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바랜 사진에서 단박에 그를 찾았다. 사진 속 많은 사람 중에서도 바로 짚어 낼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모습은 도드라져 있다. 빛나는 모습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는 눈빛이 맑고 총기가 흘렀다. 바라보고 있으면 광채가 나서 절대로 정신이 흐릿해질 수가 없었다. 언젠가 TV에서 옛 기억의 사람을 찾아가는 방송을 보면서, 나도 제일 먼저 떠올랐던 사람이 그였다. 누군가 나더러 이상형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 나는 눈빛이 맑아야 한다며 은연중에 그를 떠올리며 말했다. 내가 지금 쓰는 이메일의 비밀번호를 잊었을 때 기억을 돕는 힌트도 그의 이름이다. 그러나 정작 그를 찾아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만 내 무의식 창고에 가두고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와의 인연은 4학년 때부터다. 나는 그가 교사로 임용되어 우리 학교로 와서 맡은 첫 학급의 학생이었다. 파릇파릇하고 열정이 가득한 선생님이었다. 우리 반은 6학년 때까지 반 편성도 하지 않고 그대로 함께 올라갔다. 그는 우리 반 아이들 속속들이 사정까지 훤했다. 그는 어린 내게 ‘빛’이었다.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따랐다. 매일 우리 반 아이들에게 수업을 마치고 나면 그는 한 시간씩 붓글씨를 가르쳐 주었다. 방과 후 특별한 취미활동이 없던 시절 우리 반 아이들이 먹물 냄새와 친하게 된 것도 그 덕분이다.
6학년 1학기를 마치고 전학을 하게 되었다. 그 무렵 내가 살던 동네에 새로 중학교가 세워졌다. 오래 전부터 있던 중학교는 그 해부터 남학생들만 받고 여학생은 신설 학교로 가야 했다. 엄마는 새로 생긴 학교는 전통이 없다며, 역사가 깊은 다른 중학교로 가길 원했다. 엄마가 원하는 중학교로 가려면 그 중학교 구역에 있는 국민학교를 다녀야 했다. 학교 근처 아는 사람 집 주소에 전입을 했다. 요새 말로 하면 ‘위장전입’이었다. 도대체 엄마가 말하는 ‘전통’이라는 것이 뭔지 한 학기만 더 다니면 졸업하는데 2학기에 전학을 가게 되어 속상했다. 정든 친구들은 물론이고 그와 작별은 내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 바람에 졸업앨범도 만들지 못해서 마지막으로 기억할 아무런 사진도 남아 있지 않다.
새로 옮겨간 학교는 한 학년에 두 반뿐인 시골의 작은 분교였다. 학급수도 많고 학교에 꽃과 나무가 많아 정원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예전 학교와 비교하면 너무 초라했다. 집에서 학교 종소리까지 들리던 코앞에 있는 학교를 두고 30분을 넘게 버스를 타고 다녔다. 지금은 사라진 작은 합승 버스였다. 매일 아침 버스를 타고 예전 학교 앞을 지나칠 때마다 혹시나 아는 얼굴이라도 보일까 하는 생각에 고개가 학교 쪽으로 저절로 돌아갔다. 콩나물시루처럼 꽉 찬 학생들 틈바구니에 숨도 못 쉬고 타고 가다 버스에서 내리면 옷은 온통 구겨지고 후줄근했다.
버스가 비탈진 산길을 돌아가는 길목에 서낭당이 있었다. 나무에는 울긋불긋한 헝겊들이 매달려 바람에 나부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마치 미친 여자의 산발한 머리채 같아 으스스했다. 나는 차창 밖을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우당퉁탕 비포장 시골길을 달리면 온몸이 흔들리고 버스의 진동에 따라 엉덩이도 함께 점프를 해서 까르르 웃었다. 버스가 산비탈을 돌면서 유난히 흙먼지를 일으키며 덜컹거리면, 사고가 날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주문처럼 기도를 하곤 했다.
전학한 학교로 걸어 들어갈 때 새 학교에서 기죽지 말고 당당해지라던 엄마의 말도 기억났다. 새 학교의 선생님은 내게 첫날 인사를 시키며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평소에 소극적이지만 두 손을 모으고 아이들 앞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는 건 내가 은근히 좋아했다. 사실 나는 그때 내가 정말 노래를 잘하는 줄 알았다.
어느 날, 학교 대표로 서예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 학교에서는 붓글씨를 제대로 쓰는 사람이 없다 보니 내가 눈에 띈 것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교감 선생님 앞에서 붓글씨 연습을 했다. 교감 선생님은 내게 필체가 참 좋다며 연신 칭찬했다. 나는 대회에 나갈 만큼의 실력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말했어야 했다. 선생님의 칭찬 세례에 나는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신문지나 갱지에 우리나라, 대한민국 등 기본적인 글자를 사나흘 연습한 후 대회에 나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대회 날이 되었다. 나는 달랑 교감 선생님과 함께 갔는데, 군 단위 각 학교에서 많은 학생이 와 있었다. 대회장에 들어서니 예전 다니던 학교의 우리 반 반장이던 남자아이를 인솔하고 온 그가 있어서 놀랐다. 무척 반가워하는 그에게 나는 쑥스러워 겨우 인사만 하고 대회에 참석을 했다. 대회의 시제는 너무 엄청났다. 겨우 넉 자나 여덟 자 정도의 글자 연습을 하고 나갔던 내게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로 시작되는 송강 정철의 시조를 쓰라고 했다. 화선지는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작은 글씨로 세로로 내려써야 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화선지 접는 일부터 난감해서 파랗게 질려 있는 내게 그가 다가왔다. 화선지를 글자 수에 맞춰 접어주고 먹물을 갈아주었다. 떨지 말고 잘하라고 다독이며 말했지만, 나는 바들바들 떨며 어떻게 썼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그를 다시 만난 기쁨은 속마음 저편으로 달아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창피하고 속상해서 눈물이 마구 흘렀다. 당연히 그날의 장원은 그가 데리고 온 남자아이 차지였다. 그의 옆에 서서 의기양양하고 거만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 아이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예전 학교의 졸업사진을 보냈다. 그때 시간에서 멈추어 뚝 떨어져 나간 기억들이 사진 속에서 그와 함께 걸어 나왔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어제 일처럼 선명하고 그립다.
김미경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수필집: 배틀한 맛을 위하여·수필U동인작품집: 바다 건너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