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자궁들이 있다/ 고옥란
저기 자궁들이 있다. 38억 년 전 원시 생명체를 품었던 바다의 기억을 저마다의 이야기로 탄생시키는 구멍. 자궁들은 자궁을 낳고 그 자궁들은 이야기를 낳는다. 자궁들은 자신의 언어로 말하며 웃는다. 때론 자궁들은 울부짖으며 소멸한다.
“결국은 자궁적출밖에는 없어요. 그게 최선이라는 거 아시죠? PET나 MRI 추가 확인해서 전이여부 알아보고 스케줄 잡죠. 혹시 조직검사를 다시 한 번 해보고 싶으시면 그리하셔도 되고요.” 산부인과 권위자 K교수의 말이다. 산부인과, 엄마가 되는 것을 증명해 주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엄마가 될 가능성을 박탈당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조직검사를 위해 칸막이가 된 병실에 둥지를 튼다. 칸막이와 칸막이 사이 우화를 기다리는 애벌레처럼 누운 여인들. 그들도 나처럼 하늘을 향해 누워있을 것이다. 드리워진 커튼 사이 날숨과 들숨들이 오간다. 볼을 타고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눈을 감는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바닷가 모래밭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두껍아, 두껍아, 헌 자궁 줄게. 새 자궁 다오.” 무심한 파도는 모래집을 휩쓸어가고, 아이들의 노래도 사라진다.
바로 옆 분만실에선 막바지 진통을 하는 산모의 거친 호흡과 의료진들의 절박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마침내 어린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경쾌한 울음소리. 꽃처럼 붉은 자궁을 활짝 열고 생명을 쏟아내는 여인들. 나는 이미 말라버린 자궁. 자궁 안에 교묘히 자리 잡은 정체불명의 것을 찾아내기 위해 자궁문을 활짝 연다.
계속해서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 〈결과가 뭐래? 전화 안 받아서 메시지 남겨. 연락 바람.〉 오늘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다. 마음에 스산한 바람이 분다. 인디언 식 용어로 ‘모든 것이 다 사라지지 않은 달’ 이라는 11월. 무엇이 아직 다 사라지지 않았다는 말일까? 희망이, 삶이, 마주해야 할 고통이.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 어제와는 너무도 달라 보인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 같다. 웃으며 장난을 치며, 발랄하게 걷는 그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어제의 나는 그들 무리 중의 한 사람, 오늘의 나는 이방인이다.
〈암이래. 내막암. 이름도 생소하지.〉 〈아닐 거야. 아니겠지. 아무것도 아닐 거야. 걱정 마.〉 남편의 메시지에는 나보다 더 부인하는 목소리가 숨어 있다. 퇴근 후 식탁 앞에 마주 앉은 우리는 차마 서로를 바라보지 못한다. 묵묵히 밥을 먹기 위해 고개를 숙인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아무 것도 아닌 일. 어제까지는 그가 어떤 모습으로 밥을 먹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데 오늘은 그의 뒷모습만으로 눈물이 핑 돈다. 함께 살아 온 20년. 삶의 성적표가 빠르게 지나간다. 행복했을까? 그의 얼굴에도 내 얼굴에도 삶의 흔적이 가득하다. 희로애락이 그린 낙서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함께 그린 낙서.
모든 게 빠르게 진행되었다. 수술 스케줄이 잡혔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앞뒤 베란다의 묵은 집들과 옷장 안의 옷들을 정리한다. “갑자기 왜 그래? 안하던 행동을 다 하고?” 20년 세월 동안 무슨 살림살이가 이리도 많을까? 아껴 둔 것들이 이젠 부질없는 쓰레기로 보인다. 만일 내가 소멸해 버린다면 쓸모를 잃어버릴 물건들이다. 냉동실의 오래된 것들도 끄집어낸다. 언제 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냉동식품들. 냉장고의 정리되지 않은 반찬통들. 어쩌면 일상의 삶이란 이런 것. 냉동실 안의 얼어버린 존재감 같은 것들. 어떤 계기가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찾게 되는 것들.
살기 위한 수술이다. 그럼에도 머릿속에는 살지 못할 가능성이 함께 떠오른다. 결과는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 결여의 틈이 걱정되었다. 혹시 오래 걸릴지 모르는 병원 생활을 염두에 두고 장조림을 만든다. 부글거리는 거품을 걷어내고 꽈리고추와 메추리알을 투하한다. 꽤나 많은 양을 만들어 락앤락 통에 담는다. 먹다가 다시 한 번 끓이라는 메모를 쓰려 볼펜을 찾는다. 메모를 붙일 수 있는 것도 설마 오늘이 마지막은 아니겠지……. 또박또박 정자로 쓴다. 여기저기 밀린 일을 마무리하고 병원에 가져갈 최소한의 물건들을 챙기는 일. 마음이 먼저 줄달음질친다.
병원 로비까지 태워다주고 남편은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하러 다시 직장으로 향한다. 차가 떠나는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회전문 안으로 들어선다. 캐리어를 끄는 모습들이 낯설지 않다. 여행을 위해 호텔 로비에 모인 사람들처럼 보인다. 나도 그 중 하나다. 다만 표정에 설렘이 없다는 것. 여행안내 대신 입원생활 안내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수술 전야, 장을 완전히 비우기 위해 비릿한 약물을 쉴 새 없이 들이킨다. 먹는 것도 힘들지만 비우는 것도 힘들다. 잠이 오지 않는다. 늦은 밤. 수시로 들락거리는 간호사의 발소리. 커다란 유리창에 잘 익은 홍시감이 떠 있다. 어지간해서는 보기 드문 불그레한 달이다. 아기집처럼 보인다. 오래 전 내 자궁에도 두 생명들이 살았었다. 임부복을 고르고 튀어나온 배를 앞으로 쑥 내밀고 뒤뚱거리며 걸었던 나도 한때는 만개한 봄의 자궁이었다.
간절함과 절박함의 뉘앙스에 대해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꿈에서 나는 자궁을 찾으러 돌아다녔다. 맘에 드는 옷을 고르듯 새 자궁을 고르는 꿈. 꿈에서도 피처럼 붉은 달이 떠 있었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을까. 눈을 뜨니 병실이다. 수술은 예정대로 끝났다. 마음에 드는 자궁을 찾아 헤매었지만 끝내 새 자궁을 고르지 못했다. 홍시처럼 붉은 달이 오늘 밤엔 뜨지 않았다. 나른한 봄날 뜰에 누운 고양이처럼 자꾸만 눈이 감긴다. 잠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간호사가 남편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있다. 남편의 눈에 어린 물기가 오늘은 말라있다.
“보호자님, 이게 적출된 자궁이에요. 보다시피 꽤나 큰 근종도 여럿 있지요. 정확한 진단을 위해 다시 조직검사 의뢰할 거고, 그 결과에 따라 향후 치료방법도 결정될 겁니다.” 생명이 둘이나 자랐던 장소는 서양 배 모양. 성인 남자 주먹 정도. 무게는 60그람에 불과하다고 한다. 자궁이 적출되고 비어버린 공간에는 이제 무엇이 자리할까? “두껍아, 두껍아. 헌 자궁 줄게. 새 자궁 다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노랫말을 중얼거린다. 마취에서 깨어난 장기들이 제자리를 찾기 위해 맹렬히 꿈틀거리고 있다. 비어있는 자리를 먼저 점유하려는 것인가. 덩달아 묵직한 아랫배가 꿀렁거린다. 수술 후 회복은 온전히 환자의 몫이다. 많이 걸어야만 수술 전 상태로 빠르게 돌아갈 수 있다는 말에 병실 복도를 걷는다. 머리 위로 출렁거리는 링거 병. 소변이 든 비닐을 차고 복대를 두른 모습. 핏기 없는 얼굴. 영락없는 중환자다.
“자궁 적출 후 여성으로서 심리적 측면에서 어떤 변화가 있나요?” 핑크빛 볼터치를 한 앳된 얼굴의 수습간호사가 묻는다. “성적 정체성 말씀이신가요? 특별히 달라진 게 있을까요? 가임기도 아니고. 자궁의 유무가 꼭 성적 정체성의 상징이라고 볼 수는 없잖아요.”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갑자기 450년 만에 발견 된 파평 윤씨 모자 미라 생각이 났다. 난산으로 인해 출산하지 못한 아기를 자궁에 품은 채 연구실 실험대 위에 누웠던 조선 명문가 그 여인 생각을 한다. 어리고 연약한 싹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몸부림 쳤을까? 여인의 몸에서 한 땀 한 땀 조각보를 맞추듯 열 달의 이야기가 완성되고 세상 밖으로 던져졌어야 할 어린 생명은 이야기와 함께 박제된 어미 자궁 안에 남았다. 자궁은 생명을 잉태하는 성소이면서 때로는 어미와 아기의 생명을 묻는 무덤이기도 하다.
저기 자궁들이 있다. 환자복 위로 복대를 두르고 조심조심 복도를 걷는 나이 지긋한 여인들. 빈궁이 된지 오래지만 자궁이 있었던 곳의 세포들은 여전히 그 흔적을 기억할 것이다. 만삭의 임산부처럼 거동이 조신하다. 적출된 자궁들의 무덤도 세상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삶의 기억은 태고의 퇴적층처럼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 적출된 자궁 안에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한 자궁을 잉태한 원시 자궁. 자궁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세대를 거슬러 끝없이 이어지는 자궁의 계보. 자궁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지어내고 역사를 만들어 온 성소다. 아무런 저항이나 거부도 없이 시원의 바다를 품었던 여인의 자궁은 개화, 만개, 낙화하는 꽃과 닮아있다.
병원 산책로를 걷는다. 낙엽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뒹군다. 볏은 나뭇가지 사이로 11월의 해가 비친다. 한 무리의 젊은 여인들이 꽃다발을 들고 지나간다. 병문안을 가는 모양이다. 20대의 발랄한 웃음이 스산한 늦가을을 뒤흔든다. 자궁들이 간다. 한 달에 한 번, 건강한 피울음을 토하는 건강한 자궁들이. 역사를 만드는 소리 없는 외침들을. 가능성을 지닌 생명들을. 미완의 이야기들을 품은 자궁들이 간다. 자궁들이 가슴을 앞으로 쑤욱 내밀며 나아간다.
퇴원하여 돌아온 집,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아 눅눅하다. 제대로 걸음을 옮기는 것도 힘들지만 몸 안엔 삶의 의욕이 꿈틀거린다. 숨을 들이킨다. 반복되는 일상의 소중함을 실감한다. 내 삶에서 11월은 모든 것이 사라지지는 않은 달이 분명했다. 잉여의 시간이 주어졌다. 함께 할 식탁과 처리해야 할 일들과 마주보아야 할 얼굴들이 아직 내게 남아있다. 자궁이 사라진 자리에 삶의 이야기들을 소독 소독 채워 넣어야겠다. 물리적 자궁은 적출되었지만 심리적 자궁은 여전히 내 삶의 이야기들을 기록해갈 것이다. 나에겐 아직 자궁이 남아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