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선이 군대를 제대하고 2학기 가을 복학 후 처음 수업인 영시 클래스에 출석 했는데 담당 교수님의 지명을 받아 앞에 나가서 영시를 청청淸淸 낭낭琅琅하게 낭송하는 단정한 한 여학생의 모습에 순간 가슴이 적셔왔다
-Summer rain with cats and dogs... 여름은 소낙비를 몰고 갑자기 나에게 찾아 왔으며
-Memory of autumn stirring... 가을의 추억은 나를 힘껏 일깨웠고
-Winter kept us warm... 겨울은 나를 따뜻하게 감싸 주었다
-Earth in forgetful snow... 망각의 눈이 대지를 덮고 생명을 키웠으며
정말 그랬다 ! 화인華仁이는 미처 준비도 안 된 나에게 갑자기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려왔다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 온통 정신을 빼앗겨 버린 첫 상면相面이었다.
몇 년 전 입학 할 때는 몰랐던 그런 기분 이었다 이제 이십대 중반으로 청년이 되어 가고 보니 새롭게 느끼지는 감정이었다.
새로운 학교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한 2주쯤 후 강원도 강촌江村으로 과 전체 MT를 가게 되었을 때 경춘선 열차에 우연히 화인이가 옆자리에 앉았는데 내가 먼저 대화를 시작했다.
-이름이 화인이라며 ? 반가워 !
-( 마지 못한 표정으로 ) 네 !
-이름이 무척 예쁘네 ! 어떤 한자 쓰는지 내가 한번 맞춰 볼까?
-(무심히) 네 !
-화는 빛날 華 ! 인은 어질 仁 ! 사람은 빛나게 되고 마음은 어질라고
-호오 ! (잠시 후) 외할머니가 지어 주셨어요 !
-외할머니가 한문을 잘 하시나봐 ?
-젊은 시절 시가媤家에서 배우셨데요 !
-시가에서 ? 드문 케이스네 !
상투적으로 건조하게 시작된 얘기는 의외로 자연스럽게 소재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고 농담도 간혹 하면서 그래서 말 재미는 점점 늘어가고 반면에 간격은 서서히 좁혀지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느릿느릿 흐르는 북한강은 은은하였고 강변 마을들은 순수함으로 정겨워 보였으며 선선한 바람과 추청秋晴의 맑은 하늘은 젊은 나의 감수성을 한껏 자극했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깔끔한 성격인 華仁이의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는 오롯이 외할머니가 가지고 있었으며 그제사 열린 창窓으로 화인이는 조금씩 자기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복학생 형들의 분위기는 우리와는 많이 다른 거 같에요 !
-(그리고 조심스럽게) 근데 형도 그래요 ?
-(깜짝 놀란 듯이) 아니지 ! 난 걔들하고는 많이 다르지 ! 나야 착하지 !
-착해요 ? 후후 ! 그런 거 말고 ! 그래도 영문과니까 자신을 한음절 시어 詩語로 표현해 봐요.
-한 음절이라... 문법에 약한데 음 ! 한단어로 하자면 ... 풀잎 !
-아 ! 미국 시인 월트 휘트만의 풀잎 ? 음 ! 그러니까... 원초적 에너지 를 지닌 유연성 있는 품성 ?
-아니 ! 거기까지 가지 말고... 떨어지지 않는 풀잎 ! 꽃잎이나 나뭇잎과 달리 떨어질 일 없는 풀잎 !
-그게 무슨 뜻 ? 상대적 가치 추구 ?
-그럼 대화가 어려워지지 ! 그런 게 있어 !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 주지.
-호오 ! 형은 다른 복학생 형들과는 다르게 내면內面이 좀 있어 보인다.
-와 ! 화인華仁이 꿰 안목이 있구나.
그렇게 소낙비는 가을비가 되어 가면서 내 가슴을 조금씩 적시고 있었 으며 따뜻한 겨울을 암시하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