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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19세기말, 전세계 영토 4분의 1을 차지하며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던 영국, 그리고 아일랜드는 영국의 지배를 받는 가장 가까운 식민지였다. 750년 동안 이어진 영국의 잔인한 억압과 수탈, 감자역병으로 인한 대기근으로 많은 아일랜드인들이 목숨을 잃거나 고향 땅을 떠나야 했다.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수차례 혁명을 일으켰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아일랜드 의용군, 하지만 1916년 4월 더블린에서 일으킨 봉기는 식민지 아일랜드의 미래를 완전히 바꿔놓는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361번째 역사저널 그날 아일랜드 자유국 선포 100주년 기획 두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750년간의 식민지배 끝에 드디어 독립을 이뤄낸 아일랜드의 이야기 계속 이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최태성/한국사 강사: 영국 크롬웰에게 정말 학살당했던 그들의 모습, 대기근으로 인구의 4분의 1이 죽어나갔던 모습, 정말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이민을 갔던 모습들, 정말 이렇게 아픈 역사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봤는데 오늘은 그들이 다시 자신들의 조국을 찾아내는 독립의 역사를 시작할 것 같애요.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이시원/배우: 이제 드디어 750년 만의 독립을 이룬다고 하니 고구마 먹다가 사이다 먹는 느낌으로 오늘 방송을 볼 수 있는 거죠.
최원정: 우리 이시원씨가 시원해지는 바로 그날, 그런데 저희는 웬지 알게 모르게 아일랜드 입장에서 이 역사를 계속 바라봤는데 오늘 눈치가 보이는 사림이 있지 않은가요? (피터 빈트씨를 향하여) 안녕하세요?
피터 빈트/영국출신 방송인: 저는 영국에서 온 피터라고 하고요. 사실 저의 아버지는 영국인이었고 어머니는 한국 사람이에요. 그렇게 안 생겼지만, 영국 입장도 있지만 어머니 나라인 한국도 식민지 역사가 있으니까 아일랜드 생각하면 안타깝고 미안해져요. 그런데 저는 아일랜드 역사에 대해서 더 많이 배우러 오게 되었어요.
허준/방송인: 그러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겠어요. 한국인들 중에서도 보면 일본 분이 한국에 와 있을 때 술자리에서 슬쩍 슬쩍 물어 봤을 때 예를 들어서 분명 그때는 일본이 잘못한 거고 독도는 한국땅이다 라고 그러면 더 정이 가! 사실 저는 오늘 아일랜드에 너무 몰입해 가지고요. 레프러콘~ (레프러콘-아일랜드 설화에 나오는 노인 모습의 요정으로 아일랜드의 상징적인 아이콘 중 하나),
이시원: 초록색(허준) 흰색(김대륜) 주황색(최태성) 코드 아일랜드 다 있어요. 피터씨, 그러면 영국에서 일본은 어떻게 보면은 역사왜곡을 하고 가르치려 하지 않는데 영국에서는 본인들의 아일랜드에 대한 식민지 역사 충분히 교육받고 배우나요?
피터: 솔직히 영국 역사는 제국이기 때문에 되게 많잖아요. 그래서 다 배울 수 없어요. 당연히 솔직히 자랑스러운 거 위주로 배우죠. 왕과 여왕에 역사 포커스가 되어 있고 식민지 얘기가 나오면 어떻게 건설됐는지 좋은 쪽으로만 얘기 많이 했고 옆 나라 아일랜드인데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거의 안 배웠어요. 나중에 어른이 되고 나서 개인적으로 많이 배우게 되었어요.
김대륜/대구경북과학기술원 기초학부 교수: 최근에는 좀 변하긴 했어요. 집단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이런 이야기를 할 정도로 제국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면만 이야기 하다가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오히려 역사를 다양하게 보고 학생들이 직접 그 당시에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느낌이었는지 이런 것들을 공감할 수 있게 하는 역사를 공부해 오다가 2000년대 초반에 왜 그렇게 어두운 면만 가르치느냐 해 가지고 또 역사교육 과정을 개혁할려는 우리의 교과서 파동 비슷한 그런 사건이 영국에도 있죠.
허준: 일본하고 너무 비슷하다.
피터: 옛날 그냥 그런거 안배웠을 때 아일랜드는 영국의 일부였다 라고 알고 있다가 어른이 돼서조금 공부를 하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었지?
최원정: 식민지 750년이래요!
허준: 저희가 35년도 울분이 차 있고 아직도 분노와 상처로 마음의 회복이 안되었는데, 750년에 독립에 대한 열망 이건 정말 엄청나지 않았을까?
김대륜: 그렇죠, 그런 독립에 대한 열망이라는 것은 굉장히 오랫동안 표출이 되어 오는데 이것이 점점 고조되면서 어떤 폭발적으로 분출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1916년 4월에 일어났던 부활절 봉기라는 사건이었고요. 부활절 봉기가 계기가 되어서 아일랜드가 사실상의 독립을 얻게 되는 계기가 돼죠. 부활절은 다 아시다시피 굉장히 중요한 명절이죠. We serve neither King nor Kaiser But Ireland. Head Office, Irish Transport and General Worker’s Union. 한 1200명 쯤 되는 아일랜드 의용군이라는 사람들이 더블린에서 봉기를 일으킨 것입니다.
일동: 상태가 어마어마한데요. 도시가 완전히 폭격을 맞은 것 같애요. 전쟁 같기도 하고~
김대륜: 전쟁을 벌이는 거죠.
허준: 단순히 독립운동 만세 부르는 것이 아니네요.
김대륜: 중앙우체국을 사령부로 삼고 의용군들이 아주 용맹하게 싸움을 벌입니다. 여러 중요한 거점들을 장악을 하고~
허준: 이게 1914~1918년 까지 세계 제1차 대전이 있었잖아요. 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순간인데 1916년에 시작됐다. 게다가 부활절이다 쉬는 날이잖아요. 타이밍은 정말 잘 잡았네요.
최태성: 영국의 뒤통수를 빡 때린 모습인데요.
피터: 부활절은 영국에서 학교도 2주 동안 쉬어요. Easter Day 라고 해서 크리스마스 다음으로 큰 행사예요. 그런데 진짜 달걀 먹는게 아니고 영국에서는 달걀 모양 초콜렛을 먹어요.
최태성: 잠시만요, 달걀 초콜릿이라니요?
최원정: 초콜릿으로 달걀 모양을 만듭니다.
피터: 그때쯤 슈퍼 가면 달걀 초코로 꽉 차 있어요. 진짜 맛 있어요.
최원정: 근데 부활절이라 하면 하는 전쟁도 멈춰야 하는 그런 기간인데 하필 왜 부활절 기간에 봉기를?
김대륜: 왜 부활절을 택했는가를 알려주는 자료는 없습니다. 봉기니까 은밀하게 모의를 했을 것이고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것 아녜요. 다만 추측을 해보면 1916년 2월에 영국정부가 아일랜드 자치법 시행을 연기를 하거든요. (아일랜드 자치법-아일랜드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법안, 1886년부터 세차례 부결되고 1914년에 통과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다시 연기), 그게 첫번째로 연기를 한 것이고 두번째 연기를 한 거에요. 그러면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고 그 직후에 있었던 가장 의미있는 날이 부활절 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부활절에 봉기가 일어난 것이 아닐까 판단합니다.
최태성: 뭔가 계기를 다 찾아요. 우리 3.1운동도 고종의 승하 (3.1운동-1919년, 고종의 인산(장례)에 맞춰 일어난 전국적인 독립만세운동)를 계기로 준비에 들어간 거잖아요. 여기도 분명히 뭔가 있었을 것 같애요.
최원정: 말씀 중 얘기 들어보니까 자치권이 이미 마련된 상태였고 시행직전 이었네요.
김대륜: 문제는 전쟁이 나버렸어요. 1차 세계 대전이 나면서 다른 모든 잇슈들이 전쟁에 묻혀버리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1916년에 또 미루게 되는 것이죠.
허준: 이 부분이 첫번째 였으면 아일랜드인들도 참았을 거예요. 이미 앞에 몇번을 거부 당하고 한 거잖아요. 그래서 얘들은 이게 핑게지 해줄 마음이 없다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거죠.
최태성: 재밋는 사실은 정말 아일랜드 독립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부활절 봉기가 안 일어날 뻔 했습니다.
이시원: 아니 왜요? 아까 처음에 부활절 봉기는 계획됐던 무장투쟁 아닌가요?
최태성: 사실 부활절 봉기는 이걸 이렇게 표현해도 되나 실수?
일동: 실수?
최태성: 이게 실수로 일어난 면이 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때가 지금 누누히 얘기 하지만 1차 세계 대전 중이잖아요.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은 지금 이 기회를 본 거예요. 지금 영국이 전쟁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니까 제대로 뒤통수를 쳐가지고 무력으로 우리가 독립을 쟁취해 보자 라고 틈을 노리고 있는 상황 속에서 바로 영국과 싸우고 있는 독일, 독일에서 무기를 가지고 와 가지고 이걸 가지고 무력으로 독립을 할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독일에서 무기를 실은 배가 나오다가 영국 해군에 딱 걸려가지고 바다에 침몰됩니다. 그러면 이 계획이 어떻게 된 거예요? 다 틀어진 거지요. 중요한 게 뭐냐면 이 때 SNS가 발달이 안되었어요. 통신이 안 되어 이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모른 상태에서 그냥 시작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실수? 그렇게 볼 수도 있는 거죠.
허준: 듣고 보니까 충분히 이해가 가는 게 1차 대전 때 당시에는 공군과 육군 해군 조차도 무선통신이 제대로 안되서 서로 작전계획을 공유하지 못했던 일도 많아요.
피터: 그런 역사가 실수해서 나왔던 여러 번 있잖아요. 어떻게 보면 더 재미 있어요.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한 것도 지구 둘레를 잘못 계산해서 발견한 것도 재미있는 스토리구요.
김대륜: 그렇게 돼서 결국에는 봉기가 일어나죠. 굉장히 격렬하게 싸움을 벌이는데 봉기는 철저하게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이시원: 아니~ 부활절 봉기를 계기로 독립했다고 알았는데 사이다 시작인줄 알았는데?
최원정: 아까 교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허준: 밑밥 잘 깔아 놓으셨는데~ 먹어보니까 밥이 아니네요.
김대륜: 이야기는 조금 더 깊어지는 데요. 부활절 봉기를 일으켰던 사람들은 무장투쟁을 주장하고 나섰던 민족주의자들이에요. 이 사람들의 숫자는 1200명 밖에 안돼요. 영국이 굉장히 강력하게 대응을 합니다. 16000명 병력을 동원을 해요. 이 병력은 당시로서는 최신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소총 기관총 야포로 무장을 하고 공격을 해요 그리고 정찰 선박을 풀어서 아일랜드 주변을 정찰을 하고 그래서 가두어 놓는 것이죠. 그러니까 병력 면으로 보나 무기 면으로 보나 상대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것이죠.
최태성: 이 과정에서 영국군이 정말 잔인하게 진압을 해요. 무차별적으로 총격이 가해지게 되면서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이 엄청나게 많이 일어나는데 이 과정에서 370명 정도가 목숨을 잃게 됩니다.
허준: 아니 왜 민간인을 죽여요?
최태성: 무차별 총격이 이루어지니까~
허준: 16000명 10배 넘는 병력을 빼서 그리로 넣었다는 건 독일에서 공격 당하는 유럽 전선보다 아일랜드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라는 느낌이 들어요.
최태성: 여기에 재산 피해도 엄청나게 발생해 가지고 나중에 이에 대해서 영국이 보상금을 주는데 그때 돈이 180만 파운드~
최원정: 180만 파운드면 지금 환율로?
피터: 1 파운드가 1500원에서 1600원 왔다 갔다 해요.
이시원: 한 27억원 정도 그렇게 준 거긴 한데
허준: 아니 서울대 수학과 나왔어요? 대단하다.
최태성: 머리로 계산해서 나온 거예요?
이시원: (이실직고) 여기 쓰여 있어서~ 어떻게 보면 전쟁 중에는 영국 입장에서도 지금 1차 세계대전 중인데 우리가 분열되면 전쟁 이길 수 없다 그런 마음 때문에 더 강하게 진압하지 않았을까?
김대륜: 180만 파운드 정도를 보상했다 라고 얘기를 하는데 이걸 지금의 인플레이션을 감안해서 현재 가치로 환산을 하면 약2억 유로 정도가 돼요. 약 2700억원 정도 돈이기 때문에 피해가 막심했던 것이죠. 그러니까 아일랜드 사람들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자기들이 직접 피해를 보니까 아일랜드 의용군이 쓸데 없는 봉기를 일으켜서 우리한테 이런 피해를 입힌다. 아일랜드 의용군이 잡혀갈 때 이들에게 야유를 보낸다거나 돌팔매질을 한다거나 이런 식으로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하죠.
최원정: 계속되는 의문이 부활절 봉기가 독립의 전초가 되었다고 그러는데 독립을 이끌었다고 그러는데 지금 시민들의 지지도 못 받고 있는데 어떻게 가능했던 거죠?
김대륜: 영국군이 굉장히 잔혹하게 대응을 했기 때문이에요. 체포된 사람만 3500명 되었고 그중에 1400명 정도를 투옥을 시켜요. 그리고 직결처분을 내려서 90명 정도에게 사형선고를 내려요. 그 다음에 14명의 의용군 지도자를 그냥 참혹하게 죽여버립니다. 그런데 죽여 놓고 나니까 나중에 밝혀진 것은 그중에는 무기를 전혀 들지 않았거나 봉기 현장에 가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섞여 들어가 있었다는 거죠.
최원정: 과잉진압에 대한 반작용 같은 게~
허준: 당연하죠. 아마도 얘기 했지만 군대 전체 숫자가 1200명 밖에 안 되는데 몇 천명을 잡아넣고 사람을 그렇게 총살을 시켰다는 거는 아예 아일랜드인 입장에서는 쟤들은 우리를 국민으로 보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이 분명히 들었겠네요.
이시원: 아일랜드 입장에서는 총을 들지 않아도 죽을 수도 있는데 언젠가는 나도 희생자가 될 수 있겠구나 하는 두려움도 같이 있었을 것 같애요.
김대륜: 그래서 여론이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해요. 처음에 봉기가 일어났을 때는 민간인 희생자도나오고 재산 피해도 심하고 그러니까 왜 이런 일을 벌여가지고 부활절에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가 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의용군에 대해서 동조를 하기 시작하고 이들에 대해서 지지를 보내기 시작하는 거죠. 그러면서 의용군이 힘을 얻기 시작하고 그 과정이 누적이 되면서 결국에는 독립까지 이르게 되는 그런 스토리가 나오게 되는 거죠.
최원정: 실패로 끝났지만 오히려 아일랜드인들을 자극하여 독립의지를 불태우면서 1919년부터 독립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이 된 거예요. 그런데 그 중심에 바로 이 인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누굴까요?
------------------이광용/아나운서: 그렇습니다. 바로 이 인물이 있었습니다.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인물, 누구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요?----------------
허준: (이종격투기 선수) 코너 맥그리거!
이광용: 코너 맥그리거~ (록밴드 보컬) U2의 보노~질문을 받고 보니까 아일랜드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누굴까요? 그러면 얘기가 달라져요. 아일랜드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바로 (사진 등장) 마이클 콜린스 (1890~1922)-아일랜드 독립 투쟁을 이끌었던 군인이자 정치가, 지금도 아일랜드인들의 삶 속에서 마이클 콜린스는 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허준: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처럼 지폐~ 아일랜드 지폐!
---------------갑자기 분위기 아이리시 바 Irish Bar~ 등장 이광용 아나가 Michael Collins 브랜드 술병을 따른다--------------
이시원: 위스키 드시는 걸 보니까 아이리시 위스키예요.
이광용: 저기요, 분위기 좀 잡아 볼게요. (술잔을 들고) 마신다, 위스키병에 ‘마이클 콜린스’ 이름이
허준: 저게 진짜 이름이면 우리나라로 치면 ‘이순신처럼’ 이란 느낌이 있는 술인 거잖아요.
이광용: 그런데 마이클 콜린스 위스키 뿐만 아니라 이 포스터! 리암 니슨! 리암 니슨이 마이클 콜린스 라는 인물을 연기했던 영화입니다 (마이클 콜린스(1996년)-마이클 콜린스의 삶을 다룬 전기 영화, 1996년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 사자상 수상), 그리고 “귀여운 여인” 줄리어스 로버츠가 마이클 콜린스의 연인으로 등장해요. 영화뿐만 아니라 다큐, 드라마, 연극까지 여전히 마이클 콜린스는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면서 여러가지 영감을 주는 존재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피터: 잘 생기고 키 크고 조금 미스터리한 인물이었어요. 영국신문도 관심이 너무 많아서 연예인처럼 거의 맨날 실었어요. 그래서 관심을 끌었어요.
최태성: 어떤 관심을 끌었어요, 부정적? 긍정적?
피터: 부정적이었다가 계속 못잡고 못잡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좀 신비로운 인물이에요.
이시원: 매력적인 캐릭터였군요.
김대륜: 워낙에 신출귀몰했기 때문에 얼굴을 몰라요. 그런데 현상금이 어마어마하게 붙거든요.
최태성: 김원봉~, 김원봉이란 똑같네,
김대륜: 마이클 콜린스는 어떻게 보면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인물입니다. 부활절 봉기 이후에 투옥이 되었다가 풀려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의용군 활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아일랜드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을 하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그런 작업을 하게 돼죠. 여론이 그에게 동조하도록 변했기 때문에 아일랜드 언론, 그 다음에 아일랜드 대중이 이들을 추앙하기 시작하죠. 그래서 아일랜드 의용군 Irish Volunteers 이라는 이름 대신에 아일랜드 공화국군 Irish Republican Army (IRA)이란 표현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영어로 하게 되면 Irish Republican Army가 되는 거잖아요. 그 앞 글자를 따서 IRA가 탄생을 하는 거죠.
이시원: IRA가 최근 까지도 테러 일으켜 가지고 뉴스에 자주 나왔던 단체인데 그 단체 말하는 거 맞아요?
김대륜: 일부는 맞고 일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최원정: 많은 분들이 IRA하면 낯설지 않으실 거예요. 특히 이런 장면들은 기억하시지 않을까 싶네요.
해설: 영국 제2의 도시 맨체스터 도심 한 복판에서 어젯밤 강력한 차량 폭탄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이 폭탄테러는 아일랜드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IRA 극렬분자들이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며 부상자가 200여 명에 달했습니다. (시민들이 놀라 뛰어가는 동영상), 1970년대부터 꾸준히 자행된 IRA의 폭탄 테러는 영국은 물론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리며 테러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불특정 다수를 향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무차별적인 공격에 무고한 사람들은 목숨을 잃고 평범한 일상을 빼앗겼다. 영국 그리고 영국령으로 남아있는 북아일랜드에는 지금도 여전히 IRA 테러의 공포와 싸우고 있다.
이시원: 정말 끔찍 하네요.
최원정: 피터씨, 저 때 영국에 있었어요?
피터: 네, 저도 IRA란 말만 들어도 많은 영국인들이 치를 떠는 사람들이 되게 많아요. 제 아버님이 군인이었어요. 저도 부대에 살았거든요. 살고 있는 부대에서 어느 날 아침에 펑~ 하는 소리가 나는 거에요. 건물이 조금 흔들렸어요. 부대에서 (1988년 8월 1일), IRA의 폭탄이 터졌어요. 집 앞에 뉴스 카메라들이 막 들어오고 1명 사망했고 9명이 부상했고 이런 폭탄이 있었어요. 그래서 큰 충격을 받고 영국인들 인식은 IRA는 완전히 테러집단이다.
최원정: 영국인들 입장에서는 트라우마가 있겠네요. 뭔가 조그만 큰 소리가 나도 깜짝 놀라는~
피터: 그래서 아버지도 그런 일 했어요. 폭탄 탐지기로 차 밑에 폭탄 있는지 확인하고 차에 탔어요.
허준: 마이클 콜린스는 몰라도 IRA는 알았는데 그냥 우리 머리 속에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IRA가 비슷한 단체처럼 느껴져요.
최태성: 그렇게 인식을 많이 했거든요. 아마 오늘 이 방송을 보시는 분들도 IRA가 나오니까 또 이슬람? 중동? 그렇게 생각하실 분이 많으실텐데 아니라는 것입니다. IRA는 전혀 이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드리고 예전에 영국 런던에 촬영차 가본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뭘 사먹고 버릴려고 하는데 쓰레기통이 안보여요. 아니 이 동네는 쓰레기통도 없어 라며 쓰레기를 하루 종일 들고 다닌 경험이 있어요. 그 이유가 뭔가 했더니 테러~
이시원: 거기다가 폭탄을 숨길까봐~
최태성: 쓰레기 통 속에 폭탄테러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거리에서 쓰레기통을 없앴다고 하더라구요. 그런 걸 보면 영국인들의 삶 속에 테러의 위협을 안고 사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허준: 이게 한국에도 영향 끼친 거 아세요? 이때 이것부터 시작해서 전 세계에 공포 같은 게 왔었어요. 그래서 한국 지하철 역이나 공공기관에 쓰레기 통 다 없앴어요.
최태성: 그래 가지고 너무 불편하다 해서 지금은 내부가 보이는 쓰레기통이 재설치 한 거예요.
이시원: 그런데 아까 마이클 콜린스는 아일랜드 민족의 독립 영웅 이라면서요. 그런데 이 마이클 콜린스가 무서운 IRA를 이끌었던 사람인가요?
김대륜: IRA가 같은 IRA가 아니에요. 무슨 얘기냐 하면 마이클 콜린스가 이끌게 되는 IRA는 아일랜드 의용군에서 나온 무장독립 투쟁세력이었고 지금 테러를 일으키고 문제를 일으켰던 사람들은 나중에 1960년대 이후에 IRA가 여러 분파로 나뉘게 되는데 그중의 한 분파예요. 프로비젼널 임시 급진파라고 보통 부르죠. 그 급진파 IRA가 주로 보통 이렇게 얘기하는데 1970년대 이후 런던이나 주요 도시에서 테러를 일으킨 사람들이죠. 그러니까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원래 독립전쟁 당시의 IRA와는 다른 성격을 갖고 있죠.
최원정: 영국인들 입장에서는 테러집단이고 아일랜드인들 입장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이고~
피터: 그래서 아까 그 영화도 마이클 콜린스 상영을 영국 보수적인 언론들은 반대 했어요. 테러범을 미화하는 영화다. 솔직히 알카에다와 IS의 이전이었잖아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었어요.
이시원: 근데 정말 이게 영국 입장도 이해가 가는게 마이클 콜린스가 확실히 IRA의 전설을 만든사람임은 확실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영국인들 입장에서는 마이클 콜린스와 IRA가 당연히 싫고 그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도 이해가 돼요.
최원정: IRA를 이끈 아일랜드 독립운동가 마이클 콜린스 이야기를 좀 해 봤는데~ IRA 의용군이 이끌었던 부활절 봉기가 실패한 이후에 더욱 영국군과 대항하기 위해서 어떤 전략들을 세웠을까요?
이광용: 마이클 콜린스가 이끄는 아일랜드 공화국군 IRA가 최신 무기로 무장한 세계 최강의 영국군을 상대하기 위해 사활을 걸었던 전략이 바로 게릴라 전이었습니다. 영국군 병력은 2만 명, IRA는 만5천명, 병력규모가 조금 차이가 났을 뿐만 아니라 영국은 왕립 아일랜드 보안대 라는 경찰병력에다 민병대, 보조부대 등도 함께 운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영국군+왕립 아일랜드 보안대+민병대+보조부대), 그래서 전면전을 벌이게 되면 IRA가 많이 불리한 상황이었죠. 게릴라 전술 최소의 병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누릴 수 있는 이 작전에 대해서 대테러 교관인 최영재 대위와 함께 알아 보겠습니다.
최영재/제707 특수임무단 예비역 대위/대테러 교관: 단결! 특전사 특수임무단 예비역 대위이자 대테러 교관으로 활동하고 있는 최영재입니다. 아일랜드의 IRA가 실제 작전 했던 그런 방식이 바로 게릴라전인데요. 게릴라란 말은 많이 들어 봤을텐데 기본적인 개념을 설명드리면 이렇게 특정 인물을 암살하거나 주요시설을 폭파 어떤 행사장이나 이런 데서 혼란을 가져올 수 있게 이렇게 보통 사람들이 공격을 하는 방식을 게릴라전이라고 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광용 아나를 만나면서~)~ 어우~ 영재 아냐? (평범하게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 우리가 찾는 목표가 저기 있네요. (허준을 향해) 그리고 나서 여기서 자연스럽게 (이광용 아나의 옆구리에 낀 신문 뭉치 속에서 권총을 발사), 빵!~ 그렇게 다가가면 총은 이제 여기 와 있는 거죠 (팔과 신문지에 완전히 가려진 총),
허준: 진짜 안보여요.
이광용: 이뿐만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 이런 중절모를 많이 썼을 것 아녜요.
최영재: 중절모를 많이 썼죠 (지령이 있다고 가정하고 겉 옷 안주머니에 총을 준비) 쓰고 있다 벗잖아요. 모자를 벗어서 경의를 표하는 척~ 하다 빵!
최영재: 모자 사이로~
허준: 이러면 아예 총이 안 보여요.
최태성: 위협을 하는 것 조차를 모르니까~
최영재; 이렇게 저격을 하는 사람들이 일반인을 포섭해서 작전하기 때문에 정말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광용: 다른 사람처럼 역할을 한다든지 연기를 한다든지 그런 것도 하지 않아요?
최영재: 굉장히 많이 하죠. 우리가 다른 적 지역에 들어가서 게릴라 활동이나 게릴라전을 할 때는 마을에 있는 사람들을 포섭을 하고 이 사람들과 친해서 친구가 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제가 이 역활을 할 수가 있고 식당 종업원이 될 수도 있고 물건을 파는 상인이 될 수도 있고 그러면서 첩보를 계속 획득하고 유사시에 지령을 받으면 가서 아까 그런 방식으로 사살이나 작전을 합니다.
이시원: 평소에 교관님은 뭘 팔아보시거나 해 보신 일이 있으세요?
최영재: 저는 수산물 시장에서 상인을 가장해 보고 배를 타보았어요. 어선이죠. 선원이 되어 가지고 첩보를 보고 알려주는 것이죠.
이광용: 그래도 생선을 잘 썰고 잘 팔고 물고기를 잘 잡아야 할텐데~
최영재: 잘 해야 되는 데 그게 안 되더라구요.
이광용: 그런데 문제는요, 역할을 잘 하는 것도 중요한데 걸렸을 때 혹은 작전이 끝났을 때 퇴각하는 게 더 중요하잖아요?
최영재: 그렇죠, 게릴라 전술중의 핵심이 도피 및 탈출입니다. 왜냐면 일단 그 한 명이 잡히게 되면 불게 되잖아요. 고문을 당할 수도 있고 그러면 모든 일이 작전 요원들이 줄줄이 연결이 돼서 발각이 되기 때문에 탈출하는 능력이 정말 뛰어나야 합니다.
이광용: 얼마를 이동을 한다구요?
최영재: 보통 30킬로미터를 하는데 경기도를 벗어나는 거죠.
허준: 수원 근처까지 가는 거예요.
최영재: 그리고 특전사는 하루에 최대 100킬로미터를 주파합니다.
이광용: 천안까지 간다는 거죠.
최영재: 그것도 군장이나 무기를 가진 완전군장 상태로 이동하죠.
이시원: 정말 들어보면 무시한 게릴라 작전인데 이걸 잘 피하는 방법도 알려 추실 수 없을까요?
최영재; 사실 피하는 방법보다 첩보가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누가 이런 걸 꾸미고 있는지 아니면 어떤 무기들이 이동하는지를 알려면 우선 첩보원을 수소문을 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쉽게 발각되고 찾기가 힘듭니다.
이광용: 그래서 당시에 IRA를 이끈 마이클 콜린스는 아일랜드 경찰 정보원을 이용해서 지하 정보망을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이 정보망을 활용해서 일명 12 사도라고 불리는 특수부대 The Squad 를 운영하게 됩니다. 12사도의 주임무는 영국의 사복경찰 그룹인 G-Div 소속의 정보요원, 일명 G-Men을 암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G-Men들이 당시에 방탄 조끼까지 지급을 받고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12사도들의 저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최영재: 그때 중요한 총기가 바로 마우저 C69 총입니다. (마우저 Mauser C96-1896~1937년에 독일무기 제조업체 마우저에서 생산한 자동권총), 이 총을 처칠도 사용했었고 우리나라의 유명한 독립군 총사령관인 홍범도 장군도 항상 착용하고 다녔습니다 (사진등장), 그래서 한국에서는 나무 개머리판 이라고 하는 긴 부분이 어깨에 장착을 하게 되면 반동을 잡아 줍니다. 내가 더 정확하게 사격을 할 수 있는 화기로 생산이 되었기 때문에 홍범도 장군도 여기 개머리판 안에 총을 넣어서 허리에 차고 다녔습니다.
이광용: 갑자기 총이 달리 보여요. 홍범도 장군이 사용했었던 총이래요.
최영재: 또한 마이클 콜린스는 아일랜드 전역에서 효과적인 독립전쟁을 치르기 위해 별동대라는 조직을 운영하였습니다. (별동대 (Flying column)-신속하게 이동 가능한 작고 독립적인 부대), 별동대는 주로 영국군과 경찰을 공격해 인명 피해를 발생시키고 적의 무기고를 습격하는 등 효과적인 급습작전에 주로 투입이 됐습니다. 국내 지형을 워낙 훤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리한 점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우리나라 의병과 비슷한 느낌),
최태성: 진짜 비슷하다.
김대륜: 더블린에서 25개의 별동대를 유지하거든요. 작전에 실패도 많이 해요. 워낙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니까 아일랜드 사람들이 봤을 때는 뭔가 일이 일어나고 있고 계속해서 싸우고 있다 라는 사기를 올려주는 효과가 있었겠죠.
최영재: 이광용 아나운서도 스쿼드 라고 얘기를 했잖아요. 실제로 영국 특수부대의 SAS의 가장 작은 조직의 이름이 스쿼드입니다. 스쿼드부터 시작된 이름이죠. IRA의 스쿼드에서 유래가 되었죠. 특히 IRA의 지도자였던 마이클 콜린스는 카리스마가 엄청났는데 대담하고 냉혹한 성품을 가진 일인자였기 때문에 직접 영국군 첩자나 비밀경찰을 색출하는데 적극적으로 본인이 직접 개입을 해서 처형도 하고 지시를 했죠. 영국군 前합참의장을 끝까지 직접 사살하기도 했습니다.
이광용: IRA는 또 1921년 5월에 영국 권력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었던 더블린의 세관을 점령해서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영국군의 사기를 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었는데요. 과연 IRA가 세계 최강 영국군과의 대결에서 끝내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지금까지 이광용~ 최영재~ 였습니다. 단결!
이시원: 어찌 보면 불리했던 병력과 화력을 게릴라전으로 극복을 한 건데 그럼 이제 드디어 750년 만에 제대로 된 독립을 이루게 되는 드라마가 펼쳐지는 건가요?
김대륜: IRA 처지에서는 굉장히 불행한 일이지만 그렇지가 못해요.
최태성: 자꾸 왜 안 된다고 그러세요, 지금 롤러코스트를 타는 느낌이예요.
허준: 거의 막장 드라마 보는 느낌이예요.
김대륜: IRA와 그 다음에 영국군이 1919~1922년 2년 반 동안 정말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죠. 고양이와 쥐처럼 서로 쫓아다니면서 영국 세관을 점령하고 불태우기도 하고 사기를 진작할 만한 전과를 올리기도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서는 영국군의 기세를 완전히 꺾을 수는 없었고 양쪽 다 힘이 빠져버리는 그런 결과가 벌어지게 된 것이죠.
허준: 결과적으로 게릴라 전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승리를 하기에는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걸보여준 것이기 때문에 게릴라 전을 통해 선전했다 요런 단어가 어울리거든요. 게다가 영국의 경우에 게릴라 전에 못견딜려면 물자보급이나 병력의 보충이 없어야 돼요. 그래야 못견디고 도망가게 되는 건데 그것도 사실 쉽지 않은 상황, 단단하게 버티고 있으면 게릴라전으로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는 힘들죠.
최태성: 아까 이야기했던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 사실 적은 병력으로 일본군과 맞서 싸울 때 (봉오동 전투(1920)-홍범도 장군의 독립군 부대가 만주 봉오동에서 최초로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 또 그 지형지물을 잘 활용하는 모습, 아주 비슷한 모습으로 흘러간 가잖아요. 근데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바로 독립이 이뤄진 건 아니잖아요. 다만 우리가 살아 있다. 우리 지금 여기 있다 싸우고 있다 이런 걸 보여주는 힘을 계속 불어넣어 주는 에너지는 되겠죠.
이시원: 우리 아직 죽지 않았다.
김대륜: 이 시기에 생각해 봐야 할 포인트가 뭐냐 하면 1921~22년이면 1차 대전이 끝난 직후이거든요. 그러면 모든 나라가 물자가 부족해요. 그래서 IRA도 물자 보급이 굉장히 어려워지고 영국군도 마찬가지로 동원할 수 있는 물자를 다 동원하더라도 오래 버티기에는 힘든 상황이예요. 근데 누가 더 오래 버틸 수 있냐 이건 다른 문제죠.
이시원: 둘 다 피 말리는 싸움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해설: 1921년 7월 11일, 영국이 뜻밖에 휴전 협정을 제안하면서 영국과 아일랜드의 1921.7.11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1월 양국은 조약을 체결한다. 영국의 지배 하에 아일랜드의 자치를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2년 반 동안 계속되었던 영국과 아일랜드의 독립전쟁이 끝나게 되는 순간, 하지만 이 조약은 아일랜드에게 또 다른 불씨를 남기게 된다. 당시 영국 국왕이 조지 5세입니다. 국왕이 영국군이 아일랜드 사람들을 너무 거칠게 다룬다 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실제로 자기의 연설에서 문제해결을 촉구를 하게 됩니다. “나는 모든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잠시 멈추고, 관용과 화해의 손을 내밀고, 용서와 망각을, 그리고 그들이 사랑하는 평화의 새 시대를 위해 함께 할 것을 호소합니다”—1921년 6월 22일 조지 5세의 연설,
그리고 그 당시 로이드 조지 정부의 반대편에 서있던 야당이 전쟁에 반대를 합니다. 심지어는 국제적으로도 압력이 들어옵니다. 교황이 개입을 합니다. 빨리 전쟁을 끝내고 평화협정을 해라 라고 요구를 하다 보니까 협상 테이블에 나서게 되는 것이죠.
최태성: 이 협상을 위해서 아일랜드 정부에서는 방금 봤던 마이클 콜린스와 아더 그리피스 두 사람이 참여했구요. 영국측에서는 그 당시 수상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와 당시 식민장관 윈스턴 처칠이 참가합니다. 엄청난 사람들이 회담에 참여한 거예요.
이시원: 어떻게 보면 마이클 콜린스는 정치 신인인 셈이잖아요. 근데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해서 처칠과 영국 정부를 맞닥들였을 때 그 긴장감을 어떻게 버텼을까요?
허준: 이럴 때는 동물적 감각으로 가야 돼요. 고슴도치 목도리 도마뱀~ 크게 보이게~
피터: 제가 일기로는 마이클 콜린스는 협상에 참여하기 싫어했다고 해요~ 왜냐면 신비주의 인물인데 가면은 그냥 사람이다 라는 그런 것도 있었다구 해요.
최원정: 만약에 이때 협상이 어긋나서 독립전쟁이 쭉 이어졌다면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시원: 식민지들이 다들 이제 독립을 하는 추세였잖아요. 그래서 결국에는 아일랜드도 자기들이 원하는 식의 독립을 적극 쟁취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피터: 영국도 세계의 눈치를 보게 된 싯점이었어요. 그래서 질질 끌지 말고 그냥 발을 빼는 거다.
김대륜: 그런데 강대강으로 계속해서 부딪쳤으면 아마 영국이 승리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요. 마이클 콜린스가 뭐라고 얘기 했냐면 전쟁이 1주일만 더 지속되었어도 우리가 졌을 것이다. 아일랜드로서는 거의 완전히 힘을 다 소진한 상태였기 때문에 조금만 더 전쟁이 지속되었다면 영국이 승리를 거둘 수도 있는 상황이었죠.
허준: 그런데 저는 약간 영국분들 중에 강경파들은 술자리에서~ 일주인만 더 싸웠으면 말이야~ 캬~ 우리가~
이시원: 그런데 이 당시에는 영국도 아일랜드도 그렇고 너무 쉽게 타협하는 거 아냐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국민들도 많았을 것 같애요.
김대륜: 아일랜드 사람들이 모두가 평화 협상에 찬성을 한 게 아니예요. 실제로 평화협상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냐 말아야 할 것이냐를 아일랜드 의회에 부치게 되는데 그 결과가 굉장히 근소하게 차이가 나요. 64대 57 이에요. 7표 차이로 아일랜드 자유국을 수립하는 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허준: 여지껏 우리가 아일랜드 편을 엄청 들었는데 독립을 원하지 않은 쪽이 거의 절반이네요.
이시원: 그러니까요,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렇게 근소한 차이라니 독립을 반대하는 사람도 꽤 있었다는 거잖아요.
김대륜: 조약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아일랜드와 영국의 협상으로 탄생한 나라는 아일랜드 자유국이라는 이름을 쓰게되고 명목상으로는 영연방의 일부예요. 아일랜드 의회의 의원들은 영국 국왕에 대해서 충성서약을 맹세해야 돼요. 영국 국왕에게 충성하겠다 라는 서약을 해야 되는데 문제는 뭐냐면 우리의 정서에서는 선서를 하거나 서약을 하는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이시원: 대충하죠.
허준: 학생회장 선서하고 선창에 따라 다 같이~
김대륜: 기독교 문화권 사람들에게 선서를 한다는 것은 성경에 대고 맹세를 한다는 의미예요. 이 선서를 깨게 되면 이건 神과의 약속을 어기는 일이기 때문에 심각한 죄를 짓는 일이죠. 그래서 국왕에게 충성을 해야 한다고~ 우리가 이제까지 왜 싸웠는데 라는 얘기가 되는 거죠. 우리는 독립된 완전히 독립된 공화국을 원했던 것인데 그걸 이루지 못하고 여전히 영국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되는 처지라면 우리는 이것을 받아 들일 수 없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 문제도 있구요. 얼스터를 중심으로 아일랜드에 있는 6개주에는 개신교도들이 많이 살고 그 개신교도들이 영국과의 인연을 끊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완전히 영국의 일부로 남아 있기를 원하고 이들이 또한 무장투쟁을 합니다. 그래서 평화조약을 맺을 때 조건이 뭐였느냐면 북부에 있는 6개주는 “아일랜드 자유국에서 탈퇴해서 영국의 일부로 남을 수 있다” 라는 것이었어요. 이게 심각한 갈등의 여지가 있는 문제로 남은 것이죠.
--------------영국의 오랜 식민지배와 독립전쟁 그리고 750년 만에 찾아온 평화. 하지만 영국-아일랜드 조약으로 북부 6개주를 제외한 채 탄생한 아일랜드 자유국, 불안전한 독립으로 민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된 아일랜드-----------------
이시원: 근데 너무 안타깝네요, 우여곡절 끝에 750년 만에 겨우 겨우 독립을 했더니 이건 사이다를 콱 들이킨 게 아니라 찔끔 먹다만 느낌~
최태성: 마이클 콜린스가 독립운동가잖아요. 열심히 싸웠잖아요. 어쨌거나 영국과 협상이 체결되는데 들어갔어요. 이렇게 되면서 마이클 콜린스는 독립의 영웅이면서 동시에 민족의 분열에 장본인으로 민족의 배신자가 된 거예요.
김대륜: 마이클 콜린스 같은 사람은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아~ 좋다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나는 충분히 그걸 알고 나 역시 그걸 원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완벽한 자유를 얻기 위한 자유를 얻은 셈이다” 라고 얘기를 해요. 그러니까 이게 다가 아니고 이게 끝이 아니고 이게 새로운 출발이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설득을 할려고 해요.
이시원: 뭔가 점진적이네요,
김대륜: 그런데 조약체결에 반대했던 사람들이 그러한 설득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마이클 콜린스 자신은 이런 반대하는 사람들 설득하러 갔다가 결국에 암살(31살)을 당합니다. 암살을 했던 인물들이 누구냐 하면 (마이클 콜린스 장례식-당시 아일랜드 국민의 1/5이 장례식에 참석하며 애도), 마이클 콜린스가 이끌었던 IRA의 사람들 이예요. 굉장히 비극적인 일이죠.
최원정: 자기가 키운 자식 손에 죽은 그런 꼴이네요.
김대륜: 그래서 1922년 부터 23년 까지 아일랜드에서는 내전이 일어나는 거예요. 조약을 찬성하는 측과 그 사람들이 정부를 구성했기 때문에 정부군이 되고, 조약체결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반대파가 되어서 무장투쟁을 하는데 아일랜드 내전으로 정부군은 800명 이상 죽음을 당하고 반대파는 약400명이 죽고 약 1만2천명 정도가 투옥이 돼요. 그 반대파에게 정부군이 행하는 고문이나 처형하는 일들이 영국군이 아일랜드에게 저질렀던 일(만행)과 똑 같아요. 그래서 굉장히 아이러니 하고 가슴 아픈 일이죠.
최원정: 정말 뭔가 데칼코마니 처럼 독립-내전-분단이 된 거잖아요. 아일랜드 역사에서 자꾸 우리나라의 모습이 보이죠.
최태성: 우리나라의 영화에 “태극기 휘날리며” 라는 영화 있잖아요. (태극기 휘날리며(2004년)-1950년 한국전쟁에 휘말린 형제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동족상잔의 아픔, 인민군에 소속된 형과 국군에 소속된 동생이 같은 전쟁에서 만나가지고 서로 부등켜 않으면서 우는 모습이 너무 가슴 아팟잖아요. 근데 비슷한 이야기가 아일랜드에서도 영화로 있어요. 보리 밭을 흔드는 바람 (2006년), 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 아일랜드판 <태극기 휘날리며> 영국 아일랜드 평화조약 협정 이후 이념에 따라 갈라진 형제, 결국은 형에 의해 죽음에 이르게 되는 동생~ 노선이 다르다 보니까~
허준: 동생이 마이클 콜린스 쪽이네요,
최태성: 그렇게 된 셈이죠, 그래서 가슴 아픈 영화도 있더라구요.
최원정: 750년 만에 아일랜드가 독립을 했지만 그 이면의 아픈 역사를 들여다 보는데 저희로서는 편치가 않았네요.
이시원: 참 모든 게 다 같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일궈지면 좋겠지만 사람 사는게 다 그렇게 되진 않잖아요. 때론 나와 다른 사람들과 조율해야 할 때가 진짜 많을 것 같애요. 근데 진짜 중요한 것은 통합을 위해서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인식이 있어야 될 것 같애요. 여기에서도 어떻게 보면 같은 걸 추구했는데 내가 원하는 나의 방식으로 되지 않았다고 서로 죽이고 싸우고 하는 분쟁이 계속 된 거잖아요. 그것보다 진짜 내가 원했던 게 뭔가 서로 의견이 달랐을 때 그걸 어떤 식으로 봉합해야 되는가 지금에서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애요.
피터: 아버지가 영국 군인이었기 때문에 IRA 말 꺼내면 너무 싫어했고 자기 친구를 잃었어요. 근데 학교에서 잘 안 배웠고 성인이 돼서 이런 일들을 알았고 영국 사람들이 많은 죄를 저질렀고 반성하게 되고 그런데 또 한쪽으로 영국만 빠져서 해결이 되는 게 아니고 같은 민족끼리 같은 싸움을 계속해서 하니까 부담스럽고 역사는 알아야 될 것 같애요.
김대륜: 역사를 보면 제국이 식민지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식민지에서 내전이 발생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거든요. 이 얘기는 다른 말로 바꾸면 식민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자기들이 꿈꾸는 나라에 대해서 당연히 여러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을 테구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타협을 통해서 어떤 그림을 만들어낼 만한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독립이 찾아오는 경우가 많죠. 그러다 보니까 이념갈등이 격화가 되고 그러면서 내전으로 치달으는 이런 역사를 우리는 한국전쟁을 통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 만이 그런 고통을 겪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 일들이 너무나 빈번하게 벌어졌다. 단지 독립이 왔는데 여전히 다투고 있네? 왜 다툴 수 밖에 없는 가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원정: 독립 이후 복잡한 문제와 갈등은 계속 이어지는데요. 아일랜드 자유국 선포 100주년 기획 마지막 시간에 같이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362회 아일랜드 자유국 선포 100주년 기획 ② 끝나지 않은 독립의 길 에서 정리).
① 19세기말, 전세계 영토 4분의 1을 차지하며 세계 제국을 건설했던 영국, 그리고 아일랜드는 750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는 가장 가까운 국가였다. 750년 동안 이어진 영국의 잔인한 억압과 수탈, 감자역병으로 인한 대기근, 수차례 혁명을 일으켰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1916년 4월 더블린에서 일으킨 봉기는 식민지 아일랜드의 미래를 완전히 바꿔놓는다. 영국 크롬웰에게 학살당했던 모습, 대기근으로 인구의 100만명 명 이상이 굶어 죽어나갔던 모습,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이민을 갔던 모습, 이렇게 아픈 역사가 있을까!
② 1914~1918년 1차 세계대전 기간, 1916년에 더블린 봉기가 시작됐다. 부활절이고 쉬는 날이다. 타이밍은 잘 잡았다. 추측을 해보면 1916년 2월에 영국정부가 아일랜드 자치법 시행을 연기한다. (아일랜드 자치법-아일랜드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1886년부터 세차례 부결되고 1914년에 통과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다시 연기), 영국은 첫번째 연기에 이어, 두번째 연기를 하였다. 이때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고 그 직후가 부활절이었다. 문제는 1차 세계 대전으로 다른 모든 잇슈들이 전쟁에 묻혀버리게 되어 그래서 1916년에 또 미루게 되었다.
③ 부활절 봉기를 일으켰던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 1200명 정도, 영국이 16000명 병력을 동원 강력하게 대응한다. 영국은 최신 무기로 무장하였다 정찰 선박을 풀어서 아일랜드 주변을 정찰하고 가두어 놓았다. 아일랜드는 영국을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아일랜드 의용군은 더블린 중앙우체국을 사령부로 삼고 중요한 거점들을 장악 용맹하게 싸움을 벌였다. 영국군이 잔인하게 진압, 무차별적 총격으로 무고한 민간인들 370명이 죽었다. 재산 피해도 엄청났다. 나중에 영국이 보상금으로 180만 파운드를 보상했다. 지금의 인플레이션을 감안해서 약 2700억원 정도 돈이다.
④ 아일랜드 사람들, 처음에 아일랜드 의용군이 쓸데 없는 봉기를 일으켜서 우리한테 피해를 입혔다. 이들에게 야유를 보낸다거나 돌팔매질을 한다거나 적대감을 드러냈다. 체포된 사람만 3500명, 그중에 1400명 투옥, 90명 정도 사형선고, 14명의 의용군 지도자를 참혹하게 사살, 죽여 놓고 나니까 밝혀진 것은 무기를 전혀 들지 않았거나 봉기 현장에 없었던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여론이 급격하게 악화, 오히려 의용군에 동조하기 시작하고 이들을 지지하기 시작하자 의용군이 힘을 얻고 그 과정이 누적되면서 결국에는 독립까지 이르게 되는 스토리가 나오게 되었다.
⑤ 1916년 부활절 봉기는 실패로 끝났지만 1919년부터 독립전쟁이 본격적 시작이 되었다. 그 중심에 마이클 콜린스 (1890~1922)가 있었다. 지금도 아일랜드인들의 삶 속에서 그를 만나볼 수 있다. Michael Collins 브랜드 술병, 영화 마이클 콜린스, 다큐, 드라마, 연극까지 마이클 콜린스는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인물로 자리잡고 있다. 마이클 콜린스는 부활절 봉기 이후에 투옥이 되었다가 풀려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의용군 활동을 시작한다. 아일랜드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사람들을 설득하였다. 여론이 그를 동조하도록 변했고 아일랜드 언론, 아일랜드 대중이 그를 추앙하기 시작하였다. 아일랜드 공화국군 Irish Republican Army (IRA)이 생겨났다.
⑥ 1916년 부활절 봉기가 실패한 이후에 마이클 콜린스는 게릴라 전으로 전략을 바꾼다. 게릴라전은 최소의 병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누리는 작전이다. 마이클 콜린스는 아일랜드 경찰 정보원을 이용 지하 정보망을 구축했다. 이 정보망을 활용해서 일명 12 사도라고 불리는 특수부대 The Squad 를 운영하였다. 12사도의 주임무는 영국의 사복경찰 그룹인 G-Div 소속의 정보요원, 일명 G-Men을 암살하는 것, 이 G-Men들이 당시에 방탄 조끼까지 지급을 받고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12사도들의 저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마이클 콜린스는 아일랜드 전역에서 효과적인 독립전쟁을 치르기 위해 별동대라는 조직을 운영하였다. 별동대는 주로 영국군과 경찰을 공격해 인명 피해를 발생시키고 적의 무기고를 습격하는 등 효과적인 급습작전에 주로 투입이 됐다. 국내 지형을 워낙 훤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리한 점이 굉장히 많았다. IRA의 지도자였던 마이클 콜린스는 카리스마가 엄청났다. 직접 영국군 첩자나 비밀경찰을 색출하는데 적극적으로 본인이 직접 개입을 해서 처형도 하고 지시를 했다. 영국군 前합참의장을 끝까지 직접 사살하기도 했다.
⑦ IRA와 영국군은 1919~1922년 2년 반 동안 치열하게 싸웠다. 고양이와 쥐처럼, 영국 세관을 점령하고 불태우기도 하고 사기를 진작할 만한 전과를 올리기도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서는 영국군의 기세를 완전히 꺾을 수는 없었다. 이 시기에 1921~22년이면 1차 대전이 끝난 직후다. 모든 나라가 물자가 부족하다. IRA도 물자 보급이 굉장히 어려워지고 영국군도 마찬가지로 동원할 수 있는 물자를 다 동원하더라도 오래 버티기에는 힘든 상황이다. 1921년 7월 11일, 영국이 뜻밖에 휴전 협정을 제안하면서 영국과 아일랜드의 1921.7.11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1월 양국은 조약을 체결한다.
⑧ 영국의 지배 하에 아일랜드의 자치를 인정한다는 내용, 2년 반 동안 계속되었던 영국과 아일랜드의 독립전쟁이 끝나게 되는 순간, 하지만 이 조약은 아일랜드에게 또 다른 불씨를 남기게 된다. 당시 영국 국왕이 조지 5세가 문제해결을 촉구를 한다. 야당도 전쟁에 반대한다. 국제적으로도 교황이 개입한다. 협상 테이블에 아일랜드 정부에서 마이클 콜린스와 아더 그리피스가 참여했다. 영국측에서 수상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와 식민장관 윈스턴 처칠이 참가한다. 마이클 콜린스는 전쟁이 1주일만 더 지속되었어도 우리가 졌을 것이다라고, 아일랜드는 힘을 다 소진한 상태였다.
⑨ 실제로 평화협상을 아일랜드 의회에 부쳤는데 그 결과 64대 57~ 7표 차이로 아일랜드 자유국을 수립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조약의 내용은, 아일랜드와 영국의 협상으로 탄생한 나라는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영연방의 일부다. 아일랜드 의회의 의원들은 영국 국왕에 대해서 충성서약을 맹세해야 된다. 문제는 국왕에게 충성을 해야 한다고~ 우리가 이제까지 왜 싸웠는데, 우리는 완전히 독립된 공화국을 원했던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받아 들일 수 없다
⑩ 평화조약을 맺을 때 북부에 있는 6개주는 “아일랜드 자유국에서 탈퇴해서 영국의 일부로 남을 수 있다” 이게 갈등의 문제로 남은 것이다. 영국의 오랜 식민지배와 독립전쟁 그리고 750년 만에 찾아온 평화. 하지만 영국-아일랜드 조약으로 북부 6개주를 제외한 채 탄생한 아일랜드 자유국의 불안전한 독립으로 민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750년 만에 겨우 겨우 독립을 했는데 불완전하다. 마이클 콜린스는 독립운동가로 열심히 싸웠다. 영국과 협상에 참가했다. 이렇게 되면서 마이클 콜린스는 독립의 영웅이면서 동시에 민족분열의 배신자가 되었다.
⑪ 마이클 콜린스는 “좋다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나는 충분히 그걸 알고 나 역시 그걸 원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완벽한 자유를 얻기 위한 자유를 얻은 셈이다” 라고 얘기를 한다. 그러니까 이게 다가 아니고 이게 끝이 아니고 이게 새로운 출발이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설득을 하였다. 그러나 조약체결에 반대했던 사람들이 그러한 설득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마이클 콜린스 자신은 반대하는 사람들 설득하러 갔다가 암살을 당하였다(31살). 암살을 했던 인물들이 마이클 콜린스가 이끌었던 IRA의 사람들이다. 굉장히 비극적인 일이다.
⑫ 1922~23년 까지 아일랜드에서는 내전이 일어난다. 조약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정부군이 되고,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반대파가 되었다. 정부군은 800명 이상 죽었고 반대파는 약400명이 죽고 약 1만2천명이 투옥이 됐다. 정부군이 반대파에게 행하는 고문이나 처형이 영국군이 아일랜드인에게 저질렀던 만행과 똑같았다. 매우 아이러니하고 가슴 아프다. 아일랜드 역사에서 자꾸 우리나라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아일랜드판 <태극기 휘날리며> 보리 밭을 흔드는 바람 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2006년). 평화조약 협정 이후 이념에 따라 갈라진 형제, 형에 의해 죽음에 이르는 동생~동생이 마이클 콜린스쪽이다.
⑬ 역사를 보면 제국이 식민지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식민지에서 내전이 발생한다. 식민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자기들이 꿈꾸는 나라에 대해서 당연히 여러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대화를 하고 타협을 통해 어떤 그림을 만들어낼 만한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독립이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까 이념갈등이 격화가 되고 내전으로 치닫았던 역사를 한국전쟁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그런 고통을 우리 만이 겪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 일들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독립이 왔는데 여전히 다투고 있네? 왜 다툴 수 밖에 없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