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창간 이래로 <슬로>는 전 세계 50개 국가의 회원들로 구성된 국제 슬로푸드 운동을 대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수행해왔다. 카를로 페트리니의 주도로 1989년 출범한 국제 슬로푸드 운동은 로마의 유서 깊은 스페인 광장에 '맥도널드'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이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되었다. 출발 당시에 슬로푸드는 식탁의 즐거움을 되찾고 보호하며, 좀 더 세심한 감각을 훈련하여 고급스런 미각을 개발하자는 주제를 주로 다루었다.
그러던 중 슬로푸드는 중요한 전환기를 맞는다. 1996년에 추진된 새로운 두 가지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첫째는 성서에 기록된 노아의 방주가 시사해주는 '동물보호'라는 주제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미각의 방주' 프로젝트였다. '미각의 방주'를 추진하면서 슬로푸드는 미각에만 몰두하던 방향에서 벗어나 예술적이라고 할 만한 고급 음식을 생산하는 당사자인 농민과 토지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새롭게 생태학적인 관심이 생겨났다. 이제는 어떤 것이 좋은 음식인지 구분하는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음식과 그 재료가 어느 지역의 산물이며, 누가 생산했으며, 앞드로도 계속 생산할 수 있다는 확고한 보장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 동안 생태적 미각' 운동을 꾸준히 벌이면서 음식이 산지에서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바로 이 때 두번째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에 있는 슬로푸드 편집부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계간지 <슬로>의 창간호를 발간한 것이다. <슬로>는 전 세계의 슬로푸드 회원과 독자들에게 음식의 특성과 전통, 그리고 지역성과 보편성을 교육하는 데 나름대로 적지 않은 기여를 해 왔다.
<슬로>를 발간한 이후로 슬로푸드 회원은 급증하여 6만 5천여명에 이르렀고, 이제 미국 회원만도 5천명이 넘는다. 원더브레드(식빵), 라이트비어(맥주), 낱개 포장 치즈 따위를 낳은 미국이 먼 길을 돌아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비영리조직인 미국의 슬로푸드는 본부와 62개 지부를 통해 미국 전역의 생산자, 농민, 식료 공급자들을 연결해 주고 있다. 여기에는 아직도 나무막대와 카누를 이용해 야생 쌀을 수확하는 미국 미네소타의 원주민에서부터 델라웨어 만에서 딴 굴을 식탁에 공급하는 어민에 으르기까지, 그리고 폭스웰프와 브라운스나우트 같은 재래종 사과에서부터 세계 수준의 사과즙을 생산하는 오리건 주의 앨런 포스터까지, 그리고 지역 주민들에게 마차로 뉴올리언스 태피(설탕, 당밀을 졸여 호두나 버터 따위를 넣고 만든 캔디)를 3대째 배달해 온 로만 태피맨도 포함되어 있다.
음식과 문화가 갈수록 획일화되면서 흥미거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획일화 경향은 그 어느 때보다 요즘에 특히 더하다. 그러나 느슨해진 긴장을 조금만 끌어당기면 우리 삶의 선택방식과 관련된 전반적인 쟁점들, 다시 말해 도시의 무질서한 팽창에서부터 가족농장, 유기농업, 농민시장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생명공학 윤리에서 지역경제와 토속음식을 되살리는 일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문제를 하나씩 풀어갈 수 있다. 미국에서는 첨단기술에 의존하는 사회구조 때문에 생활방식이 빨라지면서 애석하게도 여유 있는 식사의 즐거움과 유쾌함이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슬로푸드 회원이 증가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패스트푸드' 국가인 미국에 품질이 우수하고 출처가 분명하며 다양하면서도 맛이 뛰어난 음식의 수요가 늘고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카를로 페트리니 엮음 / 김종덕.이경남 옮김, 슬로푸드-느리고 맛있는 음식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