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와 간화선>
위빠사나 수행을 주수행으로 삼는 절이나 명상을 지도하는 단체가 꽤 늘어가고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미얀마, 스리랑카 등 남방불교권의 주된 수행방법입니다. 그들은
위빠사나야말로 붓다께서 정각正覺을 이루신 유일한 수행법이라고 확신합니다.
한국에 위빠사나 수행이 전해진 시기는 1988년 전세계 위빠사 나 전파의 원조격인
미얀마의 마하시 스님(1904~1982)의 제자이며, 마하시 수행센터〔미얀마의 양곤에 있는
동시에 3,000여 명이 수행할 수 있는 규모로 전 세계에 40여 개의 분원을 두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수행 도량입니다〕의 원장인 미얀마의 승려 우빤디따가 삼각산 승가사에서 30여 명의
한국 스님들에게 21일 동안 위빠사나를 지도하신 것을 계기로 삼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하여 그 전파 경로가 인도-중국-한국-일본으로 이어지는데 이를
북방불교라 하고, 인도-스리랑카-미얀마,태국 등의 경로로 전해진 불교를 남방불교라
합니다.
흔히 북방불교를 대승불교라 하고 남방불교는 무조건 소승불교 라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말 그대로 큰 오해입니다.
불법을 실천하는 정신에는 대승과 소승을 편의상 구별하여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남방불교를 모두 소승불교라 말하는 것은 아주 큰 병폐입니다. 내면을 보면 한국불교야말로
대승이라 큰소리 치지만, 도리어 소승불교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소승은 혼자 깨달음을 추구하고 다른 이는 구제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승 쪽의
비판인데, 한국불교가 어디 제대로 혼자라도 ‘깨달음’을 강렬히 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더욱이 소승의 깨달은 자인 독각獨覺을 모신 독성전이 있고, 스님들과 신도들도 그 독각에
예배하고 기도를 하는게 현실인데, 한국 불교가 무슨 대승불교 운운하며 그들을 소승이라고
폄하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가 말입니다.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사정이고, 잘 드러나진 않지만 수행의 측면에서 조계종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수행법인 간화선과 남방의 위빠사나를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 문제는 위빠사나 수행법을 이해하셔야 설명이 가능하니, 지금부터 간단하게 위빠사나
수행법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위빠사나vipassana는 아함부 경전 중 『대념처경大念處經』이라는 경에 의지합니다. 부처님도
하셨다고 주장하는 이 위빠사나 수행법은 한마디로 ‘마음 챙김’입니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채는’ 수행법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어떤 이는 육조단경 좌선품에
나오는 생각생각 중에 자성의 청정함을 관찰하라(念念中自見淸淨心) 와 유사한 수행으로,
마음의 본성을 관하는 돈오적頓悟的 수행이라고 까지 확대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합니다.
위빠사나의 ‘마음 챙김’ 대상은 몸·느낌·마음·법(身·受·心·法)의 네 가지입니다. 이를 사념처라
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신념처身念處: 자신의 몸을 부정不淨하다고 관하는 것입니다. 이 관법은 육신의 욕망을
제어하는데 제일입니다. 즉, 이성을 보고 성욕이 일어나면 그 이성을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나의 신체는 똥, 오줌, 고름, 가래 등으로 가득하다고 마음을 챙기는 것입니다.
둘째, 수념처受念處: 안·이·비·설·신·의〔육근六根〕의 감각의 느낌들이 ‘고苦’라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즉, 어떤 비싼 옷이 좋아서 입고 싶은 욕심이 나면 그 옷을 생각하는 마음을 돌려,
입고 싶어 하는 마음 그 자체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옷을 꼭 입어야 하는 이유가
사실은 허망한 마음이라고 마음을 챙길 수 있습니다.
셋째, 심념처心念處: 마음을 무상無常하다고 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무상은 ‘항상한 것은
없으니 지금 순간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이지, 내게 내재한 불성까지도 허망하다, 덧없다,
가치가 없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한국불교의 신도들에 대한 근시안적 설명법의 문제 중 하나이지만 무상을 대부분 허망하거나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설명해 놓으니, 불교를 모르는 이들은 ‘불교는 허무주의 종교다’라고
오해할 빌미를 주는 것입니다.
심념처의 핵심은 지금 이 순간 내가 확신하고 있는 마음도 사실은 영원히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고, 이것은 다시 말해 나의 지금의 확신이 언젠간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마음 으로 챙기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넷째, 법념처法念處: 제법諸法이 무아無我라고 관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제법무아’야말로 불교의 기본명제인 삼법인三法印 중 가장 핵심적인 말입니다. 즉, 우리가
‘이것이 진리다, 저 것이 진리다’라고 생각하는 그 법이 사실은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관하는
것이 법념처인데, 너무 어렵고 설명을 하려면 저도 난감하니 이 정도로 넘어 가겠습니다.
다만 법념처의 목표인 제법무아는 반야 심경의 공空과 둘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기억해
두십시오. 위빠사나식으로 설명하면 ‘진리에 집착하지 말고 진리를 추구하는 현재의 그
마음을 챙겨라’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인 사념처에 대한 제 설명을 보시고, 간화선을 수행하시는 분들은
위빠사나에 과한 평가를 했다고 하실 것 같고, 위빠사나를 수행하시는 분들은 설명이
추상적이고 세밀하지 못하다고 책망하실 것이 염려가 됩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 저는 간화선만 하는 수행자도 아니고, 또 위빠사나 수행만을 하는
수행자도 아니니 당연히 그런 말을 들어도 변명할 처지는 못 됩니다. 다만, 저는 한국불교에
이 점만은 꼭 밝혀 두고자 합니다.
간화선의 몰록 깨닫는 돈오법이 아니면 수행의 가치가 없다는 쪽에 대해서는, 중국 송나라의
대혜종고大慧宗?(1089~1163)에 의해 제창된 간화선법으로 온전한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
1,000여 년 동안 몇 명이었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간화선의 병폐로 무늬만 선禪을 추구하는 무리가 양산되고 있는 작금의 현실, 그리고
깨달음의 100점짜리 간화선을 수행해도 10점 밖에 이룰 수 없다면, 위빠사나가 설령 50점짜리
수행법이라도 20점을 받을 수 있는 수행방법 중의 하나라면 엄밀히 말해 오히려 사람에 따라
권장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되어 집니다. 더욱이 위빠사나를 간화선법에 대항하는, 더 나아가
간화선법을 가로막는 열등한 수행법이라고 매도해야 할 근거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엔 위빠사나의 입장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은, 간화선은 실제 경전에 있는 부처님의
수행법이 아니고 방편으로 나온 수행법이고, 위빠사나는 대념처경 등에 분명히 있으니
‘이것이 성불成佛의 수행법이다’라고 확대 해석하는 것도 곤란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일반불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방법이 최고의 수행법이라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쉽고 편리한 것이 우리에게 항상 최고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수행법에도 적용된다 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