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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자의 성립과 역사] (1) 서언
범자의 성립과 역사
1. 서언
범자의 습득, 연구는 실담학(悉曇學)의 중요한 일부분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먼저 실담학에서 범자의 위상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고래(古來) 일본에서 인도에 관한 연구의 주요 부분에 실담학이 있다.
실담이란 "완성되어진 것"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梵語)의 싯담(siddham)의 음사어이다. 이밖에 칠담(七曇), 실담
(悉談), 칠단(七旦), 실담(肆曇), 실단(悉壇)등 갖가지 표기가 있지만, 일반적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것이 실담(悉曇)
이다.
실담은 산스크리트의 문자, 자음(字音)과 자의(字意) 등 일체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특히 일본에서는 산스크리트를
표기하는 문자(이하 범자라 함)의 서체, 서법, 산스크리트 문법 등 모두를 포함한 광범위한 말이다. 이와같이 실담의
의미내용은 다양하여, 천태,진언의 양종에서는 실담을 산스크리트의 표기문자인 범어자모 즉 범자와 동일한 말로
사용하고 있다.
범어자모(범자)로서의 실담을 왜 "완성된 것"으로 부르게 되었는가. 이것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먼저 (悉曇
字母章)의 모두(冒頭)에 싯담(siddham)이라고 하는 말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범어자모 모두를 가리키게 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다. 첫번째로는 실담자모장 다음 두번째는 모음 14, 자음 35로 이루어진 자모 구성상의 완전성으로부터
일컬어진 것이다. 세번째로는 세간 일반의 문자와 달리 범천(梵天, Brahman)이 만든 말인 까닭에 이와같이 불리워
졌다고 하는 것이다.
지광(智廣)이 『실담자기(悉曇字記)』에서 "실담이란 천축의 문자이다"라고 정의한 것은 실담을 범어자모에 한정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2. 범자 성립의 역사
다음에서 범자의 성립을 역사적으로 고찰하여 보기로 한다.
범자의 원어는, 브라흐마나(brāhmaṇa, 바라문, 사제계급)의 음사어에 범(梵)이 있는 까닭에, 브라흐마나 리(brāh
maṇa-lipi, 바라문의 문자) 또는 브라흐미 리피(brahmī-lipi, 브라흐미 문자)이라고 상정된다. 브라흐미가 인도의
문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간주된 것은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제11권 그리고『랄리타비스타(Lalitavis
tara)』에서 64종의 문자(실제로는 63종)에 대한 명칭을 열거하며, 혹은 불전 『마하바스투(Mahāvastu)』에 20수
종의 문자를 거론하는 경우, 그 최초에 브라흐미가 열거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불본행집경』에서는 브라흐미를 ꡐ범천소설(梵天所說)의 글ꡑ이라고 한다. 더욱이 산스크리트의 브라흐미에
상당하는 것은 아르다 마가디어의 밤비(Bambhī)이다. 일반적인 속어(prākṛta)에서도 밤비란 호칭은 사용된다.
종래 범자는 사제계급인 바라문이 성구(聖句)-베다 성전 등-를 서사하는데 사용한 것으로, 바라문 즉 브라흐마나
라는 말에 의거한 브라흐미를 문자의 명칭으로 삼은 것으로 보여진다. 브라만은 초기의 『베다 성전』에서는
바라문의 기도력, 주구(呪句)등을 의미하였으며, 마침내 신격화되어 최고신 브라흐만(Brahman 梵天)을 가리키게
된 것으로, 이것에 의거하여 범자를 범천이 제작한 문자라고 하는 전승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범자의 원어는 브라흐미-가 아니라 브라-흐미-(brāhmī)의 형태가 표준이 되고 있다. 브라-흐미-는 브라흐마
(brāhma)의 여성형이다. 브라흐마는 사제로서의 브라만 또는 브라만신(梵天)에 속하는 이라는 형용사로서, 일반적
으로 신성한 것, 성스러운 문자를 의미한다. 브라-흐미-는 브라만신의 여성적인 힘, 나아가 단순한 말을 의미한다.
이와같은 어원으로부터 보면 범자가 범천소조(梵天所造)라고하는 전승에 대해서는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범자의
원어를 브라흐마나에서 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공해(空海)는 『범자실담자모병석의(梵字悉曇字母幷釋義)』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범자실담은 인도의 문서(文書)이다. 서역기에 말하길 범천의 소제(所製)라고 한다. 5천축국은 모두 이 글자를
사용한다. 그렇지만 지역과 사람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다. 그 골체(骨體)를 말할 때에는 이것을 근본으로 한다.
겁초(劫初)에는 세상에 법수(法數)가 없었다. 범왕(梵王)이 내려와 이 실담장(悉曇章)을 주었다. 근원은 47언(言),
유파는 1만(萬)을 넘었다. 세상 사람은 그 유래를 알지 못하고 범왕의 소작(所作)이라고 한다. 만약 『대비로자나경
(大毘盧遮那經)』에서 말하는 것에 의거한다면 이 문자는 자연도리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여래가 만든 것도
아니다.
인도에서 최초로 보여지는 문자는 인더스문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더스 문명의 시대에 이미 인장, 토기, 점토판
등에 새겨진 일종의 상형문자가 있었다. 현존하는 고고학적 유품으로는 396종의 인더스 문자가 있다고 하며, 슈메르
문자의 수는 이것의 2배에 달한다. 인더스 문자는 화문자(畵文字)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가고, 2행에 걸칠 때에는
왼쪽에서 부터 오른쪽에, 3행에 걸칠 때에는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서로 좌우 반대가 되도록 쓰게끔 되어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재 인더스 문자는 해독되지 않고 있다.
어쨋든 이것에 의해 인도에는 수천년전에 이미 문자가 사용되었던 것이 알려진다. 더욱이 이 문자는 상당히 오랫동안
사용되어졌던 것같다.
아리안 민족이 서북인도의 오하(五河)지방으로 이주해 온 것은 대략 기원전 1500년 경이라 추정된다. 인더스 문명과
아리안 민족의 베다 아리안 문명과의 결합은 오늘날 지적되고는 있지만, 인더스 문자와 범자와의 관계는 전혀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인도에서 범자의 기원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은 점이 적지 않다.
지금까지 범자의 원초형태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이 있다. 첫째로는 서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문명이 탄생시킨, 지중해
연안 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셈족이 사용하고 있었던 세미틱 문자에 유래한다고 하는 설, 둘째는 인도 아리안 민족에
기원한다고 하는 설이다. 첫째설은 베버(A. Weber), 둘째설은 뷰러(G.Bhüler)에 의해 제창 된 설이다.
인도에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범자는 기원전 2세기 중엽의 아쇼카(Aśoka) 문자이다. 이 문자를 북방 세미틱 문자
및 팔레스티나 지방의 메샤(Mesha)왕의 각문(刻文)--기원전 890년--등과 비교한 결과 22문자 중 3분의 1은 동일한
형태이며, 3분의 1은 거의 합치한다고 하는 사실이 보고되었다. 더욱이 이것들은 모두 표음문자(表音文字)이다.
이것에 의해 범자의 원형 자모는 고대(古代) 서방 무역에 의해 인도에 전해져 조금씩 변화가 이루어져 아쇼카 문자에
이르렀다고 보여진다. 또 이 서방 문자가 육로로 인도 본토에 전해진 것은 외국 무역상인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것
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
가령 초기불교의 『바베루 자타카(Bāveru-jātaka)』는 고대 인도에서 바빌로니아와 해상무역이 이루어진 것을 시사
하고 있다. 또『소비라 자타카(Sovīra-jā taka=Āditta-jātaka)』와 『수파라카 자타카(Suppāraka-jātaka)』 등에 의
하면 서남 인도․카차왈 반도 지방의 소비라, 수파라카 등은 비 아리안 민족의 사람들이 사는 바닷가의 도시로 등장한다.
최초에 서방과의 교역에 종사한 사람은 아리안 민족이 아니라 남인도의 원주민인 드라비다 민족일 가능성이 높은 것
으로 추정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서남 또는 남방 인도 방면에 전해진 수입 문자가 우디야나(Udyāna, Ujjain)를 경유하여 북인도
갠지스 유역지방에 있던 아리안 민족의 본거지로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북방 셈족이 사용하고 있었던 문자는
기원 11세기경의 설형문자(楔形文字)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오늘날 이것과 범자와의 관련은 인정되지 않는다.
또한 남방 셈족의 문자와 범자와의 직접적인 관계가 일찌기 지적된 일도 있지만, 이것도 오늘날 인정되지 않는다.
뷰러는 아쇼카 문자와 셈족 계통의 페니키아 문자-메사왕 각문과 같은 것-는 서로 유사하며, 범자의 원초 형태는 기원
전 8세기에는 이미 인도에 전해졌다고 보고있다. 만약 그렇다면 갠지스강 중류 지역에 불교, 자이나교가 흥기하기
이전 『브리하드 아란야카 우파니샤드(Bṛhadāraṇyaka-upaniṣad)』, 『챤도갸 우파니샤드(Chāndogya-upaniṣad)』 등 고기(古期) 우파니샤드가 성립하는 시기에 해당할 것이다.
문자의 보급에 대해서는 바라문 교도에 비하여 불교도와 자이나 교도가 극히 적극적이었던 것을 현존하는 고고학상의
유품과 문헌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다. 하지만 바라문교는 교의의 전수를 비밀로 하는 소위 사권(師拳, muṣṭika)을
존중하는 것에 대하여 특히 불교가 시장에서의 거래에 비유되는 것과 같은 공개적인 가르침이고, 상공업자 계층을
신자로 가진 것 등이 불교도에 의한 문자의 보급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쇼카 문자 및 인도 최고의 에란(Eraṇ) 화폐의 각자(刻字)의 연대는, 당초 서방으로부터 인도에 문자가 전래한 대략
기원전 800년경보다도 이미 500년 정도의 연대적 거리가 있다. 이 사이의 범자 자료는 일체 알려지지 않는 까닭에,
오히려 페니키아 문자의 인도 유입이 아쇼카왕 시대보다 어느 정도 거슬러 올라갈런지에 대해서는 연대를 결정할
근거가 전혀 없다.
영국의 고고학자 컨닝햄(Cunningham)은 인도 고대의 상형문자로부터 범자가 발생했다라고 하는 견해를 나타내
보였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인더스 문명의 2대유적인 모헨조다로, 하라파로부터 발굴된 인장(印章)이나 그밖의
유물에 세겨진 소위 인더스 문자는 상형문자(최근 인도에서는 표음문자라고 하는 新說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인 것에 대하여 범자는 분명히 표음문자라고 하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따라서 양자의 서체상에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하는 설은 인정하기 어렵다.
결국 오늘날 범자의 자형(字形)은 남북 셈족의 문장에 직접적으로 기원하지 않고 유프라테스 유역에서 생겨난 전기
세미틱 문자에 유래하는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 달리 말하면 범자도 남북 셈족의 문자도 모두 그보다 원초적인 문자가
상정되며, 그것으로부터 각각 파생하였기 때문에 페니키아 문자와 범자의 유사성도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또 범자의 기원을 페니키아 문자에서 직접 구하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현재로서는 모두 가설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그러나 범자와 페니키아 문자의 유사성의 면으로부터 범자와 로마자와의 자형상 혹은 음운상
의 공통점도 약간 인정되어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범자는 보통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행씩 써내려가 순서대로 하단으로 옮겨가는 소위 좌행(左行)의 문자로, 인도에
남겨진 최고의 예는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각지에 남겨진 아쇼카왕의 석주, 마애법칙문이다. 시대는 왕의 재위기간
(기원전 268-232)으로부터 보아 기원전 3세기 중엽이다. 이것과 같은 시대이던가 아니면 어느 정도 연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스리랑카에 현존하는 여러 종류의 각문, 인도 마디야 주(州)의 에란에서 출토된 기원전 3백년경의
화폐의 각자(刻字)는 우행(右行)이다. 이것으로 같은 범자라도 반드시 그 행서(行書)의 양식은 일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후기 세미틱 문자는 우행이다. 초기의 대부분의 범자가 우행인 것은 이 서방문자 서법(書法)의 영향이며,
좌행은 그리이스 문자 서법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서구의 인도 학자는 추정하고 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진공(進攻, 기원전 327년), 마우리야 왕조의 아쇼카왕 시대에 인도와의 교류등에 의한 그리이스
문화의 인도유입이 범자 좌행의 성립에 어떠한 자극을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단 기원전 8세기 이전의 페니키아 문자가 좌행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일방적으로 그리이스 문자의 서법을 모방했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중국에 범자가 전해지자 한자의 세로 쓰기 습관에 따라서 세로 쓰기로 옮겨간듯하다. 공해의 『삼십첩책자(三十帖策子)』는 당(唐)에 머물렀을 때의 필사이지만, 범자의 가로쓰기와 세로쓰기의 두모습이 모두 인정된다. 『송고승전(宋
高僧傳)』에는 갈상나국(羯霜那國)에서는 그 서체를 세로로 읽는다고 하고 있다. 이 갈상나국은 곧 서북 인도의 카샨
나(Kaśanna)이다.
북방 셈족의 세미틱 문자는 22자모, 발달한 범자는 약 50자모이다. 이것들을 대비하면 본래의 자모가 상정되어지지만,
범자는 본래의 자모를 중심으로 만들어졌거나 혹은 본래 자모의 수를 점차 증광(增廣)한 것이라 생각된다.
범자는 산스크리트를 표기하기 위해 모음자합체, 반체반음부, 장모음․기음․비음을 조자(造字)하거나 또는 원자모의
두각(頭脚)을 꺼꾸로 한 작자(作字)가 생겨났다. 즉 증광의 제1이유는 아리안어(산스크리트)의 표음의 필요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욱이 이것에 대해서는 뷰러의 Indische Palaeographie 의 페니키아 문자, 아람 문자(Aramaic letters), 범자의 비교표를 참고하길 바란다.
인도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범자는 아쇼카왕 각문의 것이지만, 그것과 비슷하거나 유사한 문자는 인도에서 기원전 8
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인도 아리안 민족이 갠지스강 중류 지역으로 이주했을 무렵이다. 기원전 5,
6세기경 불교가 흥기한 시대의 마가다(Magadha), 코살라(Kosala)의 타각화폐(打刻貨幣)가 제2차 대전 이후에 다수
발견되었지만, 이것들에는 각문이 없다.
유럽의 인도 학자는 고고학적 유품과 갖가지 문헌상의 기록을 더듬어, 범자를 사용하여 전도(傳道)의 무기로 삼은
사람들은 불교도 및 일부의 자이나 교도들로 불교의 전파와 함께 전인도에 범자를 보급한 것을 지적하고 있다. 확실히
베다성전을 입으로 전승하고 있었던 바라문들은 문자의 사용에 대하여 극도로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것같다.
기원전 500년경, 야스카(Yāska)가 『어원론(語源論, Nirukta)』을 지었다. 이것은 본래 문자화되어지지 않았던 것같다.
하지만 기원전 4세기 서북인도의 문법학자 파니니(Pāṇini)의 문법서 『팔장편(八章篇, Aṣṭādhyāyī)』을 보면 문자(lipi),
필기자, 서기(書記, lipikara), 철자(akṣara) 등의 명사가 있으며, 더욱이 『바시슈타 법(Vāsiṣṭhadharmasūtra)』
에는 기원전 500년경 후기 베다시대에 이미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던 사실을 보이는 기술이 있다. 이것들을 비쳐보면,
인도에서는 기원전 500년경에 지식층 사이에서 어느 정도 범자가 쓰여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라지푸타나의 자이푸르 북방 바이라트(Bairāṭ)의 구릉에 위치한 승원지에 있는 아쇼카왕의 바브루(Bhābrū) 법칙에서
는 불교의 일곱가지 법문(dhaṃmaparyāya)을 거론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여섯은 현존하는 팔리어 성전의 경전명과
일치한다.
1. Vinaya-samukase.
2. Aliya-vasāni = Ariya-vaṃsā
(Aṅguttara-nikāya, II, 27)
3. Anāgata-bhayāni (ibid., III, 103)
4. Muni-gāthā = Muni-sutta (Sutta-nipāta, p. 36)
5. Moneya-sutte = Nālaka-sutta (ibid., pp.131-134)
6. Upatisa-pasina = Pathavinīta-sutta (Majjhima-n. I, 146-151)
7. Lāghulovāda = Rāhulovāda-sutta (ibid., p. 414)
이것들은 실제로 명칭이 기록된 문헌으로 단순히 구전되어진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당시에 이미 불교의
문헌은 어느 정도 성문화되어 있었다고 추정된다.
아쇼카 문자는 북방 아쇼카 문자와 남방 아쇼카 문자로 크게 나뉜다. 전자는 방형문자(方形文字), 후자는 원형문자
(圓形文字)인 것을 특색으로 한다. 남방 아쇼카 문자는 후에 팔라바 왕조의 팔라바 문자로 대표되지만, 범자의 발달상
관련이 있는 것은 북방 아쇼카 문자의 쪽이다. 이것도 브라흐미 문자와 카로슈티(Karoṣṭhī, 驢脣) 문자로 나누어 진다.
브라흐미 문자는 굽타형 문자로 발전하고 실담자모의 원형이 된다. 카로슈티 문자는 고대 페르시아의 아람 문자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우행서(右行書)가 특색이다. 이것은 셈족의 서체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파키스탄 페샤와르 지방의
카불다카리 비문, 하자라 지방의 비문, 또 누란국(樓蘭國) 등 중앙 아시아 지방에서 발굴된 단간(斷簡) 등에서 그러한
영향이 보여진다. 아마도 브라흐미 문자도 처음에는 우행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범자 자모의 성립, 발달 등에 대해서는 뷰러의 명저 Indische Palaeographie 를 반드시 참조해야 할 것으로, 범자의
자모에 대하여 이 책을 바탕으로 필자의 의견을 개진하고자 한다.
1)마우리야型(Maurya-type)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경까지 사용된 것으로, 대표적인 것은 아쇼카 문자이다. 최하한 연대는 기원전 220년이다.
범위는 북인도로부터 스리랑카에 미친다. 스리랑카의 아바야가미니(Abhayagāminī) 각문은 기원전 2세기말경의 것이
다. 서체에는 강약이 거의 보이지 않고 기하 모양적인 단순한 곡선과 직선의 모습을 특색으로 한다. 또 마우리아 형의
전시기를 통하여 고형(古型) 브라흐미 형과 그 변종인 드라비디 형(Draviḍī)으로 나눌 수 있다. 마우리양 형의 범자가 전 인도로 퍼진 것은 이 왕조의 아쇼카왕에 의한 불교 보호 정책에 의한 것이라 생각된다.
2)마하라슈트라型(Mahārāṣṭra-type)
대표적인 것으로 1세기경 마투라(Mathurā)의 태수이었던 마하라슈트라의 비명의 각문․화폐가 있다. 이것과 유사한
것으로 1세기부터 2세기에 걸쳐 서북인도 지방을 지배한 쿠샤나 왕조(Kuṣāṇa 貴霜)에서 사용한 쿠샤나 북방 범자가
형성되었다. 이것도 비명․각문 등으로 확인된다.
이 왕조의 카니슈카왕(Kaniṣka, 129-152 재위)은 불교를 보호 장려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마하라슈트라형은 북방 범자로서 중국 및 일본에 전래한 실담자모로 발달하기 까지의 원초적인 형태를 보이는 것으로서
주목된다. 이것을 마우리야형과 대비하여 보면 먼저 점획에 필세가 더해지고 상방획(上方劃)의 우단에는 귀두형(龜頭型)
으로 볼록한 것이 있어 후의 굽타형 내지 실담자모의 조형(祖型)인 것으로 보여진다.
고고학상 발굴 유물의 분포상 마하라슈트라형의 범자는 북인도 마투라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라지푸트나(Rājputna),
남쪽으로는 중인도의 산치(Sāñchī)에 이르고 있다.
3)굽타型(Gupta-type)
서기 320년에 찬드라굽타 1세(Candragupta)가 즉위하여 북인도에 굽타조가 흥기하여 소위 굽타형의 범자가 출현
했다. 인도 본토는 물론 주변지역으로 전파하여 갖가지 파생적인 자형을 만들어 내었다.
아마도 굽타 문자는 그 광범위한 보급의 면에서 범자의 성립상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중인도의 갠지스강 중류 지방을 중심으로 한 것에 대하여 『실담자기(悉曇字記)』에는 ꡒ지역에 따라 사람에 따라
약간의 改變이 있지만 더욱이 중천축을 특히 상정(詳正)으로 삼는다ꡓ라고 전하고 있는 바와 같다.
후대의 범자도 모두 굽타 문자를 모태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5,6 세기경의 실담자모는 굽타형 문자의 다른 형태
가운데 하나로, 서북 인도의 캐시미르 지방(Kaṣmīra)에 있었던 바르두족(Vardu)이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굽타형의 자체(字體)는 곡선획이 증가하고 상획의 우선단(右先端)은 쿠샤나족의 그것보다 더욱 비대해지는 경향을
보이며, 전체적으로 우아한 형태가 인정된다. 실담자모에 매우 접근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굽타형이 발달한 자형으로
서인도 지방에서 생겨났다고 일컬어지는 소위 보워문서형(Bower manuscripts-type)의 서체는 5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실담 자모에 대부분 부합하고 있는 점에서 실담 자모의 원형으로 간주되고 있다.
4)실담 자모형(Siddhamātṛkā-type)
굽타형이 발전한 파생자형으로 그 특색은 일본에 전래한 실담 자모에서 보이듯 수평획의 좌단(左端)이 거의 예각(銳角)
이며, 수직획의 선단(先端)이 부풀어 오른 설형(楔形)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실담 자모형은 6세기 후반 전후
로 시대가 추정된다. 나라(奈良) 법륭사(法隆寺)의 반야심경․존승다라니(尊勝陀羅尼)의 범자는 이 실담 자모형의 표준적인 것이다. 이것과 유사한 예가 인도 비하르주의 가야(Gayā)에 있는 마하나만왕(Mahānāman) 각문의 범자로 거의 동일한 형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들로부터 발달한 일군의 자형은 실담자모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나라 시대로부터 헤이안(平安) 초기에 일본에
전래된 당대(唐代)의 실담 자모는 5,6 세기경에 서 혹은 서북 인도에서 유행한 굽타형의 발전한 형태를 보이는 것이다.
5)나가리型(Nāgarī-type)
6세기에 들어 동인도 지방에서 유행한 굽타형의 파생적인 변종(變種)을 나가리형이라 부른다. 초기의 나가리형은
오른쪽이 내려가는 모습으로 실담자모와 유사하다. 이것의 예로 750년경의 동판각문이 있다.
11세기경부터는 전인도에 퍼지고 13세기에는 오늘날 인도에서 사용되고 있는 데바나가리(Devanāgarī)문자가 성립
하였다. 『실담자기』에는 ꡒ더불어 중천축에는 용궁의 문자를 가지고 있다ꡓ라고 하여 당시 중인도의 한 지방문자
이었던 나가리와 용궁의 문자가 관련이 있음을 입고 있다.
적원운래(荻原雲來) 박사는 이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비평을 하였다. 곧 #43090;nāgarī는 도시를 의미하는 nagara
의 형용사를 여성형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nāga(용)+ra(거주 하는 곳)로 어원 분석을 하면, 용이 있는 곳, 즉 용궁이
되어 나가라(nāgara)의 문자 곧 용궁의 문자를 의미하게 된다. devanāgarī는 신성한 나가리 문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렇지만 나가라는 이 나가리 문자의 원형을 가지고 있었던 종족의 명칭이 아니었을까ꡓ 라고 말하고 있다.
『불본행집경』,『랄리타비스타라(Lalitavistara)』 등 일련의 불전(佛傳)에 전하는 64서 가운데 용서(龍書, nāga-lipi)
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이것에 의하면 나가리 문자의 기원은 오히려 동인도 지방에 거주하였던 나가족이 사용하고 있었
던 문자로, 이것이 용궁 전설의 형태로써 전승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6)샤라다형(Śārada-type)
7세기경 굽타형의 변종을 샤라다형이라 하며 서북 인도의 캐시미르 및 인더스강 오하(五河, Pañjab)지방에서 발생
했다. 다음의 字形에 대해서는 일본의 실담자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인도에서 범자의 발달을 개관하기위해
보기로 한다.
7)전기(前期) 벵갈형(Proto-Bengalī-type)
11세기 굽타형의 동방 변종인 나가리 문자에 의거하여 나타난 파생적인 문자로 근대 벵갈 문자의 기초가 된 것이다.
8)쿠틸라형(Kuṭila-type)
인도에서 쿠틸라 문자라고 불려지는 쿠틸라형은 11세기경 네팔에서 사용한 구형문자(鉤型文字)를 가리킨다. 이것은
서방 굽타형 문자와 전기 벵갈 문자가 혼합한 형태로 인도 본토에서는 15세기말까지 사용되었다.
9)동부 인도에서는 오래된 브라흐미 문자에 기원을 둔 문자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수직화(垂直畵) 앞에 추형
(鍬型)의 장식이 있는 것이 특색으로 근세에 빈번히 사용되었다.
이상과 같이 다수의 자형이 있으며, 이것들 가운데 굽타형의 문자는 널리 중앙 아시아 지방에까지 전해졌다. 천산북로
(天山北路)의 쿠차(Kucha 龜玆) 지방에는 4세기초두 굽타 시대에 인도인이 이주하여 현재 사경형(斜傾型) 굽타문자
혹은 중앙아시아 범자라고 불려지는 자체를 만들었다. 현장의 『서역기(西域記)』 굴지국(屈支國)의 조에 ꡒ문자는
그 법칙을 인도에서 취하고, 약간 변화가 있다ꡓ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 그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는 것이다.
한편 천산남로에 해당하는 코탄(Khoṭan 于闐)지방에도 굽타형의 문자가 전해져, 자음에 붙은 모음부호에 약간의 변화가
이루어져 코탄어를 표기하고 있다. 이것에 대하여 현장은 같은 우전국 조에 굽타형의 변종이 생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ꡒ문자헌장(文字憲章)은 항상 인도를 존중하고 약간 서체를 바꾸었으며 약간의 연혁이 있다ꡓ라고 말하고 있다.
인도 최고의 아쇼카 문자는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것을 페니키아 문자와 비교하면 글자 형태에 공통적
인 것이 많다. 하지만 오늘날 아쇼카 문자로 대표되는 범자의 기원을 페니키아 문자에서 구하는 것은 단정할 수 없는
일이다. 인도에서는 이미 기원전 5백년경에 범자의 47 자모가 있었던 것이다.
아쇼카 문자의 형태인 마우리야형의 발전형태가 이미 보았듯이 굽타형이다. 이것들 두가지 형태의 브라흐미 문자는
남북 2가지 형태로 나누어지고, 일본에 전래한 실담자모는 기원상으로는 북방계 굽타문자(4-5세기)의 일종으로 보여
진다.
3. 범자 서사(書寫)의 소재(素材)
이러한 범자의 자형 성립에 대해서는, 서사의 재료에 의해 자형이 제약받았던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인도에서
일반적으로 종이가 사용되어지게 된 것은 12세기 후반 이슬람교도의 인도 침입 이후의 일이다. 물론 초기 브라흐미
문자는 점토, 금속, 암석의 소재에 세긴 것이다. 아쇼카의 법칙문은 세계적으로 알려져 석주법칙, 마애법칙의 2종류가
있지만, 그 소재는 모두 돌이다. 금속의 것으로는 에란 화폐가 알려진다. 요컨데 이러한 재질을 사용한 명문(銘文), 각문
(刻文)은 기록을 위한 것이 대부분인 까닭에 순수히 표기적인 것으로 장식을 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소재의 경질성
(硬質性)인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형은 세밀한 직선형으로 소박하고 직절(直截)한 느낌이 든다.
소재의 두번째는 수목(樹木)이다. 수목을 소재로 한 경우도 풍토적 제약이 있다.북방 인도에서는 나무껍질[樹皮], 특히 화수피(樺樹皮, 자작나무껍질)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벗나무 껍질과 유사하며, 물건의 포장이나 지붕을 잇는데에도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북방이라고 하는 것은 중인도, 서북인도, 동북인도를 말한다. 화수피에 박필상(朴筆狀)의 도구를
사용해 먹으로 서사한다.
남방인도에서는 소위 다라엽(多羅葉)이 사용되었다. 나뭇잎을 의미하는 파트라(pattra)의 범한합성어로 폐다라엽(貝
多羅葉), 음사어는 패다라(貝多羅), 줄여서 패엽(貝葉)이다. 탈라(tāla)의 잎을 서사의 소재로 한다. 탈라는 종려(棕櫚)
와 비슷한 태편평수엽(太扁平樹葉)으로, 딱딱하고 광택이 있다. 이것을 장방형(長方形)으로 잘라 철필 모양의 펜으로
쓰며, 연한 먹을 한 면에 발라 가볍게 닦아내면, 문자의 자리에 먹이 남아 글자가 드러난다. 오늘날에도 스리랑카나 그
밖의 남방에서는 고본문자(稿本文字)를 쓰는 데 사용하고 있다. 화수피나 다라엽에 남아있는 단간의 내용은 종교성전,
특히 불교 관계의 것이 대부분이다.
고고학적 유품으로는 경전 등의 각명동판(刻銘銅板)에 패엽을 모방한 것이 있어 패엽의 사용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학자에 의해서는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현존하는 패엽은 4-7세기경의 것이 있다. 요컨데 화수피나
패엽은 실용적인 소재이지만, 부패하기 쉬워 남아있는 것은 극히 적다. 쿠르티우스(Quintus Curtius)의 고대 인도
기록 가운데에는 알렉산더의 인도 진공(進攻) 당시 북인도에서 화수피를 서사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실담자기』에 ꡐ건다라국(犍陀羅國)의 희다가문(喜多迦文)ꡑ이라고 하는 것은 간다라 지방에서 사용된 로히타카
(Rohitaka)라고 하는 수피의 일종에 쓰여진 범자로 간주된다.
또 11세기경 앗시리아의 알․비루니(Al Bīrūnī, 973-1048)의 『인도기(記)』에는 산스크리트가 화수피에 서사되었던
것을 전하고 있다.
화수피의 문헌으로 최고의 것은 중앙아시아 코탄 지방의 고싱가 정사(精舍, Gosiṅga-vihāra)의 유적에서 발굴된
단간으로, 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지방은 건조지대에 있기 때문에 부패를 면할 수 있었던 것같다.
패엽 즉 다라엽(tālapattra)은 『번역명의집(飜譯名義集)』제3에 ꡐ구(舊)로는 패다(貝多)ꡑ라고 나와있다. 이것도 인도
본토에서는 오래된 시대의 것은 없고 일본의 법륭사 소장의 반야심경, 불정존승다라니의 2엽이 세계 최고의 패엽으로서
알려진다. 사전(寺傳)에 의하면 추고제(推古帝) 16년(608)에 소야매자(小野妹子)가 수(隋)로부터 가지고 온 것이라 한다.
글자체는 확실히 북방계 굽타형에 기원을 두고 있는 6세기경의 서사이다. 제1점획이 발달하여 우아한 감을 준다.
제1점획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도 오형도오개대사(五形圖五箇大事)라고하는 실담자모상의 상전(相傳)이 있으며, 공해는
연엽형(蓮葉形), 진언원(眞言院)은 발심형(發心形), 아각방(阿覺房)은 삼두형(三頭形), 공굴방(空窟房)은 사형(蛇形),
변지원(遍知院)은 매두형(埋頭形)이다. 그 원초형은 법륭사 사본에서 인정된다.
서(書), 문자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의 lipi는 고대 페르샤어의 dipi의 와전이라 일컬어진다. 그러나 lipi의 어근 lip는
ꡐ바르다ꡑꡐ물들이다ꡑ를 원뜻으로 하며, ꡐ쓰다ꡑ라고 하는 동사이다. 『리그베다』에서는 lip의 고형(古型)인 rip가
있으며, ꡐ고착(固着)하다ꡑ라고 하는 동사인 까닭에 인구어에 공통된 말일런지도 모른다. 인도에서는 『파니니 문법』
에 처음으로 보이며, 이란어계로부터 기원전 4, 5세기경에 인도에 들어온 것으로 보여진다. rip 가 바르다, 물들이다
라는 의미인 점에서 당연히 묵(墨, maṣi)의 사용에 의한 문자의 서사가 생겨난 것을 예상할 수 있다. 묵은 매연(煤煙)을
재료로 한 것이다.
또 산스크리트에서는 chindati( √chid 세겨넣다, 자르다), likhati( √likh 휘젓다)라고 하는 동사가 모두 문자를 쓴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것은 점토, 금속, 암석등을 소재로 하여 기록을 위해 각명(刻銘)한 시대의 서사형태를 시사하는
것이다. 문자를 가리키는 lekha도 또 동사 √likh(젓다, 세기다)에서 파생한 말로, 서사의 재료가 패엽 등이며, 필사의
도구는 철필상(鐵筆狀)이었던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수피(樹皮), 다라엽 모두 경질의 첨두필(尖頭筆)을 사용하여 자국을 세겨 문자를 쓰고, 목탄즙이나 매즙(煤汁) 등을
칠한 뒤 닦아 문자를 드러나게 한다. 후에는 묵즙(墨汁)을 사용하게 되었다. 예를들면 기원전 2세기의 안데르(Andher)
지방 출토의 탑파 중에 담겨있던 사리기의 묵서가 좋은 예이다.
또 니아르코스(Nearchos)는 알렉산더의 인도 진공 시대 북인도에서는 이미 묵을 사용하여 문자를 쓰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필(筆)을 의미하는 레카니(lekhanī) 또는 레카나(lekhanā)는 문자 그대로 ꡐ긁어 나타나는 것ꡑ으로, 경질의 펜을 사용
하여 문자가 쓰여진 것을 말하고 있다. 팔리어도 서사시 산스크리트 레카니와 같은 형의 lekhaṇī라는 여성형으로,
『증지부경전(增支部經典)』(Aṇguttara-nikāya, II,200), 『자타카 이야기』(J.,I,230) 등에 보이며, 따라서 초기불교시대
(기원전 5,4세기경)에 이미 철필상의 펜이 사용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기원전 5백년경, 이미 범자의 47
자모가 성립하고 있었던 것에 비추어보면 이해가 된다. [대서사시 『마하바라타』(Mahābhārata, I,78) 참조]
산스크리트로 필, 펜을 의미하는 다른 하나는 칼라마(kalama, karama)이다. 이것은 그리이스어의 칼라모스(kalamos
=라틴어의 calamus)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그리이스의 헬레니즘 문화가 인도에 유입될 즈음 수입된 갈대 펜을 의미한다. 오늘날에도 힌디어와 네팔어로 펜은 칼람(kalam)이다.
범자의 자형은 서사의 재질이 암석, 금속, 점토 등 비교적 경질(硬質)인 경우와 필사용구가 경질인 경우, 양자 모두
경질의 경우에는 문자가 직선형의 세자(細字)이다. 또 화수피 등에 자국을 세기는 경우에는 세자용의 경질펜을 사용한
것으로, 따라서 당연히 그 필치는 세자형이다. 아쇼카왕의 기원전 3세기 중엽부터 2세기경까지의 범자가 세자형인
것은 서사의 재질과 필사용구에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이스로부터 수입된 갈대펜이 인도에서도 제작
되고 보급하게 됨에 따라 글자형에 비대한 부분과 가늘고 긴 부분이 나타나게 되어 우아한 모습의 문자가 생겨났다.
쿠샤나왕조이후 굽타형이 되면, 비대한 부분이 한층 명확하게 된다.
4. 범자의 중국전래
중국에 불교가 전래한 것은 후한(後漢)시대인 까닭에 산스크리트 원전은 불교의 전파와 함께 알려졌을 것이지만, 문헌상
범자자모의 서첩이 전해진 것은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의 안공실역경록(安公失譯經錄) 가운데『실담모(悉曇慕)』
2권이 최초이다. 모(慕)는 모(摹)의 오자로 보여지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4세기 후반에는 중국에 북방 굽타형의 범자
가 알려졌던 것이 된다.
또 동사보보리원장(東寺寶菩提院藏)의 『고사본록외경등목록(古寫本錄外經等目錄)』에 의하면 공해록외소전(空海錄外所傳)
으로서 『라집실담장(羅什悉曇章)』1권과 『섬파성실담장(贍波城悉曇章)』1권이 기록되어 있다. 전자가 라집삼장이
전한 실담장이라고 한다면, 5세기 초두에 이미 장안(長安)에서 실담자모의 학습이 행해졌으리라 생각된다. 또 후자의
섬파성은 참파(Campā)로, 중인도 갠지스강 중류지방, 초기불교시대의 앙가(Aṅga)국의 수도, 현재의 바갈푸어(Bhagalpur) 근방에 위치한다. 따라서 이것도 아마 중인도의 표준적인 북방 굽타형에 속하는 실담자의 서첩이었다고
추측된다. 불교의 경전에서도 가령 동진(東晋)의 법현(法顯)역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제14 문자품(文字品), 북양(北涼)의 담무참(曇無讖)역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제4 여래성품(如來性品) 등에는 범어 자모에 대한 불교적인
해석이 보이며, 이들 경전의 전역(傳譯)과 함께 범자를 배우는 자도 생겨났다고 생각된다.
중국불교의 최성기인 당대에 국한해 보더라도 중국에는 당시의 범자실담의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고, 패엽범본도
현존하지 않는다. 도리어 일본에는 인도에서 전래한 패엽범본의 단간이 현존하고 있다. 나라(奈良) 법륭사(法隆寺),
경도(京都) 지은원(知恩院), 경도 차아청량사(嵯峨淸凉寺), 판본(坂本) 내영사(來迎寺), 대화(大和) 해룡왕사(海龍王寺), 대판(大阪) 사천왕사(四天王寺), 하내(河內) 고귀사(高貴寺)등에 소장된 패엽은 모두 어느때 일본에 전래하였는지는
미상이지만, 아마도 나라시대에 당을 경유하여 들어왔을 것이다. 이것들은 6,7세기 사본으로, 모두 북방 굽타형에 속
하는 범자로 쓰여져있다. 서북인도의 길기트 출토의 『법화경』등을 제외한 이외에는 인도 본토에서도 이런 류의 오래
된 패엽은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일본의 패엽단간은 매우 귀중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것들 가운데 주요한 것을
살펴보기로 한다.
[법륭사 패엽단간]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패엽으로 알려진다.『반야심경』『불정존승다라니』를 서사한 2엽으로, 말미의 1행만은 실담자
모가 모두 나열되어 있다. 강호(江戶)시대에 강호 영운사(靈雲寺)의 정엄(淨嚴), 경도 지적원(智積院)의 징선(澄禪)이
실담자모의 기본적 자형으로서 배운 것이 바로 이 법륭사 패엽이었다. 6세기 후반 굽타형 범자의 일종이라 생각되지만,
일찌기 일본을 방문한 프랑스의 실비앙 레비 박사는 7세기의 서체로 간주하였다.
[고귀사 패엽단간]
거의 6세기, 더 내리더라도 7세기경의 것이라 생각된다. 자형은 굽타형의 범자 특징이 거의 과장되어 있는 듯하며,
비대한 범자로, 글자체가 크다. 이런 종류의 것으로는 법륭사 패엽과 함께 세계 최고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고귀사는
『범학진량(梵學津梁)』1천권을 지은 자운(慈雲)이 주지이었기 때문에 그가 이 패엽 범본을 모범으로 자운풍의 범자를
만든 것은 널리 알려져있다.
[경도 차아청량사 패엽단간]
법륭사의 패엽과 거의 같은 시대이거나 아니면 조금 내려와 7세기 중엽일 것이다. 『구사론(俱舍論)』 분별계품(分別
界品)의 단편으로, 이것과 같은 종류의 것으로 동사(東寺), 해룡왕사(海龍王寺)의 패엽범본이 있다.
[고야산(高野山) 보수원(寶壽院) 지본(紙本) 패엽단간]
고야산 보수원이 소장한 『열반경(涅槃經)』여래성품(如來性品)의 단편은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된 본경의 범본 잔간
(殘簡)과 함께 매우 귀중하지만, 패엽의 양식을 포함해 그것이 지본이라고 하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전승에 의하면
홍법대사(弘法大師) 공해(774-835)의 서사라고 하지만, 이 단편의 발견자인 고남순차랑((高楠順次郞) 박사는 7세기의
사본으로 간주하고 있다. 어쨋든 인도의 패엽범본이 중국에서는 종이를 사용하여 그 양식대로 서사되어진 적이 있었던 것을 증명하는 단간으로서 특이한 자료이다. 이와같이 하여 중국에서 전사(轉寫)된 것이라고 하지만, 서체로부터 보면 6,7세기경의 것으로 북방 굽타형 범자의 표준적인 자형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견당사(遣唐使)였던 소야매자(小野妹子)의 장래품 가운데 패엽범본이 있었다고 하여 앞서 법륭사 패엽도 매자가 전한
것이라고 한다.
천평승보(天平勝寶) 6년(754) 감진(鑑眞)은 천축 주려(朱黎)의 자장(字帳)을 성무제(聖武帝)에 헌상하고 있다. 더욱이
천평8년(736)에 일본에 온 임파국(林邑國)의 불철(佛哲), 남인도 출신의 바라문 승정(僧正) 보디세나(菩提仙那),
이 두 사람 모두 범본, 범어자모를 일본에 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불철은 『실담장』1권을 전지하고, 나라 대안사(大安寺)에서 범어를 가르쳤다. 이와같이 일본에서도 나라시대에는 실담자모의 학습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앞에서도 보았듯 실담자모의 기원은 분명치 않다. 천태종의 안연(安然, 841-915)은 그의 『실담장』 가운데 4종 상승
(相承)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1)범왕(梵王) 상승 (2)용궁(龍宮)상승 (3)석가(釋迦)상승 (4)대일(大日)상승의 넷이
그것이다.
(1)은 곧 범왕 브라만신(범천)이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미 인도에서 실담자모를 브라흐미라 부른 것에 유래하는
전승이라 생각된다.
(2)는 진언밀교 전지(傳持)의 초조인 용맹(龍猛)보살이 용궁으로부터 전했다고 하는 것으로, 용궁에서 경을 얻었다는
전설에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굽타형의 이종(異種)인 나가리 문자의 성립과 관계가 있을런지도 모른다.
(3)은 『문수사리문경(文殊師利問經)』『대반열반경』『대반야경』『대집경(大集經)』등에서 설하는 실담자모의
자음(字音), 자의(字意)를 예상시키는 것으로, 이것들은 그 전래가 여러 경전에 전해지고 있는 까닭에 그 기원을 석가
상승이라고 한다.
(4)는 밀교의 교주인 법신대일여래(法身大日如來)가 설했다고 하는 것으로, 『금강정경(金剛頂經)』석자모품(釋字母品),
『대일경(大日經)』자륜품(字輪品)등에 보이는 50자모등을 예상하는 상승이다.
그러나 자운(慈雲)은『실담자기문서(悉曇字記聞書)』에서 4종상승을 심하게 비판하고 이것을 부정하였다.
공해는『범자실담자모병석의』의 벽두에 ꡒ이 범자 실담은 인도의 문서(文書)이다ꡓ라고 말하고, 『서역기』의 ꡒ범천이
만든 바, 5천축국 모두 이 글자를 사용한다 운운ꡓ을 인용하고, 나아가ꡒ세인은 그 원유(元由)를 모르고 범왕의 소작이라고 한다. 만약 대비로자나경(대일경)의 말에 의한다면, 이 문자는 자연도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여래의 소작도
아니며, 또 범왕제천의 소작도 아니다ꡓ라고 평하고 있다. 실담자모의 자음, 자의에 대해 설한 『문수사리문경』『대반
열반경』등은 중국 남북조 시대에 번역된 것이다. 이들 경전은 중인도 지방에서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까닭에 거기에 기록된 범자도 북방 굽타형의 계통에 속했던 것이 틀림없다. 더욱이 수나라 혜원(慧遠)이 지은 『대반열반경의기(大般
涅槃經義記)』제4에는 실담자모에 관한 자료의 소개, 해설이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범자의 성립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당대에는 수종의 산스크리트 사전류가 편집되었다. 그 중 주요한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번범어(飜梵語) 10권
번역명의집(飜譯名義集) 7권 송(宋) 법운(法雲) 편
범어천자문(梵語千字文) 1권 당(唐) 의정역(義淨) 역
범어천자문(梵語千字文, 別本) 1권 상동
당범문자(唐梵文字) 1권 당(唐) 전진(全眞) 집(集)
범어잡명(梵語雜名) 1권 당(唐) 예언(禮言) 집
당범양어쌍대집(唐梵兩語雙對集) 1권 당(唐) 승달다벽다(僧怛多蘗多)
바라구미사사(波羅瞿那彌捨沙) 집(集)
범자, 자모, 서첩 등에 대하여 현장은 『서역기』권2에서 소개하고 있지만, 자모는 47자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의정은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제4에서 자모수를 49자라고 하고 있다. 또한 중국에서는 송대에 『천축자원(天竺
字源)』7권이라는 대저가 있다.
밀교의 교의와 실천체계 그 자체는 실담학의 지식 위에 구축되어진 것으로, 중당(中唐)의 밀교 최성기에는 진언다라니
등을 구성하고 있는 실담자모의 학습, 연구가 성행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일본의 실담자모의 연구도 또 평안초기에 최징(最澄), 공해 등 입당팔가(入唐八家)를 중심으로 한 밀교가(密敎家)의 손에 의해 개척되어진 것이다.
슈바카라싱하(Śubhakarasiṃha, 善無畏, 637-735)는 중인도 마가다의 왕족출신으로, 나란다 대학에서 공부하고,
내당(來唐)하여 『대일경』을 번역했다. 그는 북방 굽타형의 문자를 전했다고 생각된다. 그 범자의 서풍(書風)은 석산
사(石山寺) 소장의 『오부심관(五部心觀)』에의해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장안(長安) 청룡사(靑龍寺)의 법전(法全)으로
부터 태밀의 원진(圓珍, 814-891)이 받은 것이다. 금강지(金剛智, 681-741)도 또 나란다 대학에서 배우고 내당하여
『금강정경』을 번역하였다.
불공(不空, 705-774)은 밀교부법(密敎付法)의 제6조로, 혜과(惠果)의 스승이다. 서역지방 출신으로 보여지지만,
『송고승전』제1의 불공전(不空傳)에 ꡒ15세때에 금강지 삼장에 사사(師事)했다. 처음 배울때 범본 실담장 및 성명론(聲明論)을 가지고 공부했다ꡓ라고 하듯이, 그는 금강지로부터 실담자모 및 인도의 산스크리트 문법학(Śabdavidyā)을 배운 것을 알 수 있다. 불공의 범자는 북방 굽타형의 것으로 생각된다.
인화사(仁和寺) 소장의 존승다라니 잔간(殘簡)은 불공의 범자라고 하며, 또 강호시대에 송연(宋淵, 1786-1859)이 지은
『아차라첩(阿叉羅帖)』에는 불공이 썼다고 하는 범자가 전해진다.
요컨데 중당이후 중국에서 범자의 서체는 거의 일정한 형태로 완성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패엽이나 수피(樹皮) 대신
중국에서는 모필(毛筆)로 종이에 썼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지만, 범자의 자형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한편 당대에는
박필(朴筆)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쿠티라형에 가까운 서체의 범자가 나타났다. 공해가 혜과로부터 전수받은 진언 7조상의
몇몇 조사명의 범호(梵號)는 공해가 가지고 온 비백체(飛白體)와 함께 박필서 범자의 귀중한 자료이다.
공해의 은사는 진언부법 제7조인 혜과(746-806)이다. 혜과는 실담을 담정(曇貞), 불공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공해의 범자는 혜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지만, 재당(在唐) 중에 필사한 『삼십첩책자』 가운데 몇몇의 범자는
그 서사한 경궤(經軌)의 내용으로부터 보아 기본적으로는 불공의 범자를 배운 것이라 생각된다.
또 앞서 말한 『아차라첩』에 수록된 불공서라 전하는 것과 『삼십첩책자』 가운데 범자를 대비시켜 보면, 비슷한 점이
적지 않다. 인화사에 원본이 있다고 하는 『주범자차제기(註梵字次第記)』는 공해가 쓴 것이라고도 또 공해가 가져온 것
이라고도 한다. 이것을 『아차라첩』에 대비시켜 보면, 매우 비대한 서체로, 같은 『아차라첩』에 수록된 『자모표』의 혜과서의 범자에 공통적인 서체다운 힘이 있어, 후의 대사류(大師流) 서체의 습관이라 생각된다.
5. 일본인의 범자 연구
전통적으로 공해는 입당하여 실담자모를 담정에게 배웠기 때문에 공해의 범자는 담정상승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 거의
정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공해가 <대당신도청룡사고삼조국사관정아사리혜과화상(大唐神都靑龍寺故三朝國師灌
頂阿闍梨惠果和尙)의 비(碑)>에 ꡒ마침내 곧 고위대조선사(故諱大照禪師, 曇貞)에 대해 그를 스승으로 그를 받들다ꡓ
(『性靈集』권제2)라고 스스로 쓰고 있듯이, 공해 입당시에 담정은 이미 고인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오전(誤傳)
이다. 하지만 이 담정상승에 어떠한 근거가 있다고 한다면 담정―혜과―공해의 상승계보가 성립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만약 또 앞서 서술했듯이 공해는 불공의 범자를 배웠다고 한다면, 금강지―불공―공해라고 하는 상승계보로부터 보아
공해의 『삼십첩책자』의 범자는 나란다 대학을 중심으로한 북방 굽타형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더욱이 또 공해는 재당중에 서북 인도 캐시미르 출신의 반야삼장(般若三藏), 중인도 출신의 모니실리삼장(牟尼室利三藏)
에게 배우고 특히 반야삼장으로부터는 공해의 귀국시에 40권본 『화엄경』(입법계품), 『수호경(守護經)』『이취육바라
밀경(理趣六波羅蜜經)』등 삼장번역의 경전등 4부61권과 함께 범협(梵夾) 3구(口)도 받았을 정도인 까닭에 삼장으로
부터 직접 범자의 지도를 받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예상된다. 이 범협은 보통 말하는 #43088;범협(梵篋)ꡑ으로 폐엽에
기록한 산스크리트 경전을 상하에 판목을 끼워 좌우 2개소의 구멍에 끈을 통과시켜 묶은 것이다. 소지할 때는 등에 지고 가슴에 끈을 묶는다. 또 공해 소석(所釋)의 『일행선사실담자모표(一行禪師悉曇字母表)』는 선무외의 제자 일행(683-727)의 저작이 아니라 공해의 찬술로 보는 것은 전구보주(田久保周) 예사(譽師)의 설임을 기록해 두고자 한다.
입당하여 직접 인도출신의 불교도에 사사하여 실담자모를 배웠다(혹은 배웠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다음과 같다.
반야삼장․모니실리 삼장 ------ 공해(東密)
난다삼장(難陀三藏, 중인도 출신)------ 원행(圓行, 東密)
보월삼장(寶月三藏, 남인도 출신)------ 원인(圓仁, 台密)
만소실달라(曼素悉怛羅)------ 원진(圓珍, 台密)
헤이안 초기에 소위 입당팔가는 모두 귀중한 범자 자료를 가지고 왔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공적이 뛰어난 사람은 공해로
단연 발군(拔群)이다. 공해는 일본에 있어 그 후 범자 실담학의 기초를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이하 공해에
대한 범자 연구상의 문제를 거론해 보기로 한다.
공해는 혜과에 사사하기 전에 두명의 삼장으로부터 배웠다. 그리고 『청래목록(請來目錄)』에 공해가 혜과로부터 밀교의
대법을 받은 것을 기록한 뒤에 ꡒ(6월상순) 이때 이후 태장(胎藏)의 범자 의궤를 받고 …… (8월상순) 범자범찬을 시간을
두고 배웠다ꡓ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이의 소식은 또 『약부법전(略付法傳)』에도 나와있다. 더욱이 또 ꡒ지금 일본의
사문 공해라고 하는 자가 있다. 와서 비교(秘敎)를 구한다. 양부의 비오단의인계(秘奧壇儀印契)를 주었는데 한범(漢梵)
모두 어긋남이 없이 모두 마음으로 받는다. 마치 사병(瀉甁)과 같다ꡓ라고 하는 것은 혜과의 찬사로서 전해지지만,
ꡐ한범 모두 어긋남이 없이ꡑ라고 하듯이 공해가 얼마나 실담학에 능통했던가를 엿볼 수 있다.
공해는 『청래목록』에 42부44권이라는 방대한 범자진언찬 등의 목록을 싣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석교(釋敎)는 인도를 근본으로하고 서역동수풍범(西域東垂風範)에 걸쳐있다. 언어는 초하(楚夏)의 운(韻)과 다르며,
문자는 전예(篆隸)의 체가 아니다. 이런 까닭에 그 번역에 있어서는 곧 청풍(淸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진언
유수(眞言幽邃)로서 글자의 뜻은 심오하다. 음에 따라 뜻을 고치면 곧 잘못되기 쉽다. 거의 방불(髣髴)을 얻고 청절(淸切)
한 것을 얻지 못한다. 이것 범자가 아니라면 장단을 구별하기 어렵다. 근원적인 뜻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문장의 뜻은 다음과 같다. 곧 석존의 가르침은 인도가 근본이다. 따라서 서역, 중국의 교풍 궤범과는 훨씬다르다.
인도의 언어는 중국의 음운과 다르며, 그 문자는 전서, 예서와 훨씬 다르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어로 번역하지 않으면
석존의 청량한 교풍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진언은 뜻이 깊고, 한자 한자의 의미에 깊은 뜻이 있다. 음운에 따라서
의미를 바꾸어 버리면 음의 직요(直拗)․장단이 틀리기 쉽다. 대체로는 비슷하지만, 정확할 수는 없다. 이것은 범자를
사용하지 않으면 음운의 장단을 구별할 수 없다. 인도 전래의 본래 범자를 그대로 사용하는 까닭도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공해의 실담 범자에 대한 기본적인 견해를 보이는 것이며 동시에 공해가 재당중에 인도 전래의 범자를 충실히
학습한 것을 상상시키는 문장이다.
『청래목록』의 ꡐ범자ꡑ항에는 『범자실담장』1권이 있으며, 동일하게 ꡐ논소장등(論疏章等)ꡑ의 항에는 『실담자기
(悉曇字記)』1권, 『실담석(悉曇釋)』1권이 기재되어 있다. 이 가운데 『실담자기』는 지광(智廣)의 찬술로, 아마도
공해는 재당중에 지광의 자기를 배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목록외에 『라집실담장』1권, 『섬파성실담장』1권이 있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공해가 일본에 지광의 『실담자기』를 최초로 가지고 온 것의 의의는 크다. 귀국후 천태종의 전교대사(傳敎大師) 최징이
이것을 공해로부터 빌려 본 것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으며, 이후 일본 실담학의 표준적인 텍스트로서 유포되었다.
실제 실담관계의 저작으로 후세 일본의 실담연구의 대상이 되어 가장 많은 주석이 쓰여진 것이 이 『실담자기』이다.
지광(-806)은 천태산에서 남인도 출신의 프라즈냐 보디(Prajñābodhi 般若菩提)로부터 실담을 배우고 이것을 적어놓은
것이 이 책이다.
반야보리에 대해서는 전혀 불명이라해도 좋다. 태밀의 안연(-915경)은 반야보리를 공해가 사사한 반야삼장과 동일인물로 취급하지만, 근거가 있는 추측은 아니다. 어쩻든 지광의 실담자모는 모음(mātṛkā, 摩多) 12, 자음(vyañjana, 體文)
35의 47자모로 되어있으며, 이것들의 결합 방식을 18장에 거쳐 설명하고 있다. 이것에 의해 실담자모의 배열과 결합
방법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실담절계십팔장(悉曇切繼十八章)>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해오고 있다.
후대의 것이긴 하지만 범자의 유래를 상세하게 설한 자운(1718-1804)의 『실담상승내유(悉曇相承來由)』에 공해의
소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스승이 말하기를, 이 대사의 실담에 대해서는 2종류의 전승이 있다. 그 첫째를 남천(南天)상승이라 한다. 자기(字記)에
전하는 것이 이것이다. 둘째를 중천(中天)상승이라 한다. 스승의 설로 전해지는 것이 이것이다. 이중 중천으로서 정전
(正傳)을 삼고, 남천을 방전(傍傳)으로 한다. 대체로 대사는 그것을 혜과로부터 받고, 혜과는 그것을 불공으로부터,
불공은 그것을 금강지로부터, 금강지는 처음에 아버지인 바라문으로부터, 아버지는 그것을 용지(龍智)로부터, 용지는
그것을 용맹(龍猛)으로부터 받았다. 그리고 그 범문은 겁(劫)에서 겁에 이르기까지 불생불멸이며, 법이상주(法爾常住)한
것이다. 혹 그 수연유전(隨緣流傳)에 대해 말하면, 범천소설이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안연의 소위 4종상승 중의 뜻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여기에서 전하는 바와같이 공해는 남인도 출신의 프라즈냐 보디가 전한 지광의 『실담자기』를 배우고, 또한 중인도의
나란다 학통을 전한 금강지 류를 본령으로 하였기 때문에 실담에 관해서는 2종의 상승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귀국후
공해는 『대실담장』2권, 『범자실담자모병석의』1권을 지었으며, 이것들은 모두 실담 입문서적인 성질의 것이다.
또 범자에 대해서는 『홍법대사전집』제2집에 실린 것이 있지만, 앞의 것은 고판본(古板本)이고 뒤의 것은 전집을
편집할 때 새로 고쳐 쓴 것인 까닭에 서체의 참고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편집에 관계한 장곡보수(長谷寶秀)
사(師)의 후주에 의하면, 『범자실담자모병석의』는 석산사경장(石山寺經藏) 구수(久壽) 2년사본, 인화사장(仁和寺藏) 구안(久安) 2년사본등이 존재하는 것이 알려진다. 『대일경』『대일경소』『금강정경』등의 밀교경전에는 진언다라니 및 범자 하나하나의 자모(자문)이 설해져 있다. 공해는 이것에 근거하여 『성자실상의(聲字實相義)』『흠자의(吽字義)』등 밀교적인 언어철학을 설한 것을 비롯하여, 『십주심론(十住心論)』권제10의 ꡐ진언의 자문(字門)ꡑ과 그 밖의 다수의 찬술 가운데에 밀교 독자적인 언어해석을 행했던 것이다.
홍인(弘仁) 14년(823) 10월10일에 공해는 진언학도 필수의 텍스트를 열거한 『진언종소학경율론목록(眞言宗所學經律論目錄)』(약칭 『三學錄』)을 제정했다. 이 가운데 『문수문자모품』1권, 『화엄입법계사십이자관문』1권 등 자문에 대하여 설명한 전적의 이름이 보이고 있으며, 또 범자진언찬등 40권의 리스트는 『청래목록』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후에
성명업을 삼업도인(三業度人) 중에 정한 의도를 여기에서 살펴볼 수가 있다.
삼업도인이란 금강정경계의 경전의궤의 연구를 따르는 금강정업인(金剛頂業人), 대일경계의 경전의궤의 연구를 따르는
태장업인(胎藏業人), 진언다라니등의 암송․실담의 문법연구․범자의 연구를 따르는 성명업인(聲明業人)으로서, 승화(承和) 2년(835) 정월23일에 이 각부분의 전문가 계(計) 3인의 연분도자(年分度者)의 허가가 있었다. 전날 22일자로 칙허가 내려진 것은 성명을 업으로하는 사람으로서 ꡒ실로 암기하여 『범자실담장』1부1권을 서송(書誦)하고, 동시에 『대공작명왕경(大孔雀明王經)』1부3권을 서송하며, 또 『성자실상의(聲字實相義)』를 배워야 할 것이다ꡓ라고하는 내용이었다.
이 가운데 『범자실담장』은 같은 이름의 책이 『청래목록』에 실려있다. 단 목록에서는 2권이다.
재주(再奏)한 것이 다음날 칙허로서, 이것은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권4에도 보인다. 즉 성명업인으로서 ꡒ실로
범자진언대불정(梵字眞言大佛頂) 및 수구다라니(隨求陀羅尼) 등을 암송하여야 한다. 오른쪽 하나의 업을 가진 사람은
실로 동시에 『대공작명왕경』1부3권을 배워야 한다ꡓ는 내용이다.
이렇게하여 일본에서 범자실담학의 기초가 완성된 것이다.
에도시대에 징선(1613-1680), 정엄(1639-1702) 등 범서의 대가는 모두 법륭사의 패엽을 모범으로 삼았다. 또 자운을
비롯한 갈성(葛城 )고귀사의 역대학장은 고귀사 패엽을 모범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범자에 관한 정통적인
서풍 가운데에는 7세기경의 인도 북방 굽타형의 범자 자체가 현재에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산스크리트의 동사조직] (1) 기본특징
1. 기본특징
서구언어의 문법에서 말하는 시제(tense)에는 분명한 시간(time)의 요소가 들어있다. 그러나 언어에 따라서는 가령
중국어와 같이 문법요소로서의 시제가 없는 경우도 있다. 중국어에서는 시제가 아니라 어스펙트(aspect), 즉 개시.진행.
완료와 같은 동작의 시간적 양태.과정이 중시된다. 산스크리트에서도 베다(Veda)기에는 <시간>의 요소가 그다지 중요
하지 않고, 그 행위가 완료했는지(completed) 안했는지(imcomplete 혹은 continuous)의 여부가 중요한 기준이었다.
이 경우 과거(past time)라는 개념은 완료한 행위로부터 2차적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행위를 과거의 행위나 미래의 행위로 보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어떻게 전개되는가”라는 양태(aspect)로부터
보는 것이 가능하며, 소위 이와같은 주관적 관념(syntactic precepts)이 산스크리트 동사조직의 주요한 기반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법(mood)의 차이에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법이란 mode 나 manner의 의미로 요컨대 말하는
사람이 말하고 있는 행위를 단순히 동작으로서 말하고 있는가, 혹은 명령, 요청, 희망 등 갖가지 심정 등을 담아 말하고
있는가 하는 양태의 견해에 의한 구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동사의 조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변화를 살펴볼 수가
있다.
2. 동사조직의 변화
베다(Veda)기의 동사활용에는 4개의 계통이 있다. 4개의 계통과 법과의 관계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의 표와 같다.
현재계통, 완료계통, 아오리스트계통, 미래계통의 넷이다. 표에서 보듯이 이 네 계통은 각각 다섯의 변화가 있다.
왼쪽의 둘은 시제이며, 나머지 셋은 법이다. 시제에는 제1차 시제와 제2차 시제가 있다. 2차 시제는 오그멘트가 있는
형태로 preterite라고도 부르고 있다. 역사적 시제(historical tense)라고 하는 호칭도 있다. 3개의 법이란 원망법(optative), 명령법, 가정법이다. 표에서 보듯이 베다기(기원전16-기원전6세기)에는 아오리스트의 1차 시제가 이미
없어졌기 때문에 동사조직은 전부 19개이었다. 고전기(classical Sanskrit, 기원전4-5세기)에는 이중 9개가 남아
있다. 표에는 없는 복합미래는 후에 생긴 것이다.
이 동사조직에서 고전기까지 거의 그대로 남은 것은 현재로, 시간이 지나면서 사용빈도가 높아졌다. 3개의 법
가운데는 원망법(또는 가능법)과 명령법이 남고, 가정법은 사라졌다. 베다기의 완료조직에는 5개의 변화가 있다.
1차 시제는 완료로서 고전기에는 남았지만, 2차 시제 즉 augment preterite는 베다기에 이미 드문 상황이었다.
고전기에는 극히 드물게 나타난다. 완료계통의 3개의 법은 베다기에는 리그베다 이외에는 드물다.
계통법 |
직설법(indicative) |
원망법 |
명령법 |
가정법 | |
1차시제 |
2차시제 | ||||
현재계통 |
현재(present) |
과거 |
원망법 |
명령법 |
** |
완료계통 |
완료(perfect) |
* |
* |
* |
** |
아오리스트계통 |
* |
아오리스트 |
일부가 |
** |
** |
미래계통 |
단순미래 |
조건법 |
** |
** |
** |
* 베다기에 이미 사용되지 않음
** 베다기에는 있었지만 고전기에는 없어짐
아오리스트계통에서는 베다기까지는 이미 1차 시제가 소실하고 그 후 2차 시제만이 사용되어지지만, 아오리스트
자체의 사용빈도는 점점 줄어들었다. 옛 리그베다에는 동사의 반수가 아오리스트 형으로 사용되었지만, 고전기의
『나라왕 이야기』에는 전체 중에 불과 29회만이, 『히토파데샤』에는 8회, 『바가바드 기타』에는 6회만이 나타나고
있다. 고전기의 산스크리트어에서는 아오리스트 본래의 ‘일시적 동작’을 나타내는 성질이 희박해지고, ‘단순한 과거’를
나타내게되며, 이것은 본래의 기능에 완료와 과거의 기능이 더해졌기 때문인 것이다.
법 가운데에는 원망법 아오리스트의 일부만이 고전기에 기원법으로서 남고, 나머지는 소실되었다.
미래계에서는 1차시제는 소위 단순미래로서 남고, 2차의 preterite도 조건법(conditional)으로서 남았다.
그러나 고전기에는 원망, 명령, 가정의 미래계는 모두 소실되었다.
이렇게 하여 본래는 19개 있었던 동사조직 중에, 고전 산스크리트어에서는 표에서와 같이 9개만이 남았다.
[二宮陸雄『산스크리트語의 構文과 語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