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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 俗離山(신선대2코스)
- 위치 :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 높이 : 1,058m
1. 일 시 : 2013. 1. 17. 07:00 ~
2. 장 소 : 속리산(신선대2코스)
3. 참석인원 : 23명
4.탐방코스: 화북분소 - 문장대 - 신선대 - 세심정 - 법주사 (8,9km / 5시간)
5. 다녀온길 : 중앙고속 춘천IC - 영동고속 만종JC - 중부내륙고속 여주JC, 문경새재 IC - 문경대로 가은마성방면 - 소야삼거리 - 은성로 - 문장로 문장대방면 - 문장대2길 - 화북분소주차장(하차), 속리산국립공원주차장(승차)
6. 오늘활동 상황
○ 07:00 --- KBS앞 출발(충주휴게소 경유)
○ 09:50 --- 화북분소주차장도착
○ 09:55 --- 단체기념사진촬영 및 일정안내
○ 10:00 --- 들머리진입
○ 10:10 --- 화북분소, 화북탐방지원센터 경유
○ 10:17 --- 성불사입구
○ 10:20 --- 오송폭포
○ 12:00 --- 문장대갈림길
○ 12:06 --- 문장대
○ 12:30 --- 점심식사
○ 13:09 --- 문수봉
○ 13:13 --- 칠형제봉
○ 13:30 --- 신선대
○ 14:02 --- 관음암
○ 14:21--- 금강골휴게소
○ 14:30 --- 순조대왕태실입구
○ 14:44 --- 비로산장
○ 14:50 --- 세심정
○ 15:00 --- 목욕소
○ 15:30 --- 법주사
○ 15:50 --- 조각공원
○ 16:00 --- 법주사주차장도착(후미)
○ 16:10 --- 하산행사
○ 16:40 --- 법주사주차장출발
○ 19:30 --- KBS앞 도착(음성휴게소경유)
7. 속리산 살펴보기
☐ 개관
- 1970. 3. 24 국립공원지정
- 산림청선정 100대 명산
- 한국의 산하 선정 100 중 10위
-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과 경북 상주군 화북면에 걸쳐 있는 속리산은 우리나라 대찰 가운데 하나인 법주사를 품고 있다. 정상인 천황봉(1,058m), 비로봉(1,032m), 문장대(1,033m), 관음봉(982m), 입석대 등 아홉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능선이 장쾌하다. 봉우리가 아홉 개 있는 산이라고 해서 신라시대 이전에는 구봉산이라고도 불렀다.
- 속리산은 산세가 수려하여 한국 8경중 하나로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봄에는 산벚꽃, 여름에는 푸른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가을엔 만상홍엽의 단풍이 기암괴석과 어우러지고, 겨울의 설경은 마치 묵향이 그윽한 한 폭의 동양화를 방불케 하는 등 4계절 경관이 모두 수려하다.
- 속리산은 보은군, 괴산군과 경상북도 상주군 경계에 있는 산으로서 속세를 떠난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우리나라 8경중의 하나로 남서방향으로 뻗어나온 소백산맥 줄기 가운데 위치하며 다수의 명승고적이 몰려 있으며 화강암을 기반으로 하여 변성퇴적암이 군데군데 섞여있어 변성 퇴적암 부분은 깊게 패이고 화강암 부분은 날카롭게 솟아올라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계곡을 이룬다.
- 최고봉인 천왕봉을 중심으로 비로봉, 길상봉, 문수봉, 보현종, 관음봉, 묘봉, 수정봉등 8개의 봉우리와 문장대, 입석대, 경업대, 배석대, 학소대, 신선대, 봉황대, 산호대 등 8개의 대가 있으며 속리산이라는 이름 외에도 광명산, 지명산, 미지산, 구봉산, 형제산, 소금강산, 자하산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 속리산은 법주사(사적 명승지4호), 문장대, 정2품 소나무(천연기념물 103호)로 대표된다. 법주사에는 팔상전, 쌍사자석등, 석연지의 국보와 사천왕석등, 대웅전, 원통보전, 마애여래의상, 신법천문도병풍의 보물등 문화재가 많다.
- 속리산은 산행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은 산이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찾아와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는 곳 이어서인지 행락객들이 수시로 찾아 든다.속리산 단풍은 설악이나 내장산과 같이 화려하지 않고 은은하다.
- 신라 헌강왕 때 고운 최치원이 속리산에 와서 남긴 시가 유명하다.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사람은 도를 멀리 하고/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으나/속세는 산을 떠나는구나"(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
- 우암 송시열은 속리산 은폭동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양양하게 흐르는 것이 물인데/어찌하여 돌 속에서 울기만 하나/ 세상 사람들이 때 묻은 발 씻을까 두려워/자취 감추고 소리만 내네"
인기명산 100 중 10위
- 법주사, 문장대, 정2품 소나무 대표되는 속리산은 법주사 입구의 울창한 오리숲, 기암괴석이 즐비한 수려한 경관에 단풍 또한 장관이다. 단풍이 절정인 10월에 많이 찾으며 봄에도 인기 있다. 법주사에는 여러 문화재가 많고. 복천암까지의 나들이 코스도 있어 사계절 인기 있다.
산림청 선정 100 명산 선정사유
- 예로부터 산세가 수려하여 제2금강 또는 소금강이라고도 불리울 정도로 경관이 아름답고 망개나무, 미선나무 등 1,000여 종이 넘는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국립공원으로 지정(1970년)된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
- 법주사(法住寺), 문장대, 천연기념물 제103호인 정이품송(正二品松) 및 천연기념물 제207호인 망개나무가 유명
8. 등산기행
☐ 산행안내준비
<속리산국립공원안내도>
- 속리산국립공원 내 지정탐방로 대부분은 최근 몇 년 내에 거의 다녀온 코스들이다. 자연휴식년제 때문에 입산통제 중인 문장대 - 관음봉 - 묘봉 - 운흥리방향 코스가 마음에 걸렸지만 입산이 자유롭지 못한 이상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도명산2코스는 몇 년 전 가볍게 다녀오기 위해 염두에 뒀었지만 도명산1코스를 다녀왔기 때문에 흥미를 유발하지 못하는 코스로 이미 잊은 지 오래된 코스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중 남은 산중에서 구미에 당기는 산을 선정하기에는 계절특성상 어려움이 있고, 버스운행소요시간과 산행소요시간 면에서 산행심리를 유발하는 데에도 물리적으로 한계를 느꼈다.
- 그래서 그런저런 사연을 들어 속리산을 선정하였다. 선정하고 난 후에도 하필이면 왜? 또! 속리산이냐는 물음표가 생겼다. 그 물음에 대하여는 말이나 글로서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구지 구차한 변명을 하자면 “좋은 산은 열 번을 가도 좋더라! 로 강변해 보고자 한다. 이미 속리산은 4계절 손색없는 산행지로 정평이 나 있는 점과 어느 코스를 막론하고 큰 부담 없이 하루일정으로 소화할 수 있는 코스인 점이 장점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이 코스를 처음 다녀오시는 분들에게는 처녀 탐방의 계기를 마련하고 다시 찾는 분들에게는
속리산 겨울 산행의 묘미를 재연해 보자는 뜻으로 이해를 구해마지 않는다. 모두님들에게 하루를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코스로 기능하여 기억에 남는 추억을 만드소서! 를 마음속 깊이 새기면서 안내준비를 마쳤다.
- 여기서 속리산국립공원을 살펴보고 넘어간다. 한국팔경 중의 하나인 속리산은 태백산맥에서 남서방향으로 뻗어 나오는 소백산맥 줄기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남북으로 백두대간이 지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천왕봉에서 한남금북 정맥이 분기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 충북 보은군, 괴산군, 경북 상주시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해발 1057m인 속리산은 화강암을 기반으로 변성퇴적암이 섞여 있어 화강암 부분은 날카롭게 솟아오르고 변성퇴적암 부분은 깊게 패여 높고 깊은 봉우리와 계곡은 가히 절경을 이루고 있어 광명산(光明山), 미지산(彌智山), 소금강산(小金剛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화강암의 기봉(奇峰)과 산 전체를 뒤덮은 울창한 산림은 천년고찰 법주사와 잘 조화되어 승경(勝景)을 이루고 있다. 최고봉인 천왕봉(天王峰)을 중심으로 비로봉(毘盧峰), 길상봉(吉祥峰), 문수봉(文殊峰)등 8봉과 문장대(文藏臺), 입석대(立石臺), 신선대(神仙臺) 등 8대 그리고 8석문(石門)이 있다. 법주사지구 학소대 주변 은폭동(隱瀑洞)계곡, 만수계곡, 화양동지구 화양동계곡, 선유동계곡, 쌍곡계곡과, 장각폭포, 오송폭포(五松瀑布)등의 명소가 있으며, 정이품송(正二品松천연기념물 제103호), 망개나무(천연기념물 제207호) 등 1,055종의 식물과 까막딱다구리(천연기념물 제242호), 하늘다람쥐(천연기념물 제328호) 등 희귀 동물을 포함하여 1.831종의 동물이 서식하고 있는 자연자원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속리산에 들어가면 속세를 잊게 된다. 산과산들이 겹겹이 펼쳐놓은 절경을 통해 속세의 아름다움도 더불어 깨닫게 되는 산 또한 속리산이다. 속리산 국립공원은 봄,여름,가을,겨울의 특징이 뚜렷이 드러나는 곳이다. 법주사지구, 화양동지구, 화북지구, 쌍곡지구 네 지구로 구분이 되어 있는 속리산에서의 사계절 탐방코스는 봄,가을에는 문장대,천왕봉,도명산,칠보산,군자산을 탐방할 수 있고, 여름에는 화양/선유/쌍곡계곡을, 겨울에는 천왕봉 코스에 펼쳐진 설원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속리산 신선대2코스 등산지도>
- 속리산국립공원 내에는 아래와 같이 13개의 지정 탐방로가 있다. 이중 도명산2코스만 생소할 뿐 눈에 익은 코스들이다. 최근 몇 년 내에 모두 거쳐 온 코스들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아래 신선대2코스를 기본코스로 보고, 당일 현장의 상황을 지켜봐 가면서 산행능력이 탁월한 분들을 위해 신선대에서 천왕봉 경유코스를 병행하는 방안과 컨디션 난조를 보이시는 분들을 위해 문장대에서 세심정 방향으로 곧바로 하산하는 방안을 동시에 염두에 두었다.
▶ 천왕봉1코스 : 법주사탐방지원센터~세심정~문장대~천왕봉~세심정~법주사탐방지원센터
▶ 천왕봉2코스 : 화북탐방지원센터~문장대~신선대~천왕봉~세심정~법주사탐방지원센터
▶ 장성봉코스 : 절말~장성봉~제수리재
▶ 칠보산코스 : 떡바위~칠보산~절말
▶ 도명산2코스 : 화양탐방지원센터~첨성대~도명산~공림사
▶ 도명산1코스 : 화양동탐방지원센터~첨성대~도명산~학소대
▶ 장각동코스 : 상오리~장각폭포~장각마을~천왕봉
▶ 신선대2코스 : 화북탐방지원센터~문장대~신선대~세심정~법주사탐방지원센터
▶ 신선대1코스 : 법주사탐방지원센터~세심정~문장대~신선대~세심정~법주사탐방지원센터
▶ 문장대2코스 : 화북탐방지원센터~오송폭포~문장대~세심정~법주사탐방지원센터
▶ 문장대1코스 : 화북탐방지원센터~문장대
▶ 문장대코스 : 법주사탐방지원센터~세심정~문장대
▶ 군자산코스 : 소금강주차장~큰군자산~도마골
☐ 산행안내
<단체기념사진>
- 최근 2011. 11. 24 속리산국립공원 내 천왕봉2코스와 장각동코스(화북분소 - 문장대 - 신선대 - 천왕봉 - 상오리)를 연계란 탐방 당시에는 32명이 탐방 길에 올랐었다. 그 당시에는 버스 한 대 정원을 일찌감치 확보하면서 조기에 신청 마감하는 호황을 누렸었다. 그러나 출발 전날부터 의외의 취소사태가 벌어지는 바람에 겨우 30여명을 넘기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당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오늘 역시 겨울산행의 징크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상이었다.
- 상주시 화북면일원 주간날씨는 구름조금 끼고 -10℃ ~ 1℃ 분포를 보일 것으로 예보하였다. 大寒을 3일 앞둔 날씨치고는 양호한 편이었다. 大寒은 일 년 중 날씨가 가장 춥다는 날이다. 이십사절기(二十四節氣)의 마지막 절기로 소한과 입춘의 사이에 있다. 춘분점을 기준으로 하여 태양이 황도(黃道)의 300도(度)에 이르는 때로 매년 양력 1월 20일 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혹한에 대한 염려는 일찌감치 접을 수 있었다. 춘천의 아침기온이 -8,9℃를 보일정도로 포근한 날씨였으므로 현장의 날씨는 보나마나 염려를 붙잡아 매도 될 듯 싶었다. 오늘 동해안은 대설주의보가 내렸지만 내륙의 날씨는 맑을 것으로 예보하였기 때문에 오늘도 지난주에 이어 좋은 산행환경을 예고할 수 있었다.
- 빠른 길 찾기 정보를 얻기 위해 속리산국립공원 화북분소를 검색지로 입력해 보았으나 자동차길 찾기 검색결과 없음으로 나타났다. 별수 없이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를 목적지로 입력하였더니 229,1km / 3시간11분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출발 전 버스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를 화북분소로 입력하였더니 바로 안내도 창이 활성화 되었다. 오늘은 지난주와 같은 우발사태는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믿음이 갔다. 이유는 간단하다. 버스내비게이션 검색 정보 이외에도 믿음이 가는 기사님이 배정되었기 때문이다. 10:00경 들머리 진입을 예상했었는데 예상시간 전에 여유 있게 목적지에 홈인하여 10:00정각에 들머리에 들 수 있었다.
- 화북분소주차장은 우리 일행이 유일한 단체 손님이었다.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매표소를 방문하여 위에 있는 화북분소 앞 주차장까지 버스 진입을 협의하고자 하였으나 출입문이 굳게 잠긴 채 썰렁한 빈집이었기 때문에 야심찬 의도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위에 있는 주차장은 승용차만 진입을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하고 진입을 시도해 볼까 하다가 이건 아니지 싶었다. 지킬 것은 스스로 지킨다는 습관화된 잠재의식이 발동하였던 것이다.
- 들머리에 들면서 지난밤 내린 눈이 우리 모두 일행을 환영하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고도 큰 불편 없이 오를 수 있을 정도의 눈이었기 때문이다. 어림잡아 2~3㎝ 정도 되는 적설량이었지만 먼저 내린 눈이 채 녹지 않은 상황이기에 온 세상이 눈 세상이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발에 밟히는 모든 것이 눈이었기에 오늘은 눈으로 시작해서 눈으로 끝날 것 같은 조짐이 보였다.
- 화북분소와 화북탐방지원센터에서 올려다 보이는 문장대 일원은 운무가 짙게 드리워져 있어 그 모습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귀마개를 하지 않고도 불편함이 없을 정도의 포근하고 화창한 날씨였지만 정상에서의 시원한 조망은 어려울 듯 싶었다.
- 화북면은 상주에서 서북부 40km에 위치한 산간지역으로서 북쪽으로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이, 서쪽으로는 보은군 산외면이 인접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화남면과 화서면, 외서면이, 동쪽으로는 문경군 농암면 이 인접하고 있다. 또한 오늘 들머리가 소재한 장암리는 원래 화령현 지역이었으나, 나중에 구역 개편으로 상얼(上1)과 하얼(下2)을 합하여 상주군 화북면 지역이 되면서 큰 바위가 있어서 장바우, 또는 장암이라고 했다고 한다. 1914년 하돌리와 상돌리 일부를 합하여 장암리라고 했다.
<화북분소>
- 속리산국립공원 화북분소는 당초 1986. 1. 1 속리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 화양동지소로 개소하였다. 그 후 화양동도립공원관리사무소, 국립공원관리사무소로 명칭이 개칭되었다가 1987. 8. 5 국립공원관리공단 속리산서부관리사무소 개칭, 1988. 1. 1속리산관리사무소 개칭(서부, 동부관리사무소 통합), 동부사무소가 화북분소로 기구축소 되면서 명칭이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오송폭포>
- 화북분소에서 입산한 몇 차례의 산행에서 오송폭포는 들려 보지 못하고 간과했었다. 그래서 오늘은 산행안내준비를 하면서부터 이번에는 반드시 들려 볼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오송폭포는 성불사입구에서 진행방향 왼쪽계곡 100m지점에 있다. 아무도 발길 한 흔적이 없는 눈 위에 발도장을 찍으면서 올라갔지만 따라 올라오는 일행 분들이 아무도 없었다. 五松瀑布는 속리산 신선대에서 발원한 계류가 빚은 높이 15m정의 아름다운 폭포다. 그러나 지금은 혹한기인 탓에 빙폭을 이뤄 새로운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이 폭포는 보기에 따라 5단 또는 7단의 층을 타고 물줄기가 구르지만, 비 온 뒤에는 층이 구별되지 않을 만큼 장쾌한 자태를 과시한다고 한다. 이 일대의 계곡을 시어동(侍御洞)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세조가 찾았을 때 칡넝쿨이 하늘로 치솟아 왕의 행차가 편하도록 모셨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지난주는 민가에 들려 화장을 하느라 후미 중 후미신세가 됐었는데 오늘은 오장폭포에 눈이 홀리는 바람에 후미 중 후미 신세가 되었다.
- 위에서 언급한 시어동(侍御洞)은 장바우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오송폭포 동쪽에 있는데 속리산국립공원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문장대 바로 아래 마을이다 문장대로 가시는 세조대왕을 모셨으므로 시어동이라 한다고 한다. 신선대(神仙臺). 경업대(慶業臺). 입석대(立石臺). 어림대(御臨臺). 학소대(鶴巢臺). 오송폭포(五松瀑布). 성불사(成佛寺)와 국립공원화북분소가 있는 마을이다.
<문장대(文臧臺)>
- 12:06 문장대 도착
- 오송폭포에서 부터 외톨이가 되어 나 홀로 산행이 시작되었다. 문장대 2km 전방 지점에 이르면서 고문님과 총무님을 비롯한 후미 팀과 합류하였다. 선발팀에는 회장님과 부회장님께서 동행하셨으므로 오늘은 끝까지 후미에 남을 심산이었다. 문장대 전방 1,5km 지점을 쉬엄쉬엄 지나는 동안 서둘러 올라오는 산객 한 분이 따라 붙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인사치례를 한 다음 어디서 오셨느냐는 질문을 날렸다. 우리는 창원에서 왔는데 요즘 날씨가 추우니까 사람이 없어 죽을 지경입니다. 라고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이었다. 몇 분이나 오셨는데요? 라고 재차 묻자 오늘 스무 명이 왔는데 적은 인원으로 버스 한 대 오십오만 원 주고 운행하려니 부담스럽네요! 그렇다고 산에 안 올 수도 없고 집행부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라고 부담스러운 심경을 술술 털어 놓는 것이었다. 선생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춘천에서 왔는데 오늘 스물세 명이 왔는걸요. 아! 그렇습니까? 요즘 어디를 가나 다 마찬가지인가 보네요. 네! 아마도 그런 것 갔습니다. 한겨울 지나면 좋아지겠죠? 즐거운 산행되십시오! 로 작별을 고했지만 씁쓸한 여운이 남았다.
-문장대 0,6km를 알리는 이정표 지점을 지나면서 상고대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오늘 상고대 제대로 한 번 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분위기에 도취해 있을 즈음 난데없이 옆에서 대장님! 좋다! 소리가 터져 나오는 바람에 어안이 벙벙하였다. 아니!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도대체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장이 좋다는 것인지? 아니면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열린 상고대가 좋다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보나마나 정답은 상고대가 분명할 진데 아니! 내가 그렇게도 좋습니까? 라고 우문을 날리는 장난기가 발동하고 말았다.
- 눈도 즐기고, 상고대도 즐기고, 바위와 소나무와 눈이 조화를 이룬 그림 같은 풍광을 즐기다 보니 어느새 문장대 갈림길 안부에 이르렀다. 평소 1시간30분이면 족히 오를 만한 구간임에도 불구하고 2시간이나 걸렸던 것이다. 이미 선발팀 중 몇 몇 분은 문장대 정상을 다녀와서 밥자리를 펴고 점심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 해발 1,033m높이의 문장대에 오르면 속리산의 절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그렇지만 오늘은 아니올시다! 이었다. 들머리에 들면서 예상한 대로 시원한 조망을 접어야만 했다. 연무와 박무가 오락가락 하는 바람에 지척의 관음봉과 문수봉 일원에 곱게 핀 상고대만이 찬란히 빛났고 또한 눈부셨다. 여기서 평소 같았으면 오늘 진행방향으로 칠형제봉, 문수봉, 신선대, 비로봉, 천왕봉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지금은 휴식년제 중인 관음봉, 속사치, 북가치, 묘봉, 상학봉, 운흥리 일원을 시원하게 내려다 볼 수 있지만 마음속에 그려 놓고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아름다운 속리산하 겨울 모습의 진수를 본 듯한 진한 감동과 감흥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으리라 본다. 말이 필요 없었다. 동행하신 분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문장대는 경북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산32번지 내 속리산의 중심부에 위치한 명대(名臺)이다. 문장대는 바위가 하늘 높이 치솟아 흰 구름과 맞닿은 듯 한 절경을 이루고 있어 일명 운장대라고도 한다. 문장대 안내판에는 문장대를 세 번 오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속설을 전하고 있다.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의「속리산기(俗離山記)」가 있고,「문장대이절(文藏臺二節)」이 있다. 옛 시인 박효수(朴孝修)는 이 경관을 ‘문장대(文莊臺)’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사면에 퍼런 부용이 우뚝 솟았다. 긴 산허리 싱그러운 물줄기가 몇 겹이고 거듭하였구나1 문장대는 천고의 이끼가 싸고 있고 미륵굴에는 만주(萬株)의 솔이 그늘지었네. 용이 돌아가고 난 탑 속에는 진골(眞骨:舍利) 나귀가 쉬는 바위 앞에는 신선의 자취 찾아본다. 삼한(三韓)에 복을 내림이 누가 으뜸인가 책호전(柵瑚殿) 위에 불상이 아름답다.“『신증동국여지승람』은, “층이 쌓인 것은 자연적으로 그러한 것이 높게 공중으로 솟았고, 그 높이는 알지 못한다. 넓이는 3천의 사람이 둘러앉을 만 하다. 대 위에는 물덩이가 동이만 한 게 있어서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오니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비가와도 넘치지 않는다. 이것이 세 줄기로 나뉘어 반공으로 흘러내린다. 한 줄기는 동으로 흘러 낙동강의 발원이 되고, 한 줄기는 흘러 남으로 가니 금강이요, 나머지는 서쪽으로 가서 달천이 되었다가 금천으로 흐른다.”고 전한다.「복천사사적(福泉寺事蹟)」기는, “세조가 열 섬의 환약과 열 두 동이의 탕약으로도 치유되지 않는 병으로 속리산에서 요양할 때, 월광태자(月光太子)가 현몽하여 말하기를 동쪽으로 15리 올라가면 영봉(靈峰)이 있고, 그 곳에 올라가 기도하면 신상에 밝음이 있다고 했다. 그 곳이 문장대(雲壯臺)인데 그 곳을 오르니 ‘삼강오륜’을 설파한 한 권의 천서(天書)가 있어서 엎드려 기도한 후 신하들과 강론하였다. 이후로 이르길 모두들 문장대(文藏臺)라 한다.”고 했다. 문장대 위에는 불규칙한 평면 위에 46기의 크고 작은 바위구멍과 수조(水槽)가 있다. 수조는 28기다. 김대성과 운열수에 의하면 이곳은 천제단(天祭壇)으로 오랫동안 제사(祭祀)를 올려 오던 곳이라 한다. 고구려의 광개토왕과 신라의 선덕여왕이 이곳을 다녀가고, 고려 태조 왕건과 조선 태조 이성계도 천제를 지냈다고 한다. 문장대의 알바위에 아기를 낳게 해 달라고 빌면 천하장사를 잉태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고 한다.
<속리산 지명 유래>
- 속리산이라는 산명(山名)을 얻게 된 연유를 살펴본다. 삼국유사의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風岳鉢淵數石記)에 의하면 속리산은 원래 구봉산(九峰山)이라 불리어 오다가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사에 고승인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신라 혜공왕 2년(서기 776)에 미륵장육상(彌勒丈六像)을 주조하여 봉안하고 금산사에서 지금의 속리산으로 가는 도중에 소달구지를 탄 사람을 만났다. 그 소들이 율사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소를 탄 사람이 내려서 "이 소들이 어째서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그리고 스님은 어디에서 오십니까?"하고 물었다. 율사는 "나는 금산사의 진표라는 승(僧)인데 내가 일찍이 변산(邊山)의 불사의방(不辭議房)에 들어가 미륵지장의 두 보살 앞에서 친히 계법(戒法)과 진생(眞生)을 받아 절을 짓고 오래 수도할 곳을 찾아서 오는 길입니다. 이 소들은 겉으로는 어리석으나 속으로는 현명하여 내가 계법을 받은 것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끓어 앉아 우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 사람이 이 말을 듣고 나서 "짐승도 이러한 신앙심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니 어찌 신앙심이 없겠습니까?"하고 곧 낫을 들어 스스로 머리를 잘랐다. 율사는 자비스런 마음으로 다시 머리를 깍아 주고 계(戒)를 받게 하였다. 그들은 속리산 골짜기에 이르러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보고 표시해 두고 다시 명주(溟洲 : 지금의 강릉)를 거쳐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鉢淵數)를 창건하였다 한다. 이때 진표율사로 인하여 소달구지를 탄 사람이 지극한 신심으로 세속을 여의고 입산한 곳이라 하여 세속 속(俗)과 여일 리(離), 뫼 산(山) 자(字)로 속리산이라는 지명을 얻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문장대갈림길>
- 이 갈림길에서 문장대 0,2km, 법주사 5,8km, 천왕봉 3,2km, 화북주차장 3,3km이다. 문장대갈림길 넓은 안부 눈밭에 밥자리를 펴고 옹기종기 모여앉아 시급한 민생고를 해결하였다. 화창하고 바람기 없이 포근한 날씨 덕분에 장갑을 벗어 놓고 여유 있게 점심을 먹는 호기를 부릴 수 있었다. 대한을 삼일 앞둔 엄동설한에 해발 1000m가 넘는 고지대에서 추위를 잊고 점심을 먹어보기는 난생 처음이지 싶었다. 그 바람에 들머리에 든 후 점심식사를 마치기까지 무려 3시간을 이 구간에서 까먹고 말았다. 오늘 전체 운영시간에 지장을 준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 점심식사를 마치고 바위벼랑에 아스라이 걸린 소나무를 배경으로 단체기념을 남긴 다음 2개조로 팀을 나눠 운영하였다. 여기서 세심정을 거쳐 법주사주차장까지 곧바로 하산 할 여덟 분과 당초일정대로 신선대를 경유하실 열다섯 분으로 팀이 나뉘었던 것이다. 안내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에 진로선도에 어려움 이 없는 코스였으므로 부담 없이 하산길에 올랐다.
<문수봉>
- “문수(文殊)”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준말로 여러 부처의 지혜(智慧)를 맡은 보살로 풀이한다. 또한 석가여래를 좌측에서 모시며, 오른쪽에서 모시는 보현보살과 더불어 삼존불(三尊佛)을 이룬다. 오른손에 지검(智劍), 왼손에는 연꽃을 든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나 경궤(經軌)에 따라서는 다른 것을 가졌거나 다른 형상으로써 설명되기도 한다. 이름으로 보아 이름에 얽힌 사연이나 유래가 있을 듯 싶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검색해 보았지만 아쉽게도 소개할만한 자료를 건지지 못하였다.
- 문수봉은 문장대에서 천왕봉으로 가는 길목에서 첫 번째 맞이하는 문장대 남쪽 청법대(칠형제바위) 북쪽에 있는 높이 1,031m의 봉우리이다. 문장대 갈림길에서 출발하여 10여분 남짓 오르면서 문수봉을 경유하였다. 문장대에서 문수봉을 건너다 볼 때는 봉의 형태가 뚜렷하고 봉 전체가 상고대로 뒤덮여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막상 문수봉을 경유하면서는 봉의 형태를 감지하지 못하고 탐방로 양안으로 곱게 핀 상고대에 눈길을 빼앗기고 말았다. 문수봉에서 건너다보이는 문장대의 모습이 장관이었고 오늘따라 더욱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섰다.
<청법대(칠형제봉)>
- 청법대는 옛날 어느 고승이 속리산 절경에 넋을 잃고 방황하다가 이 봉우리에서 불경 외우는 소리를 듣고 제 정신을 차렸다 하여 불리게 되었다. 청법대는 부처상을 하고 있으며, 주변에 일곱 개의 봉우리로 형성되었다. 문장대에서 신선대방향으로 펼쳐진 능선 탐방로를 따라 가다보면 왼쪽으로 병풍처럼 솟아오른 7개의 바위봉우리가 연이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임경업 장군이 속리산에 와서 이 바위를 보고 스승 복보대사가 은거하고 있는 곳임을 알았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탐방로가 없기 때문에 원경으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즐기는 봉들이다.
<신선대(神仙臺)>
- 13:30 신선대 도착
- 神仙이란 용어는 중국의 신선사상(神仙思想)과 도교(道敎)에서 이상(理想)으로 여기는 인간(人間). 즉 인간계를 떠나 산속에 살며, 선도(仙道)를 닦아서 도통(道通)하여 도술을 부리고, 장생불사(長生不死)한다는 사람을 말한다. 고 풀이한다. 인터넷 검색창에 신선봉이나 신선대를 치고 들어가면 열 손가락으로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선봉과 신선대가 검색된다. 옛날 옛적에 신선님들이 강림하여 장기나 바둑을 두면서 신선놀음하였을법한 신선대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가 신선이 되어 하루를 즐기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상이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에 잠기면서 신선이 따로 있나 마음먹으면 신선이지! 라고 뇌까려 보기도 하였다.
- 신선대 정상에는 해발 1,026m를 알리는 검은색 대리석표석이 세워져 있다. 휴게소 쉼터 식탁에 가려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이곳 바위 전망대에서 칠형제봉이 한 눈에 건너다보인다. 이곳 주변 풍광 중에서 칠형제봉 전경이 압권이다.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절로 터진다. 여기서 천왕봉까지 2,3km, 문장대까지 1,2km 지점이다.
- 문수봉에서 신선대구간의 상고대가 오늘의 백미였다. 특히 법주사방향에서 올라오는 강풍이 빚어 놓은 상고대가 두텁고 빛났다. 햇살이 가장 강한 시간대 임에도 불구하고 자태의 흐트러짐 없이 우리 모두를 환영하듯 맞이하였다.
- 신선대휴게소는 인적이 드문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고 고객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2011. 11. 24 왔을 때 주인 없는 빈집 마당 식탁에서 눈을 쓸어내고 점심식사를 했던 기억이 새로웠다. 그 당시의 상황과 달라진 모습은 없었지만 주인장이 집을 지키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슴에 와 닫는 느낌이 달랐다. 화장실이 갖춰져 있고 엄동설한임에도 불구하고 동파방지를 위한 핑계 없이 문이 열려 문전성시를 이뤘다. 금수산 상학주차장과 너무나도 비교되어 감동적이었다. 또한 간이식사와 음료 등의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다.
- 신선대는 아득한 옛날 속리산에서 절경에 혼을 빼앗긴 고승이 청법대에서 불경 소리를 듣고 멀리 남쪽 능선을 바라보니 산봉우리에 백학이 수없이 날아오르는 춤을 추고 그 가운데 백발이 성성한 신선들이 앉아 놀고 있는데 그 모습은 고승이 평생 원하는 선유세계인지라 황급히 청법대를 지나 신선들과 놀고자 그곳으로 달려갔으나 막상 당도하여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지라 크게 실망하고 아쉬워하면서 그 자리를 떠나 다음 봉우리로 가서 다시 이곳을 보니 여전히 주위에는 백학이 놀고 신선들이 담소를 하는지라. 고승은 아직도 자신이 신선들과 만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는 그곳으로 달려갈 엄두도 못 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신선들이 놀던 봉우리를 "신선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입석대>
- 오늘은 경업대에서 올려다보며 새로운 모습으로 조망해 보았다. 2011. 11. 24 천왕봉을 거쳐 상오리로 하산하는 장각동코스 탐방당시에는 입석대를 경유하였다.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법주사에서 동부강으로 약5.5㎞지점, 해발 1000m되는 산정에 우뚝 서있다. 둘레와 높이가 커서 수백 명이 움직이려 해도 움직이지 않는 커다란 바위로서 사실 사람의 힘으로 세웠다고 볼 수 없기에 신비롭기까지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30년에 왕비인 마야부인이 왕녀 덕만과 왕자 법승을 데리고 와서 피난할 때 세워 놓고 매일 아침 입석대에서 부왕이 계신 서라벌을 향하여 예배하였다고 한다.
<경업대>
- 경업대는 조선 인조(1594~1646)때 임경업 장군이 독보대사를 모시고 무술연마 등을 한 수련도장으로 삼았다 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경업대로 불렀다고 한다. 이 경업대 인근에 뜀금바위가 있어 이 바위를 뛰어 넘는 훈련을 하였다고 한다. 장군이 공부하던 토굴아래의 명천은 장군이 마시던 물이라 하여 장군수라 부른다. 이 장군수는 불로장생하는 약수 로 알려져 경업대를 찾는 행락객은 누구나 이 물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지만 그 위치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만약 그 위치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계절 특성상 물맛을 보지 못하였을 것으로 보고 간과하였다.
- 임경업(林慶業)장군은 조선 인조 때의 무신이다. 1624(인조 2)년에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고, 병자호란 때에는 백마산성에서 중국 청(淸)나라의 군세를 꺾기도 하였다. 청과 화의가 성립된 후에도 명(明)과 협력하여 청을 공격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하였다. 1697(숙종 23)년에 관직이 회복되었으며,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관음암>
- 관음암은 속리산 경업대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망이 뛰어난 수도처이다. 경업대에서 철계단을 내려오면서 경업대 200m, 관음암 100m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이 안내판에서 진행방향 오른쪽으로 접어들면서 자연이 빚은 작품이라기보다는 신공이 빚은 걸작으로 보이는 S형 바위홈통길을 통과해야한다. 입구에는 참배객 외 출입을 금지하는 경고판이 세워져 있다. 배낭을 메고 똑바로 서서 불편 없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넓고 정교하게 뚫렸다. 높은 천정에는 바위덩이들이 올라앉아 있어 혹시나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 공포감이 엄습해 오기도 하였다. 눈길에 발자국을 남겼기 때문에 따라 오는 일행 분들이 있을 것을 은근히 기대했었는데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나 혼자 보고 가기 너무 아까운 자연경관에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었다.
- 관음암은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산 1-1번지에 위치한다. 관음암의 창건은 신라 문무왕 3년(663년) 회월(晦月)대사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회월 대사는 60세에 속리산 관음암에 주석하여 해마다 돌맹이 하나씩을 주머니에 넣기 시작하였는데 그 수가 108개가 되던 해인 168세 때 입적하셨다고 한다. 회월대사의 장수에 대해 궁금했던 마을 사람들이 그 방법을 물어보니 “아침에는 새벽 공기를 마시고 낮에는 솔잎을 먹으며 저녁에는 관음암의 장군수를 마신다”고 하였다고 한다. 사찰의 세부적인 역사는 전혀 전하는 바가 없으며 다만 조선조에 임경업장군이 젊은 시절 이곳에서 7년간 수련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 현재의 관음암은 1955년 선암스님이 주석한 이래 새롭게 중창된 사찰이다. 그 당시 이곳에는 많은 무속인 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선암스님의 신심에 감화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선암스님 주석이후 1971년에 현재의 법당이 건립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법당 내부에 봉안되어 있는 범종은 1968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현 관음암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또한 1975년 세심문 위에 작은 석탑을 건립했고, 최근에 팔각 7층 석탑을 법당 전면에 건립했다. 1991년에는 사찰의 창건주라 할 수 있는 선암스님께서 입적하셨고 이와 더불어 사리탑 및 탑비를 건립하였다.
<금강골휴게소>
- 경업대와 관음암 암릉구간을 벗어나서도 한동안 급사면으로 이어졌다. 급사면길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면서 허름한 민가 한 채가 있었는데 가까이 접근해 보니 금강골휴게소란 간판을 붙이고 우리 일행을 맞이하는 주인장과 눈길이 마주쳤다. 그렇지 않아도 목이 컬컬하던 참이었는데 막걸리가 있으니 쉬었다 가라는 주인장의 호객에 마음이 끌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장작불이 이글거리는 난로가로 모여들었다. 주인장께서 아껴 드신다는 김치를 안주로 한 사발씩 들이켜고 나니 쳐졌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고문님께서 10,000냥을 내고 막걸리 한 동이를 주문하시는 바람에 갈증을 한 방에 날려 보낼 수 있었다. 여기서 막걸리로 몸을 깨끗이 씻었으니 이제 저 아래 세심정에 내려가 마음이나 깨끗이 씻자는 후렴을 남겼다. 고문님 고맙습니다. 그 막걸리 시방 또 생각납니다. 어쩌쥬 ~~~
- 그 휴게소 주인장의 고향은 홍천 화촌면, 생활근거지는 북산면 소양 댐 수몰지라고 하였다. 소양 댐을 만들면서 생활근거지가 수몰되는 바람에 이곳으로 이사 와서 정착하였다고 한다. 홍천읍내 이곳저곳 얘기하는 곳마다 부회장님께서 다 알고 계시는 곳이었다. 요즘도 가끔 춘천 결혼행사 등에 참석하신다면서 열변을 토하셨다.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고 어찌나 반가워하시는지 서둘러 자리를 뜨기가 민망하였다. 본인보다 한 살 위인 그 분의 꾸밈없는 순박한 모습이 시방 또 그리워졌다. 다음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들려 그 분께서 하고 싶었던 남은 얘기들을 마저 들어줘야겠다고 마음을 다져보기도 하였다. 헤어지면서 손을 꼭 잡으시기에 건강하시고 부자 되십시오! 라고 했더니 부자는요 뭘! 하시는 말씀을 뒤로하고 발길을 서둘렀다.
<순조대왕태실>
- 천왕봉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는 갈림길에서 잠시 내려오면 태실 방향 안내판이 있다. 여기서 들릴까? 말까? 를 놓고 망설이다가 말까?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거리 제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10여년 이상 산을 다니면서 처음 접해보는 태실이기에 눈 팅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왕복소요시간이 얼마나 걸릴지에 대해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하산예정시간 내에 날머리 도착이 어려운 상황이기에 아쉬움을 남긴 채 쉽게 포기하고 말았다. 비록 태실 현장을 답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태실이란 두 글자를 접해 본 이상 짚어보고 넘어간다.
- 순조대왕태실은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산1-1에 있다. 태실(胎室)은 왕실에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넣어두던 곳으로, 이곳에는 순조의 태가 안치되어 있었다. 항아리에 태를 넣어두었던 것을, 순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 왕의 태실로서 여러 석물을 갖추고 태실비를 세웠다. 태실의 형태는 8각을 기본으로 한 부도(승려의 사리탑) 모양을 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8각의 돌난간을 둘러놓았다. 앞에는 거북모양의 받침돌과 용을 새긴 머릿돌을 갖춘 태실비가 있는데, 앞면에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고 새겨 놓았다. 조선 정조 11년(1787)에 만든 것으로, 이 때부터 태실이 있는 산을 태봉산이라 하고 보은현을 군으로 승격시켰다 한다. 태항아리는 1927년 일제가 창경궁으로 옮겨가고 현재는 비와 석조물만 남아있다. 8각형의 돌난간은 1982년 해체, 보수한 것이다. 왕실의 태는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여겨 소중하게 다루었는데 관할구역의 관원은 봄, 가을에 태실을 돌아보고 이상 유무를 확인한 뒤 보고 하도록 되어 있고, 태실을 고의로 훼손하였을 경우 국법에 의하여 엄벌하였다고 한다.
- 순조(純祖)는 조선 제23대왕. 재위 1800∼1834.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공(玜). 자는 공보(公寶), 호는 순재(純齋). 1790년 6월 18일 창경궁 집복헌(昌慶宮集福軒)에서 정조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綏嬪)이다. 1800년(정조 24) 정월 왕세자에 책봉되고, 이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 7월에 11세의 어린 나이로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니,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英祖繼妃 慶州金氏)가 수렴청정하게 되었다. 1802년(순조 2) 10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을 왕비(王妃:純元王后)로 맞았다.
<세심정(洗心亭)>
- 세심정은 이미 여러 번 경유해 봤기 때문에 새로움을 찾기 어려웠다. 속리산 세심정은 씻을 洗, 마음 心, 정자 亭 자를 쓴다. 세속을 떠나 산에서 마을을 깨끗이 씻는 정자라는 뜻이다.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깨끗이 정화되는 느낌이 든다. 세심정 안내판에 쓰인 최치원의 “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 이란 시구가 눈길을 끌었다.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 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으나, 속세는 산을 떠나는구나." 로 풀이한다. 오늘 하루 속세를 떠나 俗離山 洗心亭에서 일상의 분심잡념 훌훌 털어버리고 또한 눈 같이 하얗고, 맑고, 깨끗한 마음 되어 聖善의 세계로 귀의하여 세상을 하얀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능력 주시고, 우리 모두가 그런 삶을 영위하는 일상 되게 하소서! 를 읊조려 보았다.
<세심정돌절구 유래>
- 세심정 직정 다리 입구 왼쪽에 세심정돌절구가 있다. 돌확은 눈이 꽉차 얼어 붙어 그 윤곽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위에 덮인 눈을 파헤쳐보았지만 허사였다. 그 유래는 위 사진내용으로 갈음한다.
<이뭣고다리>
- 이뭣고다리는 문장대에서 신선대를 경유하지 아니하고 곧바로 하산한 분들이 건너온 다리이다. 그래서 살펴보고 넘어간다. 이뭣고다리[시심마(是甚麽)교]라는 다리의 이름이 주는 느낌이 의미심장하다. 왼쪽 기둥에는 “이 뭣고”의 원어인 시심마교(是甚麽) 라고 새겨져 있다. 시심마란 선원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공안(公案)을 이르는 말이다. 인생의 모든 생활 현상에 관한 근본적인 의문으로서 “생각하는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뜻이다. 잠시나마 나는 누구이며 우리 모두는 누구인가?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정녕 우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잠시나마 머물면서 함께 느껴보시기 바란다. 여기서 여량 정혜스님의 시심마 시 한 수를 소개한다.
시심마(是甚磨)
여량 정혜
님아,
사랑이
가슴을 타고
등산하듯 하산을 한다
비는
오로지
단비이면 좋겠다
다음번 비는
언제쯤 내릴까
생애를 바쳐 찾고 찾아야 할
그것은
金井水일까 몰라
.
<목욕소>
- 목욕소는 꽁꽁 얼어붙어 그 느낌이 마음에 와 닫지 아니하고 그냥 미미할 뿐이었다. 목욕소는 조선 7대왕 세조가 법주사에서 국운의 번창 기원을 위한 대법회를 연 후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데, 약사여래의 명을 받은 월광태자라는 소년이 나타나 세조의 피부병이 곧 나을 것이라 하고 사라졌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세조가 목욕을 마치고 보니 신기하게도 몸의 종기가 깨끗이 없어 졌다고 하여 목욕소라 부르게 되었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금표 (禁標)>
- 금표는 산행안내준비를 하면서 반드시 살펴본다고 마음먹었던 곳 중 한곳이다. 세심정에서 내려오면서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에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쳤다. 금표는 “일정한 건물이나 구역 안으로 드나들지 말 것을 알리는 푯말“ 이라고 풀이한다. 법주사와 속리산의 소나무는 중부내륙에 서식하는 소나무 가운데 나무질이 가장 우수하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시대 왕실에서 사용하기위해 금표까지 세워놓았다. 질 좋은 황장목(금강송)을 왕실용으로만 사용하고 일반인의 도벌을 금하기 위해 세운 것이기에 그 의미를 되새겨 본다.
- 산림청국립수목원에서는 조선시대 전국에 걸쳐 소나무자원을 보호하기 위한 금산 및 봉산제도에 따라 설치됐던 황장금표 및 봉표를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조사 발굴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보호 관리하고 있다. 이조실록, 속대전 및 만기요람 등 자료에 의하면, 많은 지역이 금산 또는 봉산으로 지정됐으며, 이를 널리 공표하고 보호하기 위해 금표나 봉표를 설치한 것으로 기록돼있으나, 아직까지 산림관련 금표나 봉표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조사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실정이었는데 국립수목원에서 2008년도부터 문헌에 나와 있는 황장금표 및 봉산표석에 대해 일제히 조사하여 22개소를 발굴했다고 한다.
- 금표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매표소와 탐방지원센터를 방문하여 도움을 얻고자 하였으나 그 분들 역시 알지 못하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다음에 풀어야 할 과제로 남겼을 뿐이다.
<법주사>
- 법주사 역시 몇 번 들려 본 곳이기에 그냥 지나쳐 나오다가 발길을 돌려 국보제55호인 팔상정 앞까지 들어가 대충 눈 팅만 하고 서둘러 빠져나왔다. 법주사는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속리산 기슭에 있는 사적 제503호로 지정된 절이다.
- 법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의 본사이다.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 조사가 창건했으며, 법주사라는 절 이름은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776년(혜공왕 12)에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眞表)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 영심(永深) 등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 그 후 법주사는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 고려 숙종이 1101년 그의 아우 대각국사를 위해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의 수가 3만이었다고 하므로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태조와 세조도 이곳에서 법회를 열었다고 전한다.
-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된 것을 1624년(인조 2)에 벽암(碧巖)이 중창한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은 1624년에 중건된 대웅전, 1605년에 재건된 국내 유일의 5층 목탑인 팔상전, 1624년에 중창된 능인전(能仁殿)과 원통보전(圓通寶殿)이 있고 이밖에 일주문·금강문·천왕문·조사각·사리각, 선원(禪院)에 부속된 대향각·염화실·응향각이 있다. 또한 법주사의 중심법당이었으며 장육상(丈六像)을 안치했었다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은 그 터만 남아 있고, 이곳에 근대조각가인 김복진이 조성 도중 요절했다는 시멘트로 된 미륵불상이 1964년에 세워졌다.
- 1986년 이를 다시 헐고 1989년 초파일에 높이 33m의 청동미륵불상이 점안(點眼)되었다. 이밖에 국가지정문화재인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석련지(石蓮池: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신법천문도병풍(新法天文圖屛風:보물 제848호)·괘불탱(보물 제1259호)과 지방지정문화재인 세존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8호)·석조(石槽: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벽암대사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괘불(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9호)·철확(鐵鑊: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등이 있다.(자료출처 : 다음백과)
<속리산조각공원>
- 법주사 경내를 벗어나 지름길로 들어들서면 조각공원을 경유하였다. 조각공원은 속리산을 바라보는 관망 속의 속리산이 아닌 직접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산으로 조성하고자 보은군과 관광협의회에서 조각가 30여 명을 초대하여 속리의 자연과 법주의 진리와 조각의 미를 하나로 감상하고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가득 채운 속리산 조각공원을 조성하여 이곳을 찾는 행락객들에게 또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속리와 법주의 만남이 산과 절로 승화되는 곳에 예술의 미로 가득 채운 조각 작품 들은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게 자연 속에서 조형미를 만끽할 수 있는 예술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정이품송>
- 정이품송은 귀로 버스 내에서 눈 팅으로 끝냈다. 하차해서 단체기념사진이라도 촬영해 볼 것을 염두에 두기도 하였지만 갈 길이 바쁜 터이기에 약식으로 넘어갔음에 양해를 구해마지않는다. 정이품송은 보은군 속리산면 상판리 17-3번지에 서있는 수령 6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소나무로 1962. 12. 23 천연기념물 제 103호로 지정된 문화재로 높이 16m, 가슴둘레 4.5m, 가지길이 동쪽 10.3m, 서쪽 9.6m 북쪽10m의 노거수이다. 속리산으로 들어가는 길 가운데 위치하여 동쪽으로 도로가 있고 서쪽엔 천왕봉에서 발원한 한강 상류의 한 지류인 속리천이 흐르고 있다. 밑 부분에는 외과 수술의 흔적이 남아 있으나 명승 속리산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진 나무 입니다. 이 나무의 고유한 이름은 정이품송이니 나무가 벼슬품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자료출처 : 보은군청)
<하산행사>
- 세심정에서 법주사까지 도로를 따라 내려오는 구간에서도 상당한 지루함을 맛보았는데 법주사에서 집단시설지구를 경유하여 주차장까지 내려오는데 에도 그 이상의 지루함을 느꼈다. 주차장이 시야에 잡히면서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하산예정시간보다 무려 한 시간을 지체하면서 후미 팀이 주차장에 당도하였다. 국립공원이기 때문에 취사행위가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수한 김치찌개가 준비되었다. 주차장 한 편에 자리도 펴지 못하고 어설프게 쪼그리고 앉아 이슬이를 나눈 다음 서둘러 귀로에 올랐다.
- 오늘 날머리가 소재한 법주사 일원 행정구역 지명유래에 대해 살려본다. 보은(報恩)의 유래를 살펴본다. 은혜를 갚는다는 아름다운 명칭을 가진 보은군은 오랜 옛날 삼국시대만 해도 삼년산군(三年山郡) 또는 삼년군(三年郡)이라 칭했다. 서기 470년 신라 제 20대 자비왕 13년 보은읍 동쪽 4km 지점에 백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산성을 쌓고 삼년산성(三年山城)이라 불렀는데 전설에 의하면 삼년 만에 쌓았다고 삼년산성으로 칭하였다고 하며 삼년산군으로 불린 것도 역사에는 삼년산성이 쌓아진 자비왕 13년 경술(庚戌) 서기 470년부터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고려 왕건 태조(王建 太祖) 10년 서기 928년에 보령(保齡)으로 고쳐 부르다가 조선국 제3대 태종(太宗) 6년 병술(丙戌) 서기 1406년에 보은(報恩)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는데 갚을 보(報)자, 은혜 은(恩)자를 붙여 부르게 된 데는 그만한 사연이 구전되어 온다. 서기 1392년 임신(壬申)년에 조선국을 창건하여 왕으로 옥좌에 앉은 태조는 슬하에 여덟 왕자를 두었는데 첫째로부터 여섯째아들까지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소생이요, 일곱째, 여덟째 왕자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소생이었다. 태조는 다음 왕위를 물려받을 세자를 책봉하는데 신덕왕후 강씨의 말을 중히 여긴 듯 당시의 상황이 무르익어 가자 이를 눈치챈 조신 중에 개국공신(開國功臣) 정도전(鄭道傳) 등이 강씨 소생인 여덟째아들 방석(芳碩)을 세자로 옹립할 것을 비밀리에 결의하고 무리를 지어 한씨 소생 왕자들을 제거할 계책을 꾸미기에 이르렀다. 특히 조선국 창건의 지대한 공적을 남긴 바 있는 방원(芳遠)의 심복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위 사건을 세상에서는 이른바 왕자난(王子難)이라고 하는데 그 후 태조의 둘째아들인 방과(芳果)가 정종대왕(定宗大王)으로 대를 이은 다음 다섯째 방원이 태종 대왕(太宗大王)으로 왕위에 오른 다음 태종은 왕위를 에워싸고 벌어진 왕자간의 다툼을 뼈아프게 생각하였다. 특히 조신들 간에 왕자를 각기 지지하는 세력으로 갈라져 귀양길에 있던 강 씨 소생의 두 왕자가 무참히 자신을 지지하는 무리들에 의해 살해된 데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죄의식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태종은 등극한지 3년 되던 해 시자를 시켜 신나 때부터 명찰로 이름난 속리산 법주사에서 억울하게 살해된 두 왕자 동생들의 원혼을 달래는 천도불사를 크게 벌여 위로 하였다고 한다. 그 후 항상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죄의식과 두려움이 말끔히 가시게 되자 크게 감탄하며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던 태종은 즉위한지 6년째 되던 병술(丙戌)년 서기 1406년 지방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자정하던 기회에 충청도에 보령이라는 지명이 둘이 있어 중복된다고 개명할 것을 지적하면서 갚을 보자, 은혜 은자를 넣어 보은이라 칭하도록 하명하였다는 것이다.
- 법주사가 소재한 사내리(舍乃里)는 면 소재지로부터 동쪽 6㎞ 지점인 면의 북동쪽에 위치하며 동은 대목리(大木里), 서는 북암리(北岩里), 남은 상판리(上板里), 북은 경북(慶北)과 접하고 있다.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법주사(法住寺)가 있으므로 사내골, 또는 사내동(舍乃洞)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주나들, 신기(新基) 민판동(民判洞)을 병합하여 사내리라 하였으며 1947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내속리면에 편입되었다.
- 정이품송이 소재한 상판리(上板里)는 면 소재지 마을로 면의 남부에 위치하며 동은 대목리(大木里), 서는 중판리(中板里), 남은 갈목리(葛目里), 북은 사내리(舍乃里)에 접하고 있다. 본래 보은군 속리면의 지역으로서 늘근이 위쪽이 되므로 웃늘근이 또는 상판근리(상판근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방바우, 진대(陳垈), 조항(鳥項), 생왕동(生旺洞), 칠송정(七松亭)을 병합하여 상판리라 하였으며 1947년 속리면이 분할됨에 따라 내속리면에 편입되고 소재지 마을이 되었다. 1947년 속리면이 내속리면과 외속리면으로 분면 되었다가 2007. 10. 1. 보은군 조례 제1902호(2007.8.13)로 내속리면이 속리산면으로 명칭 변경되었다. (자료출처 : 보은문화원)
☐ 산행을 마치고
- 2008년 이후 속리산국립공원 내 지정탐방로는 설악산국립공원 내 지정탐방로 다음으로 많이 다녀온 산으로 기억된다. 2008. 12. 11 대목리코스를 시작으로 2010. 1. 14 문장대2코스, 2010. 7. 8 도명산1코스, 2011. 3. 10 장성봉코스, 2011. 11. 10 칠보산코스, 2011. 11. 24 장각동코스, 2011. 12. 8 군자산코스에 이어 오늘 신선대2코스를 다녀옴으로 인하여 속리산국립공원 내 탐방로의 밑그림을 완성하였다. 문장대에서 관음봉과 묘봉을 거쳐 운흥리로 빠지는 코스는 자연휴식년제에 들어간 코스로 연중 입산통제 되기 때문에 미리 다녀오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문이 열리기를 학수고대하며 앞으로 풀어야할 과제로 남겨둔다.
-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속리산 화북지구와 속리산지구는 매번 동절기 심설산행으로 다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한과 눈과 바람에 의한 각별한 추억을 남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평범한 일상으로 남았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 새삼 각인한 일상이었다. 눈과 상고대와 자연풍광이 조화를 이룬 그림 같은 모습을 조망하면서 왜? 소금강산이란 이름이 붙었는지에 대해 확실한 답이 나온 셈이다.
- 오늘 일정을 원만하게 마무리 할 수 있도록 일정운영에 협조해 주시고, 도움주시고, 안전산행 해 주신 점에 대해 깊이 감사드린다. 특히 귤 한 상자을 협찬해 주신 박정자님, 막걸리를 협찬하여 귀로 버스 내 분위기를 일신해 주신 이기채님께 감사드리면서 속리산에서의 일상정리를 여기서 마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