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너더리통신 38/170911]딸이 다섯이나 되는 울 엄마
원래 당신의 배로 낳은 딸은 세 명이다. 그런데 다섯 명은 무엇인가? ‘수양딸’이라고 하면 될까? 넷째 아들이 당시 남원 ‘혼불기념관’ 해설사로 일하던 분을 ‘누님’으로 사귄 것이 하마 10년도 넘은 것같다. 그 누님이 ‘큰 딸’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1950년생이시다. 그리고 지난해 11월초 ‘인간극장-총생들아 잘 살거라’ 5부작을 애청한 광주의 50대초(1968년생) 아주머니가 요쿠르트 1박스를 사들고 우리 부모를 뵈려고 시골집 대문을 두들겼다. 하여, 넷째 아들이 “이왕 이런 인연도 드무니 아예 ‘막내딸’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자 “그러면 저는 영광이지요. 훌륭하신 부모님과 언니가 졸지에 세 명이나 생기고” 수줍게 웃었던 것이다.
좀더 자세히 소개해 보자. ‘혼불 누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다. 일찍이 작가 최명희의 대하예술소설 12권짜리 ‘혼불’을 스무 번도 넘게 통독을 했다던가. 중학생 아들 학교 도서관에서 처음으로 빌려 읽은 후 완전히 ‘혼불의 세계’에 빠져들었다는 것. ‘청암 할머니’를 비롯한 숱한 주인공들과 감정이입(感情移入)은 물론이고, 마침 친정동네가 남원 사매와 가까워 지명(地名)조차 낯익었기에 외우기도 쉬웠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소설 배경의 하나인 전라선(全羅線) 간이역인 ‘서도역’ 철거를 똥배짱으로 박박 우겨 그 현장을 고스란히 보존하게 했을 것인가. ‘지방문화재’의 산증인이다. 남원시는 그녀에 대한 소문을 듣고 별정직 공무원으로 특채, 혼불기념관 해설사로 일하게 했다. 그만한 해설사가 어디 있을 것인가. 졸지에 시골 농사꾼이 공무원으로 일하게 됐으니, 출세를 했다면 한 것인가. 필자와의 인연(因緣)은 이렇다. 언젠가 기념관을 관람한 후 “해설 고맙다”며 명함 한 장을 건넸는데, 연말에 잊지 않고 한지(韓紙)에 붓펜으로 장문의 안부인사를 보내왔던 것. 감격하여 답장을 보낸 후 이메일 교류가 시작됐다. 아이디 ‘햇살’인 누님과 수십 통의 메일이 왔다갔다하고, 우리 집안 내력을 알게 된 누님은 시골동네 우리 부모를 방문, 즉석에서 ‘큰딸’이 되었던 것이다. 희한하다면 참 희한한 일이다. 명절 때마다 ‘자형’(동네 이장을 20년 넘게 했다던가. 얼마 전부터는 누님이 남편에 이어 이장을 맡고 있다)과 함께 추어탕, 손수 만든 유과, 부침개 등을 싸들고 찾아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전화로 안부를 수시로 여쭌다는데 “아들․며느리보다 낫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다. 고마울손! 그 누님. 2008년 나라에서 치러준 부모 회혼례(임실군 장수부부 선정)에서 축시를 멋들어지게 낭송해 주셨다.
진짜 큰 딸. 돼지띠이니 올해로 쉰 아홉. 아버지는 입만 열면 “효녀 심청이가 따로 없다”며 ‘최청(崔淸)’이라 하신다. 그 말이 틀림없다. 큰딸은 원래 그런 것인가. ‘일복’을 타고 났는지, 어릴 적부터 그랬다. 무시로 아팠던, 하숙을 치는 작은어머니를 도와주는 것은 언제나 동생의 몫이었다. 왜 있지 않은가. 그 당시에는 10살만 되어도 밥이며 빨래며 청소를 다하던 여자아이들, ‘몽실언니’가 따로 없었다. 전주에서 학교 다닐 때에도 집안 형편을 지레 짐작하고 대학을 포기했다. 무엇이든 남을 못줘서 한이다. 쥐꼬리 월급을 타도 친구 생일이라고 케이크를, 오빠 군대에서 휴가 나왔다고 용돈을 주기 바빴다. 친정부모가 못내 마음에 걸리는 듯, 전남 광양에서 거의 격주로 입성(옷. 입을거리)이면 입성, 반찬이면 반찬을 해나른다. 솔직히 말하면, 안심은 되지만 오래비로서 참 면목이 없다. 두 동생은 또 얼마나 챙기는지, 언니 노릇에도 빈틈이 없다. 딸아이를 여웠으니, 그 뒷바라지에도 정신이 없을 판인데도. 성실하다, 착하다, 기특하다고 하면 실례이리라.
둘째 딸, 한마디로 야물딱지다, 똑소리난다. 어찌나 총기가 좋은지, 무엇이든 한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는다. 할머니가 쬐깐할 때부터 점보러 갈 때마다 꼭 데리고 다닌 이유다. 어릴 적 ‘복실이’ 별명노릇 단단히 한다. 말은 잘 하는데 글은 안된다고 엄살이다. 오죽하면 수원에서 TM(텔레마케터)로 이름을 날렸겠는가. 처녀시절부터 생활력도 만만치 않았다. 강화도 오지 섬에서 근무하는 총각선생님과 결혼, 내조를 열심히 해 교장 사모님이 됐다. 담배도, 술도 끊게 만들었다. 구순의 아버지께 카톡 문자를 자상하게 알려주는 ‘귀한 딸’이다. 워낙 입바른 소리에 아버지도 무조건 오케이다. 네 명의 오빠에 치여 대학 못간 게 한이 되어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다. 방송대 교육학과와 사회복지학과 복수전공, 장학금 받아가며 졸업한 후 또 중문학과에 편입을 한 열혈 향학도이다. ‘인간극장’ 5부작에 주연(부모) 못지 않게 조연으로 활약했다. 꼭 저 닮은 똑순이 딸내미와 사업을 하는 아들을 뒀다. 시골 초교 관사에서 전원생활을 즐기며 직업상담사로도 활약하고 있다.
셋째 딸. 4남 2녀, 그만 낳으려고 했다한다. 그래서 별명이 ‘벌 것’. 하지만, 동생이 없었으면 어쩔뻔했는가. 착하기가 말도 못한다. 초딩시절 학교에서 급식빵을 줘도 먹지 않고 갖고 있다가 두 언니에게 주었다. 언니들의 구박을 받아도 한번도 대들지 않았다. 어쩌면 연애도 제대로 해 충청도 양반, 과학선생님을 만났다. 어머니 말로는 막내사위는 똥도 버릴 것이 없다던가. 어머니를 닮아 건강하니 남편을 따라 ‘일 중독’이다. 논산에서 딸기, 매실을 비롯해 별라별 작물 가꾸기에 주말마다 정신이 없다. 찰떡궁합은 이런 경우를 말함이리라. 첫월급때부터 친정아버지께 계좌이체로 10만원을 넣었다던가. 30년이 다 되었으니, 그 세월이 얼마인가. 아버지께 모두 계산해 되돌려주라고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수긍하셨다. 며느리를 금쪽같이 아는 시어머니를 만난 것도 대복이다. 아들 둘. 큰조카는 호주로 사업을 하러 떠났다. 청운의 꿈이 대박으로 이어지기를. 둘째조카는 간호사가 되었다. 애기들을 징그럽게 예뻐한다. 하루빨리 손자 보는 재미를 맛보기를 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 솔직히 딸이 셋이나 되어 말년에 ‘호강’하신다. 그럴 때마다 넷째(아들 막동이)는 어머니에게 말한다. “어머이- 내가 떡애기때 손가락 두 개를 빨아 계집애동생 3명이나 두 살 터울로 터를 팔았잖아. 그렁개 나한테 고마워야 혀” 그럴 때마다 “그려” 어머니는 희미하게 웃으신다. 손가락 1개를 빨면 머시마동생을 터팔고, 2개를 빨면 계집애동생 터판다는 속설이 전해 내려왔다고 한다. 아무튼, 시방 세계은 딸들 완벽하게 딸들 세상이다. 말하자면 ‘여인천하’라는 말이다. 부귀영화, 권세를 누려도 집안의 마나님 심기(心氣)가 불편하면 ‘말짱꽝’이다. 요즘 부인들이 친정부모 챙기지, 시댁 일가붙이 챙기는 것을 보았는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고모보다 이모이고 친삼촌보다 외삼촌이 먼저인 이런 트렌드를 어찌 하랴. 그리고 문명사적으로 보아도 ‘모계사회(母系社會)’가 정답이라고 한다.
자, 막내 따님은 어떠신가? 시댁이 마침 우리 고향집에서 10리도 떨어지지 않다 한다. ‘인간극장’을 보면서, 시댁 가기 직전에 있는 마을로 쉽게 떠올렸다한다. 부모가 오순도순 사는 모습이 너무 정답고 존경스러워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부터 참말로 참한 일이다. 지난해 11월말 처음 방문한 이래 세 번째라던가. 아버지는 줄 것이 없어 넷째가 펴낸 ‘문집 1, 2권’을 주었다던가. 진심(眞心)은 언제나 통하게 마련. 물김치, 깻잎김치를 담아와 몇 마디 말을 건네는 것이, 처음에는 부담이 갔는데, 어느새 친딸들과도 카톡문자로 교감(交感)이 되었다. 스스럼없이 ‘큰언디’ ‘둘째언니’ ‘막내언니’라고 말을 부칠 정도가 되었으니, 오지랖이라면 오지랖이다. 또한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기에 넷째가 책 몇 권을 보내주니 ‘깜놀’이란다. 하여, 넷째 환갑생일에는 티셔츠를 사 보내오기까지 했으니, 이것 단단히 ‘큰일’이 난 것이다. 8월말, 넷째는 ‘전라도닷컴’ 편집진을 격려차 광주에 들러, 전화를 하여, 가족을 대표로 처음 상봉을 하게 되었다. 수줍어하면서도 수더분하고, 부담이 없었다. 하여, 다섯 째 딸이 된 것이다.
이렇게 딸을 다섯이나 둔 울 엄마는 말년에 행복하다 말할 수 있으리. 문제는 모든 일에 손을 놓아버리신 우리 어머니, 딸들에게 더는 해줄 것이 없이 받기만 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병들고 늙으면 모두 그러는 것을. 어머니가 '다섯 딸'의 효심(孝心)을 어찌 모르랴. 희미하게 웃는 그 모습을 보면 다 아신다는 표시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날, 눈물을 흘려줄 수양딸 두 명이 있다는 것은 귀하고 복된 일이 아니겠는가. 언젠가 딸 다섯이 모여 이런저런 생활수다를 떨며 친목을 다지는 모임이라도 주선해야 할까부다. 이런 '사귄 자매(姉妹)의 정(情)'이 오래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어릴 적 형만 세 명이 있어 살벌했다면 살벌했을까. 나는 국민핵교 시절 ‘누나’가 있는 친구들이 무지무지하게 부러웠다. 이제 나도 언제 어디서나 다정히 부를 수 있는, 어엿한 누님이 있다. 그리고 세 동생을 넘어 이제 막 오십이 된 ‘막내 여동생’까지 있다. 우리 부모만 복이 있는 게 아니라, 내 복도 되지 않는가. 나로서는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호칭이 “오-빠”이다. 동생들이 ‘오빠’라고 부르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이제 또 한 명의 동생이 나에게 ‘오라버니’라며 문자를 보낸다. 감사할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첫댓글 우천은 여복이 많네그려.정이 듬뿍담긴 글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