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사진이나 글을 보고 어떤 장소가 마음에 들면 언젠가는 꼭 가보려고 나만의 여행 리스트에 저장해놓곤 한다. 그리고 기회될 때마다 하나씩 꺼내보는데, 그 중 한 곳이 충주에 있는 악어봉이다.
악어봉은 넓은 충주호와 연결된 월악산 끝자락이 악어떼가 모여있는 모습과 닮아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누구의 솜씨인지 뛰어난 작명 실력이다. 언젠가 <동물의 왕국>에서 얼룩 말 한마리를 잡기 위해 악어 몇마리가 조용히 물살을 가르면서 천천히 움직이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악어봉의 모습은 먹잇감을 노리고 조금씩 전진하는 악어떼의 모습을 연상케했다.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다 있다니"라며 호기심이 일었다. 이 독특한 풍경이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며, 악어섬은 충주의 대표 여행 명소가 됐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악어섬 가는 길이 이상하다. 아니, (공식적인) 길이 없다고 하는 편이 맞다. 그럼 도대체 다들 어떻게 올라갔을까.
그 해답은 탐방로 아닌 탐방로에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금지된 탐방로라는 의미다.
악어봉 가는 길은 사실상 금지구역으로 지정되어있다. 야생동물 보호구역이라 일반 탐방객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좁은 탐방로로 악어봉에 오른다.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길이 생기게 된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탐방로가 있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좁은 비법정 탐방로는 나름 반질반질하다.
사실 망설였다. 아무리 멋진 곳이라도 야생동물 보호 구역인데 개인의 호기심이 우선시 될수는 없지 않을까. 이브가 호기심에 이끌려 금단의 열매 선악과를 먹었듯이, 호기심이라는 존재만큼 인간을 강렬하게 이끄는 근원적인 감정도 없기에 고민스러웠다.
때마침 희소식이 들려왔다. 악어봉 일대 생태조사 결과 멸종위기 야생동물의 서식이 확인되지 않았고, 탐방객들의 안전장치를 갖추어 출입금지 구역이 해제된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충주시는 이곳에 정규 탐방로와 전망대 등 본격적인 탐방시설을 갖추고 여행자들을 맞이할 준비에 들어섰다.
호기심과 미안함 가운데 갈등하던 나에게는 희소식이었다. 마음의 짐을 조금은 내려놓고 악어봉 탐방을 시작해보기로 했다. 곧 제대로된 탐방로가 생기면 더 많은 이들이 찾게 되기에, 옛 구(舊)길을 걷는다는 나름의 의미도 있다.
악어봉은 굽이굽이 빼어난 경관을 보여주는 충주호 중턱까지 올라가야 한다. 충주호는 지금은 중부내륙의 대표적인 드라이브 코스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으며, 1980년대 초반 충주댐 건설로 만들어진 인공 호수다. 당시 댐건설로 상당히 많은 지역이 수몰되었으며 수몰 주민들은 수몰 이주 단지나 단양 등지로 뿔뿔히 흩어졌다. 수몰지역에 있었던 문화재는 현재 청풍문화재단지에 전시되어 있다.
충주호(청풍호) 건설당시 수몰지역 문화재들을 모아 전시한 청풍문화재단지. 사진은 한벽루의 모습
청풍문화재단지에서 바라본 충주호
주차는 악어봉 들머리에 있는 게으른악어라는 카페에 해야 한다. 게으른 악어는 넓은 주차장과 확 트인 충주호 풍광을 보여줘 충주호의 명소가 됐다. 특히 호수를 바라보며 양은냄비나 코펠에 라면을 끓여먹는 메뉴는 금새 동이날정도로 인기다.
카페에서 커피한잔을 마시고 악어봉에 올랐다. 아직은 출입금지라는 현수막이 붙어있지만 곧 상단에 육교가 설치되고 튼튼한 나무데크가 깔린 멋진 탐방로가 만들어질 것이다.
악어봉에 오르기 전 필수코스인 게으른악어 카페
들머리에서 악어봉 정상까지는 900m 만 걸어가면 된다. 고도차이는 불과 270m이다. 그렇다고 경사가 낮다고 무시했다가는 큰 코 다칠 수 있다. 생각보다 경사가 가파르고 바닥이 울퉁불퉁하다. 일반적인 운동화보다는 등산화와 스틱까지 챙겨오는 것이 좋다. 몇번을 숨을 고르고 난뒤에야 정상에 다다랐다. 보통 사람들은 40여분쯤 걸린다는데, 등산 초보인 나는 한시간 정도가 걸렸다.
비탈길을 오르면서도 옆으로 시선을 돌리면 악어 몇마리가 마치 술레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잠깐 잠깐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생각보다 더 악어와 닮은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악어봉이 있는 대미산 동쪽 월악산 영봉 일대 사이에는 동달천과 공이리마을이 들어서있고, 북쪽과 서쪽은 충주호와 36번 국도가 감싸고 있다. 유일하게 남쪽은 야생동물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통로로, 이곳이 탐방로로 개방되더라도 차단 펜스가 설치된다고 한다.
드디어 악어봉 정상이다. 이미 앞서간 몇명이 악어봉 정상에서 풍광을 즐기고 있었다.
고생하며 올라온 수고를 보상해주듯 풍광은 가히 예술이었다. 월악산 자락에서 뻗어나는 섬들은 영락없이 악어떼 무리와 닮아있다. 수많은 악어떼들이 긴 입을 벌리고 충주호로 스물스물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악어들이 입을 크게 벌리고 먹잇감을 낚아챌것같은 생동감도 느껴졌다. 한장의 사진으로 담기 어려운 아름다운 파노라마 풍광에 카메라를 든 손이 바빠진다. 이렇게 찍고 저렇게 찍어도 이 멋진 풍경을 담기가 어렵다. 확실히 자연의 아름다움은 마음으로 담아야 하는 걸까.
실제의 악어는 등껍질이 가죽으로 되어있지만, 악어섬의 악어 등 위에는 푸릇푸릇한 나무들이 올려져있다. 초 봄에 이곳을 찾았던 터라 중간중간 진달래, 벚꽃 색이 보였지만 가을에는 가을색이, 겨울에는 겨울색이 악어 등위에 내려앉으리라.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지금이야말로 작지만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닐까 싶다. 행복은 소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악어봉을 볼 수 있는 대미산은 고도는 낮지만 비탈길이 많아 등산화를 신는게 좋다
악어봉에 오르는 길에 만난 봄
악어봉에 오르는 길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악어
악어 등위에 올려져있는 시간의 색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