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9 |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오늘날과 다르게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중심으로 날짜를 계산하였고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은 하루의 해가지는 시간부터 다음날 해지는 시간까지를 하루로 계산하는 유대인의 방식을 따르면 안식일이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이고, 한 주간의 시작을 안식일로 보았기 때문에 즉 토요일로 보았기 때문에 주간 첫날은 안식일 다음 날, 정확히 표현하자면 토요일 일몰 후부터 일요일 일몰까지가 주간 첫날이고 그날 이른 아침이라는 뜻이다.
안식일은 유대교의 표현이고 ‘주간 첫날’ 은 그리스도교의 표현이다. 옛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안식일 다음 날’로 번역하였었으나, 원문대로는 ‘주간 첫날’ 이다.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라는 말은 해가 돋기 전 그 시간대를 가리키고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집을 떠날 때는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때였고, 무덤에 도착한 때는 여명이 밝아올 때였다고 본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른 시간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일찍 무덤을 방문한 것은 탄압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일 수도 있고, 돌아가신 주님에 대한 열정에 밤새 울다가 예수님을 찾아간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른 아침은 아직 어둡기는 하지만 이제 날이 밝아지기 시작하는 시간으로 이제 하느님의 구원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시점이다. 그리스도교의 주일이 시작되는 시점이며, 세상 창조를 기념하는 안식일의 완성으로서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로 대치되는 시점인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한때 일곱 마귀가 들려 고통을 받다가 예수님께 치유를 받은 후 예수님을 따르며 봉사하던 인물이며,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까지 예수님을 따르며 시중을 들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끝까지 남아 이를 지켜보았을 정도로 헌신적인 여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마르타의 동생이자 라자로의 누이인 베타니아의 마리아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혀 다른 사람이다.
막달레나는 ‘막달라의’ 라는 뜻으로 ‘막달라’ 는 티베리아 북쪽 4.8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다. 여기서는 마리아 막달레나만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다른 복음서에서는 막달레나 마리아 말고 다른 여자들이 동행했다고 나온다. 이 차이는 각 복음서가 기초로 했던 원 전승이 다르기 때문이다.
‘돌이 치워져 있었다.’ 막달레나 마리아가 무덤을 방문한 것은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였다. 향유를 바르는 것은 시신을 돌보는 것과 같은 의미인데, 유대인들은 시신이 썩기 전까지는 죽은 자의 혼이 시신 곁을 떠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며 장사 지낸 후 사흘 동안 시신을 돌보았다. 그리고 당시 무덤은 큰 바위로 입구를 막아 놓았다.
돌이 치워져 있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무덤의 돌은 보통 장정 다섯 명이 힘을 합해야 겨우 옮길 수 있을 정도로 무거웠으며 입구에 움푹 파인 홈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인 몇 명이 옮기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마르코복음 16 장 3 절을 보면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 하며 걱정하며 길을 떠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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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이 안 보였기 때문에 그녀는 누군가 무덤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간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급히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달려갔다. 요한복음에서는 베드로와 사랑하는 제자만이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빈 무덤의 사실을 전해 들은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복음서들과 관련시켜 볼 때 다른 제자들도 소식을 들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베드로와 사랑하신 제자를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 것은 두 사람이 사도단 안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막달라 마리아는 사도단의 대표인 시몬 베드로에게 그리고 사도단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다른 제자에게 먼저 소식을 전한 것이다. 여기서 사랑하는 제자는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라는 말은 누군가 주님의 시신을 훔쳐 간 것 같다는 뜻이다. 그리고 원문에는 ‘누가’ 가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즉 여러 명의 사람들이 주님의 시신을 훔쳐 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고, 또 원문에는 ‘우리는 모르겠습니다.’ 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막달라 마리아 외에도 다른 여자들이 함께 무덤에 갔었고, 그들도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았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예수님께서는 금요일 오후에 숨을 거두셨고, 해가 지기 전에 무덤에 묻혔다. 부활은 일요일 새벽 이전의 일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묻혀 있던 시간은 만 이틀이 안된다. 그래서 우리 계산대로 하면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이 아니고 사흘째 되는 날에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단 몇 시간이라도 날짜가 바꾸기 전에는 하루로 계산했기 때문에 그들 방식대로 표현하면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이다. |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다른 제자 요한’ 는 ‘요한’을 가리킨다. 이 두 제자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바로 무덤을 향해 달려갔다. 그들도 막달라 마리아의 말처럼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확인하고자 했을 것이다. 만일 제자들 가운데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 놓고 예수님께서 부활했다고 하려는 계획을 행하고 있었다면 베드로나 요한이 몰랐을리 없고 서둘러 무덤으로 달려갈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루카복음 24 장 12 절에 의하면 무덤이 비어있음을 확인한 제자는 베드로 한 사람이다. 반면 여기서는 요한도 함께 갔다고 진술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님의 처형을 목격한 사람이고 예수님의 무덤의 위치를 알고 있었던 제자이다. 그래서 요한이 베드로를 인도하여 무덤으로 함께 갔을 것이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두 제자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들었을 때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는 생각이 그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당혹감을 가지고 달려갔을 것이다. 베드로보다 요한이 먼저 무덤에 도착한 것은 베드로보다 요한이 젊었기 때문에 더 빨리 달릴 수 있었고, 그래서 무덤에 먼저 도착했을 것이다. |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몸을 굽혀’, 이 말은 무덤 입구가 낮아서 안을 들여다보려면 몸을 굽혀야 했을 수도 있고,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서 허리를 굽히고 들여다보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어쨌든 자세히 정확히 보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세심하게 관찰을 하지만 선뜻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아마포’ 는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붕대이다.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만 보았고, 예수님의 시신은 보지 못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떤 학자들은 요한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아마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시신이 아직 있다고 생각해서 이 시신을 만지는 부정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좀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 어떤 학자들은 사도들 사이의 위계질서로 인해서 베드로에게 우선권을 양보한 행동이라고 한다. 후자가 설득력이 강하다고 본다. 요한은 자신의 부정을 생각할 정도의 상황이 지금은 아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사실을 확인한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앞절에 이어서 아마포가 있었다는 증거를 확인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시신이 도둑맞았다는 것을 반증하기 위해서 중복해서 언급되는 듯하다. |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베드로는 거침없이 단숨에 무덤 안으로 들어간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았고, 요한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고, 베드로는 아마포와 수건을 보았다고 기록함으로써 제자들이 목격하는 상황을 단계적으로 확대시켜 나가고 있다.
‘개켜져 있었다’ 는 이 말의 원어로는 ‘싸다’, ‘봉하다’ 라는 뜻이다. 수건이 식탁보가 접혀 있는 것처럼 납작한 형태가 아니라 동그랗게 말려 있는 모양을 가리킨다. 11 장 44 절을 보면 라자로가 살아났을 때 라자로는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무덤에서 나왔다.’ 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무덤에 시신은 없고 아마포와 수건만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라자로처럼 부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라자로의 경우와는 다른 어떤 신비한 방식으로 무덤에서 사라지셨다는 것을 제자들이 확인한 것이다. 더욱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시신을 도난당했다는 것을 반증하기 위한 증거이다. 시신을 누가 훔쳐 갔다면 병사들도 있었기 때문에 급하게 움직였을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정리 정돈까지 할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베드로가 거침없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자 요한도 힘을 얻어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보고 믿었다’. 보고 믿은 대상이 무엇인지 정확히 언급하지 않는다. 단순히 시신이 없어진 것을 보고 믿었는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는지. 이 구절에 대해서 학자들의 견해는 요한이 무덤 안에 들어가 아마포와 수건이 있는 것을 보고 요한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게 되었다는 견해이다.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서 자신의 특별한 체험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여러 제자들 중 최초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는 견해이다. 그런데 요한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으면 무덤을 나와서 밖에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텐데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둘째로는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전자의 입장이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9 절에 자신이 무엇을 보고 믿었는지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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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는 빈 무덤을 보고도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요한 역시 무덤 안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님의 부활을 생각했다면 그것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믿어 왔던 의인의 부활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이해였을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지는 구원사적 의미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말씀은 공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성경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뜻하고 또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도 해석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다시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들을 기억해 냈을 것이고 또 구약 성경 전체에서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에 대한 예언들을 발견했을 것이고 이를 통해서 성경 말씀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