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대학교 이규봉 교수가 11월1일부터 본지 칼럼위원으로 활동한다. 이규봉 칼럼위원은 첫번째 주제로 '제주 4․3사건'의 유적지를 자전거로 기행하며 쓴 글을 본지에 게재하기로 했다. 이번호부터 총 5회에 걸쳐 연재되는 이번 칼럼을 통해 제주 4․3사건의 역사적 진실에 보다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편집자주>
한국현대사에서 '제주 4․3 사건'은 국내적으로는 우리 민족이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역사상 최대의 민간인 학살이며, 국외적으로는 동서 냉전 시대에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이 만들어 낸 세계적인 사건이다.
서슬 퍼런 지난 독재정권 하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던 많은 가해자와 그와 관련된 사람들은 이 학살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그 원인과 과정을 왜곡하였고, 그 참상을 감추었으며, 또한 그 피해를 축소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지난 민주정권에서 그 원인과 참상이 공식적으로 공개되었다.
'제주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부터 하루 평균 130명 이상이 살해된 48년 10월부터 49년 4월을 거쳐, 겨우 생존한 사람 수백 명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공산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자의적인 판단으로 다시 학살한 한국전쟁 시기를 포함하여 1954년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로 보고 있다.
특히 1948년 4월 3일부터 1949년 10월까지 최소한 3만여 명 이상이 희생된 사건으로 볼 때 이것은 빨치산과의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160여 개의 마을, 1만 5천여 채의 가구가 소실되었으며 제주도 전체 인구의 35%나 되는 이재민이 발생하고 수많은 가축이 살상되었으며 산림이 벌채되고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2003년 10월 15일에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위원회는 그 보고서에서 최종 책임이 이승만과 미국에게 있다고 지적하였으며, 10월 31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하였고 2006년 4월 3일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추모식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자 가해자들의 이에 대한 반성은 없고 다시 특별법을 만들어 이 사건을 폄훼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제주 4․3 사건'의 참상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하여 그 유적지를 8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자전거로 3일에 걸쳐 탐방하였다.
사소한 일이 엄청난 일로
공항에서 10시에 출발하여 용문로를 따라 제주 4․3 사건의 역사적 현장이 거의 모여 있었던 중앙로 사거리로 향하였다. 가는 도중 제주중학교에 있는 현경호 선생의 비석을 찾았다. 비석은 제주중학교 정문 안 바로 오른쪽에 조그맣게 세워져 있었다. 당시 제주중학교 교장이었던 현경호 선생은 지역의 유지로 47년 2월 23일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이 되어 사회 현실에 참여하고 정의의 편에 선 지식인의 참 모습을 보여주었던 잊을 수 없는 의인 중 한 분으로 꼽히고 있다. 1948년 12월 23일 박석내 학살에서 죽음을 당했다. 1969년 비석이 세워졌으나 당시는 군사독재정권 시절로 그의 자세한 공적이 기록될 수 없었다. 그래서 비문의 내용은 오직 교육자에 관한 것 뿐이었다.
제주중학교 앞길을 따라 중앙로 사거리로 향하니 왼쪽에 관덕정이 나타났다. 1947년 이 정자 앞 광장에서 4․3 사건의 도화선이 된 3․1절 발포사건이 일어났다. 그 원인은 아주 사소했다. 제주북초등학교에서 3만여 명이 28주기 3․1절 기념식을 거행하고 학교 앞에 있는 관덕정까지 시위를 하였다. 시위대가 모두 해산하고 구경꾼들만 남았을 때, 기마 경관이 관덕정 앞을 지나가다 자신의 말에 어린이가 깔렸음에도 이를 그대로 방치한 채 지나갔다. 이에 분노한 군중이 욕하며 돌팔매를 가했다. 그러자 총성이 울리고 무차별 총격을 가해 젖먹이를 업고 있던 아주머니와 초등학생을 포함한 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1947년 제주도는 해방이 되었음에도 실질적 삶이 해방 전보다 나아진 것이 없었고 오히려 악화되었으며, 일본과 교역 금지로 경제상황이 최악이었고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었다. 육지에서 건너온 일제경찰이 설치고 있었고, 미군정의 잘못된 미곡 수입 정책으로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부정부패가 심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군중들은 기념식이 끝나고 거리로 나와 관덕정까지 시위를 한 것이었다.
경찰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정당방위였다고 억지를 부리자, 학생의 동맹휴학에서 시작된 파업이 3월 10일 공무원은 물론 일부 경찰도 포함한 민관 총파업으로 발전하였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경찰의 아주 조그만 실수가 3만여 명의 희생자를 낸 것으로 변한 것이다. 이른바 나비효과(아주 조그만 처음의 차이가 후에 엄청난 차이를 만드는 현상)가 발생한 것이다.
1947년 3월 14일 경찰총수 조병옥은 제주에 와서 경찰 발포에 대한 사과는 커녕 오히려 강경 방침을 천명하였다. 그 결과 다음해인 1948년 4․3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2500여 명이 검거되었다. 그래서 4․3사건을 '강요된 저항'이라고도 한다. 3월에 경찰에 연행된 청년 3명이 고문으로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로당의 소장파 김달삼 등이 주도권을 잡으며 무장항쟁을 강행하였고 그 결과 4월 3일 도민의 봉기가 시작되었다.
제주도 방어의 임무를 맡던 국방경비대 제9연대는 이 사건을 도민과 경찰 및 서청 간의 충돌사고로 보고 개입할 사안으로 보지 않았으나 미군정은 4월 17일 진압작전에 동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김익렬 연대장은 극력분자가 200~300명에 불과한 만큼 우선 귀순 선무작전을 시도하고, 그래도 문제가 되면 토벌하자고 군정장관을 설득하였다. 그는 운전병만 데리고 들어가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과 평화협상에 합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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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합을 상징하는 둥근 돌을 얹고, 돌무더기 속에는 4․3 희생자 명단 등 4․3과 관련된 자료를 묻은 4․3 해원방사탑. |
ⓒ 인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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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한 자를 학살하다
그러나 경찰은 사후 책임을 두려워하여 양자 간 합의를 지키지 않고 주민들과 귀순 민병대를 공격하였다. 29일 미군정 최고 책임자 딘이 극비리에 제주를 방문한 후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이 일어나면서 평화협상이 깨졌다.
당시 제주에서 일어난 중요한 건물은 거의 중앙로터리 주변에 있었다. 47년 삼일절 발포사건 전까지 제주사회를 주도한 제주도인민위원회와 3․10 총파업 투쟁위원회 본부 터가 이곳에 있었으며 악명 높은 서북청년회(이후 서청)의 사무실도 이곳에 있었다.
서청은 47년 삼일절 발포사건 이후 제주에 들어왔다. 김일성 정권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과 친일파 처단으로 남으로 피해온 사람들로 이들은 '제주도민 90% 이상이 빨갱이'라는 악선전에 제주도를 이들의 분풀이 장소로 삼았다. 그들의 만행이 너무도 심해 서청의 만행을 4․3의 한 원인으로 꼽을 정도였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이용하였다. 사설단체인 서청에 경찰권까지 주었으나 봉급은 주지 않았다. 서청은 도 총무국장도 살해하고 제주신보도 빼앗는 등 그 행패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현기영의 <순이삼촌>에서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일본 순사가 조센징 목 치던 그 끔찍한 닙뽄도를 새나라 새 경관이 써 먹다니! 저 까마귀 오는 삼팔 따라지 이북 출신이다. 그것도 '쉿, 육지 순경 온다'하면 울던 젖먹이도 경풍들리게 화들짝 놀라며 울음을 뚝 끊는 무서운 서청 사람이란다. 어찌나 무서운지 같은 순경이면서도 섬것들은 도무지 기를 못 편다."
중요한 역사적 장소가 있던 중앙로터리에 4․3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제주도인민위원회나 3․10총파업투쟁위원회 터에는 쇼핑몰이 들어서 있고, 역사적인 장소를 알려주는 표석마저 전혀 없이 모두 상업화 되어있다.
역사적 장소임을 알려주는 어떠한 표석도 없는 중앙로터리에 아쉬움을 느끼며 최대의 수용소로 사용한 주정공장 터로 가기 위해 제주항 여객선 터미널로 향했다. 주정공장이 있었던 제주항 언덕 위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이 주정공장은 당시 제주에서 생산되는 고구마로 주정을 제조하고 이를 연료로 공급하는 곳으로 48년 초토화 작전 이후 제주도 내 최대의 수용소가 된 곳이다. 49년에는 2000여명을 수용하여 여자가 남자의 3배 이상이었으며, 90%는 산에 숨어 있다 귀순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49년 3월 주민의 민심을 안정시키고 정부의 시책을 이해시키기 위한 활동으로 귀순을 권고하는 선무공작이 전개되어 많은 수가 내려왔으나, 귀순자 300여명을 사살하고 많은 사람을 육지형무소로 보냈다. 그 결과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육지형무소로 보낸 대부분이 학살되었으며 특히 대전의 골령골과 대구의 가창골에서 많이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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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좌훈 대표(임사연 운영위원)님과 이규봉 교수(임사연 감사)님, 두 분께 축하 드립니다.
좋은 글이 좋은 신문에 실리게 된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