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과 함께 / 안순희
우리 집 뒤 숲은 먼 산으로 이어져있다. 덕분에 여러 야생동물을 자주 만난다. 온갖 산새와 풀벌레는 늘 고운 노래로 시골집의 적막을 깨우고 예쁜 산토끼는 마당까지 내려와 텃밭에 콩이며 체소를 뜯어 먹지만 그 모양이 귀여워 가만히 바라본다. 봄이면 제 울음에 놀란다는 수꿩이 날고 풀숲에는 까투리가 알을 품는다. 꽃사슴처럼 아롱다롱 무늬가 있는 고라니는 다리가 막대기처럼 가늘고 길어서 껑충거리며 무논을 가로지른다.
무더운 여름 논에 물품는 양수기에 연료를 채우려 내려가는데 논두렁에 누어 눈만 껌벅이는 고라니 새끼가 볕에 노출되어 있었다. 발굽이 둘로 갈라진 동물은 콧잔등이 늘 촉촉하게 젖어있어야 건강하다고 알고 있는데 그놈은 바짝 말라서 갈라질 것 같고 숨을 헐떡이는데 금방 죽을 것 같아 보였다. ‘대려다 먹이를 주어야할까 시원한 그늘에 두고 일어나는 데 도움을 줄까’. 아니 어미가 올지도 모르는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야생에 끼어들었다 오히려 해로우면 안 될 것 같아 그 자리를 피해 집으로 와버렸다. 몇 차례 살펴보았지만 움직임이 없었다.
다음날은 그 자리에 녀석이 없어서 어미가 대려 갔나보다 안도하려는 순간 작은 물체가 물도랑을 뛰어넘고 언덕을 올라 산으로 내달렸다. 하룻밤 새 그런 기력을 회복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못 본체 했던 판단이 옳았기에 기분이 좋았다. 가을이면 들에서 뛰는 고라니를 더 자주 만난다. 벼가 익어 탈곡이 시작되면 기계 소리에 놀라 달아나는 여석들이 통통하게 살이 올라 제법 먹음직해 보이지만 산짐승을 해치면 사고 난다는 속설이 있어 아무도 그들을 탐내지 않는다. 먹을거리가 부족하던 옛날에는 노루사냥을 했으니 노루 친 막대기 3년 우려먹는다는 말이 있었지만 먹을거리가 넘치는 지금이사 힘들게 노루사냥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노루와 고라니는 비슷하지만 다르다는데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서 아들에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어느 방송에서 들었다면서 노루는 무니가 없으며 덩치가 약간 크다고 했다. 여름이면 숲에서 찢어지는 괴성을 지르며 짝을 부르던 놈도, 비온 뒤 온 밭에 어지러운 발자국을 찍어놓던 놈도 다 고라니의 만행일 것이지만 그 깜찍한 용모 덕에 큰 미움은 받지 않는다. 고라니가 살다간 자리는 주위의 벼 포기를 접어서 커다란 방석처럼 쌓아놓고 자고 가지만 벼를 뜯어 먹거나 주위를 어지럽히는 일이 없이 깔끔한 게 대견하다. 고라니는 왜 논으로 왔을까? 아마도 천적을 피해 바닥에 물이 있고 키 큰 벼가 가득한 들이 안전한 은신처였으리란 추측을 한다. 그러라고 황새처럼 다리가 길어졌으리라, 노루는 덩치가 더 크니 산에서도 잘 사는지 나는 노루를 본적은 없다.
발굽 모양이 같은 멧돼지의 크고 넓은 발자국이 함께 찍혀서 온 밭이 쑥대밭이 될 때는 화가 나지만 산 밑에서 살려면 야생과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그들이 좋아하는 콩이나 고구마는 심지 말고 들깨나 참깨 고추 등 양념류는 공격 하지 않으니 다음해 영농 계획을 짜는 데 참고 해야겠다. 불편한 불청객도 있지만 철마다 찾아오는 아름다운 벗들도 있으니 크게 손해 보는 건 아니다. 찌는 더위를 식히는 소나기처럼 청량한 매미 소리가 잦아들 즈음 풀벌래 하모니가 시작되고 어스름한 마당에 반짝이는 바딧불이의 향연에 환호하노라면 꿈처럼 저 들에 흰 눈이 덮이리니 이 세상은 참 살 만한 곳이다.
첫댓글 자연을 아끼는 친구처럼 여기니 그곳의 고라니는 살 만하겠어요.
고라니에게도 마음 한 자락을 내어 주는 안순희 선생님이 바로 보살이시네요.
아름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
와! 안 작가님이 동물들과 같이 사는 법을 지혜롭게 터득하고 실천하고 계시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고 계시네요.
들짐승들의 개체 수가 많아 졌나봐요. 농사만 생각하면 그들이 밉기도 하겠어요. 그런데 공존하며 지내려고
노력하시네요.
저도 예전에 농수로에 빠진 새끼 고라니를 발견하고 꺼내 주었더니 가늘고 긴 다리로 논둑을 지나 숲을 행해 뛰어가던 기억이 있어요. 농촌의 가을 풍경에서 산짐승과 철새들의 이동 경로를 자주 보게 됩니다. 하물며 멧돼지도 마당 옆 텃밭에 다녀갔는지 간혹 똥을 발견한 적도 있어요. 사람도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그들과 더불어 살아야겠어요. 안 선생님의 마음처럼 맑고 아름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
자연은 우리의 소중한 친구지요. 가끔 저도 그것을 잊어버려 걱정이긴 합니다.
산새, 풀벌레, 산토끼, 고라니, 노루, 멧돼지, 매미, 반딧불이... 선생님은 친구 부자네요.
'이 세상은 참 살 만한 곳'이라는 말이 선생님 곁에 있는 동물들의 소리로 들려 가슴을 울립니다. 잔잔하고 따뜻한 글 잘 읽었습니다.
존경하는 글 벗 님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