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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2호선, 6호선 합정역 7번 출구
팔과 머리가 묶여 있는 김대건 신부의...
2023년 7월 5일 합정역 근처에서 아들의 고교 시절 학부모들과 모임이 있었다.
식사 후, 절두산 공원을 방문했다.
그런데,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미국에서 조카사위가 왔다"라며,
서울 근교의 갈만한 곳 좀 소개하란다.
늦은 시간에 도착했고 장소가 넓어 제대로 돌아보지는 못했지만, 천주교 순교 성지라 의미도 있고 구경할 것도 많은 절두산을 알려줬다.
☆ 성당
고 이희태 건축가가 설계한 곳으로, 김대건 신부 등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썼던 삿갓을 형상화한 건물 모습이다.
☆ 성당
문이 잠겨서 들어갈 수 없었다.
방문하기 전에 정확한 미사 시간을 확인할 것.
평일미사
월요일 오전 10시
화요일-금요일 오전 10시, 오후 3시
토요일 오전 10시
주일미사
토요일 오후 3시
주 일오전 10시, 오후 3시
☆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개관시간:
화요일~ 주일 오전 9시 반~ 오후 5시
늦은 시간 방문으로 15분 동안 관람했다.
촬영은 못하고 눈으로만...
많은 방문객들의 카페에 올린 사진과 글이 왜곡되는 경우가 있어서 촬영은 금지하고 있었다.
☆격변하는 국제사회 속
조선의 천주교회
1. 닫힌 조선, 위기를 교회의 탓으로 돌리다.
1849년 철종(# )이 즉위하면서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한 안동 김씨 세력이 정권의 주도권을 잡자 종교적 탄압도 잠잠해져서 교회는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선교사들이 연이어 입국하였고, 인쇄소를 세워 한글 교리서와 기도서 등을 간행하여 보급하는 등 활발한 전교활동으로, 신자 수가 1857년 1만 5천여 명에서 1866년 2만 3천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의 아시아 진출이 이어지고 러시아 등 제국주의 세력의 조선에 대한 통상과 개항 요구가 거듭되고 있었다.
1864년 고종 즉위 후 정권을 주도하던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세력을 이용해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자 하였으나,
사교의 무리와 교섭하여 서양 세력을 끌어들이려 한 것을 비난하는 조정 대신들의 압박에 정책의 방향을 바꾸어 1866년 천주교 박해를 시작하였다.
천주교인을 잡아들이라는 포고령이 내려지면서 박해는 전국적으로 시행되었고, 베르뇌(Berewx, 張, 제4대 조선 교구장) 주교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체포되었다.
또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 협력할 것 이른바, 이이제이 방아책을 제안했던 남종삼(요한), 홍봉주(토마스) 등과 정의배(마르코) 회장 등 신자들도 잇달아 체포되어 치명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천주교회의 신자들은 물론
12명의 프랑스인 선교사 중 9명이 순교하면서 앞으로 8년간 이어질 대박해가 시작되었다.
1924년 무렵 조선의 교구와 본당
☆ 개항 이후, 새로운 시대
한국천주교회의 소명
병인년에 불거진 프랑스와 조선 사이의 갈등은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표면적으로 해소되었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인의 신분 보호와 교육 활동이 보장되었고, 이를 통해 선교사들의 전교 활동이 묵시적으로 허용되었다.
조선천주교회는 서울과 각 지역에 본당을 세우고 선교사를 파견하였으며, 교리서와 신심 서적도 활발히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조국이 제국주의 일보에 강점되고(1910), 광복(1945)의 기쁨도 잠시, 전쟁(1950~1953)과 분단의 아픔을 겪는 격동의 시기를 보내는 동안 교회도 함께 고통과 혼란의 시기를 겪었다.
그러나 복음서를 한글로 완역하여 출간하고 순교자 현양회를 결성하는 등 신앙의 유산을 지키고 이어 가고자 하는 교회의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교회는 특히 박해시기부터 기록해 온 순교자 사적을 수집, 정리하며 순교자 시복 조사와 현양 사업을 지속하였다.
구전과 필사로 전하던 박해 정황과 순교자 행적을 본격적으로 조사하고 정리하여 <치명 일기>와 <기해 일기>를 편찬하였고
<황사영 백서> 원본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피와 땀으로 믿음을 지킨 이들의 순교신앙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1925년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 79위,
1968년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시복이 이루어졌고, 이들 순교복자 108위는 1984년 시성 되었다.
교회의 노력은 꾸준히 이어져서 2014년에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이 이루어졌고,
현재 절두산 순교자 13위가 포함된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가 시복을 기다리고 있다.
시성하다 (諡聖)
[천주] (교황청이 존경할 만한 천주교 신자를) 죽은 후 성인품으로 올리다
시복 (諡福)이란?
교황이 신앙이나 순교로 이름 높은 사람을 복자품에 올리어 특정 지역의 교회에서 그를 공경하도록 선언함
☆ 절두산
계단을 이용하거나, 계단 우측 길로 쉽게 올라갈 수 있다.
성당으로 올라가는 입구의 철재나무판자 순교상 게이트.
김대건신부 동상
김대건신부 동상
☆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
천주를 섬긴다는 이유로 이 땅에서 약 100년간에 걸쳐 박해를 받아 죽임을 당한 수많은 순교자의 신앙을 공경하기 위하여 세운 기념상.
절두산에서 처형된 첫 가족 순교자로 병인박해 때 순교한 이의송(프란치스코)과 그의 처 김이쁜(마리아), 아들 붕익(베드로)을 형상화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최종태(요셉) 교수 작품이다.
형구돌
병인박해 때 흥선대원군(1820~ 1898)의 지시로 천주교 신자들에게 교수형을 집행하기 위한 잔혹한 형구.
절두산 가는 길의 풍경
절두산의 의미를 아는 듯 예쁘게 피어 준 꽃들
성녀 마더 테레사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역사
(楊花津外國人宣敎師墓園)
양화진은 조선시대 교동과 국방의 요충지였기에 영조 30년(1754년) 군진이 설치되었다.
조선 조정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양화진까지 들어오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이곳에서 천주교인들을 처형했으며, 그로 인해 '절두산이라는 이름도 갖게 되었다.
복음이 선교사에 앞서 전해진 한반도에는,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들어온 1885년 이래 서양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입국하였다.
1890년 7월 미국인 의료선교사 헤론이 사망하자 미 공사관은 조영통상수호조약에 의거하여 조선 조정에 묘지를 요구하였으며, 조선 조정은 몇 차례의 담판 끝에 한양에서 멀지 않은 양화진 인근의 땅을 제공하였다.
이를 계기로 양화진에는 외국인 묘지가 조성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주한 미군의 묘지로도 쓰였다.
양화진에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복음화와 근대화를 위해 진력한 선교사와 그 가족의 묘소가 있는데, 이들은 복음전파와 성경번역, 교육과 의료사업, 그리고 당시 조선의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했다.
재단법인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은 1985년 경성구미인묘지회로부터 양화진 외국인묘지 소유권을 증여받았다.
재단은 양화진을 개신교 성지로 가꾸기로 결정하고, 1986년 한국 교회 성도들과 재계 인사들의 헌금으로 선교기념관을 건립했으며, 당시 서울유니온교회로 하여금 묘지를 관리하면서 선교기념관에서 예배하도록 했다.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재단은 정부와 서울시에 양화진 일대를 명실상부한 개신교 성지공원으로 조성해 줄 것을 거듭 청원하였다.
그 결과 2003년 서울시와 마포구는 개신교의 양화진외국인묘지와 천주교의 절두산성지를 아울러 '양화진성지'로 명명하고, 두 성지 사이에 양화진성지공원을 조성했다.
재단은 2005년 7월 '한국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교회'를 설립하여 양화진외국인묘지와 경기도 용인의 한국기독교 순교자기념관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보존하여 명실공히 개신교 성지로 가꾸는 일을 전담토록 했다.
재단과 100주년 기념교회는 마포구청과 협의하여 이 묘원의 명칭을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으로 정했으며, 관련 규정을 정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서울 楊花나루와 蠶頭峰 遺蹟)은 한강의 동북쪽 강변에 있는 사적 제399호로 지정된 양화나루와 잠두봉 일원을 말한다. 1866년 천주교를 탄압한 병인박해로 병인양요가 발생하여 프랑스 함대가 양화나루까지 진출했다가 퇴각하자, 이에 격분한 흥선대원군의 지시에 의해 잠두봉에서 많은 천주교도들이 참수당함에 따라 천주교의 순교성지가 되었다. (참고: 위키백과)
한강의 이 지역의 교량으로는 서북쪽에 길이가 약 1.2km인 양화대교, 동남쪽에 역시 약 1.2km짜리 당산 철교가 서로 약 400m 간격으로 놓여있다. 1997년 11월 1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99호로 지정되었다. (참고: 위키백과)
☆ 꼬르실료 광장
Plaza de Crusillo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로부터 광장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며 정치, 경제, 문화 등 인간활동의 중심지였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소통의 공간이었던 광장!
꾸르실료 광장은 과거 스페인에서 신앙적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시작된 꾸르실료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꾸르실료운동의 정체성을 알려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열린 공간입니다.
이승훈 베드로 (1756 ~ 1801)
이승훈은 1784년 2월 북경에서 예수회 그라몽(Louis de Grammont) 신부로부터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고 천주교 서적 및 십자고상, 상본 등 많은 성물을 국내에 들여와 이벽, 정약전, 정약용, 권일신 등과 신자 공동체를 형성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4월 8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승훈이 베드로와 이벽 세례자 요한 등이 주도한 한국 최초 가톨릭 신앙 공동체(명례방 집회) (명동 대성당 소재)
이승훈이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는 모습 (절두산 순교성지 소재)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다녀가셨다.
☆ 팔마를 든 예수상
죽음으로써 믿음을 증언한 순교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음을 상징하는 팔
마를 손에 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상.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최봉자(레지나) 수녀의 작품이다.
절두산 순교기념비문.
☆ 절두상
머리가 잘린...
☆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 성모 동굴
절두산 공원에서 바라본 당산 철교 아래로 흐르는 한강
빨간 동그라미에 십자가의 길 첫 번째 동상 앞에서 기도하는 두 사람이 보인다.
☆ 십자가의 길
제1처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받으심을 묵상합시다.
제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제3처 예수님께서 기력이 떨어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제4처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만나심을 묵상합시다.
제5처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 짐을 묵상합시다.
제6처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림을 묵상합시다.
제7처 기력이 다하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제8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을 묵상합시다.
제9처 예수님께서 세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제10처 예수님께서 옷 벗김을 당하심을 묵상합시다.
제11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묵상합시다.
제1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힌 모습
제13처 제자들이 예수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을 묵상합시다.
손과 발의 못 자국
어느 신도?의 손
그녀는 손길로 어떤 마음을 전했을까?
제14처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합시다.
제15처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묵상합시다.
☆ 가는 길
지하철 2호선, 6호선 합정역 7번 출구
7번 출구에서 나오면서 계속 앞으로 간다.
7번 출구에서 한강공원 이정표(빨간색 동그라미)가 보일 때까지 앞으로 간다.
한강 공원 이정표가 앞에 보이면 우회전해서 파란색 길이나 빨간색 화살표 방향으로 내려간다.
아래 사진의 문으로 들어가면 위의 사진의 장소로 갈 수 있다.
위 콘크리트의 양쪽으로 내려오게 되면 화살표 방향의 문으로 들어간다.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교회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이 있다.
서울특별시 마포구 양화진길 46
지번합정동 145-3
또는,
더 내려와서 위의 그림이 있는 곳에서 빨간색 화살표로 가면 절두산 순교 성지가 나온다.
당산 철교에 그려진 십자가
지하철 2호선, 6호선 합정역 7번 출구
여기저기 앉아서 쉴 수 있는 곳도 있고,
여름, 겨울, 언제 방문해도 좋을 듯하다.
오늘은 한강의 강바람이 제법 시원하다.
절두산 순교 성지는 한국 천주교회 선조들의 생명을 바쳐 믿음을 증거 한 순교정신이 살아 쉼 쉬는 뜻깊은 성지이다.
김영희 기자
첫댓글 와 대작이네요~
...
와~~한바퀴 휙~~돌아다녔네요.
그러고나니 이제 점심시간 ㅋㅋ
김기자님 덕분에 무더운 날씨에
시원한 집에서
성지들을 둘러보며 마음을 다시
가다듬게 되네요.
꼼꼼하고 알기 쉽게 길을 인도하심에
기자님 감사합니다~~
길 찾기가 제대로 됐나 모르겠습니다^^
본 것 보다 더 자세하게
올린 김기자 수고했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진짜인 줄 오해합니다^^
하나도 빼 놓지 않고 꼼꼼하게 다 적으셨네요. 저도 사진 팀과 여러 번 갔었는데 다 생각이 납니다.
이곳을 보니 당진 솔뫼 성지가 생각나네요.
김대건 신부의 생가가 있는 곳이며 관광지로도 너무도 유명하더라고요.
학부모들과 모임 참 잘하셨네요. 수고 많으셨어요 .
당진에 가끔 가도 어죽만 먹고 왔지 신부님의 생가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양화진 성지 갈때마다 숙연해지는 장소이지요
이땅에 복음을 전해주신 선교사님들께 더욱감사하고요 김기자님덕분에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
그분들의 목숨이 헛되지 않도록...
그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얼마나 혹독한
박해를 받았는지 올려놓은 형구돌이
증명하고 있네요.
긴 글 올리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글 잘봤습니다~!
더위에 건강 조심하세요^^
와우나
어쩜 이리 친절한 설명
나눔이 느껴집니다.
조선을 사랑했던
선교사들의 삶의 흔적이 느껴지는
양화진을 또한번
방문해야겠어요^^
방문해 보니 선교사들의 노고가 고스란히 전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