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권준수 박사의 저서 《나는 왜 나를 피곤하게 하는가?》에서 한국인의 현대병인 “강박증”에 대하여 다룬 내용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무엇을 망각하고 놓칠 것을 두려워 한 까닭과 누군가에 앞서 성취하고 싶은 호기심과 욕심이 불러온 '빨리빨리'란 조급한 마음으로부터 오는 분주함으로 인한 병이다. 이 개념은 삶의 참된 가치와 의미를 잃고, 강박증을 낳게 되었는데 그 병은 온통 사회를 극도의 경쟁체제 혹은 공리주의 대 자유지상주의란 체재로 인한 격한 갈등을 나은 계기가 되었다. 이 중심공간에서 사람들은 혹독하게 시달림을 받고 있다.
이러한 병리현상이 자본주의에 깊이 물든 사회일수록, 특히 한국인들은 유독 심하게 몸살을 앓고 있다. 이 고질적인 병의 원인을 알면서도 치유책은 물론 전이 루트를 막아 보려고 전혀 애를 쓰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현상은 우리 자녀들의 교육 시스템으로 전이되어 있다. 온통 사회가 감시와 경쟁체제라는 두 괴물논리에 속수무책이다.
출 ․ 퇴근할 때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무섭기까지 하다. 에스컬레이터가 있는데도 올라갈 때나 내려 갈 때나 가리지 않고 그 위로 질주한다. 그들의 말발굽 같은 구두 소리에 귀가 멍멍할 때가 많다. 그들의 육중한 몸의 무게를 견디며 유지되는 기계 수명의 단축은 불을 보듯 번한 일이고, 서로 밀치고 미는 행위 가운데 받는 감정의 손상은 또 어떻게 봐야 할런지? 결코 앞서지 못하면서도 너도나도 달리는 일에 급급하다. 비단 보행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다 보면, 끼어들기 행렬 또한 같은 유형에서 보아야 할 문제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목숨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기계다루는 일인에도 안중에 없이 무사태평이다.
나는 서두름을 철저하게 배제하면서 살고자 한가지의 원칙을 세워두고 살아가고 있다. 기다리던 버스가 오든, 횡단보드의 녹색불이 깜박이든, 엘리베이터 앞의 줄이 길게 늘어서건 전철을 기다리는 행렬이 길어질 때면 가능한 한 다음 순번을 기다린다. 그렇게 시간차가 많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제를 할 때도 가능한 한 서두르지 않는다. 아날로그식의 결재 행위를 선호한다. 왜 충분히 검토하고 생각한 뒤에 나오는 결과야말로 극대의 실용성과 시너지 효과를 가져 온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서두름은 결코 살아가는데 유익을 가져다 줄 수 없음을 경험으로 익힌바 있다. 서두름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놓치게 하는 주범이다. 긴장감은 또 다른 문제를 이끌고 와서 자신을 초라하게 실수투성이의 사내로 낙인찍어 놓는다. 혹은 주변 사람들의 편리와 배려와는 거리가 먼 불편을 조장하게 하는 원인으로 대두되기도 한다.
피에르 쌍소는 그의 저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주장하기를 현대인들은 머리 회전이나 동작이 느린 사람보다는 민첩하고 빠릇빠릇한 사람을 더 좋아한다. 후자들은 잽싼 손길로 식탁을 정리하면서도, 나지막하게 부탁하는 소리까지 금방 알아듣고는 재빠른 동작으로 상대방의 요구에 응해준다. 뿐만 아니다. 속셈에서도 그들을 당할 자가 없다. 그러나 나는 내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바로 느림이 존재하는 영역이다. 느림, 내게는 그것이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으로 보여 진다. ……오늘날 이렇듯 끔찍하게 빠른 삶을 살아가는 데 적응이 잘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미처 삶 속에 들어가지 못한 채 아직도 주변인이 되어 길거리에서 서성대고 있다. 누군가가 자기들을 이 곤경에서 구해 내 호송대에 합류시켜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헛된 기다림일 뿐이다.
문화인류학자이며 환경운동가인 쓰지 신이치는 그의 저서 《슬로우 라이프》에서 언급하기를 그는 규칙을 세워 두지 않는다고 했다. 저자는 세상과 세태를 도무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모두 무엇인가에 쫓기듯 앞만 보며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다. 그들은 때로 자신들이 지금 어디로 가는지 조차 잊어버린 채, 숨 가쁘게 달려가고 있다. 남들에게 뒤쳐질세라, 이대로 멈춰서면 끝장이라는 듯 말이다. 보다 못한 그가 사람들에게 권유한다. “우리 한 번 주위를 돌아보며 숨 한번 크게 내쉬어 보고 이제는 좀 천천히 걸어보지 않으시렵니까?”
헨리 데이빗 소로우 역시 그의 저서 《소로우의 노래》나 《월든》, 또한 헨리 솔트의 저작《헨리 데이빗 소로우》을 보면 우리는 그에게서 이런 독백을 듣게 된다. “아 평생 한결 같은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면! 평범한 계절에 작은 과일이 무르익듯 내면의 삶의 과일도 그렇게 무르익을 수 있다면! 자연과 교감하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계절마다 꽃피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면! 아, 그러면 나는 앉으나 잠들 때나 자연을 경애 하리라. 시냇가를 따라 걸으며 새처럼 노래하는 기도 자가 되어 커다란 목소리로 혹은 혼자소리로 기도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너무 요란하고 빠르게 지나가는 시대에서 정신적으로 혼미한 상태 즉, 뭉크와 같이 절규 하고픈 욕구를 절제하면서 살고 있다. 모든 것을 취할 것 같고, 자신들이 그토록 오르고 싶어 했던 직위에 올랐다고 자부하며 기지개켜던 사람들이 질러대는 절규와 두려움에 떨리는 심장박동소리를 듣는다. 이유가 무엇인가? 그 자리를 빼앗길까? 취했던 물질을 한 순간 잃어버릴 것 같은 불안감, 이들을 위해서 애크낫 이스워런은 자신의 저서 《마음의 속도를 늦추어라》에서 마음의 시계를 느리게 돌려놓기를 주문한다. 서두름 없이 마음의 여유를 지니고 사색을 경험하며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의 가치와 행복을 충분히 점검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동역자들이여! 우리는 지금 어떤 길을 걸을 것이며 어떤 모형을 취하며 살기를 원하는가? 라고 묻고 있다.
천천히 걷고 생각하고 그 가운데서 쉬 놓치게 되는 삶의 목적 혹은 방향 그리고 가치와 의미를 천천히 되새겨감이 유한한 우리 네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내는 지름길임을 기억하고 좀 더 천천히 느리게 살아가는 일을 선택하며 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