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인듯 가을 아닌 가을 같은......(秋來不似秋)
강성희(리디아)
‘대추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노천명 시인의 장날이라는 시의 첫 구절이 전설처럼 아련하다. 시인은 추석을 앞두고 열하룻장에서 대추,밤으로 돈을 샀다고 했었다. 대추 밤을 팔아서 돈을 번 것이지 어떻게 돈을 산다고 할 수 있느냐고, 열네 살의 무디고 어린 정서는 그 예쁜 우리말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내가 어렸을 때 사흘 후가 추석이면 지금쯤은 아이들은 알 수 없는 달뜸에 발을 땅에 딛지 않고 있는 것처럼 몸이 가벼웠었다. 아이들은 추석빔의 기대와 넘쳐나는 맛있는 음식과 친척들을 만날 기대로 마음이 구름 위를 나는 듯 행복했다. 그에 반해 어른들은 추석 준비의 도량으로 마음은 무겁고 몇 날 며칠 이어지는 명절 음식 준비에 몸은 고단하였을 것이라는 건 내가 어른이 되고 난 후에 알게 되었다.
지금이 음력으로 팔월 열이틀이다. 그럼에도 이 집의 주부는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예전 어른들 말씀의 표현을 빌자면 대목 중에서도 한참 대목인 팔월 열이틀 저녁에 몸과 마음이 이렇게 한가롭고 여유로워도 되는 일인가 ? 격세지감이기도 하거니와 스스로가 미안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다.
젊은 새댁 소리를 듣던 30대는 물론이고 몇 해 전만 해도 추석을 보내기 위해서 미리 장을 세 번 정도는 보았다.
집안 대소가의 어른들이나 조카들에게 줄 선물은 일주일도 전에 장을 보아 두었다. 건어물이나 과일처럼 상하지 않는 제수물을 사나흘 전에, 고기나 생선, 나물과 같이 신선도를 필요로 하는 식품들은 이틀 전에 장을 보아야 했다. 추석을 하루 앞둔 열 나흗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굽고 지지고 볶으며 집안에 고소한 기름 냄새를 피워 댔었다. 굽고 지져서 커다란 대나무 소반에 음식을 담아내면 굽기가 바쁘게 사라지고, ...... 그렇지만 내 식구, 내 자식 입에 들어가는 음식은 아깝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먹어 줄 사람이 없다. 멀리 사는 자식들은 추석 전 날 와서 저녁 한 끼 같이 맛있게 먹으면 다음 날 아침 차례 지내고 성묘를 마치면 또 자신들의 일터가 있는 도시로 바쁘게 돌아가야 한다. 어릴 때는 그렇게도 맛있게 먹던 명절 음식들도 지금은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열량이 높다며 잘 먹지 않는다. 그래서 작년부터는 명절 음식의 종류와 양을 모두 획기적으로 줄여 버렸다. 그랬더니 몸도 마음도 여유롭기는 한데, 여유가 지나쳐 허한 기분은 왜일까?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상을 차렸다는 옛 추석 명절 풍경은 내가 어려 세상 물정을 몰라 이해하기 힘들었다면, 추석 열나흗 날 오후에 와서 저녁 한 끼 함께 하고 추석 당일 오전만 지나면 자식들과 헤어져야 하는 지금의 명절 풍경은 이해는 가지만 이해하기가 싫다.
모기 입이 배뚤어진다는 처서도, 찬이슬이 내린다는 백로도 다 지났으니 절기상으로는 가을은 가을일텐데 가을이 가을 같지 않고 추석이 추석 같지가 않다. 추래불사추(秋來不似秋)라고 해야 하나?
올해의 추석은 양력 날짜로 유난히 일찍 들어 가을의 정취보다는 여름의 기운이 더 많이 남아 있어 그런지도 모르겠다. 가을의 문턱이라 하지만 아직 한 낮엔 잔 더위가 남아 덥다 덥다라는 소리가 나오고 에어컨이나 선풍기 바람을 찾는다. 하지만 저녁에는 제법 가을다운 산들바람도 불어들어 창을 닫고 이불을 끌어 덮는다. 우리가 덥다고 하는 사이에도 여름은 서서히 물러나고 가을이 오고 있긴 하나 보다.
한껏 달아 올라 세상을 태울 듯하던 맹더위도 불어오는 소슬바람 한 자락에 무위없이 자리를 비켜주는 모습이 순연하다. 떠날 때를 모르고 끝내 그 자리를 떨쳐 버리지 못하고 미련을 뜨는 우리 인간보다는, 요즘 한창 언론을 도배하고 있는 어떤 한 양반 보다는 비교할 바가 없이 자연은 지혜롭다는 생각을 한다.
달이 떴나? 베란다 창 너머로 목을 빼고 하늘을 올려다 본다. 옅은 구름 뒤로 상현에서 조금 더 부풀어 오른 달이 은은한 달무리를 거느리고 세상을 내려다 보고 있다.
열이틀 달이라고 해야 하나? 우리 조상들은 상현달과 보름달, 보름달과 하현달 사이의 달 이름을 왜 지어 주지 않았을까? 달을 보며 불러줄 이름이 없어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든다. 저 달이 남은 사흘 동안 열심히 몸피를 키워 한가위 밤이 되면 달을 사랑하는 세상 사람들의 기도를 다 품을 수 있을 만큼 크고 둥글고 아름답고 밝은 보름달이 될 것이다.
추석이 코 앞에 다가와도 설레지도 않고 전에 없이 심상하기만 한 것은 나이들어가는 내 세월 탓인게다.
추석같지 않은 추석이라 해도 한가위 보름달은 뜰 것이고, 고작 하루라고 하지만 그래도 내 사랑하는 가족들은 모일 것이니 내일 쯤은 추석장도 보고 한가위 대보름달 만날 준비를 해야겠다. 그러다 보면 예전처럼 조금은 설레이고 기다려지는 추석이 될 수도 있으려나. (끝) 2019.09.10
첫댓글 오늘도 한낮 더위가 추래불사추였습니다. 오랑캐 땅에 풀과 꽃이 없으니, 춘래불사춘이라 노래한 절세미인 왕소군 같이 나라꼴이 말이 아니니, 명절이와도 명절 기분이 느껴지지 않은 것 같군요. 그 옛 날 명절 분위기를 떠올리는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즐거운 명절 보내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기를 기원합니다.
달이 부풀어 오르듯 아직도 마음이 달뜸을 기대해 보는 추석맞이,
하지만 아무래도 옛날같지는 않아 서운하기도 합니다.
마음의 흐름이 글속에 강물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가을이 와도 가을이 잩지 않음은 자연보다는 세태의 변화에 더 무게가 실린 듯. 그래도 추석을 준비하는 작가의 글 속에서 가을의 청취가 풍겨 납니다. 추석은 가을의 문턱이니 지금부터 풍성한 가을 맞이 준비를.
팔월 열이틀에 통통해진 상현달을 보며 귀한 글 한편 건지신 것 같습니다. 늙어도 마음은 어릴적 그대로라는데.. 유독 명절을 맞는 저의 마음은 동심도 설렘도 잃어버린듯 합니다. 그래도 가족이 모일 수 있는 것은 큰 의미와 축복이겠지요. 잘 읽었습니다.
이번 추석은 너무 빨라서 아직도 여름의 끝자락 같습니다. 예전처럼 풍성한 음식을 장만하지는 않지만 명절때 가족들을 만난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어야 합니다. 바뀐 명절 풍속도에 대한 진솔한 표현이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저도 똑 같은 마음입니다.제사도 지내지 않고 몸도 옛날같지 않아 며느리 둘에게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다고 엄살을
부렸더니 가만히 계시라고 합니다 맞벌이하는 며느리들에게도 떠넘기가 싫어 바로전까지는 내가 거의 준비를 다했습니다. 하기 편하고 다 잘먹는거 한가지만 하고 김치만 담구고끝냈더니 둘째 며느리가 간단한 전구이를 준비해와 그래도 명절 기분은 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