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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죽산박씨
 
 
 
카페 게시글
수필, 시 스크랩 유럽여행 셋째날 -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 시국
sunny 추천 0 조회 15 13.12.30 08:0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새벽에 일어나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브랴브랴 로마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런던 게트? 비행장으로 향한다.
런던에는 국제공항이 4개나 있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 . . .

10시 30분경 로마에 도착하여 시내로 들어가 바티칸 근처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가톨릭의 총 본산 바티칸 시국을 방문하였다.
바티칸 박물관, 시스티나 경당, 성 베드로 대성당을 차례로 관광한다.

내게는 관광이라기 보다는 성지순례의 의미로 더 큰 비중을 두게한다.

 

 ↑ 기내에서 아침 여명을 본다

 ↑ 중국식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

 ↑ 바티칸으로 향하는 길

 

 

 ↑ 드디어 바티칸으로 들어서는 문

 

피냐정원(Pigna Courtyard or Pine-Corn Courtyard)
이 정원은 1816년 Pirro Ligorio에 의해 만들어졌다. 거대한 청동 솔방울 분수가 있는데, 이것은 아그리파의 욕실에서 발견된 것이다.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와 천정화인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등은 일본 NHK 방송사의 자적권 문제로

촬영이 금지되어 있고 내부에서는 설명을 들을 수 없기에 미리 볼고 설명을 들을 수 있도록 쌤플 그림이 걸려져 있고,

미리 여기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다.

 

 

 

 

 

 

 

가이드의 설명을 끝내고 이제 박물관으로 들어가본다

 

 ↑ 박물관 입구

 

 

 

 

 

 

 

 

 

 

 

 

 

 

 

 

 

 

 

 

 

 

↑ 저 끝으로 나가면 바로 시스티나 성당으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천정화와 벽회에 대에 잠시 설명을 곁들인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벽화  미켈란젤로의 "천지 창조"
최근 일본 nhk 방송국의 자금 지원으로 그 복원사업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미켈란젤로의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고 있는 천지창조는
바티칸 시국안에 있는 시스티나 소성당의 천정에 자리잡고 있다. 내용은 구약을 바탕으로 하여 제목그대로 천지창조의 줄거리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빛의 창조..해와달의 창조..아담의 창조.. 노아의 홍수로 이어지는 그림들은 미켈란젤로가 누워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무릅에 고름이 생기고 떨어지는 물감으로 인하여 눈이 거의 안보였다는 이야기는 충분히 이해 갈 만한 것들이다.
이 그림은 당시의 교황 율리우스2세의 요구에 의하여 1508년부터 1512년 사이에 그려진 작품이다. 그러나 실제 그림을 그릴 때는
이러한 천지창조의 순서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노아의 홍수부터 시작하여 반대의 순으로 그림을 그려 완성 시켰다.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는 일을 맡겼다.

미켈란젤로는 4년 동안 작업의 프로그램을 짜고 거기에 따라 일을 진행해나갔다.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천장 밑에 세운 작업대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에 물감을 칠해나가는 고된 작업이었다.

이로 인해 목과 눈에 이상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혼자서 4년 만에 이 대작을 완성하였다.
성서의 〈천지창조〉의 순서와는 반대로 노아에 관한 3가지 이야기, 즉 입구 쪽에서부터 그려졌는데, 완성까지는 4단계를 거쳤다.
첫번째 단계는 2개의 곡면 벽화에 그린 3가지의 노아에 관한 이야기와 8명의 나체상으로 1509년 9월 15일에 완성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아담과 이브의 원죄와 낙원추방〉과 〈이브의 창조〉, 4명의 나체상, 두 명의 예언자, 4개의 삼각형 벽화, 2개의 곡면
 벽화로 1510년 8월에 완성되었다. 세 번째 단계는 〈아담의 창조〉 〈하늘과 물의 분리〉 〈달과 해의 창조〉 〈빛과 어둠의 창조〉의
4가지 이야기와 8명의 나체상, 5명의 예언자, 4개의 삼각형 벽화, 2개의 곡면 벽화로 1511년 1월과 8월 사이에 완성되었다.
네 번째 단계는 나머지 모든 원형 벽화로 같은해 10월부터 1512년 10월 사이에 완성되었다.
그려나간 순서에 따라 화면은 점점 단순화되어 가는데, 이것은 높은 곳에 그려지는 천장화의 특수성을 미켈란젤로가 차츰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림은 1512년 완성되어 같은 해 만성절인 11월 1일 울리우스 2세의 엄숙한 미사로 제막식을 가졌다.
그후 500여 년 동안에 이 벽화는 여러 차례에 걸쳐 덧칠과 복원작업이 이루어졌다.

 

사진으로 담아보지 못한 점이 너무 아쉬운으로 남는다

 

 

↑ 시스티나 성당을 나와 베드로성당으로 이어지는 문 - 이 문을 나서면 베드로 광장과 우측으로 성당으로 이어진다.

 

베드로 대성당은 처음 완공되던 349년부터 현재까지 세계기독교의 성지순례장소로서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것은 이곳에는 사도 베드로를 비롯하여 초기 로마 교회의 순교자들 무덤이 안치되어 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성녀가 예루살렘에서 직접 가져온 십자가와 베로니카 성녀의 수건, 그리고 그리스도를 찌른 창들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성당의 규모에 의해 압도를 당한다. 대성당이 세워진 대지는 모두 25.616제곱미터(약85,000평)에 달하며,
중앙 통로의 길이는 187미터, 폭은 140미터, 높이는 46미터이며, 중앙 제대 위에 있는 돔까지의 높이는 137미터이다.
또한 대성당 내부에는 모두 44개의 크고 작은 제대가 있으며, 395개의 조각과 135개의 모자이크로 된 그림이 내벽과
돔 안쪽에 장식되어 있다. 1700년대의 건축 비평가였던 밀리치아가 대성전에 대해 평한 것을 보면, 누구든지 처음
대성당에 들어오면서 외부에서 받았던 성전의 거대함으로 인한 위압감이, 내부의 잘 조화된 모습들로 인해
조금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 (피에타란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임).
미켈란젤로(1475-1564)는 그의 나이 25살 때에 이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피렌체에서 보관중인 다비드상,
그리고 로마 성베드로의 쇠사슬 성당에서 보관중인 모세상과 더불어 그의 3대 작품에 들어간다.
이 상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중 유일하게 그의 서명을 남긴 작품이기도 하다. 돌아가신 예수님을 무릎에 안은 성모님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아들 예수님의 나이에 비해 너무나 젊은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렇게 성모님의 얼굴이
젊게 표현된 이유를 미켈란젤로의 제자였던 아스카니오 카우디비가 그의 스승에게 물었을 때,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스카니오, 너는 아직도 모르느냐? 정결한 여자들은 무릇 그 정결함을 고귀하게 유지시켜야 하지 않겠느냐? 하물며 동정녀로서
잉태하신 성모님의 정결함은 세상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지 않겠느냐? 천주의 모친이신 성모님의 모습을 젊고 아름답게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아라.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파견되었으며, 사람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시는 고통을 받으셨다. 그분의 처절한 모습을 재현함으로써
그분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양심의 성찰을 일으키게 하려는 것이 바로 나의 의도이다." 우리는 한 예술가를 재조명해 보면서 르네상스의
마지막 대가였던 미켈란젤로를 그저 조각가나 건축설계사로만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예술 세계는 바로 그의 깊은 신앙심의 바탕 안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러기에 몇 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경이적인 찬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의 성좌
로마의 그리스도인 사이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 들어와서 선교 활동을 하였을 때 앉았던 나무 의자의
조각들을 모아서 5세기경 의자의 형태를 만들었고, 그 위를 흰 상아로 장식하여 전해져 왔다고 한다. 이것을 교황 알렉산데르 7세(1655-1667)

베르니니를 시켜 다시 그 위를 청동으로 장식케 했고,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어쨌든 고고학적 또는 과학적으로 사도 베드로가 과연

이  의자에 앉았었느냐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초세기 때부터 이 의자는 사도 베드로의 무덤을 표시하기위해 그 위에 세웠던 기념비와 함께
내려온 사도의 유물로 그리스도인들이 경배해 왔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제 이 청동 의자의 위쪽을 보면, 천연 대리석을 얇게 깎아서 마치
유리처럼 보이는 타원형 안의 중심에 비둘기가 자리잡고 있다. 이 비둘기는 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성령을 의미한다. 타원형을 잘 살펴보면
열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열두 사도를 상징한다. 또한 타원형의 둥근 모습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점은 삼위일체,
즉 3이라는 숫자의 종교적인 의미를 갖기도 한다. 교회에서는 모든 숫자 중 가장 완벽한 수를 3이라고 한다. 이 청동 의자의 네 다리를 잡고 있는
청동상들을 보면, 앞쪽으로 미트라(Mitra:카톨릭 교회에서 주교들이 미사 중에 쓰는 모자)를 쓰고 있는 청동상은 성 암브로시우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로, 서방 로마 카톨릭 교회의 대표적 4대 교부(일명, 교회박사라고도 함)에 속하는 분들이다. 뒤쪽으로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와
성 아타나시우스로서 동방 그리스 정교회의 4대 교부에 속한다. 청동 의자의 네 다리를 들고 있는 교부들의 모습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대표적인 교부들이 표명하였던 그들의 교부학 이론이 바로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으로부터 내려온 것이며, 이는 다시 사도 베드로가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복음의 사실들은 변경되거나 바뀔 수 없음을 보여 준다.
또한, 성령 안에서 항상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표현하고 있으며, 또 다른 의미로는 갈라진 두 교회(동방과 서방)가 일치를
이루어야함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베르니니의 신앙을 기초로 한 예술적 표현은 세기를 거듭할수록 더욱더 새롭게 조명되어 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베드로 성당 광장
베드로광장은 베르니니가 1656년에서 1667년까지 11년에 걸쳐 양쪽 회랑을 포함하여 세운 것이다.
흔히 바로크 예술하면 복잡하면서도 장식적인 것으로만 연상되는데, 사실 그 시기에는 그러했다.
그러나 이 대광장의 양쪽에 위치 해 있는 회랑을 살펴보면, 단순한 균형미에서 그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다.
 한 시대의 예술가로서 그 시대의 유행이나 사조(思潮)에 예속되지 않고, 항상 더 나은 이상을 추구하였으며
작품의 대상을 항상 교회를 중심 테마로 잡은 베르니니의 예술 세계를 이 회랑을 통해 볼 수 있다.

 

 

 

 

 

 

오벨리스크
광장의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오벨리스크는 원래는 현재의 대성당 정면을 바라보면서 왼쪽에 있었던 것으로, 1세기 때의 로마 황제
가이오와 네로의 경기장 가운데에 장식을 위해 설치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초기에 기념 교회를 세우면서 경기장은 모두
없앴으나 탑만은 계속 남겨 두었다. 이를 교황 식스투스 5세의 명에 의해 1586년 4월 30일 이전 공사를 시작하여 약 130여 일 후
같은 해인 9월 10일, 현재의 위치에 세우게 되었다. 탑의 높이만 해도 25미터로 로마에 있는 오벨리스크 탑들 중 두 번째로 높으며,
무게는 약 300톤이나 된다. 이 거대한 탑을 옮기기 위해 그 당시 건축 설계자였던 도메니코 폰타나가 책임자로 선임되었고, 그의 지휘로
900여 명의 인부와, 말 140여 마리 그리고 47대의 권선기를 동원하여 이 어려운 이전 작업을 해냈다고 한다. 이렇게 옮겨 놓은 오벨리스크 탑
위에 십자가를 올려 놓음으로써 이 탑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상징하게 됐는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로마 제국 시절
그리스도교에 첫 박해를 시작했던 네로가 권력의 상징으로 아끼고 좋아했던 이 오벨리스크 탑을 이곳 광장의 중심에 옮겨 놓은 이유는 광장을
장식하거나 해시계로서의 기능을 갖추기 위한 것보다는, 더욱 심층적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의 정신을 이곳에
오는 모든 순례자들에게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베드로성당의 관람시간이 너무 짧아 많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가슴만 두근드근하며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많은 여운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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