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 자리와 난 자리
산수(傘壽)의 시간을 살고 있는 안상국(安相國) 원로권사는 요즘 아내의 소중함을 느끼면서 노년의 때 더욱 애틋한 마음으로 부부의 연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10월 건강했던 아내는 갑자기 꺼져가는 불꽃처럼 시름시름 앓았다. 열도 나고 몸이 으스스한 한기를 느끼는 증상이 영락없이 감기몸살이었다. 감기는 잘 쉬면 낫는 병이라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에 따른 처방을 받고 완쾌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호전의 기미는 전혀 없고 점점 가라앉은 아내를 보면서 영양주사 맞으러 근처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빨리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큰 병인가 싶어서 놀라는 가슴을 추스르며 서둘러 원주로 달려가 의료원에 입원했다. 병명은 쯔쯔가무시(恙蟲, つつがむし), 일명 ‘털진드기병’이다. 이 병은 집쥐, 들쥐, 들새, 야생 설치류 등에 기생하는 털 진드기 유충에 물려서 감염된다. 성묘, 벌초, 도토리와 밤 줍기, 주말농장 일구기, 텃밭 가꾸기, 등산 등과 같이 논밭이 많은 지역에서 야외 활동을 하다가 대부분 그 유충에 물려서 발생한다. 길게는 6~20일, 보통은 10~12일의 잠복기가 지나면 처음에 심한 두통, 오한, 전율이 생기면서 열이 나고 근육통이 심해진다. 진드기에 물린 부위에 1cm 정도의 가피(痂皮, 부스럼 혹은 딱지)가 나타난다. 붉고 경화된 병변(病變)이 수포를 형성한 후 터져서 흑색으로 착색된다. 이후 3~5일 만에 팔다리로 발진이 퍼진다. 발병 첫 주에는 열이 나고 기침을 많이 하다가 더 지나면 폐렴으로 진행될 수 있다. 드물게는 쇼크가 발생하거나 중추신경계가 침범당하여 장애를 일으키기도 한다.
기억들 더듬어 보니까 10월의 어느 날인가 밤 줍는다고 앞산에 간 적이 생각났다. 그때 감염된 것 같았다. 일반인들에게는 그냥 열 감기 정도로 착각할 수 있는 증상이었기에 김석래 원로권사 역시 그렇게 수일을 보냈다. 자녀들은 어머니의 입원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멀리서 원주까지 달려와서 당번을 정하여 간호했다. 안상국 권사는 새벽마다 아내의 건강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다. 어찌 쉽게 낫는 병이 아닌듯 생각보다 입원 기간이 길어졌다. 다행히 병의 원인은 거의 치료되었는데 예전처럼 기력이 회복되지 않았다. 아직은 퇴원이 시기상조였다. 입원 기간이 길어지자 자녀들의 지속적인 간호가 쉽지 않을 때 안 권사는 이제부터 본인이 간호하기로 하고 자녀들을 되돌려 보냈다. 입원실에서 보호자는 잠자리와 모든 생활이 불편하다. 그런데 안 권사는 굳이 이 불편한 자리를 마다하지 않고 감수했다. 아내를 보살펴야 하는 남편의 책무이기도 하지만 아내 없이 지냈던 몇 주 동안 겪었던 일 때문이었다. 바로 아내의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를 절절하게 느낀 것이다. 편히 지내는 집보다 불편해도 아내와 함께 지내는 것이 마음만은 편했다. 잠시 떨어져 지내면서 안 권사는 부부란 죽는 순간까지 함께해야 할 평생의 동반자라는 것을 가슴 깊이 깨달은 것이다.
감사하게도 김석래 권사는 기력이 많이 회복되어 더 이상의 병원 치료가 무의미해졌다. 입원한지 약 3주 만에 퇴원하여 고향같이 편한 내 집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병은 대부분 폐렴으로 이어지면서 사망이 이른다는 것이다. 김 권사가 폐렴에 걸려서 고생했으니 연령을 생각한다면 그런 상황도 올 수 있었다. 그런데 다시 건강을 되찾아 우리 곁으로 돌아왔으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더욱더 하나님께 감사가 충만해졌다. 11월 24일 안상국 권사는 아내를 위하여 기도해 준 담임목사와 직간접으로 도와준 분들에게 조촐한 점심을 마련했다. 그간의 다급했던 이야기를 웃으면서 여유 있게 나누는 시간이었다. 함께한 이들은 사지에서 탈출한 노병의 귀환을 축하하고 남은 삶에 건강의 복이 함께하길 기도했다.
흔히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말한다. 항상 있으니까 당연하다고 느낀다. 늘 곁에 있어주는 아내가 소중한 존재인데도 모르고 사는 이 시대의 남편들에게 안상국 권사는 가슴 저리게 충고한다. 내 곁에 있어주는 아내가 참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는 지혜를 가지고 살라고. 평범함에는 가림 막이 설치되어 있어서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한다. 그래서 대부분 그냥 스쳐 지나칠 때가 많다. 유독 눈에 띄는 엄청난 일에나 고개를 돌리고 감사한다. 난 자리에서 소중함을 깨닫는 자는 양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다. 난 자리에 있으면 그냥 내 곁에만 있어주는 것의 소중한 의미를 알게 된다. 그냥 존재가 은혜요 평범함이 복이다. 사도 바울이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고 힘주어 강조한 이유다. 범사(凡事)란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뜻한다. 애지중지 키운 자식이라도 언젠가는 난 자리를 만들어 놓는다. 그런 자리를 항상 든 자리로 만들어주는 유일한 사람은 아내이고 남편이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가 이 세상에서 최고의 선물이다. 서로의 난 자리를 든 자리가 되게 하려고 평생 주 안에 함께 해로하는 사람이 진정 복되다. 예수님과 그리스도인의 관계도 다르지 않으리라. 안상국 원로권사의 따뜻한 밥상에서 따뜻한 인생 교훈을 들으면서 그대가 있음에 오늘 내 삶이 행복임을 느낀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베드로전서 3:7).
따뜻한 밥상에 앉은 안상국 김석래 원로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