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적사安寂寺의 개산조開山祖는 원효元曉祖師다.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 원년(불기 1205년·서기 661년), 그러니까 원효 조사와 의상 조사가 수도의 길을 찾아 명산을 순방하며 정진에 전념하던 시절로 거슬러 오른다. 동해가 훤히 바라보이는 장산將山 기슭을 지나갈 때 숲속에서 난데없는 꾀꼬리 떼들이 모여들어 두 스님의 앞을 가로막고 어깨와 팔에 안겨 평화롭게 노니는 게 아닌가. 원효는 이곳이 보통 상서로운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지금의 안적사 터에 가람을 세웠으니, 이것이 안적사의 창건 스토리다.
원효와 의상은 함께 공부를 시작하면서 서로 조금 떨어진 곳에 토굴을 지어 피나는 정진을 수행했다. 의상은 하루에 두 끼 식사를 하는데 식사 때마다 자신이 직접 밥을 지어 먹지 않고 천녀天女가 하늘에서 가져오는 음식(天供)을 받아먹었다. 어느 날 이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원효를 초청했는데, 이날따라 선녀가 나타나질 않아 원효는 기다리다 그냥 처소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뒤 선녀가 천공을 가지고 나타나자 의상은 천녀를 심히 나무랐다. 그런데 천녀의 말인즉슨, 이곳 가람 주위에 화광火光이 가득 차 들어올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달리 전해진 이야기로는, 하늘의 군사들이 이곳을 에워싸고 있어 들어올 수 없었다고도 한다.
이를 두고서 원효가 의상의 교만한 마음을 일깨우기 위해 금강삼매화金剛三昧火를 놓았다고도 하고, 원효의 법력이 높아 하늘의 군사들이 항상 원효를 수호했다고도 한다. 의상은 원효의 도력이 자기보다 훨씬 높음을 깨달아 교만하지 않고 원효를 사형師兄으로 정중히 모시게 됐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이런 내용의 설화는 ‘선녀가 바친 하늘의 공양’ 이야기에 해당하는데, 경남 통영 의상암 등에도 유사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찰의 안내문에 의하면, 의상은 이후 안적사에 수선실修禪室을 넓혀 큰 가람을 신축하고 금강삼매론경등일심법계金剛三昧論經等一心法界의 진리를 후학에게 설파했다. 신라의 온 국민에게 역설한 화엄사상은 구국정신을 고취시켜 삼국통일의 근간이 되기도 했다.
안적사를 품은 산의 이름은 꾀꼬리 떼들이 길을 막았다 하여 앵림산鶯林山이라 한 것이다. 절 이름 안적사安寂寺는 정진수도를 통해 안심입명安心立命(모든 의혹과 번뇌를 버려 마음이 안정되고 모든 것을 하늘의 뜻에 맡기는 일)의 경지에 요달了達(수행으로 사리를 통달하는 것)해 적멸상寂滅相을 통관洞觀했다는 의미다. 안적사는 전국에서 수선납자修禪袖子들이 구름처럼 모이는 남방수선제일도량으로 그 이름이 사해四海에 높다랗다.
- 중건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사찰을 범어사 스님 묘전화상妙全和尙이 중건. 동치同治 12년 계유 11월 15일 대웅전·수선실 등을 경허慶慶·해령海嶺 두 스님이 3차 중수. 대한 1973년 신미 3월 1일 남곡덕명南谷德明 스님이 1000여 불자의 도움으로 대웅전·삼성각·수선실 2동·사천왕·범종·후불목탱화·지장목탱화·신중목탱화·요사채·종무소 등을 일신 중건, 오늘의 대가람을 이룸.
- 불상
순치順治 11년 갑오(1654년) 6월 4일 경주 남석南石으로 조성된 주불은 아미타불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대세지보살상大勢至菩薩像을 좌우보처左右補處로 대웅전에 봉안.
- 사리탑
여래진신사리보탑如來眞身舍利寶塔은 재일 불자 신수일이 천축天竺, 곧 지금의 인도에서 1000년 전에 조성한 비로자나불상에서 수급한 부처님 진신사리를 소장해 오다 고향인 탐라 관음사 향운 스님에게 증정한 것을 안적사 사리보탑 불사에 따라 불사리 3과를 기증받아 모시게 됨.
- 등록
안적사 사적비는 안적사 전면 오른쪽에 거북좌대로 입석 사적비의 원문은 최범술 선생이 짓고 글씨는 청남 선생이 씀. 사찰 경내지 확보를 위해 사찰 임야 13정을 책정. 전답 6000여 평이 안적사 아래에 있음. 신도는 약 2000여 세대가 넘게 등록. 안적사는 전통 사찰 제47호로 1974년 전통 사찰 등록법에 따라 등록됨.
- 위치
소재지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내리 692번지. 동쪽으로 8km에 기장군, 남으로 9km에 해운대, 서쪽으로 8km 지점에 동래구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