죽은 것을 불문하고 그 공덕을 상징할 수 있는 문자(文字)를 올리는 것으로, 임금에게는 네 글자를 올리고 왕비나 왕대비에게는 두 글자를 올리는 것이다.
[주-D010] 일회(一會) :
일회(一會)라는 말은, 이 당시의 법제가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어느 누구를 탄핵하려면 어떤 장소에 연합하여 모여서 이론을 조정하여 귀일(歸一)되게 하였는데, 그 모임을 말한다.
[주-D011] 자자한 …… 한다 :
이 시는 석주(石洲) 권필의 시로 그는 이 때문에 체포되어 귀양가다가 죽었는데, 여기에서는 자세하지 않은 것처럼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첫구에, 궁류청청앵난비(宮柳靑靑鶯亂飛)라는 것을 궁류청청화정비(宮柳靑靑花正飛)라고 고친 것도 무슨 까닭인지 모를 일이다. 궁류청청(宮柳靑靑)이라 함은 당시 광해군의 처족인 유씨(柳氏)들이 왕을 둘러싸고 세도하는 것을 말한 것이고, 앵란비(鶯亂飛)라 함은 꾀꼬리는 누런 것으로 황금에 비유하여 뇌물로 황금이 난무한다는 말이다.
[주-D012] 당고(黨錮)와 청담(淸談) :
당고(黨錮)는 후한(後漢) 말기에 환관(宦官)이 정권을 전담함을 분개하여 이를 공박한 지사(志士)들이 환관들의 미움을 사서 종신 금고(禁錮)의 형을 받았던 일이고, 청담(淸談)은 위진(魏晉) 시대의 선비들이 유가(儒家)의 실천적인 이론을 등한히 하고 노장(老莊)의 공리(空理)에 빠져 한담(閑談)과 고론(高論)에 치우친 일.
[주-D013] 이습(肄習) :
이습이란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른 사람 중에 전도 유망하다고 인정되는 사람은 벼슬하여 출근하면서 대제학의 지도로 항상 정치와 문학을 익히게 하고, 그 성적을 점수로 매겨서 임금에게 보고하는 것이다.
[주-D014] 왕륜(王倫) :
송(宋) 나라가 금(金) 나라 여진족(女眞族)에게 쫓겨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부자가 포로가 되고, 나머지 신민들이 양자강 남쪽으로 도망가서 휘종의 작은 아들 강왕(康王)을 황제로 세우고 여진족과 대항하게 되었는데 이를 남송(南宋)이라 한다. 남송이 차차로 세력을 회복하여 여진족과 싸워 조금씩 승리를 얻게 되자 여진족은 그것을 염려하여 전에 포로로 잡혀 왔던 진회를 석방하여 남송으로 보냈다. 진회는 남송으로 들어가서 나약한 강왕을 꼬여 전쟁은 위험한 일이니 현상대로 여진족과 강화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자, 황제는 진회를 정승으로 임명하고 강화하게 하였는데 실상은 여진족에게 항복하는 것이었다. 여진족은 송 나라 황제를 신하로 대접하여 너라는 말을 쓰고 송 나라 황제는 여진족에게 신(臣)이라는 말과 폐하라고 존칭하는 조건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반대하는 무장 악비(岳飛)를 죽이고 문신 장준(張浚)ㆍ조정(趙鼎)ㆍ이강(李綱) 등을 귀양보냈다. 그리고 여진족에게 항복하였으므로 후세까지 진회는 간신이라는 말을 들었다. 손근은 그때 부수상(副首相)으로 그 강화에 찬성한 자이고 왕륜은 그 강화의 사절로 갔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진회를 돕던 자로 낙인찍혔다.
[주-D015] 번고(反庫) :
창고에 있는 물건을 조사하고 정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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