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어제 복음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성전은 딱딱한 돌과 제도의 공간이지만, 아울러 군중의 숨결이, 그들의 희망과 믿음이 출렁이는 광장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신학적 질문을 던지십니다. ‘율법 학자들이 말하는 메시아, 곧 다윗의 자손’이라는 통념을 출발점으로 삼으시면서도, 그것을 해체하시고자 물으십니다. ‘메시아’는 단순히 ‘기름부음받은 이’라는 종교적 표지가 아니라, 다윗의 약속에(2사무 7장 참조) 뿌리를 둔 정치적 종말론적 희망이 응축된 이름이었습니다. 유다 전통은 그가 왕조를 회복할 것이라고 기대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이 전통을 부정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시편 110(109)편 1절을 인용하시며 물으십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다윗이 메시아를 “내 주님”(마르 12,36)이라 부른다면, 어떻게 메시아가 단순히 다윗의 자손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주님이라 부르지 않는다는 상식을 바탕으로 다시 묻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을 넘어, 다윗보다 위에 놓여야 합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의 이 물음으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새로이 보게 하며, 유다 전통에만 머물러 메시아를 기다리고 희망하는 무뎌진 믿음에 경종을 울립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우리에게도 물음을 남깁니다. 우리에게 익숙해진 예수님의 이미지 또한 너무 작지는 않은지요. 인간의 생각과 습관과 상식 안에서 그저 우리의 기대와 욕구를 채워 주시는 존재로만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넘어 ‘주님’으로 다가오십니다. 오늘 복음의 군중은 성전의 돌기둥 사이에서, 한 칭호가 무너지고 더 큰 이름이 열리고 있음에 기뻐합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우리 또한 날마다 낡고 굳어진 것을 비워 내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더 깊고 넓은 신앙의 고백은 우리의 좁고 편협한 언어를 허무는 데서 시작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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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5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아기를 보면 어른들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도리도리 까꿍’이라고 말합니다. 신기하게도 아이는 활짝 웃으며 그 소리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궁금하지 않습니까? ‘도리도리 까꿍’이 무슨 뜻일까요? 별 뜻 없는 단순한 의성어, 의태어일까요? 찾아보니 오랫동안 내려온 전통 육아법인 ‘단동십훈’에 적혀 있다고 합니다. 이 중에서 잘 알려진 것 몇 가지만 보겠습니다. 도리도리는 길 도(道)와 다스릴 치(治)를 쓰고, 까꿍은 ‘각궁’에서 나왔는데 깨달을 각(覺)과 몸 궁(躬)을 씁니다. 즉, 천지 만물이 하늘의 도리로 생겼으니, 너도 하늘의 도리에 따라 생겼음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또 손바닥에 손가락을 찍으며 ‘곤지곤지’합니다. 하늘 건(乾)과 땅 곤(坤)을 쓰는데, 하늘과 땅의 이치를 깨달으면 천지간 무궁무진한 조화를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죔죔’하지요. 이는 ‘지암지암(持闇持闇)’에서 나왔는데, 쥘 줄 알았으면 놓을 줄도 알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기를 손바닥 위에 올려 세우는 ‘섬마섬마(西摩西摩)’는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일어나 굳건히 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아기가 위험한 데로 가려거나 손을 대려고 하면 ‘어비어비’하면서 못 가게 하지요. 이는 한자 ‘업비업비(業非業非)’에서 왔는데, 일함에 도리와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랍니다. 의성어, 의태어가 아닌 이렇게 깊은 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 뜻을 알고서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에 대해서도 제대로 안다면 어떨까요? 주님의 뜻을 따르며,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에게 “어찌하여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마르 12,35)라고 하십니다. 당시 유다인들과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온다는 것은 절대적인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정치적, 민족적 영웅으로서의 메시아일 뿐이었지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7) 다윗이 장차 올 메시아를 ‘나의 주님’이라 불렀다는 것은 단순히 다윗의 인간적인 혈통으로만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윗조차도 경배해야 할 하느님의 아드님이며, 신적인 권위를 지닌 주님이라는 사실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자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결사, 혹은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조력자 정도로 한정 짓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 전체를 다스리시고 구원으로 이끄시는 진정한 나의 주님이십니다. 제대로 알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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