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웅의 시 「나비를 읽는 법」평설/홍일표
나비를 읽는 법
박지웅
나비는 꽃이 쓴 글씨
꽃이 꽃에게 보내는 쪽지
나풀나풀 떨어지는 듯 떠오르는
아슬한 탈선의 필적
저 활자는 단 한 줄인데
나는 번번이 놓쳐버려
처음부터 읽고 다시 읽고
나비를 정독하다, 문득
문법 밖에서 율동하는 필체
나비가 아름다운 비문임을 깨닫는다
울퉁불퉁하게 때로는 결 없이
다듬다가 공중에서 지워지는 글씨
나비를 천천히 펴서 읽고 접을 때
수줍게 돋는 푸른 동사(動詞)들
나비는 꽃이 읽는 글씨
육필의 경치를 기웃거릴 때
바람이 훔쳐가는 글씨
----------------------------------------------------------------------------------
언어 밖의 시
시인은 국어사전에서 죽은 언어를 찾지 않고 삶과의 고투를 통해 순금 같은 생의 무늬와 숨결을 발견한다. 그래서 가끔은 문법의 틀을 넘어 숨겨진 삶의 세목을 찾아내고, 의도적 비문을 통해 지루한 일상의 질서를 전복한다. 뿐만 아니라 운명적으로 늘 경계 너머를 기웃거린다. 금기를 깨는 순간 튀어오르는 스파크는 한 편의 시로 발화하는 것이다.
언어 밖의 언어를 읽는 시인이 있다. 대부분 언어의 덫에 걸려 보지 못하는 생의 비의를 시인의 맑고 정치한 시선이 포착한다. 박지웅 시인의 「나비를 읽는 법」은 언어 저편의 실상을 환기시키는 시다. 허공에 쓰여지는 언어는 ‘아슬한 탈선의 필적’이고 ‘문법 밖에서 율동하는 필체’이다. ‘나비가 아름다운 비문임을’ 깨닫는 찰나 좋은 시를 만나는 순간이 그러하듯 개안의 황홀은 온몸을 전율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비문’은 곧 사라지고 만다. 옻칠한 관처럼 무거운 국어대사전에 순장되지도 않고, 덩치 큰 문학지에 나보란 듯 폼 잡고 있지도 않은 것이다. ‘꽃이 읽는 글씨’는 바람과 더불어 종적이 묘연해지는 것,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것이 ‘시’라는 외계의 물질이다.
요즈음 타자성의 회복을 주장하는 발언을 곳곳에서 심심찮게 만난다. 마치 그것이 지상과제인 양 내세우지만 시에서 어찌 그것만이 전부이겠는가. 여러 문양과 색깔로 각개약진하는 시의 세계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다. 타자성의 회복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그것을 절대화시키는 것은 시에 대한 안목이 매우 협소한 것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박지웅 시인은「나비를 읽는 법」에서 죽은 언어와 과도하고 편향된 시적 지향이 오히려 생의 실상을 왜곡하는 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넌지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홍일표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시로 여는 세상》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