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레지오 훈화
첫째 주
사람들은 자주 '하느님께서 부족한 나를 정말 사랑하실까?'라는 의심에 빠집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도 부당하니 그저 벌만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라는 생각에 빠집니다. 그래서 벌 받지 않기 위해 착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며, 마치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것같이 오해합니다. 겸손한 듯 보이는 그 태도가 사실은 벌을 받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며,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가로막는 믿음의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이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아무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완벽한 사람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죠. 누가 하느님께 무엇을 먼저 드렸기에 사랑받을 만하겠습니까. 하느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사뭇 다릅니다. 못난 모습, 부족함, 나약함, 죄인임을 다 아시면서도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받아주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우리말에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어원을 찾다보면 ‘아름답다’의 ‘아름’은 동사에서 바뀐 명사가 아니라 본디부터 명사였다고 보아야 할 것고, 15세기에는 ‘아람답다’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아람’이라고 하는 명사가 15세기에서 나(私)의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나답다'의 뜻이 되겠습니다.
이처럼 나를 아름답다고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주셨다."라는 말씀은 극복하기 힘든 우리의 부족함에서 해방되라는 선언입니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자책감들을 벗어 버리라는 말씀이시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살아가라는 초대입니다.
용기를 납시다. 아름다운 여러분!
둘째 주
빅터 프랭클이라는 유태인 정신과 의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유태인 수용소에 감금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수용소에서 죽어갔지만 잘 견디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기 직전 한꺼번에 많은 수용자들이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기대하고 있던 그날 연합군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때까지 꿋꿋하게 버티던 유대인들이 갑자기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주의 깊게 관찰한 프랭클은 인간은 의미 없는 고통을 견디어 내지 못한다는 정신의학적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삶이 고역이더라도 의미가 있고, 자신이 쓸모가 있다면 희망을 가지고 버텨냅니다. 그러나 의미를 상실하여 자신이 쓸모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 작은 어려움도 이겨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성취하여 업적을 남겨야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결과가 그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관점을 전환할 필요가 있죠. 삶은 무엇을 성취하고 얻어내야 하는 것으로 대하지 말고, 내 인생에는 살아갈 의미는 이미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자는 프랭클의 제안을 따라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들은 생기를 되찾고 꿋꿋이 살아남았습니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의미를 찾아주어 정신 질환을 치료하는 요법(로고테라피-의미요법)이 탄생하였습니다.
만일 사람이 노력해서 무엇을 성취해야만 가치가 있는 인생이라면 그 삶은 참으로 허망하죠. 누구나 나이가 들면 육체적으로 쇠약해지고 경제적으로 궁핍해지다가 남의 신세를 지며 죽습니다. 성취해야 가치 있는 삶이라면 아무것도 못 하게 된 인생은 허망할 뿐이죠.
신앙인으로 삶을 가치 있게 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내게 생명과 동시에 존재 의미를 주셨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모상으로 만드셨기에, 인간은 그 존재 자체로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큰일을 성취하기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개인의 능력이나 성취와 무관하게 인간을 그 자체로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사랑에서 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발상의 전환, 여기에 신앙의 핵심이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둘 때, 신앙인은 어떤 처지든 감사하며 늘 기뻐하며 생기 넘치게 살아갑니다. 그것이 하느님 모상인 인간의 본래 모습이죠. 복음의 예수님은 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쁜 삶을 고역으로 여기지 않고 열정에 차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선포하신 말씀을 직접 실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일에 앞서 외딴곳에서 기도하십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삶의 의미를 깨우치는 순간이죠. 기도는 자신에게서 하느님께로 의미가 전환되는 지점입니다. 내 존재의 의미, 이 고단한 삶의 의미를 찾고 싶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속에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의 만남 속에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일으켜 주십니다. 내가 기도할 때 나를 일으키심으로 나라는 인간이 세상을 살아갈 의미를 주십니다. 삶의 의미를 찾아주심으로써 인생은 더 이상 고역이나 날품팔이의 나날이 아니라 감사하며 기쁘고 힘차게 살아갈 선물이 됩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네." (화답송 시편)
셋째 주
기도를 '원하는 것, 무엇이나 그대로 들어주는' 도깨비방망이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필요한 것을 요청하면 즉시 들어주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거래이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대한 온전한 믿음 없는 기도는 넋두리나 독백으로 흐르고 맙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신뢰하여 간절히 말씀을 드리고, 그분의 응답을 듣는 대화가 기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청한 것을 그대로 주신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언제 어떻게 주실지 결정권은 우리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께서는 더 좋은 것을, 더 적합한 때에, 더 좋은 방법으로 주십니다. 그러기에 기도는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아버지를 믿고 나누는 대화입니다. 대화 속에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면 자신이 변화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가난에 한두 푼 적선을 하시기보다. 당신의 현존을 마주함으로써 우리가 변화되어 진정한 행복을 누리라고 우리를 초대 하십니다.
어느 신앙인의 말씀에 잘 표현 되어 있습니다.
"큰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주십사고 기도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다.
부유해지고 싶어 기도했는데,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다.
삶을 누릴 수 있게 모든 걸 갖게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걸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주셨다.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 모두 들어 주셨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삶이었지만,
내 맘속에 진작 표현하지 못하는 기도까지 모두 들어주셨다.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아멘!!!
넷째 주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 구원받은 자임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한때는 죄인이었음을 속삭이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선택했노라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 교만한 마음으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실수하는 자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노라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 강한 자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힘을 주시기를 기도하노라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 성공했음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했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내가 진 빚을 다 갚을 수가 없노라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이 아니라 몰라서 혼란스러움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겸손히 하느님의 가르치심을 구하노라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 온전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이 많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하느님의 인정만을 믿노라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 삶의 고통이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내 몫의 고통을 지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이름을 찾노라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권위가 내게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을 뿐이라고." (케롤 위머)
레지오 훈화 10월
다섯 째 주
하버드대 수석졸업자인 심리학과 교수 안젤라 더크워스는 교수 이전에 백악관 인턴, 세계적 기업인 매킨지의 고액연봉 컨설턴트였지만 교사가 천직이라 여겨 박봉의 수학교사가 됩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던 그녀는 수학성적이 IQ나 수학적 재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걸 현장에서 알게 되면서 그것을 찾고자 심리학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녀가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찾기 위해 조사한 대상은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입학한 미국의 육사 웨스트포인트의 신입생들 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입학한 신입생 중에는 학기 시작 전 악명 높은 기초 군사훈련을 마치지 못해 아쉽게 탈락하는 학생들이 매년 5%정도나 되었습니다.
그녀는 많은 조사를 통해 중도포기 자와 끝까지 남는 자에게서 결정적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세운 목표를 위해 꾸준히 노력할 수 있는 능력’의 유무였습니다.
그것을 그녀는 “그릿”이라 명명하고, 그릿은 ‘열정과 결합된 끈기’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릿은 길러질 수 있는 특성이며 이것을 기르기 위해서는 네 가지가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첫째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발견하여 일을 즐기는 관심
둘째 시간을 들어서 집중적으로 끈기 있게 반복하는 연습
셋째 자신만이 아닌 타인에게도 유익하기를 바라는 목적의식
넷째 위기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 것
그릿을 기를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 레지오 활동에도 있음을 깨달은 교직을 은퇴하고 한 형제님의 경험담입니다.
아이들 성적이 향상되지 않는 것은 학습방법이 잘못됐거나 꾸준한 노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지오에서의 활동보고와 사업보고는 이 두 가지를 가능하게 함을 깨닫게 된다.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체계적인 단체가 바로 레지오이다.
우리들은 레지오라는 장치 속에서 모든 분야의 성공요건인 그릿을 키우고 있는 셈입니다.
“한평생 사도직 활동을 꾸준히 지속하는 것 자체가 바로 영웅적 행위” (교본32쪽)
“레지오는 단원들이 크리스천의 완덕을 꾸준하고 뚜렷하게 쌓아나가도록 바탕을 준다” (교본109쪽)
“줄기찬 노력만이 참된 성공을 보장하며 그것을 이기고 말겠다는 굳센 의지로부터 시작된다” (교본33쪽)
레지오 활동을 통해 그릿이 길러지면 삶도 신앙도 완덕에 이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첫댓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 구원받은 자임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한때는 죄인이었음을 속삭이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선택했노라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 교만한 마음으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실수하는 자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노라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 강한 자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힘을 주시기를 기도하노라고
성공했음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했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내가 진 빚을 다 갚을 수가 없노라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이 아니라 몰라서 혼란스러움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겸손히 하느님의 가르치심을 구하노라고
온전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이 많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하느님의 인정만을 믿노라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 삶의 고통이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내 몫의 고통을 지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이름을 찾노라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권위가 내게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을 뿐이라고" (케롤 위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