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호선 지하철을 타다
박순희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설렌다. 벤쿠버에 살고 있던 친구 Y가 2주 전에 입국하여 덕소에 머물고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덕소역에서 만난 K와 택시를 타고 Y가 머물고 있다는 아파트로 향했다. 우리는 여고 동창이면서 직장 동료였다. 만남을 앞둔 설레는 마음 탓인지 길가의 노란 산수유가 친구보다 앞서 달려와 꽃다발을 안겨주는 듯하다.
Y의 남편은 신학대학원에서 상담학을 공부하기 위해 늦은 나이에 벤쿠버로 30여 년 전 유학을 갔다. 그곳에서 목회를 하다가 10여 년 전 자원은퇴 하고 대형 트레일러를 운전하며 캐나다에서 미국을 오가던 경험을 <목사에서 트럭커로> 수필집에 담아냈다. Y는 그곳에서 직장생활도 하고, 자영업도 하며 열심히 살았다. 이번에 부부가 입국한 목적은 이중국적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다. 한국에서 6개월 이상 거주해야만 국적을 다시 취득할 수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부부는 목사로 있는 아들과 손자들을 자주 만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흘러간 시간을 되돌려놓은 듯 우리는 수학여행 온 학생처럼 잠을 잊은 채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50년이란 세월 속에 쌓인 경험들은 무궁무진했다. 나는 얼마 전에 얼굴에 4차례 침을 맞은 이야기를 했다. 이마 쪽에서부터 점점 아래쪽으로 얼굴 부위가 감각도 없고, 무거운 느낌이 2주 정도 들어서 남편에게 이야기 했더니, 이제 얼굴도 살만큼 살았으니 노화증세가 나타나는 것이라면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나는 혹시 안면마비 증세가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덜컥 겁이 나서 한의원을 찾아갔다. 한의사는 ‘내 얼굴에 혈이 섰다’며 계속 깊은 잠을 푹 자지 못하면 이런 증세가 나타난다고 하였다. 내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도 몸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며 우리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서로 건강 챙기며 잘 살자고 다짐하였다.
다음 날 아침식사를 하고 친구부부는 스포츠 댄스 시범을 보여 주었다. 캐나다에서 은퇴자들 부부끼리 스포츠댄스도 배우고, 동호인들과 크루즈여행도 다녀왔단다. 우리와 비슷한 연배인 이 집 주인과도 스포츠댄스를 배우면서 알게 되었고, 이번에 서로의 집을 교환해서 살아보기로 했다는 것이다. 친구 부부가 은퇴 후 편안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누리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았다. 내게 여유로운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어떤 생활을 하게 될까.
나는 한 달 전쯤 suv 자동차를 구입했다. 20년 넘게 소형자동차를 운전하다가 중형차를 운전하게 되니 승차감과 안정감이 좋게 느껴진다. 하지만 아직 기계작동이 익숙하지 않고 주차도 무척 신경이 쓰인다. 바쁜 일상에 자동차까지 교체해서 평소보다 긴장감을 갖고 지내다보니 얼굴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던 것은 아닐까.
지하철을 탈 때면 나이를 지하철 노선에 비유한 말이 떠오른다. 60대는 6호선, 70대는 7호선 이런 식이다. 살면서 느끼는 시간의 속도도 나이에 비례한다고 한다. 60대는 60km 70대는 70Km의 속도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7호선을 타고 70Km의 속도로 살고 있는 것이리라.
아직까지 내게 주어진 과제 중 시어머니가 천국 가실 때까지 모시는 일이 남아있다. 그런데 건강하던 내 몸이 요즘 나이 든 티를 내고 있다. 2~3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몸이 휘청거리곤 한다. 내게 남은 과제를 마무리할 수 있는 체력이 잘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이 숙제를 잘 마치면 내 몸과 마음에도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오리라.
어느 TV 프로에서 김형석 교수님은 100세 인생을 기차를 타고 100리 까지 달려가는 과정에 비유하셨다. 건강한 삶을 100세 까지 잘 유지하려면 지역사회와 학교에서 꾸준히 교육을 받고, 사회와 연결을 잘 지어야 하며, 순리를 따라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의 인생 기차는 70리 쯤 달려왔다.
7호선 지하철에 올라타니 그동안 숨 가쁘게 달려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잘 달리던 차가 대책 없이 고장이 나면 당황하듯 삶도 평탄치만은 않아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고비를 넘어서게 되는 것 같다. 때론 넘어설 수 없는 벽처럼 느껴지는 것들을 만나면 헤쳐 나갈 방법을 모색하기보다는 우회할 수 있는 다른 길을 찾아본다. 그럴 때마다 내게 힘이 되어준 것은 과천도서관에서 하는 독서와 수필 모임이었다. 그 곳에서 40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곳은 내 마음의 뜰을 잘 가꾸며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앞으로도 30리 길을 더 달려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두 개의 집
박 순 희
올 해 두 채의 집을 지었다. 그동안 직장 일로 바쁘다고 주일예배만 드리는 남편에게 회갑기념으로 미얀마에 교회를 지으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건축비는 30여 년 동안 부은 주택청약부금으로 충당하면 될 텐데 하자, 남편은 의외로 쉽게 승낙을 하였다. 나는 약간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그동안 남편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을 많이 탓해 왔었는데, 이번 일로 나보다 더 교회를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회를 짓기로 마음을 정하고 나니 남편의 고향인 석모도의 허물어져가는 옛 집이 마음에 걸렸다. 살아계신 시어머니께 효도를 잘 하지도 못하면서, 교회를 먼저 건축하게 되어서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이참에 석모도의 옛 집도 헐고 새로 집을 짓기로 했다.
그러던 중 미얀마 북쪽지방인 나웅초 지역에서 교회를 세워 줄 후원자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선뜻 나섰다. 8월에 미얀마 감리교지도자들과 선교단원들 20여 명이 양곤에서 나웅초로 출발했다. 그 곳으로 가는 길은 끝도 없이 멀기만 했다. 승합버스를 타고 대관령 고갯길을 굽이굽이 넘어가듯 12시간을 달려서 만달레이 지역에서 1박을 하고, 그 다음날 아침 3시간 정도 달려가서 점심 때 쯤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웅초 지역은 중국의 남쪽과 인접해 있고 중국인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 고아나 가난한 청소년들이 함께 생활하며, 학교생활과 신앙교육을 하고 있다. 미얀마는 4월부터 10월까지는 우기 철이라 공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 교회는 지붕과 바닥공사만 되어 있었고 아직 창문도 달지 못했다. 마을 주민들과 학생들 그리고 외지에 나가서 살면서 고향에 교회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이들과 80여 명이 모여 함께 예배를 드렸다. 남편과 내 이름이 적힌 머릿돌위에 교회의 지도자들과 손을 얹고 이 지역이 나웅초 교회를 통해 주민들의 삶이 풍요로워지고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주는 센터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예배 후에 내게 답례로 ‘차렵이불’을 선물로 주셨다. 이 지역에서는 가장 귀한 사람이 오면 이불을 선물로 준다고 한다. 그들은 미얀마어를 잘 하지 못하고 중국어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얀마어는 ‘밍글라바(안녕하세요,)’ 정도 하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마련한 식사를 함께 했다. 그들이 서로 담소를 나누면서 식사하는 모습이 우리나라의 시골 마을 잔치 풍경 같다.
그 이불을 받고 보니 내가 33년 전 결혼해서 신앙생활 했던 시절이 기억난다. 결혼할 당시 교회에 잘 다니겠다고 약속했던 남편이 회사 일이 바쁘다면서 교회를 나가지 않아서 집 근처에 있는 교회에 아이들만 데리고 다녔다. 교회에 다녀와도 내 마음에 기쁨이 없고 불평만 가득했다. 내가 이렇게 살아가려고 결혼한 것은 아닐 터인데 하는 생각에 주일 날 아침이 되면 집에서 큰소리가 자주 나곤 했다. 신앙생활의 갈등을 안고 결혼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까하는 회의도 있었다. 교회가 내 인생에 큰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석모도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 집에서 시부모님이 4남매를 기르며 1989년 말까지 사셨고, 남편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부모님이 안양으로 이사를 하고 그동안 집이 비어 있었는데, 오랫동안 집을 비워두니 담이 허물어져가고 지붕은 주저앉아 흉물스러워져 갔다. 시아버님이 살아 계실 때는 맏자식인 우리가 살림이 넉넉하지 않아 그 곳에 새로 집을 지어드릴 생각을 하지도 못해, 고향에 갈 때마다 그 집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안치가 않았다.
그런데 집을 짓기 시작하자 여러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집을 짓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새 집의 건축허가가 나기까지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나는 그동안 부모님이 오랫동안 사셨던 집이었고,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에 집터와 농토를 시어머니 앞으로 상속을 다 해놓은 상태여서 새로 집을 짓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쉽게 생각했다.
하지만 건축물대장에 그 집터에 두 채의 집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멸실 신청을 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새 집을 누구의 이름으로 등기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데도 각각 이유가 많았다. 한 지붕에 사는 가족이라도 그렇게 생각이 다를 줄 몰랐다. 80세가 넘은 시어머니 명의로 집을 건축하려하자, 내가 얼마나 살겠냐며 나중에 상속하는 일도 번거로울 텐데 손자 이름으로 증여를 해 집을 지으라고 하신다. 아들 이름으로 건축허가를 내려고 하니 아들은 나중에 아파트 분양을 받으려면 무주택자 혜택을 받지 못한다며, 본인 명의로 집을 지어준다고 해도 싫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집터는 아들 이름으로, 건축허가는 내 이름으로 등기를 내기로 했다.
또 석모도에 집을 짓는다고 하니까 다른 곳에 전원주택을 지어 본 친구들이 관리하기도 힘들고 1년에 몇 번이나 가서 사용할 수 있겠느냐며, 차라리 집만 헐어버리고 건축비용으로 자녀들이나 도와주라며 말리기까지 했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석모도의 집이 완성되었다. 그동안 수고해 주신 옆집 아저씨와 이웃사람들에게 인사를 드리러 남편과 함께 가는데, 그 곳에 ‘석모도~강화도 연륙교 착공식’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2018년 완공할 예정으로 연륙교 다리공사가 이틀 후에 시작된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이 나에게 새 집을 짓고 나자 다리까지도 놓여 진다며 경사가 났다고 기뻐하셨다. 옆집아저씨도 새 집 때문에 그 동네가 환해진 것 같다며, 당신의 집도 개축을 할까 생각중이시라며 웃으셨다.
결혼해서 이곳에 다닐 때에는 통통배를 30분 타고 석모 포구에서 내려서 방죽을 따라 10리 길을 걸어서 가거나 경운기를 타고 다녔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카페리 호를 타고 자동차로 집 앞까지 편하게 다닌다. 집을 쳐다보고 있으니 갑자기 20년 전 돌아가신 시아버님 생각이 나서 마음이 울컥해졌다.
집을 다 짓고 화단을 만들었다. 꽃을 심기 전에 흙에다 거름을 붓고 삽으로 고르게 섞이게 하려니 잘 되지 않았다. 평생 농사를 지으신 옆집 아주머니가 내가 하는 것이 딱해 보이는지, 먼저 물을 흠뻑 주라고 하신다. 흙이 부드러워진 후에 흙과 거름을 삽으로 잘 섞으니 힘도 들지 않았다. 철쭉과 금낭화와 장미를 심었다. 어머니는 석모도에 새로 지은 집을 보며 마냥 기뻐하신다. 이 집이 석모도에 사는 지역주민들과 친지들에게 사랑방과 같은 역할을 해 줄 것을 기대해 본다.
두 개의 집을 지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나웅초에 지은 교회가 영혼의 집이라면 석모도에 지은 집은 육체의 집이 아닐까. 고갱의 전시회에서 본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그림이 떠오른다. 과연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육체와 영혼이 잘 조화를 이루며 돌아가야 할 본향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사는 것이 아닐까.
박순희
자유문학 등단 (2002년)
현 남태령수필 동인회 외원
수필집 <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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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관악구 은천로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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