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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溪集 해제 李相弼
書誌事項
Ⅰ. 書誌事項
이 문집은 表題가 『竹溪集』이고, 內題는 『竹溪先生文集』이며 版心題는 『竹溪先生集』이다. 저자는 安憙(1551-1613)이다. 서문은 1890년 3월에 晩醒 朴致馥(1824-1894)이 서술하였으며, 발문은 1890년 3월에 端磎 金麟燮(1827-1903)이 "後叙"라는 이름으로 서술하였다. 특이하게도 立齋 鄭宗魯(1738-1816)의 舊序가 端磎의 발문 앞에 위치해 있다. 1890년 5월에 후손 安璣魯과 安暾燮이 기록한 발문이 마지막에 있다. 4권 2책이며 木活字本이다.
서문과 목록이 각각 4장이며, 1·2·3·4권이 각각 27·21·22·34장이어서 문집의 전체 분량은 112장이 된다. 책의 크기는 가로 20.5cm 세로 29.7cm이고, 半廓의 크기는 가로 17.5cm 세로 22.5cm이며, 매면이 10행으로 되어 있고 매행은 20자가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匡廓의 四周는 굵은 단선으로 되어 있고, 行마다 경계선이 있다. 위쪽의 어미는 下向의 櫛紋魚尾와 黑魚尾가 섞이어 나타나며, 아래쪽의 어미는 內向의 二葉花紋으로 되어 있다. 1890년 5월에 咸安의 芧谷里에서 간행되었다.
編纂 및 刊行의 經緯
Ⅱ. 編纂 및 刊行의 經緯
『죽계집」의 편찬 경위는 다음에 보이는 후손 安璣燮의 발문을 통해 그 대략을 살펴볼 수 있다.
선생의 시문이 많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고러나 10代 300年의 세월이 지나면서 여러 차례 화재를 겪어 집안에서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다. 그런데 세상사람 가운데 忠義를 崇尙하고 德業을 思慕하며 문장을 사랑하는 이들이 (선생의 글을) 보배처럼 여겨서 갈무리해 두었으므로 차츰차츰 다시 나오게 되었다.
榮州의 李公 집에서 얻은 것은 임진왜란 당시에 지으신 것이며, 우리 고을 선진이신 澗松 趙先生이 지으신 『金羅傳信錄』에서 얻은 것은 (선생의 저술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또 김해의 新山書院에서도 얻었고 "東人詞賦"에서도 찾아내었으니 이 얼마나 神異한 일인가! 참으로 萬古토록 썩지 않을 좋은 문장이라 이를 만하리라. 그렇지 않다면 어찌 10대 30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流傳되어 泯滅되지 않았겠는가?
이밖에도 狀·碣·銘·贊과 簡札 등이 생각건대 응당 汗牛充棟이었으리라. 그러나 불초한 이 사람은 寡聞하고 식견이 부족하여 모두 찾아내지 못한 채 책을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이 점 더욱 개탄할 만하다.(주1: 安璣燮, 『竹溪集』跋. “先生詩文 不爲不多 而代傳十葉 歲過三百 累經鬱攸 不能守之于家而世之尙忠義慕德業愛文章者 珍而藏之 稍稍復出 其得之榮川李公家者 龍蛇亂離中所著也 其得之本鄕先進澗松趙先生金羅傳信錄者 最其尤者也 又得之于金官之新山書院 又搜出于東人詞賦中 其亦神矣也哉 眞可謂亘萬古不朽底好文章也 不然 何其世十代年三百而流傳不泯若是之久乎 其餘狀碣銘曁赫蹄 想應棟牛 而不肖寡陋 未克盡搜 而付諸剞劂氏 尤可慨也.”)
이 글에 의하면 1890년 간행할 당시에 죽계의 후손 집에서는 죽계의 유고가 전혀 보존되어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 문집에 실린 모든 작품은 다른 신빙할 만한 자료에서 발췌해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주된 자료가 榮州에 사는 李公의 집에서 소장하던 것과 『金羅傳信錄』 및 新山書院 자료와 이른바 "東人詞賦" 등이다.
『죽계집』 부록에 실려 있는, 屹峯 李贇望이 갑자년에 쓴 遺稿後識에 의하면, 기미년에 죽계의 후손 安應瑞와 함께 順興에 들렀다가 榮州에 사는 李載翊의 집에 갈무리된 임진왜란 때의 죽계의 유고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위 인용문의 "영주의 이공 집"이 바로 이를 언급한 것일 터이다. 그러나 『죽계집』 가운데 어떤 작품이 구체적으로 영주에서 발견된 것인지자세하지는 않다. 다만 임진왜란 때의 작품이라고 하니, 제목으로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간송 조임도가 편찬한 『金羅傳信錄』 下冊의 목록에 "大丘府使安公遺稿"라 되어 있고, 본문 107장부터 123장에 걸쳐 칠언절구 「五賢從祀後有感」 1편과 「過晉陽城憶金鶴峯賦」·「鵠不浴而白賦」·「次空中樓閣賦」·「六十化賦」·「設壇拜將賦」·「天馬老能行賦」·「大會孟津賦」·「學而優則仕賦」·「葬刻鮑信形賦」·「進學在致知賦」등 10편의 부 작품과「王若曰建官策」 1편이 실려 있다.
신산서원에 소장된 자료에서 발췌한 것은 「新山書院重建通文」인 듯하나, 그밖에 동인사부와 각종 자료에서 발췌한 것은 지금 그 출전을 일일이 밝히기 어렵다. 그러나 이상에서 본 몇몇 자료를 통하여 드러났듯이, 죽계의 후손 집에 대대로 家藏된 手稿는 아니지만 세상에 크게 알려져 남아 전하는 것이므로 그 의의는 더욱 크다 할 것이다.
문집 끝 부분에 "聖上二十七年庚寅五月日 新印又咸安芧谷"이라는 刊記가 있으므로 이 책이 고종 27년 庚寅(서기 1890년) 5월에 咸安의 芧谷里에서 처음으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竹溪 安憙의 生涯
Ⅲ. 竹溪 安憙의 生涯
죽계는 1551년 함안의 모곡리에서 태어나 1613년 대구부사로 재직 중에 일생을 마쳤던 인물이다. 『죽계집』 부록에 실린 연보와 행장 등을 중심으로 생애를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죽계가 태어난 함안 인근에는 당대에 남명의 문인 또는 재전 문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남명의 문인으로는 松岩 朴齊賢(1521-1575)·篁谷 李偁(1535-1600)·篁喦 朴齊仁(1536-1618)·大笑軒 趙宗道(1537-1597)·竹牑 吳澐(1540-1617)·芧村 李瀞(1541-1613) 등이 있었으니 이들은 모두 죽계의 선배이다. 남명의 재전문인으로는 洛厓 吳汝檼(1561-1633)·匡西 朴震英(1569-1641)·道谷 安侹(1574-1636)·澗松 趙任道(1585-1664) 등이 있었으니 이들은 모두 죽계의 후배이다. 죽계가 태어나서 자란 모곡리 인근의 이와 같은 학문적 분위기는 그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남명의 학문에 접할 수 있게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죽계는 26세 때인 1576년에 진사에 입격하였는데, 당시에 그는 金海에 거주하고 있었고 이후에 金海의 士林으로 활동한 흔적이 많이 보인다. 1585년 그의 나이 35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宦路에 나가 있으면서도,
1588년에 산해정 근처에 남명을 향사하기 위한 신산서원을 창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주2: 新山書院의 創建에 대하여, 『古文書集成』26권 『德川書院誌』에는 戊寅年(서기 1578년)에 金海府使 河晉寶와 慶尙監司 尹根壽가 주도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된 기록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慶尙道先生案』에 의하면 윤근수(1537-1616)는 1574년-1575년에 경상감사를 역임한 것으로 되어 있고, 『慶尙南道輿地集成』「金海府 宦蹟」條에 의하면 하진보(1530-1585)는 명종조에 김해부사를 역임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산서원의 창건에 대한 가장 신빙할 만한 근거 기록은 慕亭 裵大維(1563-1632)가 撰한 「新山書院記」이다. 지금 신산서원에 걸려 있는 이 기문에 “戊子鄕人請建書院方伯尹根壽邑宰河晉寶 議以克合 卜基于亭之東麓下 安正字憙尸其事”라 되어 있다. 이 현판에 ‘尹根壽’·‘河晉寶’가 ‘方伯’·‘邑宰’와 같은 크기의 글씨로 되어 있는 것은 1705년에 이 기문의 글씨를 쓴 四友堂 曹爾樞(1661-1707)의 착각으로 보인다. 이 착각은 金海 士林 許景胤(1573-1646)의 『竹庵集』所載 「名堂齋總說」에 보이는 “歲萬曆戊子 方伯月汀尹相國根壽 知府河侯晉寶可其鄕人之請 卜基於亭之東麓下 數弓之地 董其事者 安竹溪憙也”라는 기록을 신빙한 데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허경윤이 어떻게 해서 이런 기록을 남기게 되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1908년에 간행된 『모정집』에는 ‘윤근수·하진보’가 각각 ‘방백·읍재’ 아래에 작은 글씨로 쓰여져 있다. 이는 ‘윤근수·하진보’이 모정의 원래 기문에 없던 글, 즉 주석이란 증거이다. 이 주석을 두고 ‘조선시대의 諱法’ 운운하는 이가 있으나, 이는 『孟子』의 이른바 “諱名不諱姓”을 이해하지 못한 所致로 보인다.)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그의 나이 42세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김해에서 창의하여 창원으로의 적로를 차단하였고 다음해 계사년에는 400여 명의 병졸들을 수습하여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아버지의 유명에 따라 관향인 풍기로 거처를 옳겼다.
1599년 그의 나이 49세 때 호조정랑에 임명되면서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형조정랑·이천부사·부사직·부사과·장단부사·단양군수를 거쳐 1608년에는 김해의 옛터로 돌아가서 살았다. 이 해에 자신의 발의로 신산서원의 중건이 시작되어 1610년에 완공될 수 있었다.
이 해 7월에 대구부사로 부임하여 1613년 대구의 관아에서 일생을 마쳤다. 대구부사로 있으면서 1610년 9월에는 신산서원에 위패를 봉안하는 일을 주도하고 1611년 2월에도 신산서원을 찾는 등 김해 사림으로서 적극적으로 남명의 정신을 계승하려 하였다.
『竹溪集』의 構成과 內容
Ⅳ. 『竹溪集』의 構成과 內容
1. 『죽계집』의 구성
『죽계집』은 4권 2책으로 되어 있는 바, 庚寅年(서기 1890년) 3월 晩醒 朴致馥(1824-1894) 所撰 서문을 포함하여 1권과 2권이 上冊으로 되어 있고, 3권과 4권이 下冊으로 되어 있다. 1권은 詩·辭·賦·策 , 2권은 記, 3권은 序·說·雜著이며 4권은 附錄이다.
1권에 수록된 시는 오언율시가 3편, 칠언절구가 4편, 칠언율시가 5편이며, 사는 2편, 부는 14편, 책은 1편이다. 2권에는 기만 6편 수록되어 있다. 3권에는 서 3편, 설 1편, 잡저 7편이 수록되어 있다. 4권 부록에는 年譜·生進榜目·文科別試榜目·恩典·家狀·行狀·
墓碣銘·唱酬·挽章·敍述·杜陵書院記事·太學通文·奉安文·常享祝·舊序·後叙·跋이 실려 있다.
그러고 보면 『죽계집』에는 書·行狀·墓碣·祭文·挽詩 등이 한 편도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뛰어난 문장력이나 김해 지역 유림을 대표하였다는 점에서 판단해 보더라도, 평소에 그가 이런 종류의 글을 한편도 남기지 않아서 지금 한 편도 전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죽계와 교제했던 여러 사람들의 문집이나 사우록을 좀더 면밀히 조사해 본다면 죽계의 작품이 여기서 그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 『竹溪集』의 主要 內容
간송 조임도가 『금라전신록』에 실어서 전한 죽계의 여러 작품들은 아마도 그의 문학성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 상응하는 작품만 실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여기에 실린 작품들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진다면 그의 문학적 역량을 재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죽계의 생애 가운데 임진왜란 때 계사년에서의 진주성 함락 이후 풍기에서 살 때가 가장 곤란을 겪었을 때인 것으로 보인다. 『죽계집』에 수록된 이 때의 글 가운데 「或問」이란 글이 당시 죽계의 심정을 잘 드러내준다.
竹溪子가 나그네가 된 뒤부터 우러러보고도 웃고 굽어보고도 웃고 앉아서도 웃고 누워서도 웃고 빈객을 마주하고서도 문득 웃곤 하였다. 或者가 이상하게 여기어 물었다. "그대는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門戶를 잃은 사람이 아닙니까? 군자는 웃을 때가 되어야 웃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대는 웃을 때가 아닌데도 웃습니다. 또한 天地를 대상으로 웃을 수는 없는 일이거늘 그대는 천지를 향하여 웃으며, 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에도 신명이 있는 법이거늘 그대는 앉아서도 웃고 누워서도 웃으며, 오래도록 공경할 사람이 賓客이거늘 그대는 빈객을 향해서도 웃으니, 그대의 웃음은 慢忽한 것입니다."
죽계자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언제 웃기를 좋아하였다고 그대는 나를 웃는다고 합니가?" 혹자가 말하였다. "그대는 웃으면서도 스스로 모르고 있으니 미치광이에 가깝지 않습니까?" 죽계자가 또 웃으면서 말하였다. "남들은 모두 저를 미쳤다고 하지만, 저는 스스로 미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혹자가 말하기를, "그러면 어리석은 것이지요" 죽계자가 눈을 빤히 뜨고 바라보다가 다시 웃으며 말하였다. "王椽은 어리석지 않았습니다" 혹자가 답답해하며 말하였다. "그대는 미쳤음에도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고, 어리석음에도 스스로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난세에 처하여 큰일을 만나고도 오직 웃기만 좋아하니, 나는 다시 그대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죽계자는 그래도 웃으면서 대꾸하지 않았다. 혹자가 떠나겠다고 하니, 죽계자가 비로소 劔을 어루만지며 길이 탄식하고 말하였다. "그대는 앞으로 와 보시오. 다들 즐겁고 한 사나이만 괴로워도 그는 한쪽 구석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거늘, 천하에 어찌 나라가 부서지고 집이 망하고도 웃는 자가 있겠습니까? 그대는 듣지 못했습니까?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음을 내가 우러러보고 웃은 것은 우러러보고 운 것이요, 굽어보고 웃은 것은 굽어보고 운 것입니다. 앉아서 웃은 것은 앉아 있을 때도 운 것이요, 누워서도 웃은 것은 누워 있을 때도 운 것입니다. 빈객을 마주하고 웃은 것은 빈객을 마주하고도 운 것입니다‥‥‥‥”(주3: 安憙, 「或問」, 『竹溪集』3卷 17-18張. “竹溪子爲客 仰而笑 俯而笑 坐而笑 臥而笑 對賓客輒笑 或怪而問曰 子非遭亂世失門戶者耶 吾聞君子時然後笑 子之笑 非其時也 且天地不可笑 而子笑之 坐臥有神明 而子笑之 久而敬者賓客 而子笑之 子之笑慢矣 竹溪子笑曰 余豈好笑 而子以我爲笑乎 或曰 子笑而不自知 無乃近於狂歟 竹溪子又笑曰 人皆以生爲狂 生自以爲非狂 或曰然則愚矣 竹溪子瞪目 又笑曰 王椽不癡 或懣曰 子狂而不自狂 愚而不自愚處亂世 遭大故 而惟笑是好 吾不復與子言矣 竹溪子笑而不答 或告去 竹溪子始撫劒長歎曰 子來前 一夫有悶 尙有向隅之泣 天下安有國破家亡而笑者乎 子不聞乎 欲哭不可 則吾之仰 而笑者 仰而哭也 俯而笑者 俯而哭也 笑於坐者 坐亦哭也 笑於臥者 臥亦哭也 對客而笑者 對亦哭也.”)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죽계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김해에서 창의하여 활동하였고 계사년에는 400여명을 이끌고 진주성에 들어갔으나 진주성이 함락되는 비참한 광경을 목도하였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貫鄕인 豊基의 順興으로 돌아갔으나 거의 미친 사람 같이 생활하였던 것이고, 이 기록은 그의 이러한 정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할 만하다.
『죽계집』의 내용 가운데 소개할 만한 또 한 가지 중요한 기록은 신산서원에 관한 기록이다. 그는 邑宰와 方伯을 찾아가 신산서원의 창건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여 그 일을 주도하였으며, 왜란으로 불탄 뒤 중건하는 일 또한 그가 주도하였던 것이다. 다음의 통문이 그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天心이 재앙을 내린 것을 뉘우침에 文運이 도리어 형통하게 되었습니다. 兵火로 불탄 祠宇는 곳곳마다 새로 세워졌건만, 山海의 한 서원만 아직 중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루하고 야만스러움을 면하기 어려우니, 부끄러움이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 아아, 우리 벗들이 비록 궁핍하더라도 남보다 백배로 노력한다면 지극한 정성 아래 이루지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한 사나이 愚公도 산을 옮기고자 하였으니, 우리 사우들은 모두 스스로 한계를 긋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향교에서부터 이 글을 먼저 都約正에게 알리고 面約正과 鄕中의 여러 鄕員들에게 알려서, 다음 달 초엿새에 만사를 제쳐두고 모두 향교에 모입시다. 먼저 府使에게 아뢰어 有司를 나누어 정하고, 事由를 갖추어 (결) 先生께 仰稟한 뒤에 이를 方伯에게도 아뢰고 우리 고을에서도 계책을 마련합시다. 그리하여 작은 노력의 부족 때문에 일이 성사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하지 않는다면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주4: 安憙, 『新山書院重建通文(戊申)』, 『竹溪集』3卷 11-13張. “天心悔禍 文運還亨 兵燹祠宇在在皆新 山海一院 尙未重修 難免鄙夷 愧孰加焉‥‥‥噫我友雖窮 人百其力 則至誠之下無事不成 一夫愚公 且欲移山 凡我士友 不可自畫 自校中將此文 先通于都約正 面約正曁鄕中諸員 於開月初六日 除萬故齊會于校中 先達明府 分定有司 具由仰稟於(缺)先生 而後告諸方伯 謀語吾熏 庶不至於虧簣 不勝幸甚.”)
이 글 한 편으로 그가 남명을 얼마나 존숭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고, 신산서원의 중건을 위해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전쟁이 지나고 난 뒤의 극히 어려운 상황 아래에서 모든 향원이 총동원하여 이 일에 동참하려 했던 점도 아울러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사유를 갖추어 (결) 선생께 앙품한 뒤에"라는 기록에 담겨 있는 의미를 유추해 봄 또한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기 위해 필요하다 할 것이다.
결락된 부분에 들어갈 말은 "來庵"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주지하고 있듯이 광해군 집정 시기에서의 내암의 영향력은 조야를 막론하고 막강하였던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죽계가 광해군 즉위 직후 대구부사에 임명되었던 것이나 남명을 존모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일 등은 그와 내암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감지케 한다. 더구나 죽계가 寒岡의 門人錄에도 收單되어 있지 않은 데다, 한강의 문인으로서 만년에 한강을 깎듯이 모셨던 慕堂 孫處訥(1553-1634)의 『慕堂日記』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城主의 喪次에 들어가 보았다. 護喪의 用具는 모두 綵緞을 사용하였다. 비록 上大夫라 해도 이보다 더 낫지는 않을 것이라 한다. 해당 비용을 煙戶家에서 내도록 하여 거의 200필에 이른다. 병이 심각할 때 아들이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기를 권하자, "만약 관청에서 죽으면 治喪에 필요한 모든 도구를 다 쓸수 있다. 그런데 집에 돌아가면 네가 무슨 힘으로 처리하겠느냐?" 하였다. 지난 겨울부터 전혀 일을 보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면 상투적인 酬酌만 하며 일이 있으면 鄕所에 사양하여 거의 관청의 일을 비우다시피 하였다.(주5: 孫處訥, 『慕堂日記』癸丑年 3月 21日條. “入臨城主喪次 護喪之具 皆用綵段 雖上大夫 無以加此云 價出煙家 幾至二百疋 病時 渠子勸解歸 曰若死於官 治喪凡百 可盡其具 歸家 則汝何力以治之 自前冬專不視事 遇人 則例行酬酌 有事 則讓鄕所 幾於空官.”)
매우 악의적인 기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모당은 한강과 퇴계를 남달리 존모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1611년에 내암이 올린 「辭貳相箚」에 대하여 인근에서 모당이 가장 극렬하게 내암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가 자기 고을 부사였던 죽계를 유난히 악의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죽계가 내암의 문인이었다는 간접적 증거라 할 만하다.
위의 통문에서 결락된 부분이 "來庵"이라는 사실은, 德川書院·晦山書院(香川書院·龍巖書院)·新山書院의 창건과 중건에 내암이 직간접으로 주도 내지는 지휘하였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김해 지역 사림 가운데는 죽계가 가장 내암의 신임을 받았던 문인이었음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맺음말
Ⅴ. 맺음말
죽계는 남명 생존시에 태어났으나 남명을 사사하지는 못했다. 연보에는 여섯 살 때 할아버지에게 배웠다는 기록만 있을 뿐 師事에 대한 다른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35세 때 문과에 급제한 뒤 38세 때 신산서원의 창건을 주도하였던 점을 보면 이 무렵에는 이미 내암의 문인이 된 뒤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죽계와 같이 당대에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던 인물의 연보에 사승에 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의도적 삭제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당시 인물 가운데 의도적 삭제 대상 인물은 내암 정인흥이다.
죽계가 이처럼 내암 정인홍의 문인이였기에 남은 시문 가운데는 그와 관련된 것이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 후손이 시문의 手稿를 전수하지 못했던 것은, 내암과 관련되는 이러한 자료를 간직할 수 없다는 사회적 여건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없는 자료를 가지고 지나치게 억측하는 것도 무리겠지만, 없앴거나 조작한 것을 선인들의 기록이라 하여 비판없이 그대로 믿기만 하는 것도 바른 태도는 아닐 것이다.
『죽계집』의 구성을 검토해 보면 家傳된 手稿가 없어서 시문이 제대로 수습되지 않았음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러나 남명학파로서의 그의 위치는 현전하는 그의 활동 한두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李相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