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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지기로 수고하시는 김용선 작가로부터 2권의 수필집을 받았다.
<이렇게 가볍게 되기까지>와 그리고 어제 집으로 도착한
새 수필집 <우포늪에 깃든 마음자리>.
두 권의 책값을 합하면 3만 원이지만 그 값에 해당되는 보답을 못 하는던 중
1971년 합천 출신이라는 김 작가와 1978년도의 합천이 나의 초임지였다는
인연을 겹쳐 봄으로써 김용선 님과의 친분을 억지로나마 엮어보고자 한다.
행여나 엮여지면 책값을 빌미로 술이라도 한 잔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수필>
아내의 귀양지가 된 남편의 초임지
귀향과 낙향은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낙향은 <뜻을 이루지 못했거나 저지당한> 뒤끝이어서
좌절의 상징과도 같다.
내 경우 초임지가 시골중학교였던 사실은
비록 학교의 소재지가 고향은 아니었으되
낙향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 자신 교사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군복차림에 제대는 아직 1년이나 남아 있었다.
장래의 꿈을 서술하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현실적인 제약은 없었다.
“내 손으로 직접 깎은 대리석으로 집을 지을 거야.”
아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뜰에는 벽오동이 있어야 해.
달밤이면 벽오동 그림자가 창에 비쳐야 하거든.”
“그러니까 시골에서 살 거란 얘기죠?”
아내는 내 꿈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 듯 했다.
“아니, 시골이 아니라 전원이지.
대도시 근교의 조용한........”
“직장은요?”
기어이 핵심을 찔러온다.
프리랜서, 저술가, 혹은 만화작가와 같은
자유업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공모전이나 신춘문예, 아니면 스누피 작가처럼 등단하는 절차는
대리석으로 집을 짓는 것처럼 일정 자체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걱정 마. 모든 것은 운명처럼 진행되게 돼 있어.”
그 운명은 진행을 멈추지 않았다.
제대를 몇 달 남겨놓고 서너 군데 쳐 본 입사시험 후
애타게 기다리던 면접통보 따위는 없었다.
대리석 건물은 안개에 뒤덮였고
벽오동은 당분간 씨앗 상태로만 간직해야만 하였다.
제대를 하자 섬진강변 소나무 숲이 우거진 곳과
해인사가 가까운 가야산 자락에 있는 학교 두 군데에서
미술교사를 구하고 있었다.
섬진강은 아내의 시댁인 내 고향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대리석 저택에 살게 해주지는 못할망정
시댁을 왕래하는 부담이나마 덜어주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여 가야산 자락을 택하였다.
2월에 제대, 3월에 부임, 4월 5일 약혼, 10월 9일 결혼.............
운명에 정해진 순서는 어김이 없었지만
초임지가 산골일 줄은 나도 미처 몰랐던 운명이었다.
* * *
험준한 고갯마루로 버스가 힘겹게 기어오르자
여기저기서 꿩이 푸드득 날았다.
차창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계곡은 까마득하여
현기증이 날 지경이 되자 기어이 아내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마산에서 냄비 몇 개와 석유곤로를 시외버스에 실을 때만해도
비록 산골일망정 신혼살림의 단꿈에 젖은 모습이었지만
비포장도로의 먼지구름이 피어오르자
아내의 이마에도 수심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서울서 나고 마산서 자란 아내는 시골 그 자체가 처음이었다.
다행히도 읍내에서 제일 반듯한 한옥 아래채를
세를 얻었다곤 하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산골에서
허풍만 떠는 신랑하나만 믿고 출발하는 인생 자체가
서글프고 두려웠다.
“젊은 시절 잠깐 산골의 풍광에 젖어서 살아보는 것도
아름다운 추억이 될 거야.”
그러나 아내는 남편보다는 현실적이었다.
“설마 평생 그곳에서 살아야 할 일은 없겠죠?”
물론 나는 장담한대로 잠깐인 1년 반(아내에겐 1년 남짓)을
시골에 머물렀다.
그 잠깐 동안 아내가 경험한 전부는 태어나서 최초로 겪는 것들이었다.
* * *
아프리카 세링게티 초원지대에서 풀을 뜯고 있는
수십 만 마리의 누우 떼를 목격하는 순간
그 장관이 주는 느낌은 미적 감동이다.
그것은 암소 서너 마리가 풀을 뜯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장엄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수천만 송이가 피어있는 유채꽃 밭이
아름다운 것도 같은 원리이다.
그러나 소나 유채꽃이 아닌,
수백 수천만 마리의 파리 떼는 결코 미적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초임지 ㅎ읍은 집집마다 돼지를 기르고 있었으므로
파리떼가 극성이었다.
주인집 부엌 천장에 달린 끈끈이 종이에
새까맣게 붙어있는 파리를 보고 아내는 질겁하였다.
“어떻게 해요?”
아내의 인생에서 첫 번째 맞이한 고비였다.
아무리 시골이래도 설마 파리 떼가
우리 인생에 끼어들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잡아야지.”
“한두 마리도 아닌데.......?”
“잡다가 보면 깨닫게 돼 있어.”
“깨닫다니요? 뭘 깨닫는다는 거예요?”
ㅎ읍의 파리 떼는 주택이나 신성한 교실을 불문하였다.
아무데나 떼를 지어 날아다녔으므로
수업중인 교탁이나 칠판일지라도 파리들에겐 안식처였다.
“선생님, 보여주세요!”
설명이 끝나자 아이들로부터 앵콜 공연 요청이 들어온다.
그러면 나는 파리잡이 전용 대꼬챙이를 집어 든다.
50센티 길이의 대꼬챙이의 끄트머리는 수없이 사라져간
파리의 혼들이 장렬하게 산화한 흔적으로 변색이 되어있다.
소림사의 고수가 따로 없었다.
허공에다 몇 번 휘저으면 비행고도를 잘못 잡은 파리들이
대꼬챙이 끄트머리에 부딪혀 추락하는 것이다.
“하나, 두울, 세엣, 네엣..................여덟 마리.
선생님 신기록이에요.”
ㅎ여중에 부임하여 교실에 날아다니는 파리 떼를 처음 보았을 때
나도 아내처럼 난감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파리 떼가 그때처럼 징그럽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파리 떼는 반가운 나의 사냥감이었다.
날고 있는 파리를 잡으려면 먼저 마음을 비워야 한다.
무념무상의 경지에서 대꼬챙이를 집어 든다.
표적이 된 파리의 비행궤적을 눈여겨 지켜보면서
손목을 순간적으로 움직인다.
배드민턴의 스매싱과 탁구의 푸싱 동작이 병용된다.
순간적 움직임의 요체는 손목의 스냅이다.
전광석화처럼 손목을 꺾어서 파리를 명중시킨다.
대꼬챙이를 통해 기분 좋은 충격파가 전달된다.
희열이 온몸을 감전시킨다.
징그러운 파리를 즐거움을 안겨주는 소재로 반전시키는 것,
이것이 생활의 지혜이다.
아내도 생활의 지혜를 깨달아야 한다.
나는 파리채로 파리를 잡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파리를 잡되 파리가 너무 다치지 말아야 한다.
지나치게 충격을 가하면
파리가 통째로 파열되기 때문에 보기에도 흉하다.
가볍게 살짝 충격을 줘서 기절만 시켜야 한다.
이맛살을 찌푸리던 아내도 조심스럽게 파리채를 잡고
한두 마리 잡아보더니 이내 가볍게 살짝 충격을 줘야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얼마 안 가서 아내도 생활의 지혜를 터득하였다.
오히려 지나치게 터득하는 바람에 제동을 걸어야 할 지경이었다.
“여보, 파리 그만 잡고 밥 먹자. 국이 다 식었어.”
* * *
ㅎ읍은 <울고 왔다가 울고 가는 곳>이다.
처음 올 때는 낯설고 서글퍼서 울고, 떠날 때는
정이 들어서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서 운다는 동네다.
아내 역시도 울면서 왔다.
언제 떠나게 될지는 몰라도 서운해서 울어야 할 순서만 남았다.
신혼집 방문 앞에 아이들이 갖다 놓은 고구마나 단감 등속은
ㅎ읍의 인정을 나타내는 징표들이다.
누가 언제 갖다 놓았는지 방문 앞 섬돌 위에는
냄비나 소쿠리에 담긴 삶은 고구마나 발갛게 익은 감이 놓여 있었다.
“그릇을 어떻게 돌려줘요?”
아내의 걱정은 언제나 단순하다.
“제자리에 두면 가져가겠지.”
“어떻게 빈 그릇만 되돌려줘요?”
그러나 우리가 감사의 표시로 담아서
대접해야할 적절한 메뉴는 생각나지 않았다.
<맛있게 잘 먹었다>는 마음만 담아서
빈 그릇을 방문 앞에 내놓을 따름이었다.
밤중에 인기척을 느끼고 일어나 창문을 열어젖히면
어김없이 한 무리의 발자국 소리들이 우당탕 사라진다.
갓 결혼한 선생님의 신혼방은 아이들 호기심의 표적이었다.
우리 부부가 아이들 관심의 대상이 되어준 대가로
섬돌 위에는 감자나 고구마,
심지어 뜨끈뜨끈한 동지팥죽까지 놓이는 것이었다.
300미터 떨어진 남편의 학교에서
국민보건체조 음악이 들려오면
아내는 된장찌개를 연탄불위에 얹어 놓는다.
10분후면 점심시간 체조가 끝나고 남편이 도착할 것이다.
그날따라 새벽에 어떤 아이가 갖다 놓은
이름 모를 딸기 비슷한 과일도 점심상에 올려놓았다.
점심을 먹으러 신혼집에 들린 남편은
새까맣게 변색된 아내의 치아와 입술을 발견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당신 거울 봤어?”
“왜요? 얼굴에 뭐 묻었어요?”
“묻은 정도가 아니야.”
“어머나! 이거 왜 이래요?”
“오디를 먹어서 그래.”
“오디가 뭔데요? 저 딸기처럼 생긴 게 오디에요?”
“경상도 말로 오들깨인데 뽕나무 열매야.
이제 큰일 났어. 오들깨 물이 한번 들면 영원히 안 지는데?”
당장 아내의 얼굴도 학교의 여교사들처럼 사색이 되었다.
그날 ㅎ여중 교무실에서도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었다.
아이들이 알루미늄 도시락에 가득 담아온 오디를
맛있다며 열심히 집어먹던 여교사들이
입술을 닦으려고 거울을 보는 순간 비명을 질렀다.
“어머머! 입 안이 왜 이래?”
“입술도 새파랗네! 수업 들어가야 하는데 선생님 이걸 어째요?”
발을 동동 구르는 도회지 출신 여교사들을 향해
내가 걱정스런 얼굴을 해보였다.
“색소를 긁어서 적출해내는 수술을 받기 전에는 평생 갈 껄요 아마?”
“문디 신선생 말은 순 거짓말이다.
걱정 말고 수업들이나 하고 나오소 고마.”
ㅎ읍 출신 토박이 여선생의 한 마디로 사태는 수습되었다.
* * *
실연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미국 유학을 떠나는 장면은 품격이 있어 보인다.
무엇을 전공하려는지 알 수는 없지만
좌우지간 공항에서의 이별은
시골버스 정류소에서 흔드는 손수건과는
본질적으로 그 무엇이 달라 보이기 마련이다.
삶의 질이란 어찌 보면 그 행동반경이 차지하는
영역의 넓이와 비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상처가
지구 반대편까지 이어지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당시 우리의 신혼생활은 좁디좁은 ㅎ읍내 셋방에 한정된
소꿉장난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유선생님이 세든 방은 너무 좁아서 어떻게 주무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러게. 드나들 때마다 문턱이 낮아서 이마를 찧는다던데.........”
“그 멋쟁이 부부가 참 대단해요. 이런 시골에서 사시는 거 보면...........”
“잠시 머무는 것이겠지...........”
광주 출신 유병현(가명) 선생이
ㅎ여중에는 나와 함께 3월에 부임해 왔는데
190cm에 가까운 훤칠한 키에다 조지 클루니(지금 생각해보면) 같은
이국적인 풍모를 지닌, 시골에선 보기 드문 멋쟁이였다.
부인 역시 탤런트 이휘향(역시 지금 생각해보면)처럼
늘씬하고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한 미인이었는데
첫눈에도 ㅎ읍내에서 살아갈 부부로는 보이지 않았다.
“가구도 아예 없던데요?
비키니 옷장 하나와 애기 기저귀 담은 바구니, 그리고 밥상 하나.......”
“거봐. 이런 시골에 오래 살 사람은 아니라니까?”
품고 있던 의문은 얼마 후 적중하였다.
우리가 사는 신혼 방으로 놀러 온 유선생의 부인은
ㅎ읍내로 흘러 들어온 사연을 밝혔는데
한 편의 드라마 같은 내용이어서
당시 재미있게 시청하던 김수현의 <청춘의 덫>을 능가하였다.
이효춘을 배신한 이정길과 김영애 박근형의 4각 관계는
그 무대가 서울의 한 회사인데 비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간 애인을 추적하여
다시 고국으로 데리고 나온 유 선생의 모험담 자체가
세계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광주 충장로를 주름잡던
무슨 조직(?)을 이탈한 후 경상도 산골로 피신하여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는 대목에 이르면
그 아슬아슬한 애정의 도피 행각이
자못 거룩해 보임은 어쩔 수 없었다.
유 선생 부부의 인생 자체가 극적이고 즉흥적인 데다가
국제적인 데 비해 우리 부부의 인생은
극히 일상적이고 계획적인 데다가 매우 국내적이었다.
“저기 있는 저것은 뭐에요?”
유 선생 부인의 눈썰미는 대단하였다.
건넌방의 소형 냉장고 옆에는 아내가 시집오면서 갖고 온,
또 다른 냉장고 크기의 포장상자가 버티고 있었는데
진작부터 수상해 보였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황급히 둘러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 이런 저런 잡동사니가 좀 있어서..........”
“쓰지 않는 그릇, 접시 따위를 넣어둘 데도 없고 해서요............”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잡동사니가 아니었다.
선견지명을 지니신 장모님이 시집가는 딸에게 손수 챙겨주신 것으로서
처녀 시절 아내가 입던 옷가지가 총망라된 것이었다.
<선생 마누라는 옷 한 가지도 사 입기 힘 든다.
양말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넣어라.>
따라서 그 포장상자는 유 선생 부인과 같이
스케일이 국제적인 인생의 주인공에게는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되는,
자질구레한 우리 인생의 상징 같은 것이었다. ▩

첫댓글 책 값 보다 더 많은 것을 남겨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우포늪에 깃든 마음자리...
글도 좋지만 펜화가 참 좋습니다.
이희숙 님이 그린 건가요?
@신재욱 네, 서양화가인 이희숙선생님께서 잘 표현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