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5) † 여섯 번째 교회, 빌라델비아/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라(3:7-13)
계3:11절은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경고이자 위로이다. 지금의 위험은 바로 퇴보와 퇴보를 계속함으로써 주님의 약속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속히 임하리니”이 말씀은 우리에게 장래 어떤 방법으로 그 크고 두려운 날의 시련에서 벗어나는지를 말해준다.
사도는 믿는 이들의 휴거와 예수님의 파루시아를 그들이 원수의 핍박과 풍파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보았다(살후2:1). 빌라델비아를 둘러싸고 있는 사면이 다 죄악이다. 두아디라(천주교회)와 사데(개신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가 좌우로 서 있다. 밖의 세상 또한 더욱 심한 타락으로 압박을 가한다.
이러한 환경 중에서 긴밀하게 주님을 따르는 것은 특별한 능력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환경 중에서 사람은 늘 주님을 높이고 진리에 복종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묻고 싶어 한다. 주님께서는 이 문제에 답하시기 위하여 이 몇 마디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은 전쟁터의 위험을 아신다. 그분은 그들의 고초를 아시며, 그들이 어떻게 그분으로 인하여 세상 가운데서 심신이 피곤하게 되었는지를 아신다.
그들의 분주함, 피곤함, 극기, 빈곤, 졸림, 상심이 다 주님의 통찰하심 아래 있다.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래로 적지 않은 세대가 지나갔다. 믿는 이들은 그분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는가? 그러나 만일 의심한다면, 그들이 사랑의 말씀을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랑의 어조이다
그분의 마음은 속히 오심을 늘 기대하고 계시며, 그분은 또한 그분의 믿는 이들의 마음 안에서 늘 속히 오신다. “내가 속히 임하리니,” 이러한 음성은 날이 갈수록 더 또렷해진다. 세상의 일들은 곧 지나갈 것이다. 오늘의 고난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영광은 목전에 있다. 그러므로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니라 버티어 내어야 하는 것이다.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그들이 가진 것은 무엇인가?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과 적은 능력을 가진 것과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과 주님의 이름을 버리지 않고 주님의 현재의 인내의 말씀과 오래지 않아 왕으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을 높이는 것이다. 바로 이것들이 지켜야 할 것들이다.
주님은 여기서 그들에게 무엇을 더 추가하라고 하지 않으셨는데, 이는 그들이 가진 것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의 능력과 주님의 이름의 승리와 주님의 십자가의 인내를 체험해야만 우리는 계속해서 이것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결코 그들에게 그분이 다른 교회들에게 하신 것처럼 ‘회개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당신은 세상 사람들과 마귀의 면전에서, 또한 여전히 육체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의 면전에서 당신이 가진 것을 지켜야 한다.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여기서 면류관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면류관은 왕이 쓰는 것이며, 면류관은 바로 왕이 된 것을 표명한다. 면류관은 일반적인 구원에 더해지는 것이며, 결코 모든 믿는 이들이 다 얻는 것이 아니다.
그날 영광 안에는 계급이 있으며, 어떤 믿는 이는 하나의 면류관을, 또 어떤 믿는 이는 하나 이상일 것이며, 또 어떤 이는 도리어 하나도 없을 것인데, 이는 그의 행위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다 영생을 얻을 것이지만, 오직 주를 위하여 고난을 받은 사람에게만이 면류관이 있을 것이다.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라고 하는 비유는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한다. 빌라델비아의 사자는 이미 면류관을 얻은 것으로 간주 되었다. 그러나 얻는 것과 지키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우리는 이미 얻은 영광을 장래의 실패로 인하여 잃어버릴 수 있다. 계속 푯대를 향하여 전진하는 것이 바로 상을 얻는 조건이다.
3,12절은 “이기는 자는 내 하느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원문 참조)고 말한다. 빌라델비아에도 “이기는 자”가 필요한가? 무엇을 이기는 것인가?
우리는 이 서신 안에서 이기는 것은 모두 교회 안의 일들을 이기는 것임을 알고 있다. 에페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실패했고, 버가모는 세상에 거했으며, 두아디라에는 이세벨의 행위와 발람의 교훈이 있었고, 사데는 사망의 냉담함에 전염되었으며, 라오디게아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서머나는 물론 약간 다른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믿는 이들이 교회 안의 죄악들을 이기려고 하지 않고 밖의 사망의 핍박을 이기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라델비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완전한 칭찬이 있었고, 빌라델비아에 대한 모든 핍박은 서머나와 같이 심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그들의 이긴 것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들의 모든 것은 이미 다 주님이 칭찬하셨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또 무엇을 이겨야 했는가? 그러나 빌라델비아에 대해서는 책망의 말씀은 없지만, 경고의 말씀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위험은 불가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험을 경고하는 것으로 보았다면 그들이 이긴 것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주님은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경고하셨다. 여기에 바로 이겨야 할 것이 있다. 위험은 바로 빌라델비아의 성질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 위험은 실제적이고 절실하며 믿는 이들이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인데 이는 그들이 가진 축복이 다 이 노선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죄악을 저지하거나 새롭게 어떤 일을 할 필요가 없었으며 그들의 승리는 바로 지키는데 있었다. 그러므로 빌라델비아 안에도 여전히 이기는 자가 있는 것이다.
교회의 성질이 어떠하든지 이기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개인적인 일이다. 이기는 것에는 개인의 능력과 영적인 사랑이 필요하다. 물론 참으로 필라델피아의 성질을 지닌 성도들이 함께 모여 교통(친교)할 수 있다면 아주 좋은 일이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 개인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영적인 성도들과 함께 있는 것이 결코 당신을 영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할 수 없다. 오직 개개인의 이기는 자들이 함께 연결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빌라델비아가 될 수 있다. 빌라델비아는 원래 이기는 자들의 교회이지만, 오직 계속하여 필라델피아의 사람이 되는 이만이 참으로 이기는 자이다. 이것이 이곳의 교훈이다.
그러므로 빌라델비아는 바로 믿는 이들을 세상으로부터 구원시키는 성령의 역사를 말한다.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이름으로 믿는 이들은 사탄의 회를 이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언제나 중심에 둔다. 그러나 위험은 여기에도 있다. 오래지 않아 새로운 조직이 형성되며 결국 그들이 지키게 된 것은 당초 빌라델비아의 성질이 아니라 그들의 고정화된 조직이다. 이것이 바로 신선함을 잃어버리는 이유이다. 이것을 보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변질에 미리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조직이 스스로 보기에는 조직의 한계성으로 인하여 정말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기는 자는 내 하느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여기서 내 하나님을 중시한 것은 바로 주님 자신이 그 영광을 얻은 사람이시며 또한 그분이 믿는 이들과 연합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 두 개의 기둥을 세웠는데, 하나의 이름은 야긴(그가 건축하리라는 의미)이요 또 하나는 보아스(안에 능력이 있다는 의미)로서, 당시 성전에서 가장 놀랍고 힘 있는 강력한 장식이 되었다(열왕전7:15, 21).
그러나 장래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더 나은 성전을 지을 때, 이기는 자들은 거기서 더욱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기둥이 될 것이다. 야긴과 보아스는 부활의 때에 다 이기는 자들에게 서 이루어질 것이다. 빌라델비아의 믿는 이들은 본래 연약했지만, 주님은 이제 도리어 그들을 가장 능력 있는 이들로 변하게 하실 것이다.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당시 땅에 속한 성전의 모든 기둥들은 먼저 대적에 의해 그 기둥을 싸고 있는 금이 약탈되었으며, 그 후에는 완전히 파괴되어 바벨론으로 옮겨갔다(열왕후18:16; 25:13-14). 그러나 주님은 장래 하늘의 성전 안의 기둥은 결코 이러한 일을 만나지 않고 영원히 그곳에 있으며, 다시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만일 “지킨다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나가지 않게” 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여기서 보좌를 말씀하지 않으시고 성전을 말씀하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성전은 경배(예배)의 장소이며 하나님은 그 안에서 사람의 높임을 받으신다. 물론 이것들은 경배를 나타내기는 하지만 경배는 결코 찬송과 기도와 감사가 아니다.
경배는 영 안에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위하고, 또 성실히 하나님을 높이는 태도이다.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 주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에게 말씀하셨는데,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다. 예수님은 비록 여기서 그분의 종들에게 말씀하셨지만 그분은 시종 자신이 지금 아버지의 종의 지위에 서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들의 하나님을 그분의 하나님이라고 칭하신다. 이는 그분이 장래 나라를 얻을 다윗의 아들의 자격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공손하게 그분의 아버지의 이름을 시인하며 그분 자신은 다만 하나님의 종이라고 여기시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분을 왕으로 세우신다.
“하나님의 성”은 계시록 21장에서 하나님이 장래 하늘로부터 하나의 실제적인 새 예루살렘을 내려 보내실 것임을 본다. 주님은 이기는 자들 위에 이 성의 이름을 기록하여 이 성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읽을 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들은 오늘날 이 세상에서 나그네이므로 장래 영원한 본향을 맛볼 것이다.
그러나 장래 영광 안에서의 실행은 당연히 오늘날 그림자 안에서 먼저 표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2장 22절은 우리가 이미 하늘의 예루살렘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요한계시록은 많은 새로운 것들을 말하는데,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 등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
예수님의 새 이름은 이 새로운 일들과 관련된다. 주님의 여기서의 이름은 새로운 것이며, 이전의 메시아라는 옛 이름이나 다웟의 아들보다 더 좋은 칭호를 얻으실 것이다. 3장 13절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우리는 결코 이 말씀을 가벼이 보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는 이것이 결코 사람의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엄중한 가르침이 우리 앞에 놓여진 이상,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귀를 할례하여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들을 수 있게 하시기를 구해야 한다. 장래의 휴거와 영광은 다 우리의 오늘날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