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건설자 스티븐
스티븐은 사막 옆에서, 술도 팔고 여자도 팔았다.
바람이 불면, 돈 되는 일을 궁리하느라 몇 안 남은 머리카락에서,
모래가 날렸다.
사막을 건너왔다는 총잡이들과 머언 마을로 가서, 은행을 털어왔다.
낄낄대며 돈다발을 나누다가, 머언 마을 은행 앞에서 보안관 총에 맞아 죽은 유령이, 흠뻑 총을 쏴 갈겼다.
이젠 먼지 회오리로 돈다발을 흐트러뜨리는, 머리숱 없는 스티븐.
사내들의 숱 없는 머리에서, 조금씩 흘러나온 모래가 만든 사막을
도시라 불렀다.
바다 학자
사막도 오래 전에는 바다였다지. 사람도 따지고 보면 바다에서 나온 게 아닌가.
그날 이후 바다는 사내의 종교가 되었다. 바다만 공부하다 다시 태어나도 바다만. 그 흔하디흔한 사랑도 못해 보고, 오로지 바다만.
모든 바다풀과 바다짐승, 해저 지형까지 몇 번을 훑어갔다. 그런 삶이 켜켜이 쌓여갈 즈음, 사내는 목에 생긴 아가미를 만지며 책상에서 일어났다.
난 바다의 모든 일들을 남김없이 알고 있다. 내가 더 알아야 할 것이 남아 있는가.
이제 바다, 바다로 가자.
그날 달빛을 받은 모든 바다 속 산호가, 산란을 시작했다.
당황한 사내의 기도에서도, 산호는 수정되었다.
그날 밤바다는 불어터진 사내의 몸을,
머언 바닷가로 밀어냈다.
들켜버린 목련
엄마, 밥할 때 쌀 씻고, 그 물 어따 버렸노.
저 꽃이 쌀뜨물 먹고 핀 거, 맞제이.
동네 사람들도 아나.
엄마가 부엌서 저 꽃 피울라고, 쌀 북북 씻은 거.
우리 집 쌀뜨물 먹고, 참 고웁게 폈다.
암만 고와도, 내 눈은 못 속인대이.
봐라, 꽃에서 쌀 냄새 나는 거.
엄마, 참 고생했대이.
매미의 진화
매미가 만 번을 허물 벗어야, 다음 여름에 개굴개굴 개구리가 될 수 있는 거여.
그 개구리가 만 번을 장맛비에 떠내려가야지, 짹짹거리는 참새라도 되는 거구.
또 그 참새가 아 천만 번은 짹짹거려야, 응애 하고 한번 울 수 있는 거란 말이여.
그래서 열심히 맴맴거린 놈들만, 사람으로 나서 노래할 수 있다는 말씀을,
알아 듣겄냐.
지금은 문 닫은 노래방 아저씨는, 공짜 시간을 넣어 주기 전에,
이상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때 친구들 중 아무도 가수가 되진 않았지만,
이 동네 유난히 시끄러운 매미 울음 소리를 들으면,
좀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건,
그때 그 녀석들도 일까.
그 단어의 뼛속
우린 그 단어의 뼛속을 질주했다.
세상 어떤 것도 우릴 쫓아올 순 없었고, 어떤 시인이 그 속도가 광속 B612라고 했지만,
뒤에서 ‘네가 봤어’ 하는 소리에 울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좋았다.
우린 맨발이었고 낄낄거렸다. 그러다가도 엉엉 울었다. 미친 것 같았다.
아니, 미쳐 있었다.
우린 그 단어의 뼛속을 달렸고, 그곳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걸릴 것이 없었단 말이다. 하지만 우린 너무도 빠르게 달려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이상한 줄도 몰랐다.
우린 뼛속을, 바로 죽을 것처럼 질주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속에선 간지러운 더운 피가 돌고 돌고, 이 별은 우리가 맨발로 뛰어 돌리지 않으면, 낮과 밤이 바뀌지 않았기에.
우린 엉엉 울다가도 갑자기 꽈리 꽃처럼, 웃음을 터뜨리며 질주했다.
사랑.
그 아무것 없던 말의 뼛속을.
― 『나를 두고 왔다』, 푸른사상, 2011.
첫댓글 프로필을 보니 학교가 저와 같군요. 과는 다르지만,
어리둥절 시집을 물색하고 있는데 영풍문고 시코너에 나타나신 박대환 시인님께서 추천한 시집입니다. 좋은 작품 소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