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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다큐] 북파공작원 그들을 말한다. | | | 북파공작원 |
2005.05.23 06:59 |
제가 인터넷으로 자료를 수집해 봤습니다. 흥미로운 사실들이 많이 있군요.
스크랩만 하다 오늘은 특별히 제가 글을 써보겠습니다.
북파공작원이 아직도 있나요? 라는 대답에 영화 "실미도"만 생각하는 분들은 아니오라고 하겠지만 실제로는 지금도 있고 운영중이라고 합니다. (북파공작원이라는 단어는 사용안함)
특전사나 UDT 의 훈련강도를 생각할수도 있지만 임무자체가 특별해서 훨씬 강도가 쎌뿐더러 특수부대들은 하나의 부대가 특수임무를 수행하지만 북파공작원들은 한명 한명이 살생무기이자 부대이기 때문에 훈련 자체가 죽음을 각오하고 훈련을 해야 할 정도라고 하는군요.
참고로 특전사나 UDT등은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이고 북파공작원은 첩보부대입니다.
(영화를 봐서 아시겠지만 상상이 가실겁니다.)
북파공작원은 군인인가? 민간인인가? 라는 것에서는 여러가지 의견을 종합한 결과 반반입니다. 일단 입대, 전역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입사, 퇴사라는 말을 쓰면서 회사에 입사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첩보부대이다 보니 설정일수도 있겠지만 우선 군인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필수요건 중 하나인 군번이 없다는 것, 그리고 계급장이 없다는것에서 군인으로 볼수 없습니다.
군인으로서 볼수 없는 다른 것중에는 소속이 없고 통상적으로 군인들에게 주어지는 휴가나 외박등에 있어서 차별점이 있거나 아예 근거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군인으로 보이지만 민간인들을 소집하여 훈련시키고 투입한다는 것과 그들의 행위나 법적인 책임에 있어서 국방부가 공식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을 들수있습니다. (존재 자체를 부인하기 때문에 책임을 질수가 없다는 논리입니다. 맞는 논리입니다. 논리로만 본다면)
이와 반대로 최근에 입사(모집)되는 북파공작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병무청에 특전사등 군 입영 지원자들중에서 물색을 하여 모병(모집)을 하고 입대시킨다는 것과 그들이 훈련받고 명령을 받는 부대가 국방부라는것, 국방부에서도 북파공작원에 대해서는 94년 이후 인정하지 않지만 그 이후로는 특수임무 수행자라는 이름으로 운영중에 있다고 공식 발표를 한적이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군과 국가의 보안과 관련된 내용이라 국방부에서는 더 이상의 발표는 없었습니다만 군번과 계급장이 없어도 전역을 하면 군번과 계급장이 주어짐으로 현역일때는 민간인 예비역일때는 군인이라는 아주 이상하고도 복잡한 말이 됩니다.
그럼으로 그들은 현역이라면 민간인, 예비역이라면 예비역 군인이라고 인정함이 가장 적절할듯 싶습니다.
그리고 직계가족 부모님 형제분들 과 그의자손에 자손까지 그리고 외가댁 직계가족과 그의 자손들 (남자만) 그리고 자신의 전과조회(실형전과가 아니면 상관없음) 그리고 가정방문 후 부모님과의 면담과 계약서 작성 그리고 4차례의 시험중 마지막 시험에서 합격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입사..마지막으로 지금은 군부대가 전혀 아니기때문에 입사 퇴사 라는 언어를 사용하며 면접시에도 우리회사에 왜 입사를 하려하는가 라는 질문이 있습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시대(년수)마다 조금 차이는 있는데 이렇게 군입대를 하면서 "계약서"를 작성하고 군대에 가는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고 모병접수로 병무청에서 불시에 들어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 지원입대를 하러 갔다가 물색관의 설명을 듣고 일대일로 면담을 한후 간단한 테스트를 거쳐 진행절차없이 바로 입대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 경우 입영날짜 자체가 없이 그 자리에서 갑자기 입대하는것이기 때문에 가족에게 안부인사나 어떠한 흔적을 남길수 없고 가족들은 행방불명 신고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물색관이 물색을 해서 모집한다고 하지만 요즘에는 병무청을 통해서 모집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병무청에서도 특수임무 지원자로서 직접 지원하는 경우도 있지만 병무청에 상주(?)하는 물색관이 설득을 하여 모집한다고도 합니다.
자료를 수집하면서 재미있는 논란들이 많은데 북파공작원 한명과 특전사 여러명 또는 조직폭력배와 싸우면 누가 이길 것인가? 라는 논란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단 북파공작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가혹한 훈련을 받은 인간병기이며 특전사는 임무실패와 상관없이 생사가 결정되지만 북파공작원들은 임무실패가 곧 자폭을 의미하는것이라고 볼수도 있습니다.
KBS 방영분에서도 보면 아시겠지만 호랑이와 마주쳐도 때려 죽일수 있을 만큼의 "독기"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사람이기보다는 철저히 만들어지고 훈련된 살인병기와 같은 존재들이었죠. 논란의 대상들과 맞짱을 붙는다면 우선 목숨을 내놓고 싸워야 할것 같군요. 그들이 받은 훈련의 대부분은 살인을 염두해두고 훈련을 받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면 논란의 결과는 대략 답이 나올듯 싶습니다. 운만 따라준다면 또는 주특기 무기만 주어진다면 수십명 정도와 싸워도 충분히 이겨낼수 있지 않을까요? (무술 유단자도 여러명과 상대하여 이기는 경우가 많은것을 참고하면 어렵지만도 않습니다.)
북파공작원이 실미도 영화의 영향으로 김신조 일당이 무장침투를 하였고 박정희 대통령이 그에 따른 보복으로 우리도 간첩을 육성해서 북파시키자고 해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미 관련기사에도 나오겠지만 한국전쟁 당시부터 첩보부대 (북파공작원 육성) 는 존재하였고 북파공작원들도 존재하였습니다.
김신조 사건이 발생할 당시에도 이미 북파공작원들은 존재하였고 대기중인 상태였습니다.
김신조 사건으로 인해 북파공작원과 비밀부대가 창설된 것이 아니라 그들로 인해 훈련강도가 더 강해지고 실무적인 임무수행과 김신조를 통한 세부적인 훈련이 강화되었습니다.
KBS 방송에서도 청계산부대가 자주 나오는데 청계산부대는 경기도 성남 그 자리에 아직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으로 민간인은 출입할수 없으며 태극기가 계양되어 있습니다. 존재하는 만큼 아직도 운영되고 있는 첩보부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북파공작원들이 주둔한 첩부부대는 실미도 처럼 하나의 부대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국 각지에 부대 존재 자체를 알수 없는 상태에서 여러 부대가 존재했습니다. 언론에 알려진 부대가 HID ,청계산 부대와 설악개발단 입니다.
북파공작원은 남자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자 북파공작원들도 있었고 대부분 남자들의 북한 활동시 피난가족등으로 위장해서 같이 침투하였다고 합니다. 다만 정식으로 훈련을 받지 못하고 남자 공작원들의 신분위장을 도와주기 위한 동반자 역활이 대부분으로 악조건에서 살아남은 분들이 희박하다고 하는군요. (탈출이나 적 사살등에 있어서는 정식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방송에서도 여자 북파공작원 출신인 분이 인터뷰를 하는데 당시 15세 나이의 북파공작원이 있었다고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현역군인들은 현역 복무를 마치고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가도 일정기간 예비군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바로 향토예비군은 북파공작원들에 의해 창설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북파공작원들의 활동에 의해 북한의 적위대(예비군)가 정규군에 못지않은 규모와 화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 그 자료를 토대로 남한에서도 60년대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게 되는 것이지요.
북파공작원 = HID , 여기서 HID는 HID(Headquarters Intelligence Detachment)입니다
북파공작원을 직접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파견첩보사령부' 정도로 해석되는 약자입니다.
즉, 북파공작원을 양성,파견시키는 첩보사령부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다음은 관련 기사입니다.
북파공작원의 뿌리는 광복 이후 실시된 미군정에서 시작된다. 1946년 미군 24군단 정보처는 산하에 '442CIC'라는 첩보부대를 창설했으며, 이 부대는 1948년 여러 반공단체와 통합해 '켈로(KLO)'부대가 된다. 8240부대로도 불린 켈로는 한국전쟁 당시 부대원 6,000여명을 거느리고 첩보전과 유격전을 수행했으며, 이 부대 외에 공군의 6004항공정보대(NICK), 중앙정보국(CIA)의 OSO, OPC, 국무부의 SOU 등이 있었다. 전문가들은 이 부대 출신 미·한국군 장교들이 한국군 첩보부대 창설에도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군이 본격적으로 북파요원을 양성한 시기는 1951년이다. 이 해 육군본부 정보국 내 공작과를 전신으로 해 첩보부대 HID(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가 탄생했으며, HID 제1교육대에서 북파공작원을 훈련·지휘했다. 한국전쟁 당시 부대수는 30여개에 달했다. 해군의 UDU부대에서도 북파공작원을 운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파공작원 문제와 관련한 초기 증언자인 박부서 대북참전연대회장도 이 세대에 속한다. HID는 60년대 AIU로 호칭이 변경됐고, 이후 조직개편을 거쳐 현재의 국군정보사령부가 됐지만 북파 관련 업무는 계속 추진했다.
50년대 북파공작원은 주로 북한 출신들로 구성됐다. 일부는 자발적이었지만, 일부는 납치돼 강제로 공작원이 되기도 했다. AIU로 개명한 60년대에는 '봉첩'이라고 불리는 물색요원들이 대상자를 포섭해 입대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북파공작특수임무중앙회 자료에 따르면 75년까지 우범자·전과자·매혈자·생활빈곤자 등이 대상이었다. 80년대 이후에는 병무청 등 공식 경로를 통해 지원자를 선발했다.
68년 1월21일 김신조 등에 의한 청와대 기습사건이 벌어지자 당국은 '북한 특수부대원들을 대적하기 위해'라는 명분으로 기존 부대를 통·폐합해 문제의 설악개발단을 창설했다. 60∼70년대 부대원은 약 320명이었으며, 현재는 100명 미만으로 알려져 있다. 72년 7·4남북공동성명 이후 공식적으로 북파작전은 중단됐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90년대에도 소규모 정탐작전은 진행됐다고 한다.
기사를 통해 보면 기무사가 현재 대공활동을 하는 부대인데 같은 맥락이네요, 기무사가 공식적인 부대라면 HID, 또는 설악개발단은 비공식적인 부대라고 생각하면 될겁니다.
관련기사 입니다.
68~71년 동안 세차례 휴전선을 넘었다. 실탄 60발과 콤포지션 폭약, 세열수류탄을 휴대한 채 북한 군사시설을 폭파했다.
지금 돌아봐도 살아서 돌아온 건 정말 천운이었다.”
60년대 이후 북파됐던 무장공작원들이 털어놓는 북파공작의 실상은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넘는다.
무장침투라면 북한 무장공작원에 의한 잔혹한 양민학살만을 떠올리는 대다수 남쪽 사람들의 고정관념과 달리, 남한 당국에 의한 대북 침투, 파괴행위가 60~7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이뤄졌음을 이들은 증언하고 있다.
당시 남북은 50년대 한국전쟁 전후의 혼란을 벗어나 차츰 안정을 되찾으며 경제재건에 몰두하던 시기였지만, 이들은 여전히 총과 폭탄으로 무장한 채 `드러나지 않는 전투'에 종사해야 했다.
`멸공통일'의 명분과 취업보장 등 물질적 보상을 내세워 그들을 끌어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창수(49·가명)씨는 AIU (Army Intelligence Unit) 1기생으로 입대하던 68년, 17살의 청소년이었다.
군 당국은 5월부터 2달여에 걸친 끈질긴 `물색'끝에 그를 북파요원으로`영입'했다.
입대 뒤 이씨는 동기생 200여명과 함께 강원도 ○지역의 첩보대훈련소에 배치됐다.
하지만 10대의 이씨는 혹독한 훈련 끝에 불과 몇개월만에 30㎏짜리 모래배낭과 5㎏짜리 발목 아대를 찬 채 12㎞의 산악을 1시간 이내에 주파했다.국군 장비는 물론 에이케이소총,소련제 기관총 등 북한군 장비 사용법까지 완전습득한 그는 말그대로 `인간병기'가 됐다.
기본 훈련을 마친 뒤엔 10명 단위로 쪼개져 인천대, 남산대, 양구대, 운천대 등 예하부대로 옮겨졌다. 북한 침투지역의 지형·지물을 빼닮은 그곳 안가에서 통신과 독도법, 살인·폭파 등의 전문기술을 익혔다.
이씨는 69년부터 침투작전에 나섰다. 침투조는 5인1조로 편성됐고, 육군 대위가 조장을 맡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AIU 1기생 주아무개씨는 “69년 9월9일을 기해 북방한계선을 넘어 ○○비행장 부근 신축벙커를 폭파시키고 돌아오는 임무를 수행했다.
당일로 폭약을 설치하고 목적물을 완전히 폭파시킨 뒤 귀환했다”고 증언했다.
작전 과정에서 소리없이 쓰러지거나 북에 귀순한 전우들도 많았다.
또다른 북파요원 이아무개(55)씨는 “한번은 철책선까지 갔다가 동료 한 명이 북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침투작전 자체가 취소된 적도 있다”고 말했다.
현재 군 당국이 집계하고 있는 60년대 사망·실종된 북파요원만 2150명에 이른다.
하지만 목숨을 건 북파공작이 끝나고서도 약속했던 보상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국가유공자법에서 규정한 보훈대상에서 60년대 북파자는 철저히 제외됐기 때문이다.
주씨는 “보상은 커녕, 70년대 중동에 가려고 했지만 신원조회에 걸려 가지도 못했다"며 분개했다.
이아무개씨는 “정보사 등에서 요즘도 계속 `조용히 있으라'는 연락이 온다”고 말했다.
이동안 설악산동지회 대표는 “`이제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동기와 후배들의 연락이 폭주하고 있다”며 “더 이상 숨죽이고 지낼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필요할 때에는 써먹고, 필요가 없으니깐, 그 어떤 보상도 없이, 쓰레기 마냥 버리고, 국가는 그들을 철저하게 일회용 쓰레기 마냥 이용을 한 것이다 !! 거기서 배우는 것이라고는,죽도록 사람죽이는 기술과, 나중에 전역후 남는 엄청난 정신적 후유증 뿐이며, 사회에나와서도 적응을 하질 못해 자살자가 속출한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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