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영랑 생가를 둘러보는 데 생가 안채 뒤로 계단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 세계모란공원이라는 표지판이 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사랑채 건너편 은행나무 쉼터에서 쉬고 있겠다는 남자친구를 두고 계단을 올랐다.
미끄러질새라 조심히 밟아 올라간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앞이 내다보이지 않아 더욱 호기심을 자극한다.
좁은 문을 빠져나와 만난 안내판을 보니 생각보다 그 크기가 제법 넓다. 우선 추천 관람 코스라고되어 있는 화살표 방향으로 걸어 보기로 했다. 모란은 장미, 수국, 작약과 함께 강진을 대표하는 작물인데 영랑생가 뒤편으로 이어진 세계모란공원은 영랑의 문학적 감성과 보은산 도시공원의 자연경관이 어우러진 생태문학공원이라고 한다.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은 사계절모란공원이다. 8개국 50종류의 다양한 모란의 자태를 유리 온실 속에서 사계절 내내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작약과의 잎지는 떨기나무인 모란은 중국 북서부 원산인데 높이는 1-2m이고 한국에서는 함경북도를 제외한 각처에서 재배한다. 우리나라에는 1500년 전에 도입된 식물로, 중국 이름 목단에서 유래되었다. (목단 > 모단 > 모란)
부귀화, 화중왕이라고 불리며 장미와 함께 긴 세월 아름다운 꽃으로 사랑 받아온 모란은 5월부터 크고 화려한 꽃을 피우기 때문에 세계모란공원의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5월과 6월이라는데 사계절모란공원에서는 사계절 내내 모란을 볼 수 있다고 하니 겨울에 피는 모란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는데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모란꽃은 안타깝게도 그림이 전부였다.
예로부터 부귀의 상징으로 여겨온 모란은 설총의 <화왕계>에서도 꽃들의 왕으로 등장한다. 강희안은 그의 저서 <양화소록>에서 화목 9등품론이라 하여 꽃을 9품으로 나누고 그 품성을 논할 때, 모란은 부귀를 취하여 2품에 두었다. 이와 같이 상징성에 의하여 신부인 예복인 원삼이나 활옷에는 모란꽃이 수놓아졌고, 선비들의 소박한 소망을 담은 책거리 그림에도 부귀와 공명을 염원하는 모란꽃이 그려졌다. 왕비나 공주와 같은 귀한 신분의 여인들의 옷에는 모란무늬가 들어갔으며, 가정집의 수병풍에도 모란은 빠질 수 없었다. 또 미인을 평함에 있어서도, 복스럽고 덕있는 미인을 활짝 핀 모란꽃과 같다고 평하였다.
강진군에서 사계절 모란꽃을 볼 수 있도록 기술 개발하여 전시 중이라는 사계절 꽃피는 모란도 그 옆의 프랑스 모란이나 일본 모란도 겨울에는 겨울 잠을 자는 모양이다.
모란은 현재 세계적으로 200종류가 넘는 많은 재배품종이 있다고 한다. 모란을 볼 수 없어 조금 아쉬웠지만 선인장이나 열대식물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눈이 즐거웠다.
과거 중국에서는 꽃의 왕이라 불리었고 현재도 매화와 더불어 국화로 불릴 정도니 모란꽃의 위상이 어떤 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모란은 선덕여황의 설화에도 등장하는데 당 태종이 신라와 협약을 맺기 위해 덕만공주에게 모란꽃 그림 한 점과 모란씨 석 되(한국 최초 모란꽃)를 보냈는데 그것을 본 덕만공주는 “꽃은 화려하다. 허나, 꽃에 벌이 없으니 향기가 없겠구나”라고 말하였다. 나중에 핀 모란 꽃은 실제로 향기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선덕여왕 설화와는 달리 모란에는 은은한 향기가 있다고 한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100년생의 모란과 인스타에 방문 인증할 수 있는 예쁜 벤치!
사계절모란공원을 나오면 다시 세계모란공원과 이어진다. 모란 조형물을 따라 공원을 거닐면 약수터 물을 이용한 생태연못과 모란폭포를 만나게 된다.
걷다 보니 남쪽은 확실히 따뜻하다. 서울은 이례적인 한파로 낮기온이 열흘 가까이 영하 8도~15도에 가까운 추위가 계속 되고 있는데 이곳 모란공원에는 여전히 푸른 잎과 곳곳에 심어진 열대나무가 계속해서 눈에 들어온다. 하얗고 빨간 모란이 넘실대는 꽃동산이 펼쳐진 건 아니지만 잠시나마 마음이 안온해진다.
감성 트레일 코스를 따라 5분 정도 올라가니 공원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에는 아름다운 강진만을 보며 편히 쉴 수 있는 쉼터가 마련되어 있고 서정시인 김윤식 선생의 영랑 추모원이 보인다. 보은산 등산로에 있는 구암정에 가려는데 남자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도대체 어디까지 간 거냐며..ㅎ;;
영랑 생가 뒤로 이어진 모란공원에 왔다가 전망대에 오르니 저 멀리 강진만이 보인다며 올거냐 물으니 사진으로 찍어오라고 했다. 진짜 컨디션이 많이 안 좋긴 한가 보다.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영랑 생가 방향으로 걸어 내려갔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만나는 데크길 위에서 바라보니 무궁화 없는 무궁화 동산이 전부 내려다 보인다. 꽃은 없지만 혼자 조용히 걸으며 눈 쌓인 공원을 걷는 평화가 좋다.
모란공원에는 대나무 숲을 그윽하게 밝히는 2,000여개의 야간 경관조명을 설치해서 자연스러운 빛과 공원 내의 모란 폭포 및 다양한 조형물을 아름다운 조명빛으로 꾸몄다고 한다. 낮과는 또 다른 밤의 매력이 어떨 지 궁금하다.
정자 앞 영랑 추모원에는 김윤식 선생상과 1934년 4월 『문학(文學)』 3호에 발표되고 이듬해 시문학사(詩文學社)에서 간행된 『영랑시집』에 재수록된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비가 세워져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 봄을 기둘니고 잇슬테요
모란이 뚝뚝 떠러져버린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흰 서름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로 무덥든 날
떠러져 누은 꽃닢마져 시드러버리고는
천디에 모란은 자최도 없어지고
뻐처오르든 내보람 서운케 문허졋느니
모란이 지고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니고잇슬테요 찰난한 슬픔의 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