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황제가 「경일잠(敬一箴)」을 언제 지었고 언제 국자감과 전국 학교에 비석을 세웠는지에 관하여 말이 많았습니다. 현재 『(嘉靖)池州府志』,卷第八,雜著篇上,藝文,「敬一箴」을 보면 가정 5년(1526) 6월 21일에 썼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가정황제가 지은 「程子四箴」의 주석도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기록을 보면, 가정 6년 11월 13일에 강관(講官) 고정신(顧鼎臣, 1473-1540)이 송나라 범준(范浚, 1102-1150)의 「심잠(心箴)」을 강연한 것을 듣고 느낀 것이 있어서 「경일잠(敬一箴)」을 지었다고 합니다. 가정황제가 장총(張璁) 등에게 말하자, 장총은 정이천의 「사물잠(四勿箴)」도 좋다고 건의하였고 가정황제가 「程子四箴」의 주석도 달았습니다. 장총은 이것들을 국자감과 전국 학교에 비석을 세우자고 건의하였습니다. 다른 기록들에는 가정황제의 「경일잠」 서문만이 남아있습니다.
가정황제가 「경일잠」을 지어 국자감과 전국 학교에 비석을 세웠던 까닭은 황제가 신하들에게 충성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황제 권한을 신하들이 넘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명나라 태조와 성조는 황제 교육과 신하 교육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이것은 원나라 세조부터 황제와 신하의 교육을 나누었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황제권을 강화시킨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황제의 독재를 확립한 것입니다.
범준의 「심잠」이 중국 학계에서 주목을 받은 것은 주자 때문입니다. 주자가 19살 과거시험을 보려고 항주에 가는 길에 절강성 금화에 있는 범준의 집에 들렀으나 만나지 못하였고 과거시험에 합격한 뒤에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렀으나 여전히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이후에 범준의 아들의 부탁을 받고 찾아갔던 적이 있습니다.
범준은 북송시기 성리학자들의 영향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 심학을 연구하였습니다. 주자는 범준의 스승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주자는 범준의 「심잠」 “天君泰然,百體從令” 구절에 대하여 천군이 맹자의 대자(大者)이라고 해석하였고 『맹자 집주』에 글 일부를 인용하여 넣었고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따라서 주자는 범준의 「심잠」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절강성 금화지역에서 주자학을 계승한 북산 사선생(北山 四先生) 가운데 허겸(許謙)이 원나라 시기에 국자감 좨주를 맡았습니다.
송나라 주자학자 진덕수(眞德秀, 1178-1235)가 『심경(心經)』을 편집하면서 범준의 「심잠」을 인용하였습니다. 원나라 시기에는 호병문(胡炳文, 1250-1333)이 주자의 뜻에 따라 중시하고 「심잠」에 주석을 붙였습니다. 왕양명의 『전습록』에서도 「심잠」 “天君泰然,百體從令” 구절을 인용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범준의 「심잠」은 사실상 도교의 종교적 상상력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천군은 순자(荀子)가 말한 천군이 아니고 도교의 옥황상제를 뜻합니다. 이 점이 후세 연구자들은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고려시기에는 이색(李穡) 선생이 원나라 시기에 북경에 있는 국자감에 다녔다고 합니다. 아마도 좨주 허겸(許謙)으로부터 「심잠」을 배웠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이색 선생과 조선시기 서거정 선생 등이 시를 지으면서 범준의 「심잠」 “天君泰然,百體從令” 구절을 자주 인용하였습니다. 조선시기에는 가정황제 「경일잠」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임진왜란 이후에 북경에 사신 갔던 사람들의 기록만이 남아있습니다. 따라서 율곡 선생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 학자들도 범준의 「심잠」을 주목하였고 여러 연구가 나왔습니다. 하곡 정제두 선생과 심육 선생도 「심잠」을 인용하여 심학을 설명하였습니다. 대체로 이기 관점에서 천군이 이(理), 백체가 기(氣)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고려말기와 조선시기에는 주자의 영향 때문에 범준의 「심잠」 주목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심잠」을 학술관점에서 평가하면 그다지 수준이 높거나 새로운 내용은 없습니다. 따라서 조선시기 학자들이 심잠을 주목하고 깊이 연구한 것은 지나친 측면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외국 학술이라도 걸러내서 연구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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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황제,「경일잠(敬一箴)」 서문:
경(敬)은 마음을 지키고 잠시라도 밖으로 놓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군주가 경(敬)하면 천하를 잃지 않고 제후가 경(敬)하면 나라를 잃지 않고 경대부가 경(敬)하면 봉지를 잃지 않고 지식인과 일반 백성들이 경(敬)하면 목숨을 잃지 않습니다. 우임금은 “군주가 군주의 일을 어렵게 여겨야하고 신하는 신하의 맡은 일을 어렵게 여겨야한다.”고 말하였습니다. 「五子之歌」에서는 “내가 많은 백성들을 통치하면서 마치 썩을 밧줄로 6마리 말의 수레를 끄는 것처럼 위험하고 조심스럽다.”고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지도자로서 어찌 경(敬)하지 않겠습니까! 경(敬)이라는 한 마디를 널리 전파하면 세상을 밝아질 것입니다. 일(一)은 마음을 순수하게 하여 천리(天理)에 완전히 합동하게 하고 아무런 인심(人心)이 섞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이윤은 “덕(德)이 일(一)이 되도록 해야만 어떤 일을 하더라도 길(吉)하지 않은 것이 없다. 덕(德)이 둘이나 셋으로 나뉘면 일할 때마다 흉하지 않은 경우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일(一)이라는 한 마디를 널리 전파하면 세상을 밝아질 것입니다.
대체로 군주 자리에 오른 것은 하늘에서 부탁을 받은 것이고, 하늘의 밝은 명령을 받아 만방의 군주가 된 것입니다. 군주의 말과 행동 및 통치명령은 사실상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리고 위험한 국가를 안정시키는 것에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마음을 아주 짧은 잠깐이라도 경(敬)하지 않는다면 군주의 덕(德)이 어떻게 순수하게 되고 인욕에 섞이지 않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반드시 제사를 지낼 때 신명이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을 느끼고 있어야합니다. 또한 통치명령을 백성들에게 내릴 때에도 단정하고 장엄하게 조심하여야하며 백성들의 인정(人情)에 어긋나지 않을까를 걱정해야합니다. 더구나 혼자 있을 때에는 나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꺼리지 말고 고쳐야하며, 나의 덕(德)이 어떤지를 생각하고 힘써서 닦고 게으르지 않아야합니다. 사건이나 사물이 닥치면 지극한 이치를 따져서 찾아내는 동안에 경(敬)을 지키고 일(一)이 되도록 해야합니다. 천자의 직무를 다하여 조상과 가족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며, 구족(九族)을 가까이하고 백성들을 마음에 품어야하며, 어진 혜택이 주변 국가들에도 미치도록 해야합니다.
저는 어린 나이에 커다란 황제의 대통을 계승하였는데 덕이 부족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기에 어리석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경(敬)을 지키는 지경(持敬)공부를 다하고 잘 다스려서 덕이 순수한 일덕(一德)이 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줄이는 것이며, 삐뚤어지고 안일한 생각들을 없애고, 덕을 쌓은 사람들을 믿고 맡겨서 저를 잘 돕도록 하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들을 널리 찾아서 관직에 임용하여 순수한 왕도를 실행할 수 있도록 하여, 태평스럽고 행복한 통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저는 서적을 읽다가 깨달은 것이 있기에 아래와 같이 적어서 스스로 힘쓰려고 합니다.
가정 5년(1526, 가정황제 19살) 10월에 이부상서 楊一淸과 어사 熊爵이 왕양명을 병부상서에 추천하였으나 가정황제는 왕양명 본인과 학술이 “竊負儒名”, “非方正之學”이라고 비난하고 임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해 10월에 「경일잠(敬一箴)」을 지었고, 費宏의 건의를 받아 국자감과 지방 학교에 비석을 세웠습니다.
『명 가정황제 실록』을 보면 가정5년 당시 19살이었던 가정황제가 비굉의 영향을 받아 「경일잠」을 지어 국자감에 비석을 세웠던 것처럼 보입니다. 최근에 속경남 교수는 여기에 근거하여 『왕양명 연보 장편』(1796쪽)에서 가정황제가 비굉의 영향을 받아 「경일잠」을 짓고 정주학 입장에서 육왕학을 배척하였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가정황제 개인적 입장에서는 대례의(大禮議) 때문에 당연히 주자학을 싫어하였고 양명학도 싫어하였습니다. 가정황제가 양명학을 싫어하였던 까닭은 도교의 主靜공부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가정황제는 도교의 내단 수련공부를 하면서 나중에 신선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도교의 내단 수련공부에서 보면 왕양명의 수양공부는 수준이 높지 않고 평범하며 또한 신선이 될 수 있다는 종교적 신념도 없습니다. 따라서 가정황제가 결코 주자학을 수호하기 위하여 양명학을 배척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북경 관계(官界)에서 보면, 왕양명이 주신호 반란을 진압한 뒤에 전공을 병부상서 왕경(王瓊)에게 돌리고 공로의 일부를 비굉에게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비굉은 왕양명의 북경 등용을 막고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에 대례의(大禮議) 때문에 득세하고 있던 석서(席書)를 비롯하여 장총(張璁)과 계악(桂萼)이 왕양명을 북경 등용에 추천하고 있었으나, 장총과 계악이 서로 좋은 상호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경쟁관계에 있었습니다. 장총은 왕양명을, 계악은 위교(魏校)를 지지하였습니다. 위교는 주자학 입장에서 왕양명을 이단학술이라고 비난하였고, 계악은 왕양명을 훌륭한 학자이며 좋은 관원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위교의 영향을 받아 왕양명의 북경 등용에는 소극적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조선시기 조선 사신이 국자감에 가서 직접 비석을 보았고 소문을 듣고 기록하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가정6년에 가정황제는 강관 고정신이 범준(范浚)의 「심잠(心箴)」을 시강하는 것을 듣고 장총(張璁)과 적난(翟鑾)에게 「심잠」이 좋다고 말하였고, 장총 등은 정이천의 「사물잠(四勿箴)」도 좋다고 건의하였답니다. 가정황제는 정이천의 글도 읽어본 뒤에 2편에 주석을 달고 또한 「경일잠」을 짓고 주석도 달았다고 합니다. 조선 사신의 기록은 장총의 역할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명실록』이나 명나라 다른 기록은 비굉의 역할을 강조하였습니다. 가정황제가 항상 비굉 등과 상의하였다고 하며 비굉이 「경일잠」을 비석에 써서 세우자고 건의하였다고 합니다. 조선과 명나라 양측의 기록이 서로 다릅니다. 명나라 기록에 따르면 비굉이 왕양명을 미워하였기 때문에 가정황제가 왕양명을 싫어하였고 그래서 경일잠을 써서 국자감 등에 세웠던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조선과 명나라 어느 쪽의 기록이 정확한지는 현재 알 수 없습니다.
경(敬)은 마음을 지키고 잠시라도 밖으로 놓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군주가 경(敬)하면 천하를 잃지 않고 제후가 경(敬)하면 나라를 잃지 않고 경대부가 경(敬)하면 봉지를 잃지 않고 지식인과 일반 백성들이 경(敬)하면 목숨을 잃지 않습니다. 우임금은 “군주가 군주의 일을 어렵게 여겨야하고 신하는 신하의 맡은 일을 어렵게 여겨야한다.”고 말하였습니다. 「五子之歌」에서는 “내가 많은 백성들을 통치하면서 마치 썩을 밧줄로 6마리 말의 수레를 끄는 것처럼 위험하고 조심스럽다.”고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지도자로서 어찌 경(敬)하지 않겠습니까! 경(敬)이라는 한 마디를 널리 전파하면 세상을 밝아질 것입니다. 일(一)은 마음을 순수하게 하여 천리(天理)에 완전히 합동하게 하고 아무런 인심(人心)이 섞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이윤은 “덕(德)이 일(一)이 되도록 해야만 어떤 일을 하더라도 길(吉)하지 않은 것이 없다. 덕(德)이 둘이나 셋으로 나뉘면 일할 때마다 흉하지 않은 경우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일(一)이라는 한 마디를 널리 전파하면 세상을 밝아질 것입니다.
대체로 군주 자리에 오른 것은 하늘에서 부탁을 받은 것이고, 하늘의 밝은 명령을 받아 만방의 군주가 된 것입니다. 군주의 말과 행동 및 통치명령은 사실상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리고 위험한 국가를 안정시키는 것에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마음을 아주 짧은 잠깐이라도 경(敬)하지 않는다면 군주의 덕(德)이 어떻게 순수하게 되고 인욕에 섞이지 않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반드시 제사를 지낼 때 신명이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을 느끼고 있어야합니다. 또한 통치명령을 백성들에게 내릴 때에도 단정하고 장엄하게 조심하여야하며 백성들의 인정(人情)에 어긋나지 않을까를 걱정해야합니다. 더구나 혼자 있을 때에는 나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꺼리지 말고 고쳐야하며, 나의 덕(德)이 어떤지를 생각하고 힘써서 닦고 게으르지 않아야합니다. 사건이나 사물이 닥치면 지극한 이치를 따져서 찾아내는 동안에 경(敬)을 지키고 일(一)이 되도록 해야합니다. 천자의 직무를 다하여 조상과 가족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며, 구족(九族)을 가까이하고 백성들을 마음에 품어야하며, 어진 혜택이 주변 국가들에도 미치도록 해야합니다.
저는 어린 나이에 커다란 황제의 대통을 계승하였는데 덕이 부족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기에 어리석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경(敬)을 지키는 지경(持敬)공부를 다하고 잘 다스려서 덕이 순수한 일덕(一德)이 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줄이는 것이며, 삐뚤어지고 안일한 생각들을 없애고, 덕을 쌓은 사람들을 믿고 맡겨서 저를 잘 돕도록 하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들을 널리 찾아서 관직에 임용하여 순수한 왕도를 실행할 수 있도록 하여, 태평스럽고 행복한 통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저는 서적을 읽다가 깨달은 것이 있기에 아래와 같이 적어서 스스로 힘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