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역사 이야기 -조선 영조시대 청렴 호조판사 정홍순 삶 엿보기 - (21세기 현 위정자들의 지침서) —-
[ 현 대선 후보들 중 나라 살림은 걱정도 안하고, 퍼주기 급급한 정당과 후보를 보노라면,
최근 IMF 뉴스에서 국가 부채 비율 상승 속도 1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계빚이 가장 빨리 늘어나고 있는 나라로 꼽혔다고 합니다. 가계부채에 기업부채까지 더한 민간부채 규모는 지난해 처음 4000조원을 넘어섰습니다.
경제 성장 수치 0%로 향하는 대한민국을 예의 주시하고 있음으로 알아야한다. ]
——————————.
정홍순(鄭弘淳) 육상궁(毓祥宮) 문턱을 깎운 일화 포함.
정홍순은 동래(東萊) 사람으로 아호는 호천(瓠泉)이라 하였다.
영조 21년(1745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정홍순은 평소에 항상 두 개의 갈모[笠帽 : 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 쓰던 고깔과 비슷하게 생긴 물건]를 가지고 다녔다. 하나는 비 올 때 자기가 쓰기 위함이고 하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준비해 두는 것이었다.
정홍순이 아직 과거에 등제되기 전에 영조 임금께서 동구릉(東九陵)에 납시었을 때 그는 동대문 밖에 나가 구경하고 있었다. 어가가 대궐로 환궁한 뒤에 구경하던 사람들도 각기 흩어져 돌아갔다. 그 때 마침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는데 옆에 같이 걷고 있던 한 사람이 갈모를 갖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있는 것을 보고 정홍순이 갈모를 하나 빌려주어 쓰게 하고 같이 동행하였다. 회동의 성문에 이르러 그 갈모를 돌려줄 것을 청하니 그 사람이
“비가 아직 완전히 개이지 않았으니 내일 꼭 그대의 집으로 전해 돌려 드리겠습니다.” 한다. 정홍순은 “우리 집은 회동 몇 째 골목 몇 째 집이오.” 하고 상세히 알려주고 또 그 사람이 갈모를 돌려주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그 사람이 사는 주소를 물으니 “남문 밖 모동 몇 째 거리 무슨 골목에 사오.” 한다. 그 이튿날 그 사람이 오지 않자 정홍순은 곧 그 사람의 집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끝내 그 집을 찾지 못했다.
그 뒤 20여년이 흘러서 정홍순이 호조판서가 되었을 때 한 좌랑(지금의 사무관급)이 새로 부임하여 인사를 드리러 왔다. 정홍순이 그를 자세히 보고
“그대가 옛날 영조 임금님께서 동구릉에 거동하였을 때 내 갈모를 빌려갔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가.”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이 잠깐 생각하다가 깜짝 놀라며
“예. 과연 그랬습니다.” 한다. 정홍순이
“남의 갈모를 돌려주지 않았으니 신용이 없음을 가히 알 수 있는 터라 어찌 국가의 중요한 재산을 맡아 관리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사직서를 낼 마음을 먹는 것이 좋을 것이네.”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사람은 마침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했다.
영조 임금께서는 효성이 지극하시어 육상궁(毓祥宮 :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을 창건하였다.
정홍순이 호조판서로 있으니 임금께서 하교하시기를
“설계 규모를 하나같이 종묘 양식에 따르도록 하라.”
고 하셨다. 그러나 그는 왕후가 아니고 빈이기 때문에 왕후의 예로 할 수 없음이 원칙이라 문턱를 평평하게 깎아내렸다. 지세가 낮고 푹 빠진 것 같으며 문 또한 높지 않았다. 준공 후에 임금께서 거동 하시어 문의 모양을 보시고 심히 낮아 종묘의 규모와 같지 않은 것 같아 호조판서를 급히 불러
“문의 모양이 종묘에 비해 너무 낮으니 경이 어찌 감히 나의 뜻을 어기는가.” 하신다. 정홍순이 부복해서 아뢰기를
“전하. 가까이에서 전하를 모시고 있는 내관으로 하여금 종묘에 달려가서 자로 재가지고 오도록 하여 비교하옵소서.”
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 치수를 비교해보니 과연 차이가 없었다. 이로써 임금의 노여움이 풀렸다.
정홍순이 호조판서로서 예조판서까지 겸직하고 있을 때 사도세자의 장례를 맡아 치르게 되었다.
초종범절[初終凡節 : 초상이 난 뒤부터 졸곡까지 치르는 모든 절차]을 풍족하고 후하게 치르는데 신경을 써서 수의에서부터 관모, 의대, 신발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미세한 물건이라도 챙겨서 조처하고 그 때 소용된 물건을 기록한 문부를 아주 단단한 궤 속에 넣어 경건히 봉함해서 가장 신임하는 부하 직원에게 일러두었다.
“이 궤짝을 깊이 간직하라. 그렇지 않으면 큰 화가 미칠 것이니라.” 하고 그 궤짝 열쇠를 자신이 항상 차고 있었다.
정조임금께서 즉위하자 그 이듬해 정조 2년(1778년) 임금께서 사도세자가 돌아가셨을 그 당시의 장례를 풍후하게 하였는지 아니면 간소하고 박하게 하였는지를 알고자하여 그 때 예조판서가 누구였는지를 물었다.
좌우에서 “정홍순입니다.” 한다. 왕의 마음속으로는 장례를 만약 터럭 끝만치라도 소홀하게 하고 박하게 한 것이 있으면 즉시 국문을 벌여 죽이려고 하였다. 정홍순을 불러 물으시니 정홍순은 곧 예조의 관원을 불러 예전에 지시하여 평소 깊이 간직해두었던 궤짝을 궁궐 뜰 앞에 매다 놓게 하고 차고 있던 열쇠로 궤짝 문을 따고 문서를 임금 앞에 열어 놓으니 임금께서 하나하나 점검해 보고 물자가 풍후하고 예에도 조금의 흠결이 없음을 인정할 수 있었다. 임금께서 대단히 만족해하시며 정홍순을 칭찬하고 그 뒤에 우의정으로 특배하였다.
정홍순에게 딸이 있어, 그 딸이 과년한 나이가 되어 배필을 정하여 장차 시집을 보내게 되었는데 부인에게
“혼수 등 포백과 돈은 얼마가 필요하오.” 하고 물었다. 부인의 대답이 “최소한 800은 필요합니다.” 한다.
“그러면 잔치에 드는 비용은 얼마가 필요하겠소.”
하니 부인이 “400이 필요합니다.” 한다.
정홍순은 “내가 그 때쯤 가서 준비하리다.” 하였다.
혼수를 보내야 할 시기가 되어도 포백은 오지 아니하였다. 부인이 초조하고 답답하여 어찌 된 일이냐고 채근하였다. 정홍순이 대답하기를
“내가 이미 시장 상인에게 부탁해 놓았지만 시장 상인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아니하니 내가 재상 지위에 있으면서 어찌 이런 것으로 시장 상인을 죄줄 수 있겠소. 차라리 헌 옷이라도 깨끗이 빨아서 입고 시집가는 수밖에 없지 않겠소.”
라고 하는 것이었다. 혼인 잔칫날이 내일로 다가왔건만 잔치를 준비할 물건은 도착하지 않았다.
부인이 또 답답하여 남편에게 따져 물었다. 정홍순은
“시장 상인이 또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아니하니 도리어 서민들처럼 스스로 물건을 사고팔고 하는 무역 행위를 해서 간략한 주효를 준비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제일 나은 방법일 것이오.”
한다. 부인은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사위는 당대 명재상의 아들이었다. 그 장인의 지독한 구두쇠 행위를 괴이쩍게 여기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처가에 가니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때 장인이 도롱이와 삿갓을 주면서
“너는 너의 집으로 돌아가서 너희 집에서 아침 식사를 해라. 우리 집에는 준비한 밥이 없고 너희 집에는 이미 지어놓은 밥이 있을 것이니 이미 지어놓은 밥을 버려서는 안 될 것이며 준비 없는 것을 기다린다는 것도 옳은 것은 아니니라.”
하는 것이었다. 그 사위는 원망하여 돌아가서 이로부터 처가 왕래를 끊어버렸다.
몇 년이 흐른 뒤에 정홍순이 사위와 딸을 불렀으나 오지 아니하였다. 그는 사위의 아버지인 사돈에게 편지를 써서 타이르게 하여 사위와 딸을 맞아왔다. 서로 안부 인사를 나눈 뒤에 모두 데리고 뒤뜰로 갔다. 거기에는 아담한 집 한 채가 마련되어 있고 정원도 매우 그윽한 정취를 풍기고 있었다. 방과 다락은 매우 정결하고 가재도구도 완비되어 있었다. 정홍순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난 날 네가 시집갈 때 혼수 등의 비용을 너희 어머니에게 물었더니 약 1,200 이 필요하다고 하더구나. 어찌 그 같은 돈을 별로 긴하지도 않은 곳에 투입해서 한갓 보고 듣는 것을 장식해 뭣에 쓰겠느냐 생각해서 내가 그 돈으로 매년 이자를 늘려서 이 집을 짓고 또 고향에 논밭을 사서 연 수확이 수백 포가 되니 몸이 마칠 때까지 주림은 없을 것이다. 너희들이 여기서 살도록 하여라.” 라고 하였다.
정홍순이 평안감사로 있을 때 수청기생이 그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엿보고 있다가 담배합에서 영남지방에서 생산된 담배를 약간 훔쳐서 피웠다. 그는 평소에도 물건을 사용해도 얼마가 남아있는 지를 잘 관측하는지라 돌아와 보고 기생을 잡아 태장을 30대를 쳤다. 그 뒤에 통인[通引 : 시중드는 비서]들이 감사 없는 사이에 장난을 치다가 체경(거울)을 부수어 버렸다. 이들은 전일 기생의 매 맞은 일을 생각하고 겁을 먹고 도망쳐 버렸다. 돌아와 보니 거울은 깨져있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감영의 하급 직원을 시켜 다 불러서 따뜻하게 효유하고 각 직분에 돌아가게 하여 죄주지 아니하였다. 감사보좌관이 묻기를
“오늘의 체경 하나는 전일의 담배보다 훨씬 중한 것인데 먼저는 죄를 주고 이번에는 불문하신 것은 어찌된 까닭이옵니까?” 라고 하였다. 정홍순은
“기생은 고의로 범한 것이고 통인들은 우연히 체경을 깨뜨렸을 뿐이니 어찌 큰 죄가 있다 하겠는가.” 라고 대답하였다.
정홍순은 호조판서로 10년을 재직하면서 국가의 재산에 있어서는 얼마 안 되는 조그마한 것이라도 반드시 스스로 살피고 점검하여 국고가 충실토록 했다.
정승이 되어 자기 집을 수리하게 되었는데 일꾼들과 공임을 다투는 일이 자주 있었다. 자제들이 민망해서
“대인의 몸이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아래 기술자나 일꾼들과 공임 돈을 가지고 다투시니 체면 손상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하니 그는 “그렇지 않다. 한 나라의 재상으로서 한 나라의 의표가 되거늘 내가 임금을 많이 주면 반드시 이것이 국내에서 전체의 통례가 되어 일반 백성들이 곤란을 받게 되기 때문이니라.” 라고 하였다.✤
[ 출처 네이버 블러그]- https://m.blog.naver.com/rkddka31/221753921010 - 링크허용중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