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방을 꿈꾼 적 있다
조효복
스물은 꽃 아래 여우처럼 환하고 천진한 난민처럼 웃는다
향기를 입에 문 붉은 잇새의 부러진 가지들이다
맛과 향이 부풀어 오른 기억을 따 먹는다
5월의 포도나무에서 물비린내가 났다
낯가림이 심한 포도 새순은 붉었다고 기억한다
방 한 칸을 꿈꾸는 스물의 시선은 멀고도 가까웠다
강줄기를 바라보면서 오필리아를 떠올렸다
그때 우리는 동시에 물로 뛰어들었던가
포도 꽃가지를 안은 우리는 물결 위에 몸을 뉘었다
상실은 멀리서도 크게 보인다
포도밭은 침수 직전이었고 이제 막 형태를 갖춘
여린 포도송이들이
솎아져서 떠다니고 있었다
집을 잃고 떠도는 우울조차 내 것이 아니었다
포도 맛을 결정하기에 우리의 혀는 까다로웠다
정착지를 꿈꾸며 떠도는 방들
꽃향기가 전부인 세상은 어디에도 없었다
죽음뿐인 검은 마을에서도 열매들은 새로 태어났다
혼자가 두려운 심장들이 흰 미사보에 싸였다
우리는 이제 농익어 단맛으로 울기로 했다
여우들이 먼 꽃으로 자라며 울음의 방으로 익어갔다
이파리 아래 들썩이는 포도의 기척들
세상의 숨겨진 방들이 포도를 부추긴다
- 2020년 <시로여는 세상> 신인상 당선작
■ 조효복 시인
- 순천 출생
- 동덕여대 회화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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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공모전 당선 詩 소개
둥근 방을 꿈꾼 적 있다/조효복 *2020년 <시로여는 세상> 신인상 당선작
시냇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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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4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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