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19] 유광렬(柳光烈) - 임의 날에, 나의 날에 6. 입교, 한가지 잘못 안 것이 있었다 - 2
16 그냥 안 대줘도 그만인데 무엇때문에 내게 일일이 사정을 밝히시지 않으면 안되는가, 몹시 감격스러운 나머지 이런 선생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 속으로 울먹였다.
17 그해 여름 선생님께서는 교회에 들어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내 사정으로는 아직 학교도 못 마친 상태이고 오히려 교회에 폐가 될 것 같아 굳이 사양하였다. 그러다가 선생님과 간부들이 구속되시는 일이 벌어졌다.
18 첫날 나는 교회에 오지 못하였다. 이튿날 교회에 오니까, 청년 일곱 명이 어젯밤부터 합숙기도를 시작했는데 광렬 씨도 같이 하자고 권유하는 사람이 있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이제라도 한데 끼워넣어 주겠다는 제의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쾌락하였다. 나는 우선 다른 일론 못 도와도 기도는 빠지지 않고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19 어떤 때 집에서 조금 누워 쉬다 보면 눈이 스르르 감기는 때가 있다. 그러면 집안사람이 오늘 밤엔 그만 집에서 주무시지오 하는 것이다. 그러면 농담으로 내가 ‘사탄아’ 할라치면 그편에서 ‘물러가라’고 맞장구, 그래서 다시 밤늦게 교회를 찾아가면 어느새 12시 가까워 문을 채웠으면 도둑놈같이 울장을 타넘어 들어가 합세해가지고 세 시간 만큼씩의 참기도에 참여하곤 하였다.
20 그때 다른 동료들은 다 여러 가지 공무로 식구네 집 등 나가 자기도 하곤 했는데 석 달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교회에 와서 꼭 자면서 기도한 것은 나 혼자뿐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렇게 고지식한 사람이 나다.
21 10월 4일 드디어 운명의 날이 왔다. 이날 재판에서 선생님께서 과연 무죄언도를 받고 백일하에 풀려나느냐 하는 것은 대단한 믿음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날 아침 나는 결정적인 무죄 석방을 전제로 한 장장 120행의 시 ‘광명의 아침’을 지었다가
22 그날 10월 4일 밤 감옥에서 풀려 장충동 교회로 돌아오시어 함께 기쁨을 나누는 자리에서 읽어 올리고, 10월 7일 청파동 전 본부교회로 이사한 수일 후 가진 선생님 출감 환영회 때에 또 읽었고, 그 후 이 시는 해마다 10월 4일 출감 기념일때면 유효원생의 옥중작인 성가 ‘고난과 새생명’ 과 함께 정규 프로화하여 봉독하곤 하였다.
23 1955년 말경 또 교회에 들어와서 일하라고 말씀이 계셨으나 개인의 빚도 있고 해서 오히려 폐를 끼치게 된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1956년 봄 세 번째로 똑같은 권유가 계셨다. 나는 세 번째라 더 이상 사양 않고 말씀에 순종, 실행에 옮겼다.
24 1957년 4월, 입교하고 바로 그 감격적인 장면들을 묘사해서 만든, 보기에 따라서는 통일 교회 관계 최초의 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장영창 작 ‘통일교회의 정체’가 발행되어, 나는 이를 진지하게 수정, 감수하였다. 교회에 기숙하고서 얼마 안 되어, 나는 취직해가지고 ‘성화’ 편집을 할 셈으로 취직을 하려 하였다.
25 모 잡지사 편집 책임자로 얘기돼 치안국에 근무하는 중학교 선배에게 약 3개월간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그러다가 무산되고 말았다. 나는 배신당한 데 대해 참을 수 없었다. 좁은 소견에 자살하기로 결심하였다.
26 전차를 타고 청파동으로 돌아가면서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죽을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교회에 당도해서야 이왕 죽을 바엔 두었다가 뜻 위해 죽자, 뜻이 요구할 때는 앞뒤 가리지 않고 목숨을 바치자, 이렇게 결심을 고쳤다. 한번 죽기로 했던 목숨이니까.
27 나는 1958년 12월 16일부터 5일간 서울 시천 교당(侍天敎堂)에서 개최된 통일교회 최초의 대부흥회 개최를 실질적으로 총지휘하였다(강사 유효원 최용석).
28 그리고 1959년은 선생님이 당신의 40세 기념으로 양복 한 벌과 구두 한 켤례를 새로 맞춰 주심으로써 14년간에 걸친 내 헌 옷 입기 습관을 정지시킨, 실로 내 몸에 해묵은 땀내와 맑은 새 기운이 갈아든 역사적인 해이다.
29 1960년이 밝았다. 우리 교회에서 1960년은 새 출발의 기념비적인 해이다. 이 해에 부모의 날과 자녀의 날이 선포되었고 문선명 선생이 만 40세가 되신 해로서 양위분의 성혼식을 거행하였고, 김원필 유효원 김영휘 세 분의 성혼식이 거행된 해이다. 이 모든 행사는 문선명 선생님이 주재하시고 내가 그 진행을 사회하였다. 그래서 나로서는 특히 잊을 수 없는 행사요, 해이다.
30 물론 1961년의 33가정의 성혼식도, 1962년의 72가정 성혼식도 모두 내가 사회를 맡아 진행하였다. 그리고 27년 동안 성화청년회(협회사무 대행)와 협회의 문화부장을 맡아 일하는 동안 음력 1월 6일의 문선명 선생님 탄신일만 오면 기념식을 진행시키랴 축탄시를 써서 읽으랴 교구 대항 웅변대회와 음악콩쿠르대회를 주재하랴 문화의 밤 프로를 짜고 또 사회하랴 이틀쯤은 정신없이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