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석: 교회신문 > 제 441호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메지 말라 (고후6:11~18)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이는 신명기 22장 10절의 말씀입니다. 소와 나귀를 한 쟁기에 메어 끌게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유대 율법에는 소와 나귀가 같은 멍에를 메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요? 소와 나귀는 몸체의 크기가 다르고 힘의 크기도 다르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몸체와 힘이 적은 나귀가 고통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합당한 멍에는 어떻게 메는 것일까요? 힘센 황소끼리 메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는 암수끼리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하십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이는 불신자와의 동업이나 결혼, 모사나 대업을 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 자와 함께 하는 것은 소와 나귀가 함께 멍에를 메는 것과 같은 것이며, 이로 인해 나귀가 고통을 받는 것처럼 믿는 자들이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믿는 자를 나귀에 비유하느냐 물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믿지 않는 자들은 거칠 것이 없는 반면, 우리 믿는 자들은 믿지 않는 자들에 비해서 해서는 안 되는 일, 삼가야하는 일, 절제해야 하는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하는 음행, 탐욕, 호색이나 거짓, 우상숭배를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운동회에 가면 이인삼각경기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안쪽의 발을 하나로 묶어 함께 뛰는 경기 말입니다. 그 때 마음이 맞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서로 뜻이 맞지 않으면요? 보폭이 맞지 않으면 어찌 됩니까? 분명히 넘어질 것입니다. 결승점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도중에 넘어져 무릎이 깨지고, 더는 얼굴도 깨지고 남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마음과 뜻, 사상이 맞지 않으면 이런 꼴이 납니다. 더욱이 신앙이 맞지 않으면 더 사나운 꼴을 만나게 되지요. 마음과 뜻이야 대충 맞출 수 있습니다. 사상도 타협하면 중도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므로, 서로 맞지 않는다면 사업이든 결혼이든 다 파경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성경을 봅시다. 사울이 사무엘과 함께 하다가 사무엘이 죽은 후 신접한 여인과 하나 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넘어졌습니다. 비참하게 죽고 만 것입니다. 재산과 지혜가 여느 열왕들보다 컸던 솔로몬, 그렇게 잘 나가던 그가 왜 마지막에 나라를 빼앗기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까? 믿지 않은 자와 멍에를 같이 메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취한 천여 명의 이방 여인들이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들여왔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유다 4대 왕인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산당과 아세라 상을 제하는 등 종교개혁을 단행하던 왕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셔서 나라를 강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견고해지자 그는 지속적으로 나라가 강성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그의 아들을 아합의 딸과 정략결혼을 시켰습니다. 또한 정략결혼으로 아합과 동맹을 맺은 그는 선지자 미가야의 예언을 무시하고는 길르앗 라못을 공격하다 아합은 전사하고, 자신은 겨우 목숨만 건지는 사태에 이르고 맙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여호사밧에게 선견자 예후가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서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대하19:2).
다시 말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메어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 그는 이스라엘 왕 아하시아와 공동으로 배를 만들어 다시스에서 오빌의 금을 수입하려고 했지만 그 배가 파선되고 맙니다. 왜요? 그 답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레사 사람 도다와후의 아들 엘리에셀이 여호사밧을 향하여 예언하여 가로되 왕이 아하시아와 교제하는 고로 여호와께서 왕의 지은 것을 파하시리라”(대하20:37).
우리에게는 아브라함과 같은 결단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내놓으라고 했을 때, 아내인 사라와 의논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라에게는 아들을 드릴만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국내 집회를 다니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부산 구덕체육관 집회를 위해 비행기를 타려고 공항에 나갔는데, 그 날 악천후로 인하여 모든 비행기가 결항되었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항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9시까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구덕체육관에 가야 합니다. 저를 기다리고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한참 기도를 하는데, 당시 제 운전을 해주던 집사가 저를 흔들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께서 잠깐 뵙고 의논 좀 하시잡니다.” 라고 했습니다. 저는 “지금 내가 하나님과 의논하고 있는데, 누구랑 의논을 한단 말이냐?”고 하고는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대구행 비행기가 하나 뜬다는 안내방송이 제 귀에 들렸고, 그 비행기에 올라 대구로 날아갔더니 신혼부부가 예약한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택시를 잡아타고 빗속을 달리며 오직 방언으로 기도했고 결국 제 시간에 구덕체육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제가 그 때 어머니와 상의했더라면 저는 절대 제 시각에 구덕체육관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믿음의 어머니였지만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람과 의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그 순간 저를 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의 결혼 문제로 상담해옵니다. 그러면 제가 먼저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이 같아야 합니다. 다른 것보다도 먼저 믿음이 있는 자여야 합니다.” 그러면 “물론이지요.” 라고 대답은 잘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사윗감이나 며느릿감을 데리고 오면 전혀 안 믿는 자를 데리고 오는 겁니다. 왜 그랬냐고 하면 “아휴, 목사님. 믿게 하면 되지요. 그럼 하나 전도하는 거잖아요. 놓치기 아까운 자리라 그랬어요. 학벌도 좋고, 가문도 좋고, 직업도 좋고 거기에 인물까지 좋은데 어떻게 마다하겠어요?” 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 대부분이 교회에 안 나오는 것은 물론, 나오던 아들, 딸마저 주저앉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과연 끝까지 잘 갈까요? 잘 간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옳은 것입니까?
사업을 하는 자들도 그렇습니다. 제가 이 설교를 한 두 번 하는 것도 아닌데, 믿지 않는 자와 동업을 하다 홀딱 망해서 울고 찾아오는 자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어떡해요?” 아니, 제가 목이 터져라 설교할 때는 어디 갔다 왔답니까? 귀에 딱지가 앉도록 설교를 했는데, 소귀에 경 읽은 겁니까? 그들은 너무 조건이 좋아서,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라서 동업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조건이 좋으면, 사람이 믿을 만하면 믿지 않은 자와 동업해도 좋다.” 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왜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깁니까?
그렇다면 “그럼 세상과 등 돌리고 살아야 하나요?” 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아닙니다. 그러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지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는 것은 믿지 않는 자로 인하여 믿음이 흔들릴 수 있고, 나아가 있는 믿음마저 아예 잃을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믿음을 잃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떠나고 징계만 남게 되니 고통만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아예 믿지 않는 자와는 동업이나 결혼, 그 어떤 대업도 꿈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와 동업을 했는데 개업식에 돼지머리 올려놓고 절하자고 하면 어떡하시렵니까? 주일에도 장사하자고 하면 주일 빼먹을 겁니까? ‘첫열매’ 드리자고 할 때 딴죽 걸 텐데, 십일조 드리자고 하면 ‘미쳤냐?’고 할 텐데 어쩌시렵니까?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여 제사 지내자고 하면 싸울 겁니까? 주말에 놀러가자고 하면 따라서 갈 겁니까? 이사하는데 좋은 날이라고 점집에서 날 잡아오면 그 날 이사할 겁니까? 고민할까 봐, 갈등할까 봐, 그것으로 인해 서로 사이 안 좋아질까 봐, 그러다 아예 믿음 팔아먹을까 봐 하나님이 미리 말씀하시는 겁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메지 말라.” 할렐루야!
경고를 무시하면 경고도 너를 무시한다
마음이 맞는 자는 우주와도 안 바꾼다
♣ 은혜로운 찬양 목록
http://m.cafe.daum.net/ssj0643/cR42/93?svc=cafe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