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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할 때에는 품위 있게 질서 있게(고전14장26-40)
성경본문:고린도전서14:26-40
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33.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고 같이
34.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36.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38.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40.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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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예배하십시오!
지난주 페이스북에 어떤 분이 낡은 사진 한 장을 올렸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추운 겨울 야외에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입니다.
어떻게 오르간을 가지고 다녔는지, 기름통에 앉아 오르간을 치는 병사와 작은 제단을 만들어 놓고 예배를 인도하는 군목의 모습, 그리고 추운 날 모여 있는 병사들의 모습.
그냥 보는 것만으로 간절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저 그 낡은 사진을 보면서 “예배는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지난주의 방언과 예언의 은사에 대한 설명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예배와 연관되어 방언과 예언이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은사가 당시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26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역시 ‘덕’을 세우기 위해 예배 가운데서 이 두 가지 은사가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현재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아주 잘 다듬어진 순서에 따라 합니다.
물론 성경에 나타난 순서가 아니라, 교회의 전통에 따라 익숙해진 예배 형식입니다.
예배에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을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이 당신께 집중될 때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죠.
그러므로 예배시간에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활용한다면 당연히 하나님께 집중하는 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6절에 보니까, 당시 예배에는 ‘찬송시’가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구약시대와 마찬가지로 시편을 낭독하고 함께 외웠을 것입니다.
또한, ‘말씀과 계시’가 있었다고 하는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나 사도들이 주님께 받았던 말씀을 전했거나 사도 바울이 교인들에게 했던 말씀을 나누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오늘날처럼 ‘성경’이 없던 시대이기에, 말씀의 기준도 모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이런 계시를 잘 활용하지 않는다면 혼란에 빠질 우려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방언과 예언도 자신에게 임한 은사대로 활용한다면 분별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든 예배의 형식과 은사들이 공동체 예배의 ‘덕’을 세우는 데 적절하게 사용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6~33절에서 사도 바울은 아주 구체적으로 방법을 제시하는데,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으로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배하러 모일 때는 각자가 전체를 유익하게 할 만한 것을 준비하십시오.
방언으로 기도할 때는 두세 사람까지만 하되, 그것도 여러분의 말을 통역할 사람이 있을 때에만 하십시오.
모임에서는 두세 사람 정도만 말하고, 나머지는 귀 기울여 듣고 마음에 새기십시오.
한 사람이 독차지하지 말고 차례로 지켜 말하십시오.
그리고 말하는 사람은 각자 기회를 얻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것을 말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모두가 서로에게 배우게 될 것입니다.
말하기로 한 사람은 말하는 방식과 시간까지 책임지십시오.
우리가 바르게 예배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무질서에 빠뜨리지 않으십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고린도 교회의 예배를 가장 혼란스럽게 한 것은 은사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은사들을 서로 과시하고 싶어 했기에 생긴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남의 은사를 존중하거나, 배우려는 것보다 자신에게 임한 것을 나타내고 싶어 하는 것, 결국 예배가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은사로 인해 자신에게 집중하게 되었던 것이죠.
오늘날도 이런 오류가 참 많이 발견되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신학생들을 위한 집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입니다.
물론 수련회에서 시간을 잘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설교를 하기 전에 기다리는데, 정말 지나치게 찬양인도를 오래 하는 인도자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배는 자기가 준비한 것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가 예배 되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이죠.
설교자로서 가장 힘든 것은 자신이 준비한 것을 다 할 수 없을 때입니다.
그런데 용기 있게 끊을 수 있는 것은, 내가 하는 순서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부흥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죠.
대표기도를 하는 분이 얼마나 길게 하는지. 참다못한 목사님이 중간에 나와서 종을 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분은 계속 기도하고 우리는 말씀을 듣죠.”라고 멘트를 했다고 하죠.
그런 생각을 해보셨나요?
자신에게 충실하고 너무도 성실한 것이 예배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예배는 공동체 의식이기에 서로에게 덕을 세우지 않으면 질서를 깨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이 그런 글을 썼더군요.
여기에서 어느 교회 어느 목사라고 밝힐 수는 없지만, 출판 기념예배를 드리며, 순서에 도지사와 국회의원 전직 대통령과 이름을 대면 알만한 목사님들을 초청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1부 축하 예배를 드리는 중간에 전직 대통령이 들어오자 온 성도들이 일어나 박수를 치고 사진을 찍으면 환호를 질렀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떻게 예배를 드리며 중간에 들어오는 사람을 위해 박수를 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잘 짜인 것으로 준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실 수 있을까요?
예배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일입니다.
아주 구체적이죠?
방언할 때는 통역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회중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두세 사람만 하라는 것입니다.
예언 역시 두세 사람만 하고 다른 사람들은 분별해야 합니다.
또한, 예언이 나에게 임했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임할 수 있기에, 다른 사람에게 강하게 성령이 역사하면 자신이 잠잠하게 기다려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예언이 참된 것인지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럼 예언을 분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첫째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
☞둘째 그 예언이 성경과 조화를 이루는가?
☞셋째 그 예언이 교회에 덕을 세우는가? 그리고 사랑으로 말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예언은 잘못된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31절을 보면 예언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게 됩니다.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배움’과 ‘권면’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우리가 생각했던 예언과는 조금 다른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것은 누군가의 앞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 가운데서 진리의 말씀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통해 실제 삶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배우게 되는 것이며, 그 공동체에 임한 말씀으로 인해 서로를 권면하게 됩니다.
이러한 배움과 권면은 늘 깨어서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건전하게 임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여자들에 대하여
요즘 같은 세상에 여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참 조심스럽기는 한데, 당시 교회에서는 여자들로 인하여 혼란이 야기되었던 것 같습니다.
34.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이 부분은 지금 교회에서도 아주 논란의 여지가 많은 부분입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여자들에게 안수를 주지 않거나 여자들은 강단에 설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구약시대에서부터 예수님께서 여자 사사를 쓰신 것으로 본다면 여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공적으로 쓰실 수 없다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을 듯합니다.
제가 생각하기는 당시 고린도 교회가 여자들로 인해 혼란스러운 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여자 성도 중에 자신이 받은 은사로 인해 교회에서 교만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질서를 파괴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사회가 가부장적 제도 아래에서 여자들은 인격적으로 존중받지 못했던 때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달랐습니다.
어쩌면 사회와 가정에서 억압받았던 여인들이 교회에서는 자유롭게 활동을 했던 것 같고 오히려 그로 인해 혼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들이 더 기도도 많이 하고 은사적인 체험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 교만으로 인해 남편들이 교회에서 세워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어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군목시절 노는 것을 참 좋아하셨답니다. 낚시, 바둑.
그런데 그 당시 저희 어머니는 삼각산과 한얼산으로 기도하며 많은 은사를 체험하게 되었고, 신유의 은사로 인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낫기도 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그런 기도를 했답니다.
남편을 목회자로 세워주시고 본인의 은사를 거두어 달라고 말입니다.
그 이후에 저희 아버님은 군목시절부터 유명한 부흥사로 활동을 하시게 되었고, 오늘날 만나 교회를 개척하고 세우게 되었죠.
여자들에 대한 부분은 문화적인 차원에서 조금 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초창기 교회가 ‘ㄱ’자로 지어졌던 것처럼 당시 근동지방의 예배 역시 남녀가 함께 섞여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을지 모릅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교육 수준이 낮은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설교할 때, 따분해진 여성들이 중간에 잡담을 나눴을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아주 예의에 벗어나는 일이지만, 예배 중간에 자신이 모르는 것을 남편에게 설명해 달라고 큰 소리로 물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로 예배의 질서가 깨어질 수 있는 상황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여인들은 누군가 예언할 때, 아무 생각 없이 비판적인 말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남편이 하는 예언을 너무 주관적으로 평가하고 비판하는 일로 인해 가정불화로까지 번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의문이 있다면 집으로 가서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질서가 깨어진 예배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사도 바울의 의지가 엿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무질서의 원인이 또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개척은 사도행전 18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방 전도가 시작된 이후에 할례 문제로 논쟁이 있었고, 사도행전 15장에 있었던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할례에 대한 논쟁이 있었죠. 이방인이 예수를 믿고 난 후에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의 문제로 말입니다.
그 공의회의 결과는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멍에도 지우지 않겠다고 결정합니다.
그러한 이유로 고린도 교회는 율법에서부터 아주 자유로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고, 이방인 크리스천보다는 유대인 크리스천이 훨씬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에서 율법에 구애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하는 여자들을 향해 율법을 가지고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여자 성도들의 열심은 분명히 칭찬받을 만한 것이지만, 지나친 열심으로 인해 질서를 깨드리는 일이 일어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아니라는 말이죠.
절제하지 못하는 은사는 혼란입니다.
은사는 귀한 것이지만 성령의 통제를 받지 못하면 정욕에 쓰일 수 있습니다.
절제하라는 사도 바울의 명령은, 은사는 능히 절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자와 악한 영에 사로잡힌 사람의 가장 명확한 구별점이 무엇일까요?
‘절제’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이성적입니다.
하지만 잘못된 영에 지배를 받는 사람은 감정적입니다.
이성은 자신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정은 자신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소위 무당들에게 신 내림이 있다고 합니다.
신이 내리면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그 신의 포로가 되어 삽니다.
굿을 하지 않으면 몸이 아프거나 힘들어합니다.
그 말은 그 사람이 영에 사로잡혀 자유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면, 성령님은 우리의 의지로 일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의 마음대로 성령님을 부리거나 사용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한 의지와 자유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주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진정으로 신령한 사람은 자신이 황홀경에 빠지거나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능력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무질서한 교회에 편지하며 무어라 말하고 있습니까?
본문 37~38절 말씀입니다.
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38.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사도 바울이 지금 성령의 감동 되어 이 편지를 쓰고 있어서 정상적인 성령의 역사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을 알 것이라는 말입니다.
안다면 순종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신앙적 의지로 결론을 이야기한다면 39절과 40절의 말씀을 들 수 있겠지요.
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40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품위 있게” “질서 있게”라는 말을 <Living Bible>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everything is done properly in a good and orderly way”
모든 일을 적절하게 그리고 질서 있게 순서대로 하기 위해서는 제재가 필요합니다.
품위와 질서가 파괴되는 원인은, 우리가 너무 감정적인데 있습니다.
흔히 다혈질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너무 쉽게 이것은 내 성격이라고 변명합니다.
분명한 것은 이성의 제재를 받지 못하는 감정. 이것을 우리는 ‘야만인’이라고 부릅니다.
수준 이하의 사람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하고 박사학위를 받고, 교회에서 목사, 장로, 권사라 불린다 할지라도 감정적인 사람에게서는 어떤 품위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감정은 절제하지만 ‘지성주도적인 사람’을 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너무 차갑고 비판적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가면서 서로 돈을 내겠다고 싸우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혼자 돈을 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에 이런 사람은 후회합니다.
괜히 기분을 냈다가 손해를 본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너무나 계산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은 자기가 먹은 것은 자기가 냅니다.
물론 후회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너무 차갑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주변에는 ‘의지주의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아주 깊이 생각하고 결정합니다. 쉽게 감정에 휩쓸리지도 않고, 때로는 배려할 줄 아는 덕스러운 사람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의지가 위험한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판단과 기준에 근거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품위와 질서는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의 가장 강력한 신앙의 고백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리스도인은 내 감정, 내 지성, 내 의지도 다 십자가에 묻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뜻과 주님의 말씀 앞에서 서게 될 때, 신앙이 내 의지의 주체가 됩니다.
우리의 모든 판단이 지금까지는 내가 좋으냐 싫으냐의 기준이었다면, 이제는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 앞에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신앙적 의지”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품위 있고 질서 있는 사람은 이 신앙적 의지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결국, 나의 감정과 내 의지가 나 중심적이고 나를 드러내는 것이었다면 신앙적 의지는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모든 은사는 바로 이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덕’이란 개인보다 전체를 생각하는 것이고 나보다 남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은사들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본 것이 아니라 예배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사용되느냐를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중에 기도의 은사, 찬양의 은사, 방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바로 오늘 예배의 공동체 안에서 그 은사들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예배자 가운데 자리에 앉으면서 꼭 바깥쪽을 차지하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끝에 앉아야 편안하니까요.
한쪽 어깨가 상대방에게 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늦게 들어오는 사람이 자리에 앉으려고 하면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억지로 길을 터줍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당신이 이 예배의 자리에서 은혜롭게 예배드릴 권리가 있습니다.
찬양의 은사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당신에게 품위는 없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장로님이 꼭 예배시간마다 소위 ‘사각지대’에 앉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장로님은 왜 그렇게 불편한 자리에 매번 앉습니까?”
그러자 장로님이 대답합니다.
“네, 목사님 이 자리는 아무도 앉기 싫어하기 때문에 제가 않습니다.”
그 말 한마디로 이분이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나지 않습니까?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서 여러분은 얼마다 다른 회중을 배려하고 있습니까?
또한, 덕을 세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특히 사도 바울이 관심이 있었던 것은 교회를 잘 이해하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예배를 드릴 때, 예배드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예배를 처음 드리는 초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을지 말지를 결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덕이 있다는 것이 바로 한 영혼을 구원하는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주위를 보세요.
성경을 잘 찾지 못하는 사람도, 성경을 가지고 오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의 예배에만 집중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그래요. 여러분의 신앙이 자신만을 돌아보기에도 벅차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여러분의 신앙 연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결코 품위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덕이 가진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미래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숙하고 품위 있는 신앙인은 멀리 내다봅니다.
바로 당신의 은사와 신앙을 통해 어떤 영향을 줄지를 생각합니다.
이것도 우리 교회의 이야기는 아닌데요,
어떤 교회에서 장로를 뽑는 선거를 하는 날, 기업을 운영하는 사장이 직원들을 다 데리고 와서 투표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지금 당장은 자신이 장로의 직책을 얻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직원이 그분을 장로님으로 인정할까요?
아니 그 장로님이 그 직원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가장 큰 덕은 나의 삶과 행동으로 인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담임목사로서 늘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의 이런 행동으로 인해 어떤 영향이 있을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품위가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내 맘에 든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내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감정이 표시되는 것은 어린아이의 영역입니다.
링컨 대통령이 존경을 받는 것은 자신의 정적들을 포용했기 때문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기대를 가지는 것도, 그가 다음 내각에서 자신의 적들도 포용하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품위와 질서는 내 생각이 아니라, 성령의 질서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심령에 말씀하시는 것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질서가 깨어지는 것이 무분별한 은사와 자기중심적 생각이라면, 교회의 품위와 질서는 성령님을 따라 순종하는 것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들어 부쩍 그런 생각이 듭니다.
믿음과 예배란, 그 행위를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 나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는 것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배할 때에는’이라는 말은 사실 예배하는 인격에 대한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면 할 수밖에 없는 그런 행동과 언어들이 예배입니다.
지난 월요일 CTS ‘고민있수다’ 방송 촬영을 하면서 ‘혼전 순결, 낙태, 동거’와 같은 주제들을 다뤘습니다.
크리스천들의 고민이 무엇이냐면,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이 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서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 예배는 품위 있고, 질서가 있을 수밖에 없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