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열왕 19,9ㄱ.11-13ㄱ; 로마 9,1-5; 마태 14,22-33
+ 찬미 예수님
한 주간 동안 잘 지내셨어요?
더위에, 태풍에 연일 날씨와 씨름하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도 날씨와 씨름을 하고 있는데요,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다가 바람과 파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다 새벽에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복음의 앞 단락에서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제자들은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먹인 것을 기억했을 것이고, 이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그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새로운 모세이시라는 기대에 차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제자들의 기대를 넘어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모세보다 위대하신 분이실 뿐 아니라, 모세가 만나 뵈었던 하느님을 보여 주시는 분임을, 그분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다”라는 말은, 하느님 이름인 “야훼”를 번역한 말입니다. 뒤이어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신 말씀 역시 구약에서 하느님의 이름과 함께 자주 등장하는 말입니다.
물은 생명과 구원의 상징이지만, 바다와 검은 호수는 죽음과 멸망의 상징입니다. 광대한 바다와 어두컴컴한 밤의 호수는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새벽에 예수님께서 호수를 밟고 걸어오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삶과 죽음의 주인이신 분, 죽음마저도 정복하시는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
베드로가 “주님, 당신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청하자, 예수님은 “오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지만,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져 물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베드로가 시선을 예수님께 향했을 때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눈을 거센 바람으로 돌리자 물에 빠졌습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시몬느 베이유는 “우리의 시선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는데요, 내가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나의 구원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인간만이 하늘을 바라보는 유일한 존재라고 합니다. 혹시 다른 동물들 예컨대 개가 하늘 바라보고 있는 것 보신 적 있으신가요? 개는 주로 무엇을 바라보나요? 주인을 바라보지요? 그렇다면 인간은 하늘을 왜 볼까요? 우리의 주인이 거기에 계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만이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을 향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은 ‘희망’을 가진 유일한 존재입니다. 희망을 향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유혹을 자꾸 바라보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게 되고, 시련으로 시선을 빼앗기면 시련에 빠지게 됩니다. 유혹과 시련 중에도 주님을 바라보느냐, 유혹과 시련으로 시선을 돌리느냐가 무척 중요합니다.
우리 집에서 나의 시선이 가장 자주 향하는 곳에 무엇이 있습니까? 많은 교우 댁에 십자고상과 성모상이, 그리고 성화가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 가정에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신다는 징표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주님께로 자주 시선을 향하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주님께로 시선을 향한다는 것은, 우선 고상과 성모상을 통해 내 눈을 자주 예수님과 성모님께 향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내 마음의 시선이 주님께로 향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되뇌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묵주기도를 하면 마음의 시선이 자연스레 성모님을 통해 예수님께로 향하고, 성경 말씀을 되뇌어도 주님께로 우리 마음의 시선이 향합니다. 그래서 주님께로 시선을 향한다는 것은 실제로 우리 눈이 어디로 향하는가, 우리가 마음으로 되뇌고 있는 말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예전에 피정을 하면서 오늘 복음 말씀에 오래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오너라”라는 말씀이 깊이 와닿았습니다. 물 위를 걸어오시며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시는 예수님께 베드로는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너라”하고 초대하십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의 성소는 ‘예수님께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당시 저는 ‘제가 사제로 잘살고 있는지’ 물음을 던지고 있었는데,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훌륭한 사제로 사는 것인가’, ‘나는 나의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너라’라는 말씀에 마음이 무척 고요해짐을 느꼈습니다. 제가 사제직을 통해 받은 근원적인 부르심은 ‘당신께로 오라’는 초대라는 것을 느꼈고, 제가 잘하고 있는가, 훌륭한 사제로 살아가고 있나, 그렇지 않은가보다 훨씬 더 중요한 질문은 ‘제가 진정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님께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만나는데, 하느님께서는 강한 바람 안에도, 지진 가운데에도,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나간 뒤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 즉 당신 말씀 안에 하느님은 계셨습니다. 이 말씀은 영의 식별에서도 무척 중요하게 다루어지는데요, 우리는 하느님을 크고 강한 힘 안에서 체험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하느님은 조용하고 여린 소리 안에서 훨씬 더 자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을 나에게도 건네십니다. 내 마음 한가운데서 ‘오너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께, 나는 어떤 대답을 드릴까요?
첫댓글 '나다'
탈출기의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을 드러내시는 '있는 나'의 표현 이었군요^^
또 이렇게 알아갑니당^^
네~ 히브리어 '야훼'의 희랍어 번역어인 '에고 에이미'가 쓰였어요~~
그리고 탈출기 외에도 이사 41,4; 43,10에도 '야훼'가 나오는데요, 특히 이사야 43장에서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이 여러 차례 나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