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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도는 그림에 솜씨 있는 자로서 그 이름을 안 지가 오래다. 삼십 년쯤 전에 나의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홍도를 시켜 주관케 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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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후기 작품의 시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40세 되던 해인 1784년에 그린 《단원도》이며 이 때부터 "단원"이라는 관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중인인 김홍도가 명나라의 문인화가 이유방의 호를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은 후기의 그의 새로운 심적상태를 반영한 것이다.[19] 40세가 되던 해인 1784년에는 경상도 안동의 안기역(安奇驛) 찰방(察訪)[20] 이 되어 2년 5개월 간 근무하였다. 1790년에는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와의 정치적인 대립으로 죽은 사도세자를 위해서 지은 사찰인 용주사 대웅전에 운연법으로 입체감을 살린 삼세여래후불탱화를 그렸다. 48세가 되던 해인 1791년에는 충청도 연풍의 현감으로 임명되었다. 충청도 연풍에서 현감으로 일한 경험은 김홍도가 민중들의 삶을 중국의 영향을 받는 대신 자신만의 개성으로 그려내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1796년에는 용주사 부모은중경의 삽화, 1797년에는 정부에서 찍은 오륜행실도의 삽화를 그렸다.
김홍도가 51세의 나이가 되던 1795년에 “남의 중매나 일삼으면서 백성을 학대했다.”는 충청 위유사 홍대협의 보고로 만 3년만에 파직됐다.[5] 연풍 현감에서 해임되어 한양으로 올라온 김홍도는 다시 화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 김홍도는 50대의 나이로 관직 생활 이후에 자신의 독특한 화풍을 정립해가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벌이게 된다. 이 시기 그는 도화서의 공적인 일 이외에 사적인 주문에 의한 작품도 활발하게 하였고, 부드럽고 서정적인 필치로 그린 그의 작품은 인간적으로나 화가로서나 원숙한 모습을 보여준다.[21]
이렇듯 많은 그림을 그렸고 당대 최고의 화가로 이름이 높았지만, 그의 삶은 어려웠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지필묵이 부족했을 정도로 가난했던 적도 있지만, 생활에 크게 구애받는 성격은 아니었다. 조희룡의 《호산외사》는 이런 김홍도의 모습을 잘 전해주는 유명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집이 가난하여 끼니를 잇지 못 하였다고 기록했다.
김홍도는 풍속화를 잘 그리기로 일반에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남종화, 평생도, 신선도, 풍속화, 진경산수, 초상화 등 전반에 걸쳐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산수화는 그의 예술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김홍도의 산수화 배경은 당대에 유행하고 있던 남종화풍(南宗畵風)의 운치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과 함께 우리 산수풍속(山水風俗)의 서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그가 44세 되던 해에 정조의 명을 받고 복헌 김웅환과 함께 금강산에 있는 4개군의 풍경을 그린 것을 계기로 하여 그의 독자적인 산수화를 확립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 김홍도가 실제 경관을 사생(寫生)한 것이 금강산 사군첩(四郡帖)인데 여기에서 우리나라 화강암 돌산과 소나무가 있는 토산을 표현하는 적절한 묘사법을 터득하여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는 모습을 경쾌하게 묘사한 수지법(樹枝法)이 완성되었다. 김홍도의 진경산수화첩이다. 그의 산수화는 여백을 적절히 남기면서 대상을 압축하는 밀도있는 구도법과 형상을 집약해서 표현해 내는 묘사력, 그리고 운치있는 운염법 등으로 김홍도의 산수화는 진경산수와 남종문인화가 하나로 만나는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가 이룩한 속화(俗畵) 양식은 같은 시대의 긍재 김득신, 혜원 신윤복에게도 크게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후배들이 그대로 추종하여 그의 아들인 긍원 김양기, 임당 백은배, 혜산 유숙, 시산 유운홍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1800년 이후의 김홍도
김홍도(1745-1806)는 1800년이 되는 해는 55세이었고, 겨우 6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김홍도는 19세기의 화가라기 보다는 18세기의 말인 정조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그러나 1800년 이후를 6년 동안을 보냈으므로 그의 회화를 살펴보는 것은 19세기 회화를 이해하는데 하나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
1800년은 단순히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해가 아니다. 한국사에서 의미 있는 해이다. 조선의 문화를 꽃 피웠다는 영, 정조 시대가 정조가 죽으므로 한 시대를 마감하는 해이기도 하다. 김홍도는 정조의 사랑을 많이 받은 화가로서 영, 정조 시대의 문화를 대표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1800년을 전, 후하여 그가 겪은 개인사적인 여러 일들은 한 사람의 인생사일 수도 있지만 회화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 때문에 결코 개인사일 수만은 없는 이유를 가진다.
김홍도는 정조 시대에 도화서 화원으로서는 최고의 영광인 어진(御眞)을 그리는 작업에 세 번이나 참여하였다. 정조는 “김홍도는 그림에 솜씨가 있는 자로서 그의 이름을 안 지가 오래 되었다. 삼십 년 전쯤에 나의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그림에 관한 모든 일은 모도 홍도를 시켜서 주관하게 하였다.”라는 글을 1800년에 써서 홍제전서에 실었다.
임금이 세손 시절인 30년 전부터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만큼 유명한 화가인데도 그의 일생에 관하여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다. 그의 일생에서 숨겨진 부분이 많다는 것은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에서 환쟁이를 천시하던 사회에 처한 그의 신분 때문이었다. 1800년 이후의 그의 생애를 대강이나마 훑어보고자 하는 것은, 그를 통하여 사회와 문화, 미술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추적해보고자 하기 위함이다.
1800년은 정조의 죽음으로 정치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순조의 등극과 더불어 정조의 후원을 받던 벽파가 권력에서 밀려나고 시파가 권력을 차지한다. 이 과정에서 김홍도를 후원하였던 많은 인물들이 박해를 받으므로 김홍도의 위상도 많이 약화되었다. 김홍도의 스승인 강세황과, 김홍도의 기예를 극찬한 정범조는 남인 계열로 벽파에 속하였다. 보수적인 성향의 시파가 집권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19세기는 개방과 개혁이 멈추지 않고 흘러갔으므로, 19세기로 진입하는 해가 1800년 이었다. 이 와중에 김홍도는 6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1792년에 본 늦동이 아들 김양기가 겨우 여덟 살이 되는 해이다. 서당에 다니면서 글공부를 시작할 나이이다. 김홍도는 아들이 너무 어려서 자신의 회화를 전수하지 못 하였지만 김양기도 화가로 살았다.
1801년에 순조가 수두에 걸렸다가 회복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삼공불환도(三公不煥圖)를 제작하였다. 삼공불환도는 조용한 정원 생활과 정승 자리를 바꾸지 않겠다는 중국의 고사를 소재로 그린 그림이다. 그림의 기법은 조선풍이 완연한 실경의 그림이다. 우리의 풍속을 소재로 하여 그린 조선의 회화이다. 18세기에 정선에 의하여 퍼트려졌던 진경산수가 강희언, 김응환, 김홍도, 이인문, 김석신, 최북, 김윤겸, 김수성, 정충엽, 정수영 등의 화원 화가들에게 전수되어서 유행하였다. 도화서는 실경산수를 선호하였고, 실경산수가 도화서의 보수적인 화풍이 되었다. 1801년에 그린 삼공불환도도 실경산수화 계열에 속하는 그림이었다. 1800년 대에도 도화서를 중심으로 실경산수가 유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804년 7월에 규장각의 자비대령화원의 채용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1802년에 순조가례의궤도의 제작에 참여한 화가의 명단에는 김홍도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때는 직책이 없으므로 고정적인 수입도 없었을 것이고, 생계가 어려웠음을 보여주는 기록도 남아 있다.
자비대령화원을 뽑는 시험의 화제가 정조 때와 순조 때는 차이가 있었다. 산수화가 7%에서 21%로 대폭 늘어났다. 문방은 6%에서 1,5%로 감소했고, 인물(31%)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속화(20%)도 변화가 거의 없었다. 문방이 줄어들고 산수가 늘어난 것이 가장 큰 차이이다.
다시 헌종(1835-1849) 때가 되면 인물이 크게 줄고(35%에서 14%로) 속화는 더 늘어났다.(21%에서 29%로) 산수화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일반적인 특징은 인물화가 줄어들고 속화와 산수화가 많은 것이다.
19세기 회화를 자비대령화원의 채용 시험에 출제되는 문제를 중심으로 요약해보면 정조, 순조 때까지는 인물과 속화가 가장 많이 출제되었고, 헌종 때부터는 인물이 급격히 감소하고 산수가 크게 증가하면서 산수와 관련이 있는 누각도도 많이 그려진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양상을 인간 중심의 사회 현실을 담는 그림보다는 자연을 소재로 하는 그림을 선호하는 심미 취향의 변화를 나타낸 것이라고 말한다. 철종 때가 되면 다시 산수가 감소하고 영모화가 압도적으로 많아진다. 고종대에 이르면 영모, 초충, 매죽 등의 화조, 잡화 계통을 여전히 많이 그렸지만 철종 때보다는 즐어든다. 상대적으로 속화나 문방 및 누각처럼 다분히 궁중 취향에 접한한, 도시적이고 문명적이며, 장식적인 그림을 선호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 후기의 회화사와 거의 일치한다.
녹취재의 문제로서 산수화가 증가하였지만 진경산수를 문제로 출제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시문(詩文) 속의 시정과 운미(韻味)를 대상으로 사의(寫意)를 표현하는 것에 무게를 두었다. 실경산수가 쇠퇴하고 문인화가 유행한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19세기는 중국의 고증학과 금석학을 받아들여서 남종문인화가 유행하였기 때문이다.
김홍도가 정조의 총애를 받고 있을 1784년에 자비대령화원을 뽑는 시험 문제로 책가(冊架)와 책거리(冊巨里)를 처음으로 출제하였다. 순조 때에도 책가와 책거리를 시험 문제로 출제하였다. 채가와 책거리는 1800년을 전후하여 꾸준히 출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책가 그림은 책이 꽂혀 있는 서가 그림을 그려서 방안을 장식함으로 방안에 책이 꽂혀 있는 느낌을 주게한다. 선비 취향의 그림이다.
김홍도에 관한 기록을 이규상이 남겼다.
“당시 화원의 그림이 처음으로 서양 나라의 입체감 나는사면척량(四面尺量) 화법을 본떴는데 그림이 이루어진 것을 한쪽 눈을 감고 보면 모든 기물이 가지런히 서 있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세상에서는 이를 책가라고 불렀다. 그림에는 반드시 채색을 칠하고, 한때 귀인들의 벽에 이 그림을 바르지 않은 경우가 없었는데, 김홍도가 이 기법을 따랐다.”
이 기록에 의하면 1800년을 전후하여 화려한 진채를 사용한 책가 그림을 화원들이 많이 그렸다. 정조가 이 그림을 좋아 하였다. 왕실과 사대부 집안에서 책가 그림을 애호하여 많이 주문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벽에 바르다, 라고 함으로 벽에 거는 족자 형식이 아니고 벽지처럼 바르는 형식을 취하였음도 알 수 있다. 책가 그림은 중국에서 유행한 그림 양식이다. 정조 때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홍도는 1804년의 단오날에 규장각 자비대령화원이 되었다. 몸에 병도 들었고, 나이도 많은 원로 화가로서 화원이 되었다는 것은 그의 생활이 어려웠음을 말한다. 이날의 내각일력(內閣日歷)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화원 김홍도와 박유성은 본각(本閣-규장각) 화원 중에 결원이 있으면 그 자리에 발령을 내고, 만약 결원이 없으면 정원 외로 늘려 근무케 하라고 하교 하셨다.”
이 기록에 의하면 김홍도는 원로 화원으로서 특별히 채용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1804년에 채용시험에 응시하여 김득신 등의 후배 화원들과 같이 시험을 보았다는 기록을 보아서 특별 채용이 아닌 아닐 수도 있었다. 말년에 아들에게 쓴 편지에 형편이 어려웠음을 한탄하는 것으로 보아서 생활이 어려워서 응시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규장각의 자비대령화원이 되고 나서 6월 22일에 속화를 그려서 일등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804년에 계회의 행사를 그린 기로세련궤도는 김홍도의 말년의 작품이다. 기록으로 남기기 위하여 그린 그림이지만 일종의 풍속화에 속한다. 김홍도가 자비대령화원이 되고 나서 남긴 그림에는 계회도를 위시하여 속화(俗畵)가 많다. 1800년 이후에 김홍도가 화원으로 근무할 동안에는 녹취 시험에 속화를 많이 출제하였다.
속화는 풍속화를 의미한다. 풍속화를 자비대령화원의 취재 과목으로 선정한 이유로서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곧 좋은 정치를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풍속화를 속화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대부들이 아름다운 취향(雅)에 반대되는 의미가 아니다. 시중의 풍속을 아름답지 않게(俗) 보고 풍속화를 속화라고 한 것은 아니다. 풍속화는 선정을 베푼다는 맥락에서 궁중에서 그렸던 것이다.
19세기 회화에서 속화가 크게 유행하는 배경을 김홍도를 통하여 살펴 보았다. 18세기 전반 경에 나타난 풍속화가 거의 시골의 생활을 다룬 것이라면 18세기 말 경에서 19세기 초에는 도시 풍경이 현저하게 많아졌다. 시골의 풍경은 거의 대부분이 전통적인 경직도나, 몇 가지 풍속에 한정하여 소재를 삼아서 전형적인 그림을 그렸다. 도시 풍경은 도시의 길거리, 시장, 오락, 놀이, 어슬렁거리는 한량의 모습이나, 활쏘기 등을 다루었다. 조선시대의 세시 풍속도 많이 그렸다. 김홍도의 씨름도 하나의 예이다. 세시 풍속은 서민만의 풍속이 아니고 왕에서 서민에 이르기 까지 전 국민이 공통적인 정서를 가지는 풍속이다.
조선 후기의 회화가 전반적으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풍속화도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의 속화는 담고 있는 내용이 모두 조선시대의 풍속이고, 현실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고, 한국적인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속화가 크게 발전하였던 정조-순조 년간에는 서울의 도시 풍경을 많이 다루고 있으나, 고종 대에 이르면 속화의 화제가 중국의 고사나 중국의 시문(詩文)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직접 피부에 와닿는 풍속이 아니고 시문이나 고사의 내용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므로 현장감이 현저히 줄어든다.
1805년에는 이인문이 그림을 그리고 김홍도는 글을 쓰는 합작품 ‘송하담소도’를 남겼다. 이인문은 같은 시절에 화원 생활을 함께 한 절친한 친구이었다. 또 이해에 아들 김양기에게 편지를 썼다.
“아들 연록 보아라.
날씨가 이처럼 차가운데 집안 모두 편안히 지내며, 너의 독서 공부는 한결같이 하고 있느냐? 내 병세는 모친에게 부친 편지에서 자세히 말하였으니까 다시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김동지도 직접 갔으니까 내 병세를 전하였을 것이다. 너의 훈장 선생 댁에 갈 우러사금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럽다. 정신이 어지러워 더 쓰지 않는다. 을년(乙年) 섣달 열흘 날에 아버지가 쓰다.”
이때 김양기의 나이는 열 세 살 쯤이었다. 아직은 나이가 어려서 아버지의 그림 기법을 배우지 못하였을 것이다. 당대를 뒤흔든 유명화가의 말년도 가난하고 외로웠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조선 시대의 화가들의 일반적인 삶이기도 하였다.
절친한 친구이었던 이인문은 김홍도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같은 유형의 그림을 그리면서 1824년까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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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조 대에는 - 노론 일부와 소론, 남인으로 연합된 시파의 우세 속에, 노론 벽파가 참여하는 형태였죠.
순조 대에는 - 정순왕후 경주 김씨가 수렴첨정을 하면서, 외척인 경주 김씨 일문과 영의정 심환지의 노론 벽파가 일당 전제 정치를 펼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