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수필 / 훈장 선생님과 천렵(川獵)하던 날
중학교 시절, 방학 때만 되면 언제나 나는 서당에서 한 학(漢學)을 배워야 했다. 그것은 엄하신 아버님의 뜻이었다. 훈장 선생님은 환갑을 훨씬 넘긴 할아버지였다. 하얀 모시옷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시커먼 갓을 상투 위에 꽂아 쓴 채 기다란 담뱃대를 입에 물고 희뿌연 연기를 뿜어대는 그의 단아한 모습이 어린 나에게는 신비롭기까지 했다.
나는 형 또래 네 명, 아우 또래 네 명의 학동(學童)들과 공부를 했다. 훈장 선생님은 아침마다 각자의 진도에 따라 가르침을 주셨고, 우리는 온종일 배운 내용을 큰소리로 읽어대며 암송해야 했다. 해질 무렵 암송 시험을 통과 하지 못하면 선생님은 사정없이 회초리로 장딴지를 내려 쳤다. 당시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우고 있던 나도 몇 차례 그 회초리 세례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 훈장 선생님 할아버지 밑에서 무더운 여름을 지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고역이었다.
그렇지만 단 하루의 예외가 있었는데, 그것은 매년 중복(中伏) 날이었다. 해마다 이날만 되면 어김없이 천렵(川獵)을 했고, 학동들의 백일장이 열렸다. 또한 인근의 내로라하는 선비(한학자)들이 자작시(自作詩)를 제출하고 이 중 장원(壯元)을 뽑는 행사도 있었다. 선비들은 대부분 이웃 마을 서당의 훈장 선생님들이었다.
이날은 훈장 선생님이나 우리 모두 아침 일찍부터 흥분으로 가득 찼다. 붓, 벼루 등 필기구를 꼼꼼히 챙긴 훈장 선생님 할아버지를 따라 우리는 취사도구를 비롯한 먹을거리를 한 짐씩 짊어지고 유미 강으로 갔다.
유리알처럼 맑은 물속으로 모래알들이 곱게 펼쳐져 있다. 얕은 시냇물은 제자리에 가만히 고여 있는 것 같이 잔잔하다. 형들이 갈퀴를 들고 물속의 모래를 주룩 긁어댔다. 놀란 모래무지들이 튀어나와 바로 옆 모래 속으로 숨어든다. 우리는 양 손바닥을 모아 모래와 함께 고기를 건져 올렸다.
한편 선비들은 대님을 풀고 바지를 걷어 올린 다음, 버선을 벗어 바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는 양 발을 물속에 담근다. 선비들이 나지막하게 시조를 읊조리자 매미들이 울음을 멈춘다. 어떤 이는 숲속 바위에 올라앉아 굵다란 대 붓으로 그림을 그리고, 또 어떤 이는 살아 있는 물고기를 안주 삼아 막걸리 한 대접을 훌쩍 마시고 나서는 “좋다, 얼씨구 좋다”소리를 지른다. 그러고 나서 손바닥으로 무릎을‘타닥타닥’내려친다. 저 멀리 물 위에서 먹이를 쫓던 물새들이 놀라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형들이 바윗돌을 나란히 세워놓고 아궁이 삼아 불을 지피고, 급조된 화로에 밥을 짓고는 모래무지 매운탕을 끓였다. 꿀맛 같은 점심 후 우리는 선생님 앞으로 모여들었다. 형들은 8행 시, 우리는 4행시로 운(韻)을 받고는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시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더해도 좋은 시구가 떠오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한글로 아무렇게나 갈겨 써놓고 한문으로 고쳐 달라며 형들을 괴롭혔다.
선비들은 빙 둘러앉아 한 사람씩 고저(高低)를 맞추며 자신들이 지은 시조를 읊조린다. 저쪽 숲속에서는 종달새가 조잘대며 장단을 맞춘다. 멀리 남쪽 하늘에서는 뭉게구름이 둥실거리며 떠다닌다. 강 건너 늙은 소나무 가지에서는 백로들이 기다란 부리를 비벼대며 사랑놀이를 한다. 강변의 풀밭에서는 누렁이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마치 한 폭의 시원스레 그려진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우리 훈장 할아버지 선생님이 자작시 대회에서 일등을 차지하셨다. “장원이요!”하는 순간, 우리는 벌떡 일어나 마치 내가 장원을 한 것처럼 날뛰며 기뻐했다. 선생님은 그러는 우리를 말리시며 이웃 주막거리에 가서 막걸리 한 통을 받아오라고 하셨다. 장원 턱으로 선비들에게 한 잔씩 돌릴 셈이다.
마을의 아낙네들이 빈대떡 등 먹을거리를 가지고 들른다. 물가에서 발을 담그고 있던 선비가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버선을 신고, 대님을 맨다. 아낙네들에게 발등을 보이는 것은 선비정신에 크게 어긋난다. 선비들이 목욕하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머리 위의 갓을 벗는 날이면 상투 속에서 배어 나오는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든다.
우리가 쓴 시가 선생님 앞에 놓였다. 기름 먹인 나무판자(詩板)에 함께 실린 네 편의 시는 우리 아우들이 4행으로 쓴 시다. 훈장 할아버지 선생님은 우리가 쓴 시를 꼼꼼히 읽어보시더니 만족하지 못하는지 어색한 미소만 자아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선비들이 형들이 쓴 시에 눈길을 보낸다.
형들은 매우 긴장된 모습으로 네 편의 시가 들어 있는 시판을 선생님 앞에 반듯하게 펼쳐놓았다. 선생님은 붓을 들어 먹칠을 한 다음 처음 시에 동그라미 두 개를 그렸다. 또 어떤 형의 시에는 동그라미 세 개를 그려 넣었다. 세 번째 형의 시는 여러 번 거듭 읽어보시고는 동그라미 네 개를 치셨다. 그러고는 마지막 시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얼굴은 이미 막걸리 기운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붓에 먹물을 다시금 흠뻑 적시었다. 이번에는 다섯 개의 동그라미를 큼직하게 그려 넣었다. 그러고는 “좋다!”하고 외쳐대면서 무릎을 탁 쳤다. 주변에 있던 선비, 형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힘차게 손뼉을 쳐댔다. 시판에 동그라미 다섯 개를 받은 윤제 형이 장원한 것이다. 윤제 형은 멋쩍은 듯 주변을 힐끔거리더니 선생님 앞으로 다가서서 넙죽 큰절을 올렸다. 선생님은 잘했다며 격려하셨다. 윤제 형이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주막으로 달려가 막걸리를 사다가 모든 선비들에게 한 사발씩 떠드렸다.
천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술이 거나해진 선비님들의 발걸음 또한 매우 경쾌해 보였다. 서당에서의 아름다운 추억을 더듬어보며 서투르게 쓴 시 한 줄, 중이 적삼 입은 몰골의 사진 한 점이라도 남아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가져본다. 한편, 한시 습작(習作) 기회를 저버린 한(恨)이야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으랴…….
2006년 여름 牛步 / 朴鳳煥
(한국문학방송 간 태풍 불던 날 나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