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만 / 권정식
2006년 11월 15일
한국관광공사가 뽑은 10월에 가볼 만 한곳으로 “무진기행(霧津記行)”의 문학적 배경이자 람사협약(RAMSA Convention)에 등록된 세계5대 연안습지의 하나인 순천만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침 사진 동호회에서 물때를 맞추어 11월 12일 일요일에 순천만 출사(出寫)가 있다기에 기꺼이 신청했다.
이전에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알지도 못했고 작가 김승옥(金承鈺 1941-현재)에 대해 아는바 없었으나 여행지의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
김승옥은 일본에서 태어나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그는 Sex를 Motive로 하여 그것을 통해 개아(個我)의식을 자각해 나간다 했다.
무진기행도 그런 통속적인 이야기 속에 해학이 묻어난 작품이다.
그는 무진을 안개 낀 나루터 순천만이라 하고 60년대의 한 무기력한 남자에 대해 거침없이 이야기를 전개해 간다.
전쟁이 터지자 폐병을 핑계로 갈대 속 움막에 피신하여 자위를 치면서 전쟁터에서 전사한 친구 소식을 듣고서는 자학에 빠진다.
전쟁이 끝나자 운 좋게 제약회사 사위로 출세한 그가 무진으로 내려와 겪는 이야기가 무진(霧津)기행(紀行)이다.
도심으로 탈출하고 싶은 무진 여학교 처녀 음악 선생과의 정사는 그가 자위를 치던 그 갈대 숲속의 움막이다.
람사협약은 1971년 이란의 람사에서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보호를 위해 채택된 협약으로 우리나라는 1997년에 가입하여 경남 창원 “우포 늪”/강원도 대왕산의 “용늪”/전남 신안 “장도 습지”가 람사에 등재되어 있다.
그에 더하여 여수 해양수산청은 작년에 순천만의 70만평 갈대군락지와 끝없이 자리 잡은 칠면초/다양한 어종/흑두루미의 최대(最大)월동지(越冬地)인 이곳을 국제적 습지로 인정 받기위해 람사에 신청을 하고 순천시가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물골을 따라 관광 보트가 지나가는 항적은 西山으로 넘어가는 일몰과 함께 사진 동호인들이 꼭 한번 담아 보고 싶은 노을 풍경이다.
이정도 여행지의 정보를 머릿속에 정리하고 나니 현장이 보고 싶고 또한 현지에서의 체험이 기대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바빠 05시에 집을 나섰다.
우리가 대절한 관광버스는 양재역에서 추가 탑승자들을 태우고는 남으로 달려 산청휴계소에서 최종 참가자들을 실었다.
지리산을 비껴가는데, 멀리서 보는 남도의 명산에는 지금에야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었다.
모두들 일찍 출발 하느라 아침식사를 건너뛰었기에 순천 정식은 그 맛이 예술이었다.
대대포구에는 안개가 없었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2시 30분경이니 안개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나는 머릿속에 안개를 그리면서 끝없이 펼쳐진 갈대숲을 바라다보았다.
갈대숲 사이로 물길이 나 있고 관광객들이 모터보트를 타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썰물로 물이 빠지면서 서서히 물골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물골 너머로 진짜 오두막이 눈에 들어왔다.
저 갈대숲 너머 물길 따라 샛강을 건너면 저 오두막에서 혼자 자위를 치고 있을, 세상을 등진 허름한 청년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내 공상을 알기나 하는 건지 젊은 여자 사진 마니아들이 그쪽을 향하여 그림을 담기에 분주하다.
혹시 저 여인네들 중 하나가 숨을 헐떡거리는 저 움막속의 여선생 하인숙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에 가슴 쪽을 훔쳐보았다.
습지생태와 갈대 관찰로는 나무판자를 깔아 DECK를 만들었는데, 그 위를 걷는 기분은 가히 일품이었다.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단위 관광객들이 아무 불편함이 없이 산책을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중간 중간에 탐사겸 휴식 공간이 준비되어 있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질서 있게 산책로를 따라 늦가을 나들이를 즐기는 모습이 여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갈대숲속의 산책로 끝에 이르자 용산 전망대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이 나타났다.
빨리 걷지 않으면 일몰 시간을 놓칠 것만 같고 일행들은 이미 눈에 보이지 않아 마음은 더욱 급했다.
전망대 구경을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에게 얼마쯤 거리가 남았는지 물어보았다.30분은 족히 걸어야 한단다.
갈대숲을 지나면서 소설속의 정황을 그려 보느라 일행보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나보다.
전망대는 이미 카메라로 가득 차 빈틈이 없어, 전망대 아래쪽 산비탈에 삼각대를 설치하고 카메라를 장착했다.
다행이 일몰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심호흡을 한 뒤 넓은 순천만을 내려다보았다. 저만치 칠면초가 물이 빠지면서 붉은 융단을 깔아 놓은 것처럼 아름답다.
그 위로 한 떼의 물새가 석양을 받으면서 날아간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담으려고 이렇게 많은 사진가들이 전국에서 몰려던 것이다.
해가 서산에 걸쳐 서서히 내려가자 S자 물골을 따라 관광객들을 태운 모터보트가 물결을 수놓으면서 사진가들을 위해 멋진 기동을 하고 전망대의 모든 사진가들이 이 장관을 담으려고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다.
얼마간 촬영으로 인한 정적이 흐른 끝에 모두들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만족해하는 이 보다 아쉬워하는 이들이 더욱 많았다.
준비해간 소주잔을 돌리고 모두가 축배를 외쳤다.
운이 좋아 맑은 날씨에 물때까지 알맞아 이 먼 길을 달려온 보람에 만족했다.
그리고 서둘러 서울로 출발한 시간이 저녁 7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