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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에 닿으면 마음이 밝아진다>의 줄거리:
내 인생의 흑암은 언제였나요? 소위 삶의 상황이 나락으로 떨어졌던 때가 흑암의 시기였습니까? 모든 것이 순조롭던 때가 광명한 시기였나요? 그런 때가 있기는 했던가요? 아닙니다. 아무리 형통하고 순조로웠어도 우리는 아마 흑암을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흑암과 광명을 구분할 수 있어야 흑암 탈출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십자가에 닿으면 마음이 밝아진다
(누가복음 23장 44절~49절)
44.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48.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49.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에 닿으면 마음이 밝아진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에 닿으면 마음이 밝아진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제육시부터 제구시까지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간으로는 정오 12시에서 오후 3시까지에 해당되는 시간입니다. 44절을 보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온 땅이 어디까지를 의미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십자가 사건을 지켜본 사람들에게 완전한 어둠이 임하였던 것입니다. 시선이 닿는 한도 내에서 어둠이 그치고 빛이 보였다면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다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의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어둠이 임하여 빛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적도에 가까운 중동 땅에서 정오로부터 오후 3시는 하루 중에 햇빛이 가장 강하게 내려쬐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세 시간 동안 어둠이 임하게 됩니다. 이 사건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앞의 맥락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한 행악자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는 바로 이 말씀 뒤에 본문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낙원을 선언하신 뒤에 온 땅에 어둠이 임하게 된 것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낙원과 이 세상의 비교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죽으심으로 세상을 탈출하십니다. 이때에 좌우편 십자가에 매달렸던 행악자 중에 한 사람의 마음을 받으시고 그 마음을 가지고 낙원으로 진입해 들어가십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이 곧 믿음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아직 십자가에 달려있었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행악자의 마음을 데리고 낙원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들어가신 낙원과 예수님이 등지신 인간 세상의 차이점은 바로 빛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특이한 현상을 통하여 낙원이 빛의 나라라면 이 세상은 흑암의 나라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낙원에 들어가시는 상황에서 예수님과 함께한 첫 번째 사람은 행악자였습니다. 행악자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이유가 없고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마땅하게 여긴 첫 번째 사람이었습니다. 이 고백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은 요구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가 없으나 나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될 마땅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만드는 것이며 동시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행악자는 예수님께 마음을 드린 첫 번째 사람이 되었습니다. 정확하게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보였던 것입니다. 다른 이유에서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고자 했던 사람은 많았지만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 마음을 드린 첫 번째 사람은 바로 이 행악자였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는 행악자의 마음을 데리고 낙원으로 들어가시게 됩니다.
그리고 이 낙원의 특징은 바로 빛의 세계입니다. 중동 땅 정오부터 3시까지 임한 어둠의 의미는 햇빛 찬란한 가운데 눈에 보이는 온 세상이 아무리 밝게 보여도 속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흑암은 눈에 어둠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어둠이 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할 수 없다면 모든 사람의 마음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흑암의 세상을 산다는 성경의 말씀이 실제 우리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요? 마음이 흑암에서 산다고 말할 수 있는 증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마음이 흑암에 처할 때 나타나는 특징은 혼돈과 공허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하였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동시에 언급되고 있지만 면밀하게 말하자면 혼돈과 공허의 근본적인 이유는 흑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혼돈은 마음의 평강이 깨어진 상태입니다. 혼돈과 대비되는 평강이란 동서남북 어디를 바라보아도 세상에서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평강의 모습은 믿음의 선진들에게서 발견됩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세상에 대해 바랄 것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세상의 상황과 상관없이 깨어지지 않는 것이 줄곧 말씀드렸던 절대 평강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흑암이 처해 있을 때 평강은 깨어지게 되고 평강이 깨어진 증거는 지금과는 다른 상태가 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흑암의 또 다른 특징은 공허입니다. 공허는 무슨 일을 해도 결실이 없어 채움이 느껴지지 않고 불만과 결핍을 느끼는 상태입니다. 마음의 채움이 생겨나지 않기에 불만이 생기고 노력에 대한 실망감만이 존재하는 것이 공허의 상태입니다. 이처럼 평강이 깨어져 혼돈을 느끼고 채움이 없는 공허함이 흑암에 살고 있는 특징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에 흑암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동안 가장 밝아야 될 정오로부터 오후 3시에 어둠에 덮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특별한 현상을 통해 사람들의 눈에 어둠이 임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어둠이 임하였음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흑암은 마음의 상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본래 사람은 마음을 통해 하나님과 접촉이 가능하도록 하나님 크기의 접촉면이 있고 하나님을 접촉하여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면서 안으로 받아들여 하나가 될 수 있기 위한 공백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크기의 접촉면과 하나님 크기의 공백을 가진 영이 마음입니다.
이러한 구조를 가진 마음에서는 접촉을 통해 있음의 느낌을 받아들이고 안으로 받아들여 하나 됨으로 채워짐의 좋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에 어둠이 임했다는 것은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을 다루며 계속해서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에 마음에 어둠이 존재한다는 것은 있음의 느낌이 하나님께 적용되지 못하는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마음을 채우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에 좋음의 느낌이 하나님께 적용되지 못한 상태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가족들을 대면합니다. 부모님과 배우자와 자녀가 있음을 느끼면서 그 존재감에 의해서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상태가 되면 이 사람은 어둠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한편 눈을 뜨자마자 하나님 있음의 느낌을 가지고 그 느낌으로부터 가족들에게 말하고 행동을 하게 될 때 밝음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느낄 때 마음에는 평강과 채움이 임합니다. 이러한 상태가 유지되는 가운데 비로소 가족들과도 온전한 관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배우자의 있음의 느낌을 먼저 받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배우자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느끼고자 한다면 마음에는 어둠이 임하게 됩니다. 배우자가 하는 일을 눈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마음에 어둠이 임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한 채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밝은 대낮에 얼마든지 눈으로 온 천지사방에 있는 삼라만상을 다 보고 있는데 왜 흑암의 세상에 살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만 흑암의 세상을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행악자의 마음을 데리고 낙원으로 가십니다. 예수님이 낙원에 들어가신 것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가 아니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순간이었습니다. 이는 곧 어둠을 빠져나가는 일이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에 어둠이 임했다고 하는 이 흑암이라는 단어가 있음과 좋음의 느낌과 어떻게 연결이 될 수 있는지에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을 이해함으로써 마음이 십자가를 통해 흑암을 탈출하여 밝아지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좋은 인상을 갖고자 성형을 하지만 정말로 인상이 밝아지고 싶다면 마음부터 밝아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의 밝은 빛이 얼굴로 발산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에 왜 어둠이 임했는가를 알면 십자가에 닿음으로써 밝아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마음이 밝아지는 광명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 뜨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본문이 어둠과 빛에 관계된 내용이기에 이 표현을 영적인 관점에서도 응용하여 사용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권력에 눈을 떴다면 권력의 존재감을 느끼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권력에 눈을 뜨지 못한 상태도 있습니다. 세상에 권력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적어도 내 마음에서는 권력의 존재감이나 좋음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돈에 눈을 떴다는 것은 마음에서 돈의 존재감을 무겁게 느끼고 돈의 좋음을 강렬하게 느끼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돈의 존재감을 잘 모릅니다. 세뱃돈으로 십만 원짜리 자기앞수표를 받았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자기앞수표가 뭔지를 모르기에 어리둥절해합니다. 수표에 십만 원이라는 돈의 가치가 담겨 있음도 모르고, 십만 원을 쓸 때 얼마나 기분 좋음을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어린아이는 돈에 대해서 장님인 상태이고 돈에 대해서 어둠이 임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성에 눈을 떴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이성에 관심을 느끼기 시작하면 이성에 눈을 떴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이성에게 큰 존재감을 느끼기 시작하게 되면 가까워지게 되고 서로 좋음의 느낌이 더 강렬해지면 연인이 됩니다.
눈을 뜬다는 것이 빛과 연관된 표현이기에 조명으로도 비유할 수 있습니다. 권력에 눈을 떴다는 것은 마음에서 권력이 조명을 받게 된 상태와도 같습니다. 이성에 눈을 떴다는 것은 마음에서 특별하게 여겨지는 사람이 이성으로 부각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조명이 비치면서 다른 이성들은 더는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염두에 두고 이 세상에 임한 어둠과 십자가 사건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어둠 즉 흑암은 내 마음에서 하나님께 빛이 비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가정에서는 마음으로 가족의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마음으로 직장 동료들과 상사와 해야 될 일들의 있음을 느낍니다. 마음에서 그 대상들에게 빛이 임하게 된 상태입니다. 세상이 빛을 받는 상태란 하나님이 빛을 받지 못하시는 상태입니다.
회사에서 사장님의 존재감을 느끼는 동안에는 사장님에게 빛이 비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는 내 마음에서 하나님께는 빛이 비춰지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된 상태입니다. 있음의 느낌은 마음에서 보이는 대상에게서 갖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흑암의 상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흑암이 임했다는 것은 세상일들의 있음을 느끼느라 도무지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서 배우자의 있음을 느끼는 동안에는 하나님께 눈 뜨지 못하고 하나님이 안 보이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바로 흑암이고 어둠의 상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동안 하나님께서 어둠을 내리심으로써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이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모든 것들이 있게 된 것들입니다. 우리도 있게 된 것이고 우리가 대하는 사람이나 사물이나 사건들도 모두 있게 된 것들입니다. 우리는 있게 된 모든 것들에 앞서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 주권자로 존재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향해 먼저 마음의 눈을 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제일 먼저 볼 때 하나님의 빛 아래에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배우자는 창조주에 의해 있게 된 존재입니다. 따라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빛 아래에 있을 때만 비로소 배우자와 정확히 대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보다 배우자를 먼저 보고자 한다면 마음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상태에 갇히게 됩니다. 창조주의 빛이 내 마음에 임하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에 배우자를 대면하면서도 창조주가 만드신 본래의 모습대로는 대면할 수가 없습니다. 평생을 부부로 살면서도 아내와 남편이 서로의 진면목을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보는 상태에서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창조주의 빛 아래에서만 창조된 대상들의 진면목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배우자의 상태가 나쁘면 나쁜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그에 합당한 말과 행동을 하면서 평강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반대로 마음에서 창조주의 빛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평강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배우자를 우선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면 창조주의 빛은 가려지게 됩니다. 배우자의 진면목을 볼 수 없고 불완전한 만남만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으니 평강이 있을 수 없고 관계에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빛을 느낄 수 없는 상태에서 세상을 마주하는 것은 마치 외과의사가 전기가 끊긴 환경에서 수술을 집도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의사는 내시경이나 확대경을 통하여 환부를 밝히 보면서 수술을 해야 합니다. 어둠 속에서 손으로 더듬거리며 수술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흑암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창조주의 빛이 없는 상태에서 더듬거리며 상대를 판단하고 관계를 만들어 나가고자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배우자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하면서도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전기가 끊긴 상태에서 수술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며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창조주의 빛 아래에서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사람과 일과 사물들의 진면목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상황이 바뀔 때마다 어둠의 세계에서 살 것인가, 빛의 세계에서 살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잠을 자다가 무슨 소리가 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전등부터 켜게 됩니다. 상황이 바뀌면 내 마음에서도 불이 켜져야만 합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주권자이심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눈을 뜰 수 없다면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는 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외과의사가 전기가 끊긴 방에서 수술하는 것처럼 끔찍하고 위험한 일이 우리의 삶에서 일어납니다. 마음이 흑암의 상태에 있기에 혼돈으로 평강이 깨어지고 결실 없는 공허가 가득한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이 바뀔 때마다 주권자로 계신 하나님의 있음에 대해 눈을 뜰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모든 일은 오류 속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어둠이 내린 이유입니다. 세상이 가장 밝게 보일 시간에 칠흑 같은 어둠에 덮이게 되었습니다.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을 밝음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어둠에 임했음을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낙원을 언급하시면서 땅에는 어둠이 임했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 안에 들어갈 때만 하나님의 빛이 가득한 낙원이자 천국으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낙원과 천국을 환경적 측면이 아닌 관계의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본문 46절을 보면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셨다는 말씀의 의미는 천국에 들어가셨음을 뜻합니다. 그렇게 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도 오늘 낙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만드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이 천국으로 가신 것입니다. 천국으로 가셨으므로 예수님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는 상태가 바로 낙원입니다. 죽어서만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살아서 천국을 가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인지 지옥에 갈 것인지는 지금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를 통해 결정될 것입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어서 천국 보좌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면 낙원에 갈 것이고,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음부로 가는 것입니다. 음부에서는 있음과 좋음의 느낄 대상이 아예 없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낙원과 음부의 상태를 잘 보여줍니다. 비유라고는 하지만 이것은 영적인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는 예수님이 비유로 삼기 위해 만드신 가상의 인물들이지만 그 비유 속에 존재하는 낙원과 음부의 구조는 사실입니다. 부자는 음부에 들어가서 낙원을 봅니다. 그러나 마음에서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외의 다른 어떤 있음과 좋음의 거짓 희망조차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으면서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있음과 좋음을 느낀다는 것은 일종의 섬망(譫妄)현상입니다. 섬망현상이란 약물중독 등으로 환각을 경험하는 상태입니다. 환자들은 불안정한 의식 속에서 환각을 현실로 착각합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마음에서 창조주의 빛을 느끼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섬망현상과도 같은 상태에 빠져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창조주의 빛 아래에서만 본래의 모습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에게 눈 뜨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을 보면 환각상태입니다. 아내가 이렇다, 남편이 이렇다, 자녀들은 이렇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어둠 속에서 느끼는 환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환각이기에 진리도 없고 합당함과 타당함도 없습니다. 잘못된 있음과 좋음을 느끼고 있기에 그로부터 생겨난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발현조차도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 처해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나를 인격적으로 동일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그저 기계적으로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 동일시란 저주 속에 떨어진 이후에 예수님이 보이신 태도를 통해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에 대한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있음의 느낌이 어떤 것이며, 하나님의 좋음의 느낌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나에게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며 지정의와 언행이 움직일 수 없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손발이 묶여 체포되시는 것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광풍노도 속에서도 잠을 주무셨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의 느낌을 광풍노도보다 더 강렬하게 느끼고 계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광풍노도 속에서 하나님의 있음의 느낌이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광풍노도에 시선을 향하는 동안 하나님에 대해서는 눈뜰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나를 동일시함을 통해 예수님께서 느끼시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의 강도와 크기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교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 없다면 생각조차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갖는 있음의 느낌을 그대로 갖고자 하는 것이 바로 동일시입니다. 예수님은 고작 15시간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도 견딜 수 없어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생을 하나님과 단절되어 살면서도 편하게 살아왔습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좋음의 느낌을 나의 느낌으로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격적 동일시입니다.
이 인격적 동일시에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잊지 않으면 됩니다. 항상 깨어있으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십자가를 기억할 때에 우리의 마음은 광명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마음에는 당장 밝음이 생겨납니다.
우리의 저주받은 체질은 자꾸만 하나님이 아닌 세상 것들을 느끼고자 합니다. 하나님께 눈 뜨지 못하는 마음을 느꼈다면 이러한 마음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동일시하여 죽은 자로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이 밝아지는 경험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어둡고 무겁고 근심이 가득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밝고 가볍고 평강이 찾아옴을 경험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닿게 하는 것입니다. 의식으로 붙잡을 수 있으면 됩니다. 의식으로 예수님 십자가를 붙잡으면 내 마음이 예수님과 하나 되고 내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낙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죽으실 이유가 없고 나에게 있다고 보고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과 동일시하면 마음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갑니다. 오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음은 빛의 나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마음이 밝아집니다. 가벼워집니다. 어둠이 사라집니다. 어둠은 염려 근심 걱정으로 평강이 깨어진 상태입니다.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이를 수 없다면 어둠의 자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둠 즉 흑암의 상태에서는 혼돈과 공허와 불평과 불만과 원망과 짜증과 염려가 증거로 나타납니다.
의식으로 십자가를 붙들면 마음이 십자가에 닿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갑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마음이 낙원에 이르러 밝은 빛 아래에 오늘도 거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인생의 시간이 얼마나 오랫동안 어둠 속에 있었는지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생활화를 좀 더 인격적으로 본격화함으로써 예수님과의 동일시가 철저히 이루어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어둠에서 벗어나 기적같이 밝아지는 놀라운 은총을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