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 : 『신곡(지옥편)』
1. 이탈리아의 위대한 시성이라 불리는 단테의 『신곡』은 기독교 문학의 최고봉이자 르네상스 정신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다. 연인 베아트리체의 간청과 신의 허락을 받은 단테는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산 자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특별한 내세의 여행을 떠난다. 그것은 인간의 죄악을 관찰하고 연옥과 천국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단테는 이러한 여정에 ‘희극(commedia)'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것은 비극(tragedy)과 상반된 개념으로 비록 고통과 죄악에서 출발했지만 결국은 신의 구원에 이르는 행보한 결말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각각 33편으로 이루어진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에서 가장 문학적으로 우수한 작품은 ’지옥편‘이다. 고통과 비탄의 세계는 인간의 보편적 진실과 실존적 의미를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영역이다. 단테가 경험한 ’지옥‘은 인간의 갈등과 충돌의 생생한 모습을 통해 우리의 삶을 성찰하게 해주는 힘을 주는 것이다.
2. 지옥의 관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써있다. “나는 처음도 없고 끝도 없고 영원히 있으리라. 나를 거쳐 가려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고통의 영원한 지속, 이것만큼 끔찍한 형벌은 없다. 지옥에 떨어진 자들에게 가해진 형벌은 끔찍한다. 역청에 갇히고, 몸이 잘리고, 불꽃에 시달리며, 육체는 파괴되지만 다시 회복되면서 형벌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희망’이 없는 세계, 그것이 지옥인 것이다. 지옥에 대한 묘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유사하다. 인간의 죄악이 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첫 번째 지옥은 예수가 태어나기 이전에 영세를 받지 않은 사람들의 거주지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형벌이 없다. 다만 천국에 갈 수 없을 뿐이다. “여기서는 공기를 진동시키는 영원한 한숨 소리 이외엔 통곡소리 하나 없었다.”
3. 두 번째 지옥부터 본격적인 죄악이 드러난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한 죄악의 모습이다. 두 번째 지옥부터 다섯 번째 지옥까지는 과도함에서 기인한 죄들이다. 육욕에 빠지고, 물질적인 것에 탐식하며, 지나치게 인색하거나 소비하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을 통해 단테는 세계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제시한다. 과거의 인물들과 현재의 인물들이 사례로 등장하는 것이다. 가령 클레오파트라와 헬레네는 육욕의 죄로 오게 되고, 당시의 정치가들은 탐식과 분노의 죄로 온 것이다. 특히 오랫동안 피렌체의 정치가로 활동했던 단테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정치적으로 적대적인 인물에 대한 공격을 신랄하게 퍼붓는다. “저 놈은 현세에서 교만한 사내였다. 이름을 남길만한 선행은 아무 것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저놈의 혼은 여기서 저렇게 미쳐 날뛰는 거다. 지금은 왕이라 칭하며 큰소리 치고 있는 자들 중에도 무서운 악평을 현세에 남겨 훗날 여기서 돼지처럼 늪 속에서 살게 될 자가 있으리라.”
4. 다음의 죄악은 이단자와 폭력을 행사한 자들이다. “제멋대로 남의 피를 흘리게 하여 재산을 약탈했던 폭군들”이 이에 해당된다. 그렇기에 ‘알렉산더’는 폭력의 죄를 지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기독교적 윤리관을 통한 역사에 대한 재평가라 아닐 수 없다. 단테가 가장 상세하게 묘사한 지옥은 제8옥이다. 이곳은 모두 10개의 구렁이 있어 각각마다 다른 죄인들이 끔찍한 형벌로 신음하는 곳이다. 각각의 죄는 다음과 같다. ‘여자 유괴자, 아부추종자, 성물매매자, 마술사, 탐관오리, 위선자, 절도자, 권모술책자, 분열파괴자, 허위위조자’ 등이다. 인간의 삶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행위들이 죄악이 된 것이다. 그래서 메데이아를 유혹한 이아손이, 목마를 계획한 오디세우스가, 죄인이 된다. 분명 기독교적 시각이지만, 단테의 시선은 조금은 미묘하다. 가령 오디세우스가 지옥에 왔지만 그에 대해 결코 냉혹하게 평가하지만은 않는다. 영웅적 행위의 가치는 인정하기 때문이다.
5. 지옥을 이동하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일종의 ‘로드무비’와 같다. 각각의 지옥에서 단테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하소연을 듣고 그것을 지상에 알릴 것을 약속한다. 지옥에 갇힌 자들은 과거의 삶을 반성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한다. 때론 지옥의 동료들과 과거의 일을 가지고 다투기도 하는 것이다. ‘지옥’은 갱생의 가능성이 없는 곳이다. 그런 암담함이 끊임없는 갈등으로 그들을 좌절시킨다. 그렇기에 남은 자존심은 자신의 이름에 대한 평가에 집착일지 모른다. 끔직한 형벌로 고통받은 모습에 단테의 마음은 연민으로 가득찬다. 어쩌면 고통에 대한 정직한 시선일 것이다. 하지만 스승(베르길리우스)는 냉정하게 비판한다. “여기서는 정을 죽이는 것이 정을 살리는 게 된다. 천주님의 심판에 대해 연민의 정을 품는 자는 가장 발칙한 놈이다.” 그것은 ‘지옥’이 신의 정의가 실현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어설픈 연민은 죄의 실체를 지워버린다. 냉정하게 그들의 죄를 직시하라는 경고이다.
6. 연민과 고통 속에서 연이어 벌어지는 끔찍한 광경의 지속은 단테를 피폐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깨달음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죄악의 본질을 파악하는 과정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힘들어하는 단테를 스승이 격려한다. “비단 이부자리를 덮고 자면서 명성을 얻은 예는 없다. 이름도 내지 못하고 평생을 마친 자가 지상에 남기는 유물은 말하자면 공중의 연기, 물 위의 거품이다.” 참다움 구원은 현실의 추악한 모습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고통과 비극을 그대로 인식하고 거기에서 변화해야 함을 자각하는 일이 될 것이다. 단테의 여정은 신이 인간에게 그 길을 제시하지만 그것을 걷고 변화해야 하는 과제는 인간에게 주어져 있음을 강조하는 것일지 모른다.
7. <신곡: 지옥편>은 죄악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에게 가해진 형벌이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으며, 그것에 대한 인간군상들의 다양한 반응이 정밀하게 표현되고 있다. 신의 영광이나 정의의 구현과 같은 종교적 정서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구체적인 작품의 흐름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시선에 대한, 설득력있는 관점이 중심이 된다. 그런 점에서 작품의 독해는 부담스럽지 않다. 어차피 종교는 인간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내재적 힘이다. 그런 힘을 특별한 문학적 표현으로 만나는 것은 신의 힘이 축소된 현재에도 여전히 흥미로운 경험이다.
첫댓글 -신에게 다가가고 싶은 가엾은 인간의 존재, 그것이 인간다운 인간의 길이라 믿었던 시간들..... 지금도 우주는 쭉쭉 뻗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