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 안에 잠들어 있던 어머니의 손목시계가 오감을 깨운다. 시곗바늘은 움직이지 않는다. 어머니가 눈을 감을 때까지 차고 있었던 조그마한 쿼츠형 메탈 시계다. 시계 줄을 풀고 억지로 손목에 밀어 넣었다. 오므린 손을 통과하기도 어려울 만큼 작고 싸늘하다.
“이렇게 가는 손목으로 어떻게 육 남매를 키우고 시집·장가를 보냈는지”. 손목의 느낌이 머리까지 올라온다.
“언제 사드렸지?” 갑자기 궁금했다. 돌아가신 지 십 년이 넘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울산 동생에게 전화했다. “어머니 시계를 언제 사드렸지?” “기억이 안 나는데?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서랍 정리를 하다가 어머니 시계가 있어서”
경주 동생에게도 물어보니 생각해 보고 다시 전화하겠다고 했다. 한참 뒤에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차고 다니던 시계가 고장이 잦아서 형이 사 드린 거잖아?” 그제야 기억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시급한 외환 확보를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의 자금 지원 체제를 활용하겠습니다. 이에 따른 다방면에 걸친 경제 구조조정 부담도 능동적으로 감내해 나가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지금은 누구를 탓하고 책임을 묻기보다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통을 분담하여 위기 극복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1997년 11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로 우리나라 경제는 국제통화기금의 관리하에 운영되었다. 대규모 실업과 마이너스 경제 성장, 금융 불안이 가중되면서 힘없는 국민은 고통의 터널로 들어갔다.
“날마다 감동적인 일이 벌어졌다. 바로 전 세계를 감동시킨 금 모으기 운동이었다. 국민은 장롱 속의 금붙이를 꺼내 은행으로 가져갔다. 전국의 은행마다 금붙이를 든 사람들이 줄을 섰다. 금반지, 금목걸이가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귀한 사연이 담겨 있는 소중한 징표들이었다. 국민이 나라의 빈 곳간을 금으로 채우고 있었다. 신혼부부는 결혼반지를, 젊은 부부는 아이의 돌 반지를, 노부부는 자식들이 사준 효도 반지를 내놓았다.” 김대중 자서전 2권에 있는 내용이다.
어머니는 금목걸이와 금반지를 들고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하셨다. 서운해하는 자식도 있었지만 대부분 어머니의 의견을 존중했고 금반지는 다시 맞춰 드리기로 했다.
어느날 경주 동생이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배가 아파 병원에서 처방한 약을 먹었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차도가 없이 모시고 왔다는 것이다. 어머니 얼굴엔 핏기가 없었다. 너무 아파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고 했다. 급하게 대학병원에 모시고 가니 맹장이 터져 창자가 썩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시 수술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하다며 바로 수술할 수 있는 병원을 추천해 주었고 앰뷸런스로 이동해 수술했다.
담당 의사는 수술로 제거한 내용물을 보여주며 “창자가 이렇게 썩었는데 그동안 뭐 했어요? 아들 맞아요?”라고 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경주 동생으로부터 어머니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고 내려갔다. 무릎과 다리가 아픈 것은 알고 있었는데 심장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걱정이 되었다. 대학병원에서 보름 동안 검사와 입원 치료를 받았다.
의사는 “심장 기능이 약해져서 100%를 기준으로 볼 때 5%밖에 남지 않았다. 다른 기능은 정상이니 집에 모시고 가서 편하게 해드리는 것이 좋다.”라고 했다.
서재를 어머니 방으로 만들었다. 장남이면서도 어머니를 모시지 못한 마음의 짐이 있었는데 늦게라도 함께할 수 있어 나름대로 기분은 개운했다.
벚꽃이 절정을 이룬 봄날의 토요일이었다. 어머니는 “눈이 잘 보이지 않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어머니를 모신 기간은 단 삼 개월이었다.
유품을 정리하고 나니 남은 것은 손목시계 하나였다. 그리고 손가락 살이 빠져 반지도 끼지 못한 어머니의 모습은 잊혀갔다.
요즘은 세월이 좋아 스마트폰 앱으로 손녀의 성장 과정을 나날이 볼 수 있다. 며칠 전에 올라온 동영상을 보니 두 돌도 되지 않은 손녀가 인형을 토닥이며 자장가를 부른다. 무슨 말인지 집중해서 들어 보니 어릴 적 어머니가 불러주던 자장가와 비슷했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잘도 잔다 우리 아가. 멍멍이야 울지마라. 꼬꼬닭아 울지마라”.
자장가 소리를 들으며 전지를 넣으려고 책상 위에 올려 놓았던 손목시계를 다시 서랍에 넣었다.
2024.11.29. 김주희
첫댓글 어머니와 얽힌 손목시계 지난날이 새로워지겠군요. 지난 날 살기 어려웠던 시절입니다. 추억으로 간직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어머니의존재는 항상 그립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