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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수필하나 붙들고 >를 읽고 /이희순 수필가
임병식 선생의 작품세계는 나에겐 익숙한 풍경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무려 1,500편에 이르는 선생의 거의 모든 작품을 만났고 대부분의 작품에 댓글을 올렸습니다.
아마도 나만큼 선생의 작품을 섭렵한 사람은 없을 듯합니다.
수필은 말의 성찬이 아닙니다.
수필은 작가의 언행이라는 반석 위에 짓는 진실의 집입니다. 누구에게나 양심은 있겠지만 저 깊은 곳에서 침묵으로 말하는 양심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청석 임병식 선생을 존경하는 까닭은 공감과 감동을 자아내는 수필도 수필이려니와 무엇보다도 올곧은 인생을 살아온 분이기 때문입니다.
중증뇌병변장애로 와병 중인 사모님의 수족이 되어 20여 년을 한결같이 수발하고 계시는 그 한 가지만으로도 나는 선생을 존경해마지 않습니다. 실어증까지 겪고 있는 사모님을 차마 장시간 남의 손에 맡길 수 없어 선생은 아직껏 해외여행 한 번 다녀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순정입니다.
저의 능력으로는 선생의 작품을 감히 평가할 수 없기에 그동안 제가 꾸준히 올려왔던 몇몇 댓글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쟁기>에 대한 10여 년 전의 제 짧은 댓글을 먼저 소개합니다.
글을 배워 무쟁기질을 해 본 사람만이 보여주는 실체적 감동에 빠져듭니다.
수필은 진솔한 체험의 문학임을 다시 한번 절감합니다.
수필은 수석이다. 수석의 생명은 돌의 가치에 있지만, 돌의 가치를 품어 안은 좌대야말로 돌의 생명을 증거 하는 화룡점정의 붓이다. 돌은 진실이며 수필의 소재이고 좌대는 수석을 재구성한 언어의 미학이다. 돌은 어떻게 놓느냐, 어느 곳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분재는 변용이 필연적이지만 돌은 조금이라도 다듬어서는 안 된다.
“소가 앞정강이로 힘차게 물을 차면서 앞으로 나아갈 때 속살 뒤집어 놓은 그 지반 위를 밟고 지나가는 기분은 개척자의 기분이다. 뒤이어 폭포수 쏟아지듯 그 속으로 밀려드는 물의 동요, 그것은 하나의 활력이었다.”
임병식 선생의 <쟁기>는 값이 없는 산수경석이다. 보리를 거둔 논바닥에 물을 대고 쟁기질을 하는 광경에는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쟁기질을 하는 화자의 감각은 생명력이 넘치는 서정의 노래를 창조해 내고 있다. 돌은 무심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상상력의 세계로 이끈다.
-졸고 <수필의 길> 중에서-
<어머니의 호밋자루>에 대한 저의 댓글입니다.
선대부인께서 오랫동안 텃밭을 일구시던 호미를 잡아보신 감회가 느껴집니다.
부모님 생전에 효도한 자식일지라도 돌아가신 후에 후회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부모님 특히 어머님의 사랑은 어떠한 효도로도 다 갚을 수가 없으니 아쉬움이 더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호미를 통하여 어머님을 기리고자 하시는 선생님의 효심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참고로, 지금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는 한국 호미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하네요. 쓰면 쓸수록 편리하고 매력 있는 농기구라며 칭찬이 자자하다고 합니다.
늙으신 부모님을 봉양하는 것도 효도이겠으나 부모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아 그 마음을 편안케 해드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효라고 생각합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님의 내리사랑을 세상의 무엇으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모정무한>에 대한 댓글입니다.
선생님의 작품을 통하여 누님에 대한 사연은 어림짐작하고 있었으나 참으로 애잔합니다. 더구나 연암의 글을 대하시면서 그동안 참아왔던 선생님의 회한과 손위 누님을 떠나보낸 여한이 더욱 눈물겹습니다. 1964년이면 어김없이 바로 위의 누님이시군요. 영혼 결혼을 하여 제웅으로 떠나가신 누님의 영혼은 아마도 평안을 누리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제게도 누님이 있을 뻔했는데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고 하더군요. 어쩌다 한번 그 누님이 살아계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에 잠기곤 합니다.
세월이 흐른다 하여 혈육의 정이 어찌 희석되겠습니까. 미혼 누님을 여읜 슬픔과 정한이 선생님 문학의 자양분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흰 꽃상여>에 대한 댓글입니다.
당대의 역술인 두 분과 인연이 있으셨군요. 조선시대에는 역학이 선비들의 필수과목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역학은 일반적인 학문과 달라서 이론공부만으론 경지에 도달할 수 없고 신통을 해야 한다고 하지요. 수십 년 매달리고도 도통을 못하고 대부분 논리에 그친다고 합니다
<내가 만난 두 도인>에 대한
밤마다 이야기를 졸라대던 저에게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시던 어머니 말씀이 생각나네요. 고래로 글을 쓰는 이들은 청빈하게 살아왔는가 봅니다. 어르신께서도 선생님이 장차 구차하게 살아갈 것을 염려하여 원고를 내다버리셨을 것입니다 친가와 외가를 닮아 글쓰기에 매진해오신 선생님께 새삼 경의를 표합니다 그 왕성하신 활동과 능력에 자주 탄복합니다
<집안 내력>에 대한
알에서 깨어나 자라면서 어미가 물어다 주는 먹이를 넙죽넙죽 받아먹던 독수리 새끼가 마침내 벼랑 끝에서 상승기류를 타고 비상하는 순간, 독수리 새끼의 심장은 얼마나 두렵고 설렜을까요. 창공을 선회하면서 처음으로 마주친 세계는 얼마나 경이로운 것이었을까요. 버스머리 군두는 선생님께서 독수리의 날개를 받아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출발점이셨군요.
<그리움이 머문 자리>에 대한
추수가 끝난 빈 들녘의 풍요로움과 자식들 알뜰살뜰 키워 성가시킨 어머니의 따뜻한 빈 가슴이 감동으로 안겨옵니다. 아, 빈 것의 아름다움은 농부의 땀방울과 어머니의 희생과 청백리의 삶의 향기였습니다
<빈 들의 향기>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하신 성경 말씀이 떠오릅니다. 쇠는 불에 달구어 칠수록 단단해지고, 질그릇은 엄청난 고열을 견뎌내야 아름다운 도자기로 거듭나는 법인데 요즘은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는 의지가 나약한 사람들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자주 접하게 됩니다.
<생명의 존엄>
생전에 욕설이나 험악한 말을 많이 하여 다른 사람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힌 사람은 죽어서 혀를 뽑히는 발설지옥에 떨어진다고 합니다. 뽑으면 다시 자라나고 뽑으면 또 자라난다고 하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쓰는 말이 바로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라."라는 것이지만 막상 상대방의 처지가 되어 생각해보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합니다. 역지사지의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면 세상은 천국에 훨씬 가까워지겠지요.
<역지사지>
예전에 제 아버지 불치병을 나수기위해 험한 바위산을 기어오르며 부엌칼로 어렵사리 바위옷을 떼어내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바위이끼가 아무래도 바위에 납작하게 눌러붙어 사는 회백색의 그 바위옷인 듯합니다.
떼어내기도 힘들 뿐 아니라 양이 매우 적어서 종일 고생을 해도 한두 주먹을 채취할 정도였지요. 그 시절엔 아버지 병이 낫기만을 바라는 마음에 바위옷이며 바위솔을 채취하고 산천을 더듬어 마른 쇠똥을 줍기도 하고 심지어 독사를 잡기도 했습니다. 사모님이 속히 쾌차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바위옷>
선생님의 글을 두 번 읽고 나니 교교한 달빛이 잠 못 들어 깊어가는 청년의 밤을 위로하고 그믐달이 삼동의 새벽 추위에 떨고 있던 방황의 시절이 희미한 그림자를 남기며 스쳐갑니다. 달빛은 서늘하여 나그네의 심사에 고독을 더하는 듯합니다. 달은 인간을 비롯한 동물의 생식활동에 깊이 관여한다고 합니다. 물론 보름게니 그믐게니 하는 이야기는 헛된 논쟁이지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달의 사연을 들어본 적이 언제였는지 아득합니다.
<달>
밝은 빛은 무엇엔가 비춰야만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허다한 사람들은 찬란하고 밝은 빛을 칭송하면서도 정작 그 빛에 노출되기를 꺼립니다. 다른 사람이 그 빛에 노출되어 벌거벗은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은 즐거워합니다. 빛과 그림자의 진실을 생각해 보는 계기입니다.
<그림자>
천부적 심미안도 있겠지만 체계적인 훈련을 거쳐야 제대로 된 심미안이 갖춰진다고 생각해 봅니다 무릇 뛰어난 예술작품은 그 가치를 알아본 이들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작품도 예외일 수 없다고 봅니다 어쩌면 훌륭한 독자가 더 절실한 요즘인 듯합니다
<아름다움을 보는 훈련> 댓글
비마다 새록새록 옛 추억이 새겨져 있습니다.
어느 여름날 대취하여 야트막한 둠벙에서 세수나 좀 한다는 것이 그만 나도 모르게 머리만 내놓고 둠벙 물속에서 몇 시간이나 잠들었던 적도 있었지요. 그때 누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었지요^^
어느 분의 초가지붕 이는 이야기에 왜곡된 부분이 많아 예의를 갖춰 넌지시 기별을 넣었더니 너무나 교만한 어투로 퉁을 놓는 바람에 그 카페를 떠나온 기억이 새롭습니다.
<둠벙의 추억> 댓글
제가 가끔 감상하는 '봉숭아'입니다.
박은옥 작사 정태춘 작곡
초저녁 별빛은 초롱해도 이밤이 다하면 질 터인데
그리운 내님은 어딜 가고 저 별이 지기를 기다리나
손톱 끝에 봉숭아 빨개도 몇 밤만 지나면 질 터인데
손가락마다 무명실 매어주던 곱디고운 내 님은 어딜 갔나
별 사이로 맑은 달 구름 걷혀 나타나듯
고운 내님 웃는 얼굴 어둠 뚫고 나타나소
초롱한 저 별빛이 지기 전에 구름속 달님도 나오시고
손톱 끝에 봉숭아 지기 전에 그리운 내님도 돌아오소
<추억으로 남은 봉숭아 꽃물> 댓글입니다.
부처님 귀를 하신 자당님의 자애로우신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 세상 어머니들이 짊어진 숙명과도 같은 삶의 무게는 천근만근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쳐 쓰러질 때까지도 며느님의 병구완에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신 자당님의 노심초사를 저로서는 감히 추측조차 할 수 없습니다
<맥문동 줄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결론 부분이 저의 지론과 같아 마음에 스며듭니다. 사람이 땅을 복되게 하니 향기로운 사람이 묻힌 곳이 좋지 않은 곳일지라도 마침내 향기로울 것이고 악취가 풍기는 자가 묻히면 천하명당이라도 오염되고 말 것입니다.
<명당 이야기>
임병식 선생의 아호는 청석(聽石)입니다.
수석에 조예가 깊으신 선생께 어울리는 아호입니다. 내가 선생을 처음 뵈었던 때는 2007년 여름이었던 듯합니다. 어느결에 16년이 한 줄기 바람처럼 지나갔군요. 어느 날 뜻밖의 연락을 받고 뵈었던 기억이 선합니다. 내가 <한국수필>을 통해 등단한 사실을 축하해 주시고 격려해 주셨지요. 그때 청석 선생은 <한국수필>작가회 회장을 맡고 계셨습니다. 나는 그해에 선생을 따라 한국수필작가회에 입회하여 지금까지 소소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나아가 문협에도 참여하고 여수수필문학회에도 얼굴을 내밀게 되었는데 모두가 선생의 배려 덕분이었습니다.
2010년이 저물어가던 때, 선생의 제의로 ‘동부수필문학회’가 탄생했습니다. 동부수필문학회는 지난 13년 세월에 회원들의 필력이 상승곡선을 그리는 가운데 변함없는 우의와 문학적 교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고문으로 계시는 선생의 열성적 지도가 이루어 낸 소중한 결실입니다. 청석 선생도 어언 팔순을 바라보고 계시는군요. 나도 고희를 맞았지만 글쓰는 사람들에게 나이가 무슨 걸림돌이 되겠어요. 한국 수필 백년사에 100인으로 선정되어 출간하신 《오직 수필 하나 붙들고》는 한정된 지면 탓에 선생의 주옥같은 명작들이 고루 실리지 못해 아쉽습니다.
구태여 노익장이라는 단어를 끌어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언제나 청춘, 임병식 선생의 문운 융성과 건강 백세를 기원합니다.
(2023. 10.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