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변통을 비우는 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키를 뒤집어 쓴 오줌 싼 아이마냥 계면쩍은 표정으로 아빠의 소변통을 들고 병실을 나설 때마다 옆 침대 밑에 있던 소변통을 급히 챙겨 든 민우가 내 손에 들려있던 것 까지 가져가며 말했다.
“이것도 비워야 하거든. 가는 길에 내가 다 비워올게.”
민우는 옆 침대에 누워있는 한수 아저씨의 아들.
한수 아저씨는 민우를 버렸다. 흥청망청 마음대로 살다가 많은 빚을 졌고 생명이 위독해지자 일말의 양심으로 민우를 찾았다. 간병을 원해서가 아니었다. 유산이 아닌 빚을 상속받게 할 순 없는 노릇이라 상속포기를 대비시키기 위함이었다.
“입맛이 없구나. 수육이라도 먹으면 입맛이 돌아오려나...돼지고길 먹어보고 싶네...어쩌다 이런 병에 걸려서는... 민우야... 수육이 먹고 싶구나...”
“병에 걸린 게 억울하세요? 아버지 원하던 대로 원 없이 사셨잖아요. 너무 억울해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그렇게 먹고 싶어 하는 돼지를 생각해보세요. 병에 걸려서 죽은 돼지야 말로 행복한 돼지래요.”
얼음으로 만든 비수를 맞은 한수 아저씨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고 민우는 병실 밖으로 나갔다. 아빠가 잠든 걸 확인하고 살며시 그의 뒤를 따랐다.
“모질게 말했으면 계속 모질어야지. 울긴 왜 우니?”
나를 발견한 민우는 손등으로 급하게 눈물을 훔치더니 이내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사브레 구름이네...”
“방금 뭐라고 했어? 사브레... 구름?”
“응. 사브레 몰라? 비스킷. 구름모양이 꼭 그 과자 같이 생겼어.”
“알아... 너무 잘 알아...나... 나 말고 저 구름을 사브레라고 부르는 사람을 처음 만났어. 신기하다...”
나를 바라보는 민우의 고요한 눈.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우물 같은 그의 눈동자 안으로 빨려들어 갈 것만 같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한수 아저씨가 돌아가셨고 휑한 옆 침대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아빠의 동공도 결국 그 침대처럼 비어버렸다. 이제는 정말로 고아가 되어버린 스물일곱 살의 민우와 나. 같은 병실에 있던 동지애로 두 번의 장례를 함께 치렀다. 다른 상주도 조문객도 없었지만 민우는 장례음식으로 수육을 추가 주문했다.
어렵사리 병원비와 장례비를 지불하고 병원을 떠날 때, 병실에 있던 잡동사니 생필품을 챙겨 모두 버렸다.
병원 앞 갈림길에 서서 민우가 말했다.
“너를 계속 보고 싶어.”
고요하고 고독한 그의 검은 눈동자. 나와 같은 눈동자다. 나도. 라고 대답하려다 말을 삼켰다. 버린 생필품처럼 민우도 버려두고 싶었다. 간병생활동안 읽었던 책의 문구가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음수(-)더하기 음수(-)는 여전히 음수예요.
그건 수학이라서 이론의 여지가 없어요.
두 개의 고독을 합친다고 하나의 행복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에요. -밑줄 긋는 남자 中-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우린 장례도 함께 지낸 사이니 언젠간 다시 만나지지 않을까?”
민우의 검은 눈동자가 더욱 짙어졌다.
“정작 우린 옷깃도 스친 적이 없어.”
“그럼 지금 스치면 되잖아.”
나는 스웨터의 소매를 길게 뺀 다음 애써 웃으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는데 옷깃이라는 건 말이야. 생각보다 스치기 힘든 부위에 있어.”
민우는 악수하려고 내민 나의 손을 잡아 힘껏 끌어당겼다. 귓불에서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나는 두레박을 타고 그의 우물 안으로 깊이깊이 잠겨 들어갔다. 서늘할 줄 알았던 우물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깊은 포옹 후 민우가 내 코트 깃을 매만지며 말했다.
“옷깃이란 건 두루마기나 저고리의 목둘레라고 바보야.”
사랑은 한 줄기 바람일 뿐이다.
나는 사랑이라는 바람을 쐬다가 감기에 걸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밑줄 긋는 남자 중 中-
다시금 밑줄 긋는 남자가 내게 속삭였지만 나는 지독한 독감에 걸리고 말았다.
2
볕이 드리워진 민우의 눈 속 검은 우물물이 찬란하게 반짝였다.
“답장이 오는데... 행복하더라...”
오랜만에 다시 만난 우리는 볼링장으로 향했다. 친구차를 빌려온 민우는 트렁크를 열더니 볼링화 두 개를 내려놓았다.
“친구녀석네 커플 볼링화인데 어차피 남이 신던 볼링화 대여해서 신을 거면 이거 신자.”
“싫어.”
“신자.”
“저거 나한테 맞지도 않아.”
같은 디자인의 볼링화를 신지 않아도 같은 눈동자를 가진 우리인데 민우는 무얼 증명 받고 싶어 한 걸까.
한번만 신어 달라는 민우의 부탁에 결국 발을 우겨 넣었다. 여성 볼링화는 240mm 내 발은 245mm
발은 울었지만 나는 행복했다.
볼링장에서 나와 내 운동화로 다시 갈아 신었을 때 꽉 끼던 행복이 조금 헐렁해 진 느낌을 받았을 정도로 민우와의 시간이 즐거웠다.
음수(-)더하기 음수(-)는 여전히 음수예요. 밑줄이 희미해진다.
스물여덟의 가난한 연인
가끔 볼링을 치고, 스쿠터를 타고 가까운 공원으로 가 산책을 즐기며 토스트로 한 끼 데이트 식비를 아낀다.
“햄 치즈 하나랑 스페셜 토스트 하나 주세요.”
“음~~~~녜!!!!!!”
알바생의 독특한 대답에 마주 본 우리의 눈 속 우물물이 넘실댄다.
“감사합니다.”
“음~~~~녜!!!!!!”
한동안 우리는 토스트집 알바생 성대모사 놀이에 몰두했다.
“나 사랑해?”
“음~~~~녜!!!!!!””
“내일도 만날까?
“음~~~~녜!!!!!!”
3
스물아홉의 여전히 가난한 연인
그의 자취방에서 월드베이스볼 클래식을 함께 봤다. 한국대표팀은 중국에 콜드게임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콜드게임이 뭐야?”
“지금 중국이 너무 못해서 점수차가 지나치게 벌어졌지? 더 이상 경기를 계속할 필요가 없다고 느껴서 심판이 게임 종료 결정을 내린 거야. 쉽게 말해 심판에 의해 종료결정이 내려진 게임을 콜드게임이라고 해.
cold가 아니라 called."
열심히 설명하는 민우의 모습 뒤로 주희의 환영이 나타났다.
“민우랑 헤어져. 너흰 안 돼. 실장님이 너한테 마음 있는 거 같던데 민우라니. 언제까지 토스트나 먹고 김밥천국 들락거릴 거야? 민우랑 결혼하면 휴... 앞이 훤히 보인다. 보여.”
‘심판 주희가 우리 연애에 종료를 선언했다.’
“아....콜드게임...이젠 확실히 그 개념을 알겠어. 하지만called 보다 cold가 더 어울리는 건 왜일까?”
민우는 싱긋 웃더니 내게 입을 맞췄다.
“세영아. 어디서 들었는데 키스를 많이 하면 오래 산대. 우리 많이 하자.”
‘민우야 나는 어려가지 상념들로 사랑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수명이 줄어드는 것 같은데 어쩌지?’
평생 지독한 가난에 허덕이며 살았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음수(-)더하기 음수(-)는 여전히 음수예요.
그건 수학이라서 이론의 여지가 없어요.
다시 짙어진 밑줄. 나는 민우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실장님의 저녁식사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토스트 200개를 사먹을 수 있는 풀코스를 저녁한 끼로 먹었다. 달콤했던 샴페인.
하지만 실장님의 얼굴은 샴페인에서 피어났다가 사라진 기포처럼 내 머릿속에서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켠 라디오에서 김진표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안녕이라 말 하지마
아직은 날 떠나가지마
이 밤이 지난대도 몇 만 년이 흘러도
아직 난 해줄 얘기가 많아
...
조그만 우리의 발이 되어 준 내 스쿠터
뒤에서 들리던 행복한 네 웃음소리
그리고 말하기엔 유치한 그 놀이
갑자기 필름처럼 모든 것들이 다가와
....
민우...
나는 얼어붙었다. 잔인한 우리의 Cold Game.
한참 만에 정신을 차려 서점에서 사온 책을 펼쳤다.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
똑똑한 속물이 되라고 저자는 말한다.
성공적 결혼을 위해서는 적당히 속물적인 선택이 필요하다.
성공적 결혼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남성상을 열거해 놓은 파트를 읽으며 내 안의 냉정을 굳혀가고 있을 때,
딩동~ 휴대폰이 울렸다. 민우였다.
“사랑해. 바보야.”
원망도, 질문도, 질타도 없었다.
나의 우물물이 격한 소리를 내며 넘쳐흘렀다.
내 사랑이 책에 나오는 여자의 인생을 서포트해 줄 왕자는 아니지만 하나는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내가 바보라는 거.
난 정말 바보다. 그는 나를 아무런 계산 없이 사랑한다. 이런 바보인 나를... 사랑한다.
두 개의 고독을 합친다고 하나의 행복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에요.
개 같은 소리. 그의 인생을 서포트해 줄 공주는 아니지만 그를 행복하게 해 줄 거야.
민우에게 달려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문을 연 순간 거짓말 같이 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맨발로 뛰쳐나가 그의 얼굴을 감싸 쥐고 뜨거운 키스를 퍼부은 뒤 아름다운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오래오래 같이 살자.”
-에필로그-
다음날 아침, 이른 새벽부터 주방에서 뚝딱거리던 민우가 세영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세영아. 버섯전골 만들었어. 일어나~ 근데 냄비받침이 안보이네. 어디에 뒀어?”
이불 속에서 세영이 베시시 웃으며 답한다.
“쓰레기통 한번 뒤져봐, 거기 책 두 권 있거든. 그거 냄비받침으로 쓰자.”
“에? 책을 왜 버린 거야? 에이 식탁에 올리는 건데 더럽게.. 버리려고 했던 건 그냥 버리자.
전에 분명 봤었는데...”
부엌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 민우는 둥근 냄비받침을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해님같이 붉고 둥근 냄비받침이 우릴 향해 손을 흔든다.
두 개의 빛나는 검은 우물이 마주한 채 넘실댄다. .
끝/ well: 우물, welling up: 북받쳐 오르다.
첫댓글 밑줄긋는남자 라는 책 너무 읽어보고싶어졌어요
꼭 사서 읽을거에요~~^-^♡
어휴 결국 둘이 헤어졌어야하는데
베드엔딩이네요 (이상 솔크보낸 1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