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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좀 이따 예배 끝나고 또 다 막 이렇게 몰려서 인사를 나눌 것 같아서 미리 그냥 여기서 한꺼번에 인사를 나눠야 우리 우람 형제가 편할 것 같아서요. 우리 우람 형제 가운데 딱 앉아서 오늘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또 이렇게 우람 형제의 건강을 회복해 하셔서 오늘 예배를 함께 드립니다. 우리 감사의 박수 하나님께 올리겠습니다.
개인으로는 굉장히 부담스러워요. 처음 나오고 또 이렇게 여러분들이 관심을 집중하면 그러니까 그냥 끝나고 나갈 때는 서로 이렇게 눈 인사 정도 수준으로만 우리 마음으로는 막 다 껴안고 싶고 막 뭔가 사랑을 표현하고 싶은데 제가 얼마 전에 심방을 갔다 와서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충분히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 마음을 담아서 그런 사랑을 담아서 감사의 박수를 드린 줄 믿습니다. 아무튼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앞으로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더 풍성한 은혜를 허락하실 것을 믿습니다.
네 우리 이은주 집사님 또 홍선희 씨 또 비롯해서 우리 여러 동역자들에게도 동일한 은혜가 풍성하게 허락되어서 우리 공동체가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들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맛보고 그 은혜를 마음껏 나누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즘 교회에 대한 말씀들을 수요일 저녁에도 그렇고 또 이렇게 좀 정리를 하고 있는 중에 있는데요. 오늘은 안디옥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참 많은 교회의 이야기가 나오죠. 신약 교회에 보면 신약 성경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를 시작해서 안디옥, 빌립보, 데살로니카, 골로새, 고린도, 에베소 이런 지역의 교회들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교회들은 각 지역에서 그 지역의 특성에 맞게 또 그 성도의 구성원들의 그러한 어떤 신앙의 모습에 맞게 각각 특징들이 있고 그 특징에 맞게 그 교회들이 세워지고 또 쇠퇴하기도 하고 다양한 모습들을 성경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에 보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편지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거기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교회가 에베소교회이고, 가장 나중에 등장하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들 하나하나를 이렇게 좀 묵상해 볼 필요가 있는데요. 특별히 라우디게아 교회를 요즘 묵상을 하게 될 때가 참 많아요.
라우디게아 교회 여러분들은 어떻게 인식하고 계십니까?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교회 이 라우디게아라고 하는 지역에는 금이 많이 생산되어서 참 부유했습니다. 풍족해서 그 풍족함 가운데 그들이 부족함을 모르다 보니 간절함이 그들의 삶에는 별로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도 하나님의 은혜와 천국에 대한 소망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풍성한 삶이 오히려 그러한 신앙의 요소들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처음 믿을 때의 열정이 점점 시들해지고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열심도 식어버리고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아닌 차지도 뜨겁지 않은 미지근한 상태라고 책망 받았습니다.
7개 교회 중에 칭찬을 전혀 듣지 못하고 책망만 받은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이지요. 근데 이 교회가 요즘 이렇게 묵상할 때 보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 한국교회 또는 우리의 신앙의 모습 가운데 혹 이 라오디게아와 같은 그러한 모습들이 있지 않나라고 하는 그런 마음들이 마음속에 이렇게 들 때마다 참 많은 생각들이 되고 회개가 되고 또 기도의 제목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오늘은 이 라우디게아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반면에 그 많은 교회들 가운데 모델적인 교회가 또 등장하죠. 바로 안디옥 교회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에서 폭발적인 성령의 놀라운 역사 가운데 교회가 막 부응했잖아요. 그런 부흥의 역사를 경험했던 예루살렘 교회가 이제 스데반 집사의 죽음 이후에 핍박으로 인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그런 가운데 흩어진 성도들이 이 안디옥 지역에 가서 스스로 자원하여 전도하여 세운 교회가 바로 이 안디옥 교회입니다.
근데 성경에 보면 이 안디옥 교회에 대한 이야기들이 여러 가지가 나오는데, 이 안디옥교회의 특징 중에 몇 가지만 살펴보자면 사도행전 11장 26절에 보면 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호칭을 명칭을 이제 듣게 됩니다.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라고 하는 명칭을 듣게 됩니다. 물론 이 말이 긍정적인 말보다는 약간 예수쟁이들이라고 하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말은 사람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비아냥거리는 말로 들릴 수 있지만, 믿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림을 받는 것은 굉장히 큰 영광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을 살고 있는데, 마치 자신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야 라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거거든요.
그 작은 숫자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갔을 때 그들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작은 숫자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인들이 그 지역사회 세상을 뒤흔들어 놓는 초석이 되었던 것이죠. 작은 불꽃이 되었습니다.
또한 안디옥 교회는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해서 아시아 일대와 유럽에까지 수차례의 전도 여행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 많은 교회를 세운 교회, 성교의 전초 기지가 된 교회가 바로 이 안디옥 교회입니다.
바라옵기는 저는 우리 하늘 소망교회가 이 안디옥교회처럼 작은 인원이라 할지라도 우리 가운데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나 우리가 아까 우리가 함께 불렀던 찬양처럼 이 땅 가운데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서 작은 우리의 영향력이 이 사회를 정화시키고 세워가고 일으키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가 또 수많은 성도들을 세우고 교회들을 일으키는 그러한 교회 교회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 인정받고 칭찬받는 그러한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러면 이 안디옥교회는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존귀한 쓰임을 받을 수 있었을까?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정도의 요소들을 한번 찾아보려고 합니다. 먼저 교회의 머리는 누구신가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누구의 명령대로 운영되어야 할까요? 예수님의 명령대로 운영되어야 합니다. 이 우리 육신이 있는데 머리가 하라는 대로 해야지 머리는 일로 가라고 하는데 몸은 이쪽으로 가려고 하고 그러다 보면 이 몸은 망가질 수밖에 없겠죠.
여러분 귀한 교회로서 우리가 쓰임을 받으려면요.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특별히 우리는 성령 시대를 살고 있기에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 교회를 통하여 예수님은 뭘 하려고 하실까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눈빛만 보면 알 수 있는 그런 관계라면 참 좋을 텐데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그냥 우리의 뜻대로 내 생각대로 예수님의 뜻과 상관없이 그렇게 이루는 집단이 된다면 이것은 예수님께서 계획하신 교회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냥 사람들의 모임이 되고 말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수많은 제안들을 합니다.
요즘 교회가 분위기가 참 쉽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옆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구제합시다. 우리 좀 밖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뭔가 사회적인 봉사를 합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럴 때일수록 교회가 더 예배가 중요하다고 우리가 여기고 예배에 집중합시다. 우리 예배에 집중하기 위해서 뭔가 좀 악기들도 더 좋은 걸로 드리고 찬양팀도 더 멋지게 가꾸고 더 이 환경 분위기도 좀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는 환경으로 우리 새롭게 시설도 정비하고 합시다. 또 어떤 이들은 교회는 건물이 아니니 성도들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하나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더 교제하고 더 성도들이 돌아볼 수 있도록 우리 뭔가 그룹을 더 소그룹이나 우리 교회를 더 세워 갑시다.
네 지금 제가 말씀드린 이 내용들은 다 맞는 말이고 다 좋은 말입니다. 필요한 말씀들이지 예배도 구제도 선교도 또 사회봉사도 성도 간의 하나 됨도 너무 중요합니다. 그런데요 교회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이것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교회들이 다 똑같은 모습으로 그렇게 그 사명을 감당한 게 아니거든요.
큰 교회는 큰 교대로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시골교회는 시골교회대로, 도시 교회는 도시교회대로 각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사명이 있고 그들에게 지금 이 순간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우리가 들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아멘 네 너희는 나를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내가 맡길 일이 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여정 속에 우리도 먼저 내 생각, 내 뜻, 내 경험을 내려놓고 성령의 음성을 듣는 그 일에 우리가 더욱더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한번 따라서 해볼까요? 이런 기도를 좀 드렸으면 좋겠어요. 주님 시키실 일 있으신가요? 말씀해 주세요. 주님 제 마음에 감동을 허락해 주세요. 우리 교회를 통해 하실 일이 있으신가요? 말씀해 주세요. 성령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함께 감동되어 함께 움직이게 해주세요.
아멘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요. 예배 또 봉사 선교 다양한 우리의 활동들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거예요. 그들은 성령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새 번역을 보니까 그들이 주님께 예배하며 금식하고 있을 때에 그러니까 이들이 지금 예배를 드리는 과정 속에 금식하며 기도했다는 거예요. 왜 이들은 예배 중에 금식하며 기도했을까 성경이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 그 당시에는 성령의 그러한 기름부으심 속에 성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가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누군가가 하나님이 지금 이런 마음을 주신다고 하나님이 지금 이런 말씀을 주신다고 이야기를 했을 겁니다. 그럴 때 그 한 사람의 이야기에 따라 그냥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뜻을 같이 묻고 구하고자 하는 그 기도가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알고자 할 때 그들은 함께 합심하여 금식하며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때에 명확하게 그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음성이 바로 2절에 있는 말씀이죠. 내가 불러 지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이 두 명의 사람들을 통하여 할 일이 있으니 그들을 따로 세우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역사상 이 사건 지금 이 장면은요. 굉장히 단순한 장면이 아닙니다. 아주 중요한 장면입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 안디옥교회 사람들은 이 바나바와 사울을 왜 세우라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따로 세우라고 하는 이유가 지금 우리는 이미 이 뒷 이야기를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런 일을 하시려고 지금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라고 우리는 인식하지만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지금 막 이렇게 폭발적으로 부응하고 성장하고 하나 되고 있는 이런 과정 속에 갑자기 하나님께서 이런 명령을 내리셨을 때 그들은 이 말씀이 뭘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갑자기 성령을 통해서 말씀하신 거예요.
근데 여러분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이제 선교 여행 중에 소아시아 지역으로 이렇게 선교 여행을 하는 중에 환상을 보게 됩니다. 자기가 지금 가려고 하는 쪽의 반대 방향인 마게도냐 그리스 사람들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고 하는 환상을 봐요.
근데 이 바울이 이 환상을 이게 하나님의 명령이구나 내가 지금 가려고 하는 그 방향이 아니라 이제 이 방향으로 가라고 하시는구나 그래서 원래 가려고 하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그 결과 유럽의 놀라운 복음의 선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고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에게까지 복음이 증거되고 그 복음이 우리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만약이라고 하는 질문 한번 해볼까요? 만약 안디옥 교회가 이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면, 만약 사도바울이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면, 아니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면이라는 생각을 해보면 지금 세계의 역사, 우리 기독교의 역사는 지금하고 너무 다를 겁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에게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과정 속에 이 성령의 음성 듣는 이 일에 우리가 너무 무뎌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쩌면 성령의 음성을 듣는 건 앞에서 말씀 전하는 목회자나 또는 뭔가 은사가 가득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요. 성령의 음성은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거룩한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잖아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자기의 뜻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사기의 말씀처럼요. 사사기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음성이 그 당시에 있지 않으니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다 보면 서로 내 의견이 맞다라고만 말하다가 결국 분열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이 어렵다라고 단정하면 쉽게 그 음성을 듣기에 도전하지도 못하고요. 결국 포기하게 되면 우리는 더 큰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혹 경험되지 못했습니까? 우리 안디옥교회처럼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또 우리 각 개인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더욱더 영적인 민감성이 회복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날마다 기도에 힘쓰고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024년이 시작될 때 선포한 게 있죠 우리 하늘소망교회에 이제 7년을 맞이하는데 지금 우리의 상태가 어떻습니까? 지금 이 코로나가 맞춰지고 지금 우리의 상황을 점검하게 하시는 이 상황 속에 우리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개척의 원년으로 삼아봅시다고 선포했습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개척할 때 여러분들이 가졌던 마음, 또는 이 작고 연약한 교회에 등록하기를 결단하고 가졌던 처음 마음, 그 마음을 회복하고 다시 시작해 봅시다고 우리 함께 결단하고 외쳤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일지 우리 한번 같이 물읍시다. 앞에서 이끌어가는 목회자가 이렇게 합시다 저렇게 합시다고 하는 방향을 이끌어갈 수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동력이 너무 작아요. 한 사람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것은 하나님이 원래 계획하신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명확하게 듣기를 원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 음성에 귀 기울이고 지금 우리가 돌아봐야 할 것들이 있다면 함께 돌아보고 함께 붙들고 열심히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열심히 감당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 안디옥교회가 귀하게 쓰임 받았던 두 번째 이유를 들어보자면요. 그 음성을 듣는 것으로 끝난 게 아니죠 음성을 듣고 그 음성대로 순종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우리가 길을 열고 말씀을 듣는다고 그냥 듣는 것만으로 우리는 변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죠.
안디옥교회 성도들을 보십시오. 오늘 말씀을 듣고 즉각 순종함을 볼 수 있습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이 말씀을 지금 성령의 음성을 같이 들은 다음에 그들의 반응입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세 번역으로 보면, 그래서 성령의 음성을 같이 들은 다음, 그래서 그들은 금식하고 기도한 뒤에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떠나 보냈다.
안디옥교회는 즉시 이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을 안수하여 선교사로 파송하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불로로 가서 우리 새번역은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바나바와 바울은 성령이 가라고 보내심으로 실루기아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건너갔다.
아멘 바울과 바나바도 역시 순종함으로 즉시 복음을 들고 선교의 현장으로 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두 구절의 말씀은 너무 짧고 명료하지만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사건입니다. 지금 이걸 여러분들에게 한번 지금 우리의 상황으로 이거를 대입해보면 이 성도들이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또 이 바나바와 바울이 얼마나 놀라운 지금 결단 순종을 했는지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 안디옥에 교회가 생겼다고 이 소식을 접했을 때 이 바나바를 파송하는데 이 바나바는요 그 예루살렘 교회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4절에 보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 지더라.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존경받는 인물이었어요. 근데 이런 인물이 이 안디옥 교회에 파송된 겁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담임 목회자로 이 자리에 오게 된 거예요. 함께하는 그 과정 속에 많은 사람들이 주께 나오게 되는 역사를 경험합니다. 부흥을 경험하게 된 것이죠. 얼마나 기쁠까요? 저는 우리 교회에 이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일들이 이제 회복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개척 초기에 여러분들 생각나시나요? 지금 여기 뒤에 이 벽면 뒤에 잠자고 있는 애들이 있어요. 누군지 아시나요? 여러분들이 안고 있는 의자입니다. 우리 개척할 때 여기 있는 의자 외에 이 의자로 부족할 것 같아서 의자를 사놨죠. 그래서 우리 개척 예배드릴 때 중간중간에 의자를 안고 예배를 드렸고 이 의자가 부족할 정도로 우리 참에 어떻게 해야지 초창기에 그런 모습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막 어떤 사람들 우리 은성이가 화장실 갔는지 몇몇 사람들 중에 은성이도 그랬지만 우리 4층도 우리 같이 교회 만들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말을 할 정도의 그런 우리 상황이 됐을 때 우리 어땠습니까? 마음이 막 같이 이렇게 세워지는 모습을 보면서 기쁨이 있었어요.
그렇죠 아마 안디옥교회에 교회가 날마다 더해지는 역사를 경험할 때 그들 안에 기쁨이 있었을 겁니다. 근데 여러분 이렇게 인품이 좋고 능력 있고 믿음을 고루 갖춘 인물이 지도자로서 함께하는 그것 그것은 참 서로에게 기쁨이 되고 그들에게는 참 너무나도 복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디옥 교회를 크게 부응시키고 이렇게 끌어 안정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지도자뿐만 아니라 이 바나바가 다소에 가서 바울을 데려다가 그와 함께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랬을 때 비로소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들었거든요. 그러니까 교회적으로 지금 분위기는 계속 세워져 가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영향력을 끼쳐주는, 근데 그 일에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 누구예요?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근데 지금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세워서 파송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욕심이 없었을까요? 헤어짐에 아픔이 없었을까요? 아니요. 바울과 바나바가 얼마나 존귀한 사람들입니까? 얼마나 더 함께하면서 더 배우고 더 같이 세워져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들에게 있었지 않겠습니까?
근데 여러분 그들은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하였고 그 두 사람을 세워서 파송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의 어떤 자기들 중심의 욕심,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아니라 성령님이 말씀하실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그 뜻대로 순종하며 나아갔다는 사실이죠.
어쩌면 이건 엄청난 희생입니다. 엄청난 자신들을 내려놓는 거예요. 그 결과 안디옥교회는 선교의 본거지가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이제 선교 여행을 갔다가 돌아와서 선교의 그 과정들을 또 나눌 때마다 그들은 더 풍성한 기도의 제목과 은혜를 함께하게 되었고 또 그들을 지원하는 지원자가 되었다는 사실이죠.
그뿐만 아니죠 바울과 바나바도 큰 희생을 감수하지 않았습니까? 목숨을 걸고 3차에 걸쳐서 그 넓은 지역 미지의 땅을 향해서 복음을 들고 나아가 복음을 증거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감수해야 될 위험이 수없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그 순종 헌신을 하나님은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 하늘소망교회가 안디옥 교회와 같은 교회가 되기를 저는 소망합니다.
네 안디옥교회는 선교의 모델이 된 교회입니다.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위대한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귀기울이고 그 말씀대로 순종한 교회 이 안디옥교회 성도들처럼 지금 이 시대 가운데 우리가 먼저 하나님이 나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 공동체에게, 이 시대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먼저 귀기울여 들을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그냥 지금처럼 여러분들 살면서 들을 수 있으시겠어요? 안 듣고 그냥 지내도 괜찮으시겠어요 더욱 우리 귀를 열어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도전이 우리 안에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들이 생각지 못한 일들이 여러분들에게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여러분들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가운데 또는 예배를 참여하여 함께 예배드리는 가운데 아니면 교제하는 가운데 주님의 음성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감동하십니까? 그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이제 개척의 원년이라고 선포하고 시작하는 2024년 중반에 왔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어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다시 우리의 마음을 가다듬고 우리 결단하며 나아가길 원합니다.
10월에 임직을 준비하고 있는 임직자들이 있어요. 기도하고 훈련받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들만의 잔치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이 과정 속에서 같이 기도하고 같이 사람을 세우고 같이 꿈꾸는 귀한 과정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