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처
<테이크 쉘터>(제프 니콜스, 드라마, 15세, 2013)
영화는 현실을 재현한다. 그러면서도 실제와 다소 거리가 있는 음향효과나 영상효과를 넣는데, 그 이유는 영화관이라는 공간에서 관객이 느끼는 현실감을 제대로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사실주의자는 현실과 이야기 자체에 관심을 갖지만 형식주의자는 각종 효과를 사용해 느낌과 메시지를 전하는 데에 전념한다. 여기에 영상 미학적인 숙고를 통해 의도하는 바가 더욱 도드라지도록 한다. 사실 재현 중심의 연출과 형식적인 연출의 결정은 영화의 근간이 되는 이야기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대체로 연출방식에 대한 감독의 취향이며 철학에 좌우된다. 어떤 것이든 관객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일에 지나치지 않으면서 관객의 감정이입을 제대로 이끌어내는 영화가 될 때 관객과 평론가들로부터 잘 만들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감정이입이야 관객의 공감능력에 좌우되는 것이 보통이나, 영화 이야기 자체가 주도권을 잡는다면,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도 그 영화 속 정서를 함께 느끼며 감상할 수 있게 된다.
<테이크 쉘터>는 그런 의미에서 잘 만들어진 영화다. 우리에게는 재난 영화로 비쳐질 만한 작품이지만, 금융위기와 더불어 경제위기를 경험했던 미국인들은 자신의 상황에서 충분히 공감하며 볼 수 있었다고 할 정도로, 감독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미국의 중산층에 속한 사람들이 느낄 수밖에 없었던 불안한 심리를 표현하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감상 전에 제작 의도를 알고 보았기 때문인지 몰라도, 필자 역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와 당시의 정서를 영상을 통해 그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함께 느끼는 것 같았다. 21세기 지구 종말론이 팽배했던 시기의 암울한 정서와 분위기를 극적인 서사와 영상미로 표현했던 <멜랑콜리아>(라스 폰 트리에, 2012)에서 받은 것과 같은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영화 이해를 위해 인생에서 불현 듯 찾아오는 삶의 위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비록 자연재해가 아니라도 현대사회에서 위기는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다가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거나 심적 혹은 물질적인 고통을 안겨준다. 아직 원인을 알지 못할 때 양심적인 사람들은 대개 가장 먼저 자신을 돌아본다.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 내게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만일 직접적인 원인이 내게서 찾을 수 없다면 혹시 나와 관계하고 있는 가족에게 있는 것은 아닌지를 의심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의혹을 일으키는 대상이 주변으로 확대되어 가족과 이웃 그리고 직장 동료에게까지 미친다. 특히 인과율적인 사고에 익숙한 인간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영화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감상될 필요가 있다.
제목의 의미는 “대피하다”는 뜻을 갖는다. 영화의 중심에는 커티스(마이클 섀넌 분)가 있다. 비록 청각장애를 가진 딸을 두고 있긴 해도 이웃들이 부러움을 살 정도로 단란한 가정을 이끌어가는 가장이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상한 일들 때문에 커티스의 삶은 돌변하게 된다. 악몽을 꾸고 또 폭풍우가 몰려오고 기름같은 비가 내리는 환상 때문이다. 커티스는 정신분열증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엄마를 떠올리며 가족병력을 의심하며 자가 진단을 시도한다. 그러나 심해지는 병세를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한 커티스는 의사를 찾지만, 그를 진료하고 치료할 수 있는 정신과 병원은 너무 먼 거리에 있고 또한 너무 비싼 비용 때문에 포기한다.
더욱 더 악화되는 상황에서 커티스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아내를 놀라게 할 일들을 한다. 집안에서 키우던 개를 마당으로 내쫓고, 결국에는 개를 형에게 주었으며, 또한 아직도 부채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주택 담보 대출을 받아 마당에 방공호를 만든다. 악몽이나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커티스는 꿈에서 자신에게 해를 가했다는 이유로 절친했던 직장 동료를 멀리해 오해를 산다. 앙심을 품은 그는 커티스가 회사 기계를 무단으로 사용한 일을 폭로하였고, 사장의 분노를 산 커티스는 마침내 회사에서 해고된다. 그야말로 불과 며칠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게다가 딸의 청각장애를 치료하기 위한 수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라 그동안 모든 것을 잘 참고 지내던 아내마저도 분노를 터뜨린다. 의료보험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막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커티스만이 느끼는 이상한 현상들 때문에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마저 총체적인 위기 상황에 내몰리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영화는 미국의 경제위기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 부실한 의료보험 제도와 갑작스런 실업 그리고 가정의 위기 등을 보여주고, 위기의 상황에서 피난처는 오직 가족뿐이라는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 같다. 커티스는 심각해지는 증세에도 불구하고 가장으로서 재난의 위기로부터 가족을 지켜내려고 애를 쓰고, 또한 아내도 그런 커티스의 치료를 위해 비록 치료비 문제가 있다 해도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결심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커티스와 가족의 위기는 어느 정도 극복될 가능성을 찾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문제는 영화 이해를 여기에서 멈추지 않게 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그동안 커티스의 환상에서만 나타났고, 그래서 정신분열 환자의 증세로만 여겨졌던 일들을 아내와 딸도 함께 경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놀랍기도 하고 또한 보는 자로 하여금 섬뜩한 느낌을 갖게 만든 까닭은 커티스의 염려와 불안이 단지 정신병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재난의 전조였음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내와 딸마저 경험하게 된 현상들은 실제였을까, 아니면 커티스에게 나타났던 것과 동일한 환상이었을까? 만일 그것이 실제였다면 커티스는 현대판 노아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가족 모두 커티스와 함께 정신이상을 겪는 것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장만이 느꼈던 불안이 가족 모두에게 확대되는 위기 상황을 그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영화의 이야기가 여기서 멈추고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아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을 얻을 만한 직접적인 단서를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을 오직 관객의 상상력에 맡긴 까닭은, 이 장면이 감독이 보여주는 것 이상의 것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감독이 집중하고 있고 영화를 통해 마침내 드러내고자 하는 점은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불안과 고통이다. 다시 말해서 커티스 가족이 겪는 불안과 고통은 누구도 쉽게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족 병력인 정신병일 경우도 그렇고 실제로 자연재해가 일어난다고 해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이유에서든 그토록 가족을 지키고 싶었던 가장의 소박한 바람은 물거품이 된다. 이것은 당시 미국의 경제위기가 중산층 시민과는 전혀 무관하게 일어난 일이라도 결국 피해는 중산층 시민과 가족 모두가 받을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반영한다. 니콜스 감독은 그런 부조리한 상황 때문에 겪는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와 불편하게 전개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목하게 되는 점은 무엇보다 먼저는 커티스를 대하는 아내의 태도이다. 크리스천 가정 출신의 아내는 커티스의 변화를 지켜보는 아픔을 잘 참았을 뿐만 아니라 위기가 최고로 고조된 때에도 커티스를 품으며 가족을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경제적인 위기의 상황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가족 해체 현상이 커티스 가족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다. 극도로 불안한 마음 상태를 가진 커티스 때문에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 함께 불안해지면서도 어느 정도 안정을 취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녀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그녀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위기 상황에서 진정한 피난처는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단서였다. 그것은 가족이며, 또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