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장군과 설립자 강동오 풍년제과 대표와의 운명적 만남
강동오대표는 20여년전(2002년) 광주에서 살다가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기울어진 풍년제과를 인수해 순 우리 밀로 한옥마을 명물인 초코파이를 전국으로 만들어 팔기 시작한다.
‘당장 돈은 안 돼도 우리 가족을 위해 만든다’는 신념으로 빵을 만들어 오던 강대표는 2008년 홍보 겸 수출을 하기 위해 중국에 가게 된다. 그해 안중군장군이 수감되었던 대련시 여순에 있는 일제 강점기의 형무소를 방문하게 된다.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조국의 독립만을 위해 1910년 3월 26일 31세의 안타까운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안중근장군의 정신을 되새기게 되며, ‘어려웠지만 우리 밀 사업을 시작했던 첫 마음으로, 가치 있는 사업으로 꼭 성공시키고 말겠다. ’라는 뜨거운 다짐을 하게 된다.
그런 마음을 가슴에 품은 채 또다시 중국에 2차 방문(2015년)을 하게 되고 비행기 안에서 안중근평화재단 청년아카데미 이진학이사장을 운명처럼 만나게 되며, 안중군 장군에 대한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된다.
그 후 2016년 강대표는 안중근 정신에 매료되어 제2공장을 매입하게 되고, 2018년 안중근 기념관을 설립하며, 그해 3월 26일 전주시 진북동에 무료개관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독립운동가 안중근 장군 112주년(2022) 순국일을 맞이해 일본 상인에 대항해 조성된 한옥마을에 안중근장군 기념관을 확장 이전하게 된다. 기념관 입구에는 2m 40cm 높이의 안중근 동상과 강동오 풍년제가 대표가 어렵게 수집한 유묵이 전시되어 있다.
<안중근은 장군인가 의사인가>
올해 2월14일은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은 날이고, 3월26일은 안중근 서거 112주기가 되는 날이다. 100주기이던 2010년 3월23일에 국방부와 육군은 안중근에게 정식으로 장군칭호를 부여하였으나, 국가보훈처에서는 아직도 의사칭호를 고수하고 있고 교육부의 교과서에도 의사로 표기되어 있다.
육군사관학교 교정에는 안중근 장군 동상이 2015년에 들어섰고, 1976년에 건립된 충의비에는 안중근의 휘호인 “위국헌신 군인본분 爲國獻身 軍人本分”이라는 군인정신이 새겨져 있다. 육군본부 회의실에도 안중근장군실이 있다고 한다.
2010년 3월 25일 조선일보는 안중근 義士인가, 장군인가를 주제로 서로 다른 두분의 의견을 조선일보를 인용하여 소개한다.
(장군론측 주장)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한국사.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敵將쏜 장군
'의사'는 日주장 돕는 꼴… 장군도 사상가 될 수 있어… 이순신 장군도 있는데 장군이 의사 아래인가
안중근은 하얼빈 의거 후 뤼순 법정에서 나는 대한의군의 참모중장으로서 적장을 쏜 것이므로 나에게 적용할 법은 일본·청국·한국 어느 나라의 법이 아니라 육전(陸戰) 포로에 관한 국제법이라고 네 차례나 주장하였다. 필자는 이에 근거하여 지난 2008년 의거 99주년에 '안중근 의사'란 호칭을 재검토해 볼 것을 제안하였다.
하얼빈 의거 당시 일본 정부의 사건대책본부(외무성)는 사건 직후인 11월 초에 이미 안중근을 극형에 처하는 것이 정부 방침이라고 뤼순 법원에 통고하였다. 안중근은 심문과정에서 "군인이라면 직속상관을 대라"고 하자 실명(김두성)을 들었고, 고종 황제의 지시 여부에 대해서도 "있었다"고 답하였다.
(중략)
'의사(義士)'라는 호칭은 하얼빈 의거 직후 우리 독립운동 진영에서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안중근의 법정투쟁 내용을 알지 못한 상태였다. 그들은 안중근의 영웅적 거사 성공을 기리는 마음에서 의사라는 호칭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의사'는 조직의 존재보다 개인 행위의 이미지를 더 강하게 주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안중근을 단독살인범으로 몰았던 일본 정부의 의도를 도와주는 결과를 가져온다. 일본은 하얼빈 의거 당시부터 안중근을 은인을 배반한 테러리스트라고 낙인찍었고, 근자 이라크 사태 때 국내에서도 안중근을 한국 테러리스트의 원조로 간주하는 말이 만만치 않게 나돌았다. 안중근의 법정 투쟁 내용이 다 알려진 지금 이 상황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
(중략)
국가보훈처가 장군은 1년에 60명이나 배출되고 의사는 수십 년에 한 사람 나온다는 이유로 '안중근 의사'란 호칭을 재검토하자는 의견에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의사와 장군이란 호칭이 국가적 차원에서 규정이 없다면 보훈처가 굳이 이런 논평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더욱이 장군을 모두 같은 것으로 보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순신 장군 같은 분은 1000년에 나올까 말까 한 분인데 어떻게 '장군'이 '의사'보다 아래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학계의 일각에서 사상가로서의 면모 때문에 장군이란 호칭에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의 오랜 '출장입상'(出將入相·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된다)의 전통에서 본다면 전선에서 장군으로 활동하던 분이 옥중에서 숭고한 뜻을 담은 저술을 낼 수도 있지 않은가. 요컨대 안중근이 한 일을 올바로 드러내는 호칭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 (조선일보 2010.3.25)
(의사론측 주장)
김용달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
인류평화 大義천명한 의사로 불러야
'장군'은 거사만을 부각… 교육계몽 활동과 동양평화·인류공영 등 사상가로서의 삶 보아야
(전략)
역사용어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과 평가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안중근 의사라고 하거나, 안중근 장군이라고 할 때의 역사적 해석과 평가는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안중근 장군이라고 해서 틀린 말은 아니다. 안중근 의사 자신이 심문 과정에서나 법정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고 당당히 말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안중근 의사는 1907년 말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한 이후 연추를 중심으로 하는 연해주 의병부대의 우영장으로 맹활약하였다. 여러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면서 일본군과 수십여 차례 혈투를 벌였다. 그래서 안중근 장군이라고들 하는 것이다.
(중략)
의거 못지않게 안중근 의사가 민족독립과 동양평화, 그리고 인류공영의 숭고한 뜻을 세우고 펼쳐온 과정도 큰 의의가 있다. 의사라는 이름은 나라와 겨레, 나아가 인류 평화에 대한 '대의(大義)'를 세우고, 그 옳은 뜻에 몸을 던져 구현한 사람들에게 붙이는 역사용어이다.
(중략)
안중근 의사는 황해도 부잣집의 맏아들로 태어났지만,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특히 천주교에 귀의한 이후 포교 현장에서 민족대중의 무지와 피폐한 삶을 목격하고는 곧 민중계몽운동에 나섰다. 그것이 진정으로 자신이 신앙하는 종교와 민족의 양심에 부합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광산회사를 설립하여 산업진흥에도 애썼다. 나아가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나랏빚 갚기에도 앞장서며 을사늑약 이후 급격히 기울어가는 조국의 운명을 되살리기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이 과정에서 안중근 의사는 대한의 독립이 우리만의 일이 아니라, 동양평화, 나아가 세계평화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광무 황제가 강제 퇴위 되고, 군대가 해산되는 망국의 상황이 도래하자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부대를 이끌고 항일전에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활동지역에 나타난 한국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처단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빛나는 점은 바로 이것이다. 동양평화와 인류평화는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독립을 보장하여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있다는 사실을 세계만방에 알린 것이다. 우리가 안중근 의사를 동양평화의 수호자이자 인류평화의 사표인 '의사'로 불러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조선일보 2010.3.25)
(어느 쪽이 옳은가)
리산
2022.2.11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일본 메이지천황의 동양평화에 관한 칙어를 인용 발전시킨 것이다.
1904년 2월10일 메이지천황은 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필자 번역)
[짐의 생각은, 문명을 평화적으로 발전시켜, 여러 외국과 우호관계를 촉진함으로써, 아사아의 안정을 영원히 유지하고, 또한, 각국의 권리나 이익을 훼손하지 않도록 하면서, 오랫동안 일본제국의 장래의 안전이 보장되는 상황을 확립하는 데에 있다.이는 짐이 타국과 교섭할 떼에 가장 중시하는 바로, 언제나 이러한 생각에 어긋나지 않도록 유념해 왔다.짐의 부하들도, 이러한 짐의 의사에 따라 각가지 일을 처리해 왔기 때문에, 외국과의 관계는 해가 갈수록 점점 두터운 친교를 맺기에 이르렀다.지금 불행하게도 러시아와 싸우게 되었지만,이는 결코 짐의 의지가 아니다.
일본제국이 한국의 보전을 중시해 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나라와 한국은 여러 세대에 걸쳐 관계를 유지해왔을 뿐 아니라, 한국의 존망은 일본제국의 안전보장에 직접 관계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원문)
[惟ふに文明を平和に求め列国と友誼を篤くして以て東洋の治安を永遠に維持し各国の権利利益を損傷せすして永く帝国の安全を将来に保障すへき事態を確立するは朕夙に以て国交の要義と為し旦暮敢て違はさらむことを期す。朕か有司も亦能く朕か意を体して事に従ひ列国との関係年を逐ふて益々親厚に赴くを見る。今不幸にして露国と釁端を開くに至る豈朕か志ならむや。
帝国の重を韓国の保全に置くや一日の故に非す。是れ両国累世の関係に因るのみならす韓国の存亡は実に帝国安危の繋る所たれはなり。]
물론 이 선전포고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한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지만, 안중근은 이등박문 처단의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안중근은 법정에서 메이지천황의 뜻을 거역한 이등박문을 동양평화에 관해 같은 뜻을 가진 고종황제의 지시를 받아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처단하였음을 강조한다. 뤼순감옥에서 쓴 유묵에도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 이라고 본인의 의지를 밝히고 있다. 간수 중에 안중근을 존경하게 된 사람들도 주군(대한제국 황제)에 대한 일본인이 이해하기에는 사무라이로서의 충성을 보인 점에 존경을 표한 것이었을 것이다.
안중근은 동학군을 토벌한 관군이었고 13도 창의군 조직의 일원으로서 대한의군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사령관을 거쳐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 밝혔다는 것은 대한제국 참모로서 을사늑약에 반기를 든 최초의 공인이 된다. 이는 역사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갖게 된다.
민간인으로서의 의사 칭호는 일본이 테러리스트로 치부할 빌미를 주게된다. 그러나 황제의 군인으로서라면 그의 거사는 고종황제에 대한 충성의 결과가 된다. 그리하여 동양평화론도 보다 정론화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안중근 이후 112년 동안 동양평화론을 단 한 줄도 가필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는 걸출한 인물로서 이순신장군, 홍의 장군, 녹두장군, 김좌진장군과 같은 다양한 장군들이 있다. 이들이 의사가 아니라서 홀대받는 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안중근이 1909년에 이미 대한의군, 대한국인임을 밝힘으로써 대한제국인임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는 점은 1919년 3.1독립선언문에서 33인이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고 있는 것과 사뭇 다르다. 나라 잃은 식민지 시대가 아닌 어엿한 대한제국의 국민이었던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안중근의 사망 후 두 자녀는 거둔이가 없어서 뿔뿔이 흩어졌다가 장남 안문생(安文生)은 1911년에 7세 나이로 음식에 중독돼 죽었고,차남 안준생은 30여년을 구걸하다시피 살다가 일제가 돌보게 되면서 이등박문의 아들의 양자로 들어가고 누나 안현생도 동생과 함께 친일파로 전락하는 신세가 된다. 아무도 돌보지 못한 책임이 후대에 있는 것이다. 안중근의 유해는 아직도 못찾고 있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전남 장흥군 죽산안씨 문중인 만수사 내에 해동사라는 사당을 지어 67년째 제사를 올리고 있다. 죽산안씨 문중과 장흥군에서는 공식행사로서 사망일인 3월 26일에 추모제가 열린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의 서문만 적어두고 미완성인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우리에게는 그의 동양평화론을 구체적으로 완성하여 국제화 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하여 국제관계의 지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안중근_장군 #안중근_의사 #육군 #국가보훈처 #대한의군 #참모_중장 #이등박문 #동양_평화론 #해동사 #하얼빈 #장흥군
[출처] 안중근 장군인가 의사인가|작성자 리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