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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매듭짓기의 연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부르실 때까지 이어집니다.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앞이 정리되어야 합니다. 매듭이 필요합니다. 또 매듭은 사이와 사이에서 일어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매듭을 짓지 않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은 석연치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 해를 시작하는 설 연휴는 인생의 또 하나의 매듭을 짓는 날입니다. 이때 지난 한 해 참 애썼다고 자신을 칭찬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시인은 “도시에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라는 자신의 책 서문에 수록된 “당신 참 애썼다”라는 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나는 이제 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에 지쳐,
당신에게 눈물 차오르는 밤이 있음을.
인생은 고해입니다. 고난은 필연적입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지만 무조건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삶 자체가 고난입니다. 견딜 수 없는 아니 견뎌야만 하는 힘겨운 고난의 연속입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아니 어쩔 수 없어서 무기력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고난의 연속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차오른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밤이 쉬지 않고 이어지는 고난도 있습니다. 다들 견디고, 받아들이며 또 피눈물까지 흘리며 살아낸 날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몰라준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다 알아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또 감히 안다.
당신이 무엇을 꿈꾸었고,
무엇을 잃어 왔는지를.
어릴 때부터 마음에 품은 꿈이 있습니다. 성장해서 마음 속 깊이 새겨진 꿈이 있습니다. 현실의 벽은 너무나 높았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시도해 보았습니다.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몸부림쳐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꿈을 이루기는 절대로 쉽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잃은 것이 정말 많았습니다. 때로는 사랑을, 때로는 가족을, 때로는 이웃을, 때로는 건강을, 때로는 인생을, 때로는 가장 소중한 생명까지 잃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고해 같은 힘겨운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다 경험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이제는 그것까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흔들리는 그림자에
내 그림자가 겹쳐졌기에
절로 헤아려졌다.
고해 같은 힘겨운 인생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흔들릴 수밖에 없는 때가 필연적으로 다가옵니다. 완전히 다른 둘이라고 생각했던 너의 그림자와 나의 그림자가 서로 완벽하게 겹칩니다. 주어지는 쉽지 않은 삶을 살다보니까 아니 애를 쓰며 살아내다 보니까 마치 완벽한 하나라도 되는 것처럼 서로 겹칩니다.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 저절로 헤아려집니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어갔지만
끝내 가버리던 버스처럼
늘 한 발짝 차이로
우리를 비껴가던 희망들.
남들 쉴 때 쉬지 않았습니다. 아니 쉴 수 없었습니다. 남들 즐길 때 즐기지 않았습니다. 아니 즐길 수 없었습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허구 헌 날 일찍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야근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새벽별을 보고 시작해서 저녁달을 볼 때까지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꿈은 너무나 야속했습니다. 간발間髮의 차이로 놓쳐버린 너무나 아쉬운 버스 같이 될 듯, 될듯하면서도 되지 않았습니다. 겨우 한 발짝 정도밖에 되지 않는 너무나 작은 차이로 비껴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다시 그 희망을 좇으며
우리 그렇게 살았다.
그래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을 괜히 고해라고 했겠느냐고 스스로 위로하며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려니 하며 최선을 다해서 살아냈습니다. 오늘도 마음에 품은 꿈을 좇으며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내고 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내고 있습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은 몰라주어도 그림자가 하나같이 겹치는 시인은 압니다. 견디기 어려운 고난이 쉬지 않고 이어지는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단 한 순간도 꿈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서 부드럽게 속삭입니다.
당신, 참 애썼다.
사느라, 살아내느라,
여기까지 오느라 애썼다.
여러분 그동안 참 애쓰셨습니다. 고해 같이 힘겨운 인생 오늘까지 사느라 애쓰셨습니다. 오늘까지 살아내느라 애쓰셨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오느라 정말 애쓰셨습니다. 시인은 또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외칩니다.
부디 당신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
아직 오지 않았기를 두 손 모아 빈다.
시인은 가장 행복한 시절이 아직 오지 않았기를 두 손을 모아서 간절하게 빕니다. 머지않은 장래에 다가와주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빕니다. 그래야 포기하지 않고 오늘을 살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24년, 두 번째 새 해의 이틀째가 시작된 오늘 저와 여러분은 견디기 어려운 힘겨운 일들을 견뎌내고, 받아들일 수 없는 힘겨운 일들을 받아들여야 했던 눈물의 시간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아쉬움 속에서도 여기 이렇게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모든 일들을 빠짐없이 다 이루었다고 우쭐거릴 이유는 없습니다.
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좌절할 이유도 없습니다. 또 저와 여러분 앞에 어떤 미래가 펼쳐지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습니다. 일은 되다가도 안 되고, 안되다가도 될 수 있습니다. 또 안 되는 일들은 저와 여러분을 더 깊은 차원의 영적 세계로 인도해 줍니다. “좋은 때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는 생각하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전7:14)라는 증거대로, 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졌으면 기뻐하면 됩니다.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생각하면 됩니다.
어떤 일이 주어지든 이제까지처럼 믿음으로 받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애쓰면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태초בְּרֵאשִׁית베레쉬트”는 창조와 함께 시작된 역사적 시간의 출발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당신 마음에 품고 계셨던 우주와 인류가 모습을 드러내는 시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 역시 영원 전부터 마음에 품으셨습니다. 당신의 때가 이르자, 당신이 예비하신 사람을 통해서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우주 만물의 시작점인 태초의 중심에 저와 여러분이 있습니다.
제아무리 장엄하고, 광활하며, 온갖 신비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여전히 미지의 세계인 우주 또는 지구라고 할지라도 저와 여러분이 없으면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어떤 가치도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존재할 때 비로소 가치와 의미를 부여附與받을 수 있습니다. 한 영혼 곧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과 땅을 빈틈없이 가득 채우고 있는 천하보다 귀한 이유입니다.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과 상황과 조건과는 전혀 상관없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아무리 가지지 못했어도 우주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가진 놀라운 존재입니다. 자부심을 가지기에 충분합니다.
“천지”를 직역하면 하늘과 땅입니다. 넓은 의미로는 무수히 많은 별들로 채워져 있는 은하계 안에 은하계들이 있고, 그 은하계들 각각에 또 은하계들이 있는 그렇기 때문에 셀 수 없이 많은 별들로 구성되어 있는 우주를 가리킵니다. 좁은 의미로는 지구를 가리킵니다. 궁극적으로는 생각하면 할수록 신비한 존재인 동시에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는 어떤 가치와 의미도 가질 수 없는 영적 존재인 사람 곧 저와 여러분을 가리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서는 천하보다 귀하지만,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는 무無, 공空, 허무虛無에 불과한 쓸데없는 존재입니다.
“창조ברא(바라)”는 무無에서 유有에로의 창조를 가리킵니다. 완전한 신적 창조 행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과 유일하게 교제할 수 있는 영적 존재인 인류 곧 저와 여러분의 창조를 설명할 때만 사용되었습니다. 인간이 우주 안에 가득한 생물들과는 달리 영적으로 충만할 때 곧 하나님으로 충만할 때 비로소 참된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과 평안과 안식과 쉼을 누릴 수 있는 이유입니다. 한편, “하나님אלהים(엘로힘)”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절대 주권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탁월한 섭리로 온 우주는 물론 개인 곧 저와 여러분의 삶을 책임지고 맡아 관리하십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곧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한 주도권을 쥐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5:17),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고후4:16)라는 증거대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하고 계십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점점 더 낡아지는 육신과는 달리 영혼은 새로워지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를 위해 오늘도 여전히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새해를 맞은 시인은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나무가 되지요”라는 자신의 책을 통해서 “마음은 부리기 나름 아니던가. 마음은 본래 큰 것으로 말하자면 세상을 품고, 작은 것으로 말하자면 바늘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니 (설령...고난이 거센 파도처럼, 눈보라처럼 내게 밀려오더라도) 마음의 장광을 대해처럼 설원처럼 가져볼 요량이다.”라고 다짐했습니다. 최고의 랍비로 알려진 그Jonathan Sacks는 “분열된 세상을 치유하려면”이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이 되면 랍비 한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회당, 학교, 문이 늘 열려 있던 그의 집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루는 한 학자가 방문했습니다. 랍비가 모습을 감췄다는 말을 듣고 당황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하늘”이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평화와 음식과 건강을 필요로 하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누구보다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학자는 랍비가 사라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기로 결심했습니다. 목요일 밤, 랍비의 집에 몰래 숨어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떠오르기도 전, 랍비는 뜨겁게 탄식하며 울었습니다.
잠시 후, 벽장에서 낡은 농부의 옷을 꺼내 갈아입었습니다. 손에는 도끼를 들었습니다.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굵은 나무 한 그루를 찍어 넘어뜨렸습니다. 가정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장작을 만들었습니다. 장작을 짊어지고 마을의 어둑한 뒷길에 자리를 잡고 있는 허름한 집으로 가더니 문을 두드렸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늙은 여인이 문을 열고나와 누구냐고 묻자 자신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소개했습니다. 장작을 팔기 위해서 왔다며 헐값에 줄 테니까 사라고 제안했습니다. 여인이 사고 싶기는 하지만 돈이 없다며 어려워하자, 이번에는 외상으로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갚을 능력이 없다는 말에는 여인이 믿는 하나님이 방법을 찾아주실 테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대답했습니다. 병들어서 불을 피울 수 없다는 여인의 말에는 대신 피워주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곧 불을 피워준 다음 돌아갔습니다. 그의 행동을 모두 확인한 학자는 랍비의 제자가 되어 마을에 마물렀습니다. 이후, 제자들이 방문객에게 랍비가 하늘에 올라갔다고 말하면 더 이상 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분은 (생각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계실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민중운동가, 사상가였던 그咸錫憲는 자신의 전집 “수평선 너머”를 통해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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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
그 얼굴만 보면 나를 잊고,
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
밥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모르는 얼굴,
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는 듯하고,
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애,
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맘 파도처럼 일어나고,
가슴이 그저 시원한,
그저 마주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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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 마음 급해!
내 가슴 타!
내 눈 흐리고
내 숨 헐떡여 끊어지려 하네!
그 얼굴 하나
그 산 얼굴 하나 보고 싶은 마음에.
이 세상 뭘 하러 왔던고?
얼굴 하나 보러 왔지.
참 얼굴 하나 보고 가잠이
우리 삶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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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세상에 온 목적은 하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라고 노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게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나게 된다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된다고 노래했습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달라졌습니다.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제자들을 돌아보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면서 노벨상 문학상을 수상한 그Wisława Szymborska는 “두 번은 없다.”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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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라는 학교에서는 아무리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낙제는 없다고 노래했습니다. 2023년, 저와 여러분 모두 참으로 애쓰셨습니다. 2024년,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할지라도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각과 생각과 삶을 살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필요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소유는 물론 능력까지도 기꺼이 나눠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고난이 거센 파도나 눈보라처럼 밀려온다 할지라도 대해大海나 설원雪原같이 깊고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절대 주권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탁월한 섭리로 우주 만물을 경륜經綸하시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가장 알맞은 때에 세상에 보내주셨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복된 2024년, 성공은 물론 실패 속에서도 전혀 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복된 2024년, 천하보다 귀한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복된 2024년, 무엇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순간 스스로는 물론 하나님께서도 참으로 애썼다고 칭찬해 주시는 복된 2024년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