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놈들... 지금... 뭐하는 짓인줄 알아..?
이 새끼들... 이런 유치한 짓거리가 의리라고 생각하냐?"
"네!"
정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몽둥이를 손에서 놓았다.
"어이쿠"
손에 잔뜩 힘을 주고 있던 담임은 그바람에 힘을 주체못하고 교실바닥
에
주저 앉아 버렸다.
12.
교실안엔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방금 정현이는 담임을 밀친 것이다.
담임은 어이가 없어 하고 있었다.
"너... 너...."
정현이는 태산같이 내앞에 버티고 있었다.
이건... 내가 바라지 않았던 일이었다.
나는 정현이같은 애들이 학교를 나오지 않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없다
는
것을 잘알고 있었다.
정현이는 선생들과 다투기를 싫어했다.
먼저 결석하자고 제의했던 것만봐도 알수있는 일이다.
그런 정현이를 굳이 학교에 나오라고 한건 현재로써는 나와 뜻을 같
이
하는 녀석으로 믿을만한건 정현이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독불장군처럼 혼자 돌아다닐 때가 아니었다.
항상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유대감을 가져야 할시기였다.
그래서 정현이더러 맞지않게 해주겠다고 안심시켰고 대신 맞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놈들. 뭐하는 짓들이야?"
난데없이 교실문이 홱 열려졌다.
언젠가 날 붙들고 상담을 시도했었고 내가 교실에 없는 걸 단박에
알아챘던 강덕중 선생이었다.
"이놈들이 아주 막되 먹었구나. 담임선생님을 밀쳐?"
노기 띤 음성이었다.
좀처럼 화를 잘안내는 선생이었고 내가 수업을 가볍게 빼먹은 것도
워낙 인식이 물렁해서였다.
이런 강덕중선생의 음성에 노기가 가득하자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
다.
"강선생님..."
담임은 중얼거렸다.
"여긴 어쩐일로...?"
그것은 정말 중얼거림이었다.
"내 수업에 빠진놈들인데 궁금해서 가만 있을수가 있나요? 내 밖에서
다 봤습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쉽게 넘어갈 일은 아니 것 같았다.
"이놈들.."
젠장, 또 뭐야? 괜히 상담이랍시고 날교무실로 불렀던 선생...
무슨 짜증나는 훈계를 할려고...
"왜 이렇게 비뚤어졌어? 이놈들아.."
응?
노기띤 음성은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왜 이렇게 세상을 헛살아? 네놈들 생각엔 그렇게 살면 폼나니?
응? 그래?"
"예"
나는 예전처럼 거침없이 대답했다.
철썩-
놀랍게도 강덕중선생이 내 뺨을 쳤다.
"못난 놈..."
쳇... 뭐야? 신경써 주는 척 하지마...
나는 속에서 반감이 치솟았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어쩐지 내게 불리했다.
"어서 사과드려!"
정현이에게 소리치면서 음성은 다시 노기를 띄였다.
"얼른!"
"죄송..."
마지못해 하는 소리라 그런지 뒷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똑바로 못해?"
정현이는 강덕중선생을 한번 쳐다 보았다.
그리고다시 담임을 보았다.
"죄송합니다."
진심에서 나오는 소리같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또렷한 발음이었다.
담임은 말이 없었다.
그러길 한참...
"들어가라."
담임은 귀찮다는 듯이 우리에게 손짓을 했다.
"양용수"
강덕중선생이 갑자기 반장을 불렀다.
"예"
"이반에 내수업 몇교시야?"
"3교시인데요."
"그 시간에 자습하고 너희 두놈! 나하고 면담좀 해야 겠어."
또...? 지겨운 선생이다.
면담, 상담... 이런타입도 짜증나기는 마찬가지다.
조례시간이 끝나자마자 난 승태를 불렀다.
"야! 김승태."
녀석은 놀란 토끼눈이 되어 날돌아보았다.
한때 친한척할려고 했던것에 비하면 경기를 일으킨 수준이었다.
"뭐야? 왜 그래? 내가 어려워? 너하고 그런사이냐?"
"아...아니..."
녀석은 어느새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강덕중 뭐하는 놈이냐?"
"강덕중선생님? "
"선생님은 무슨... 그래 걔"
나는 지금껏 초등학교 입학하고나서 한동안 불러본이후 선생님이라고
교사를 불러본적이 없었다.
직업으로써의 교사는 있어도 선생님이나 스승은 없다는 것이 내 생각
이었다.
백번을 양보해도 선생까지가 내 한계였다.
"강덕중 선생님 좋아. 학생들 다 기억할려고 하고... "
그러고 보니 반장의 이름을 부르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반장을 부를때는 으례히 '반장'이라고 부르
는 게
아닌가? 담임도 아닌데..
나와 처음 대면했을 때도 앞문으로 쑥들어온 나를 그렇게 책망하진 않
았고
나와 상담했으며 내가 수업을 빠졌을 때 금방 알아보았고 다음날 자기
수업
에 빠진 놈들 궁금하다며 조례시간에 우리교실앞에 있었다.
젠장... 잘못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뭐가 좋다는 거야?"
"넌 전학와서 잘모르겠지만 강덕중선생님, 몇안되는 진짜 선생님이
야."
놀고 있네...
나는 속으로는 반발하고 있었지만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알았다."
그리고...
3교시였다.
나와 정현이는 상담실로 갔다.
뭐라고 할까...? 뻔한 소리로 날 갖고 놀겠지...
아니면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며 날 협박할지도 모르고...
뭐, 레파토리야 뻔하지...
"앉아라."
상담실문을 열자 강덕중선생은 반가운듯이 맞았다.
'저것도 연기야. 반가운척... 한두번 당하는 것도 아니고...'
"아침에는 미안했다. 뺨은 치는게 아닌데.. 커피 한잔 할래?"
"아닙니다."
나는 경계하고 있었다.
내가 확실한 태도를 취해야 정현이가 결심을 쉽게 할수 있다.
'넘어가면 안돼. 윤정현....'
"그래? 하긴 너희한테는 몸에 해롭지."
'본론이나 말하라구.. 아저씨..'
"어디보자... 너희들 말이야. 학생부에 사정사정해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거야. 안된다고 그러는 걸.. 허허"
'뭐가 우습다는 거야? 고맙수다. 젠장..'
"이놈들.. 허허.. 그래.. 누구나 다 너희들같이 살고 싶을때가 있지.
반항하면서... 그런데 이놈들아, 세상에는 어떤 삶이 있는지 아니?"
"성공한 삶과 그렇지 않은 삶입니다."
나는 거침없이 뇌까렸다.
언젠가 김인범이 날 꼬드길때 했던 말이었다.
"그래? 음...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예"
정현이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글쎄... 그렇게 볼수도 있겠지. 너희들 생각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말이야. 이렇게 보는게 너희들보다 조금더 산 내가 보기엔
더 나은거 같애. 자식으로써 사는 삶과 부모로써 사는 삶."
자식으로써 사는 삶과 부모로써 사는 삶......
나는 강덕중선생을 거부하고 있었지만 이말에는 알수없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하지만 나는 고집을 버리고 싶진 않았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자식을 낳아 길러보지 않고서는 어린애에 불과
해.
그런데.. 이 자식이라는 것들이 보통 머리아픈게 아니거든?"
무슨소릴 하려는 거야?
"처음에는 눈에 넣어도 안아플것 같은 것들이 커가면서 밉상이 되지.
괜히 미워보일때가 있어. 아버지한테 책산다고 거짓말해서 노래방에
가고
말이야. 허허.. 커가다보면 한창 미운시기가 있어."
그러면서 강덕중선생은 커피 한모금을 마셨다.
"그런데 말이야... 신기하지? 그 시기가 지나면 몸도 커지고 귀여운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다시 이뻐 보인다 말이야.
애가 좀 철이 들어서 징그러운데도 오히려 이뻐보여."
그러더니 강덕중선생은 우리앞으로 몸을 당겼다.
"너희들은 미운시기야. 이건 시기란다. 누구나 그런 때가 있지.
너희들은 개성이 강해서 조금 눈에 잘띄는 것 뿐이야.
이 시기만 지혜롭게 넘기면 너희들은 아주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어."
이런...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
나는 내의지와는 무관하게 갈등을 일으켰다.
"친구들하고 어울리면서 선생님, 부모님한테 반항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싶고 왠지 주먹쓰면서 이기면 쾌감을 느끼고 그건 모두 시기란
다.
때가 지나면 말이다, 그 시기가 지나면 아무 의미도 없는 그런거야."
나는 마음속으로 반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왠지 그것은 공허했다.
시간이 지나 나와 정현이는 상담실문을 나섰다.
"어떻게 생각해? 정현아"
"글쎄..."
"저딴 말에 넘어가지마. 뻔한 술수라구."
나는 정현이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스스로에게도 다짐하고 있었다.
"그래. "
"참, 김인범한테 가자."
"왜?"
"장학금문제 해결해야지. "
나는 마음속이 불편했다.
얼른 다른 신경 쓸일을 찾아야 했다.
얼핏 떠오른것이 장학금때문에 내부에 불만이 있다는 소리였다.
방과후... 병원...
"가자."
김인범이 내가 찾아온 이유를 듣더니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
"뭐가? 내몸이야? 지금 가도 괜찮냐는 거야?"
"둘다."
"괜찮아. 사장님께는 말씀드려 놨으니까 언제라도 데리고 오라고 하셨
어."
김진우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놀라지마. 이정우. 완전 별천지니까. 학교하고는 비교가 안되지."
진우는 예의 그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참, 유림정보고 하현미는 배성여고에서 대신해준다며?"
"그래."
"너혼자 깨라고 했을텐데?"
"그 조건이 들어왔을 때 배성여고와는 아무사이 아니었어.
연합학교를 만들고 이용하는 건 내 재능이다."
"하하... 어쨌든 뉴스에도 나오고... 사장님 관심이 대단하다고 들었
어."
나, 정현, 인범은 진우가 모는 그랜저에 올라탔다.
서울에 온지 얼마 안되는 나로써는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되지 않았
다.
차는 어느 성인 나이트앞에 멈춰섰다.
나이트클럽이라면 보통 젊은 이들이 놀러와서 춤추고 땀빼는 곳이지
만
여기는 갖가지 쇼로 중장년층을 주 타겟으로 하는 곳이었다.
크기는 중간정도... 별로 사람이 다니지 않을 것 같은 위치인데도
건물앞에 대어 놓은 차가 꽤 많았다.
기도가 진우와 인범을 알아보고 이내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는 다른문으로 돌아 건물안에 들어갔으며 사무실 같은데서 한참
을
기다렸다.
그리고 나는 다시 혼자서 여기저기를 미로같이 돌아 사장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안에는 꽤 잘 해놓았다.
넓고 깨끗했다.
여느 드라마에서 회장실이라고 꾸며놓는 셋트보다 몇배는 더 나아 보
였다.
바닥에는 대리석이 깔려 있었고 매끄럽게 코팅된 바닥에 내 모습이 거
울처럼
비쳤다.
사장실에 비치되어 있는 가구나 책상은 한눈에 봐도 비싼 외제품이란
걸
짐작 할수 있었다.
"앉거라."
사장이라는 이사람...
나이는 30대중반으로 보였다.
잘다져진 체구였지만 호리호리하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넥타이를 매지않은 정장차림이었으며 인상은 그리 무섭지 않았다.
"네가 요즘 그렇게 날린다며?"
"예"
"하하하하. 듣던대로 배짱이 있구나. 전혀 기죽지 않는군.
남자 다워. 요즘은 사내놈들이 다들 여자애들 같아서 맘에 안들었는
데,
넌 제법이야."
"장학금문제로 왔습니다."
쓸데없는 얘기 듣기싫어 나는 화제를 돌렸다.
"흠... 네가 내게서 장학금을 받는다는건 졸업후의 진로가 정해지는
것이다.
나는 강요는 하지않아. 이런 삶.. 매력이 있지만 싫다면 끌고갈 생각
은 없다.
넌 어떠냐? 나와 함께 같은 길을 가볼래?"
"....."
"원한다면 대학에도 보내주지. 넌 그릇이 남다른 것같으니 손에 피묻
힐 일은
없을 거다. 물론 기록상으로 말이야. 군대도 얼마든지 빼줄수 있어.
이런 제의는 아무나 받는게 아니다. 어중이떠중이 주먹잡이였다면 널
이렇게
만나지도 않았을거다. 넌 키워 볼 가치가 있어."
나는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또 나에게 다가온 달콤한 유혹이다.
그때 문득 오늘 오전 강덕중선생과 상담한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강덕중선생에 대한 알수없는 반감을 치솟게 했다.
"졸업후 이리로 오겠습니다."
"하하하.. 시원시원해서 마음에 든다. 한달에 8백만원씩 너에게 주
마.
누구한테 얼마를 주든 그건 네가 알아서 결정할 문제다.돈이 적으면
말해.
올려 줄테니."
8백만원....
한사람당 40만원 이상돌아가는 액수다.
이건... 전혀 뜻?의 일이었다.
"네가 돈을 어떻게 쓰는지 지켜 보겠다. 진짜 물건이라면 돈쓸 줄도
알겠지."
그렇게 말하는 사장의 눈동자에서 빛이 솟고 있었다.
"이거 받아."
그리고 사장은 내게 핸드폰을 주었다.
"충전기하고 이어폰은 여기 싸놨어."
"이건...?"
"번호는 전원스위치 누르면 나올거다. 앞으로는 나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이런, 벌써 간섭인가...
"널 지켜보겠다. 내가 지접 통제한다는 건 그만큼 널 높이 사고 있다
는
뜻이다. 넌 잘 모르겠지만 이번 대우는 파격이다."
파격...
모를 소리였다.
그렇게 사장과의 만남은 끝이 났다.
사장실을 나오면서 명패에 패인 이름을 보았다.
윤재식!
윤재식....
내 운명을 바꾸어 버릴 지 모를 이름이었다.
..
13.
한주가 지났다.
배성여고에선 유림정보고 여학생들을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깨뜨렸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리고 곳곳에서 연합제의가 들어왔으며 나는 인근지역에서 확실한
절대강자로 부상하였다.
2,3학년들도 어느 새 나의 밑에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안녕하세요? 한진대영문과 4학년 윤정임입니다.
여러분들 만나서 반갑고 앞으로 4주동안 열심히 하겠습니다."
윤정임...
그녀가 교생으로 우리반에 배정받은 것이다.
그리고 나를 곧바로 알아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곧 눈웃음을 지으며 반갑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
다.
물론 정임의 기억속에 부산에서 올라온 친구들과 있었던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정임의 자취방에 드러누웠던 것을 떠올렸으리라.
나는 굳이 반가운 표정을 짓고 싶지 않았다.
정말 별로 반갑지 않았고 굳이 아는 체 하고싶지도 않았다.
나는 무뚝뚝하게 정임을 노려보듯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눈치가 없는 건지 정임은 여전히 날보고 웃고 있었다.
거기다가 정임은 부지런했다.
교생이 되면 뭐하는 지 모르겠지만 다들 바쁜척을 했었는데 정임은
쉬는 시간이면 꼬박꼬박 교실로 와서는 잠깐이라도 얼굴을 비추고 가
는
게 버릇인 듯했다.
"안녕? 오랫만이네."
'나한테 존칭써주면서 대접하더니 교생주제에 선생이라 이거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름이..... 이정우? 다친덴 좀 나아졌어? "
"예"
건성이었다.
"너, 너무 무게잡는거 아니니? 요즘 여자들 그런남자 안좋아해."
정임은 웃으면서 내 어깨를 쳤다.
'어라? 이건 뭐야? 재수없게 친한척이야?'
나는 어이가 없었다.
지독하게 눈치없는 여자였다.
"넌 우리집 알테니까 반애들데리고 시간나면 놀러오고 그래.
난 정말이지 학생들하고 친구같은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거든."
교생인 주제에 벌써부터 별꿈을 다 꾸고 있다.
아니 그건 그렇다쳐도 내가 그딴 소리에 관심있는 것도 아니고 귀찮
을 지경
이었다.
"괜찮지? 집도 가까우니까 부담없겠지? 선생님은...."
"선생입니까?"
귀찮기만 하던 나는 마침내 정임의 말을 잘랐다.
"교생이지."
"으..응? 그..그래. "
정임은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활짝 웃었다.
"그렇네. 고맙다, 야. 나 정말 선생님인줄 착각하고 있었나봐.
후후.. 정우아니었으면 4주뒤에 월급달라고 학교측에 떼썼었을지도
모르겠는데?"
'젠장... 지금 그걸 웃긴다고 하는 소리야?'
"어머. 시간이 벌써.. 나 가야겠네. 다음에 봐."
쉬는 시간이 끝나가자 정임은 내게 손을 흔들어대며 교실을 빠져 나갔
다.
그런식으로 정임은 틈틈이 교실을 들락거리며 반아이들과 이야기를 했
고
나름대로 부지런히 학생들 이름을 외려고 들었다.
그런 정임을 두고 반애들사이에서는 좋은 평판이 돌고 있었지만 나에
게는
그저 쓸데없는 짓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겐 확장된 내세력을 관리하는게 더 급했다.
비록, 인근일대에 내소문이 난 덕분에 소강상태지만 언제 어느때 무
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는 일이었고 나같이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는 것이나
장애물을
제거해야 하는 것도 내가 해야 할일이었다.
전학온지 3주만에 무섭게 커버린 나로써는 이제 내부를 관리하며 결속
력을
다져야 할 시기인것을 잘알고 있었다.
더이상의 세력확대는 자칫 허울좋은 껍데기가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
다.
치고받는 것과는 성질이 달랐다.
이젠 머리를 써야 할 때이고 그래서 더욱 난 신경이 날카로웠다.
이런 때에 정임같은 존재는 정말 귀찮은 것이다.
"정우야, 네 폰 소리아냐?"
정현이가 내어깨를 흔들었다.
"응?"
나는 가방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아직 난 내 핸드폰이 울리는걸 금방 알아차릴 정도로 이 낯선 기계에
익숙치 않았다.
"네."
"정우냐? 나 진우다."
"왜?"
"수업언제 마쳐?"
"내맘이야."
"하하. 5시까지 학교앞으로 가겠다. "
"왜?"
"어떻게 일하는 지 구경시키라는데?"
"일?"
"만나보면 알아. 넌 구경만 하면돼. 까치하고 개구리란 놈들 둘이서
다할거야."
"넌?"
"난 연수생이잖아. 나도 구경만 할거야. 그럼 이따 봐."
진우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정현이에게 적당히 얘기해두고 5시쯤에 학교를 나왔다.
빵빵-
어디선가 클랙션소리가 울렸다.
"여기다."
진우였다.
"수업 다끝났어?"
"정규수업은."
"그래? 지금은 뭐야? 자습? 보충수업? "
"자습."
"요즘도 그래? 요즘애들 학교에서 빨리 나오던데?"
"우리학교는 아냐. 근데 일이라니?"
"사채업자 한명을 손볼 모양인데 어떤 식으로 하는지 보라는군.
넌 처음이지? 난 몇번 봤는데 손가락마디마디를 잘라내면서 협박하던
게
기억에 남아. 헛소리를 할때마다 한마디씩 톱으로 썰더라구.
결국엔 손가락 두개가 날아가니까 술술 불더군."
진우는 운전을 하면서 무용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또 한번은 남편보는데서 마누라 유두를 잘라내는거야.
한번 그런일을 당하고 나면 말잘듣거든. "
무슨소리를 하는지 알수 없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었다.
"너 면허증 언제땄냐?"
"응? 면허? 따긴.. 너도 하나 만들어. "
"만들어?"
"아직 뭘 모르는군. 이 세상도 제법 재미가 있어.
운전 배울래? 하나 만들어 주라고 말해 줄까?"
"됐다."
"쿠쿠쿡.. 하긴 넌 나이가 안되니까 고쳐야 할게 좀 많겠군.
참, 인범이 낼부터 학교 나갈거야."
"그래?"
"응. 아직 완전치는 않지만 어찌됐건 인범이가 학교에 나가면 네가 편
해
지겠지. 경영에 노하우가 있는 녀석이니까."
경영이라.... 그럴듯한 표현이었다.
"인범이 주먹은 시덥잖지만 제법 약삭빠르게 경영은 잘하지.
당분간 인범이하고 의논하면서 꾸려봐. 그리고 넌 당분간 네 식구들
챙기기보단 배우느라 바쁠거다."
"무슨 소리야?"
"사장이 널 아주 좋아해. 최단기 코스로 키울거야. 혜택이지.
약간의 성의만 보이면 곧바로 인범이한테 학교는 넘겨버려라.
넌 진짜 세상에 들어갈거야. "
아직은 감이 쉽게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무언가 엄청난 운명이 날기다리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너 아직 여자는 없지?"
"관심없다."
"카하.. 말하는걸보니 아직 총각이군. 딱지 떼고나면 달라질걸?"
"여자엔 관심없어."
사실이었다.
나는 특이하게 여자에 큰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런..이런.. 뭘 잘못생각하고 있군. 어차피 너나나나 머리속에 먹물
들어간
여자 구하긴 힘들고.. 하긴, 난 결혼도 안할생각이지만.. 어쨌거나 심
심할때
만날 여자는 있어야지."
"입닫아."
"크큭.. 분위기잡긴.. 네 식구들은 좋아할거야. 그렇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몰랐는데 꽤 성가시게 말많은 놈이다.
"애들 이끌고 가려면 너도 별다를바 없다는 연대감을 심어주는 것도
한방법이야.
가끔 애들 끌고 청량리나 영등포에 가서 몸푸는 것도 나쁘지 않아."
"언제 도착하냐?"
"하하.. 내말 흘리는군.. 하지만 기억해. 네가 관심이 없더라도 여자
는 중요한
숙제야. 네가 취하는게 아니라 아이들에게 주는거야."
"뭐?"
"흥미가 생기냐? 언제 어느때 죽을지 모르는 애들이지. 넌 밟는 과정
이
다르니까 쉽게 죽지 않겠지만 네가 이끌애들은 경우가 달라.
담배 한개피나 술한잔 그리고 여자를 부둥켜 안는게 그네들의 유일한
낙이랄
까... 어차피 우리 인생은 그런거야.
일끝내고 난뒤에 여자를 던져주는건 일종의 선물이지.
이끌어 나가야 할 입장에선 생각해봐야 해."
전혀 틀린말은 아니었다.
"후후... 여권운동가들이 이런말 들으면 날 죽이려 하겠지?
킥킥.. 어차피 우린 아웃사이더야. 이세상의 아웃사이더.
우리가 취할여자도 마찬가지고.. 머리속에 뭐가 들어찬 여자하고 만날
일은
없으니까. 하긴 요즘은 여대생들도 몸팔러 다닌다고 하더라만... "
"다 끝났냐?"
"하하하. 초연한척 하는군. 다왔다."
차는 주택가로 미끌어져 들어갔다.
앞에서 두명이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진우는 그 두명을 태우고 같은 길을 몇바퀴나 돌았다.
"길 잘알아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지."
"알았다."
"언제 칠거야?"
"새벽2시가 가장 적당해. 며칠간 봐 왔는데 그 시간대가 제일 한적
해."
까치라는 사람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보다 예닐곱은 많아보였지만 피차 존칭쓸 필요를 느끼진 못하고 있
었다.
"며칠동안 보안시스템도 건드려 봤고 별짓을 다했지.
지금은 보안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야. 그냥 침투해서 처리하고
나오면 돼. "
"오래 걸리나?"
"아니, 금방 끝날거다. 네가 이정우? 장래 우리를 이끌 재목인가? 후
후"
뭐야? 이런 분위기... 어색하다..
"이번일은 간단하다. 집은 꽤 크지만 집안에는 혼자뿐이야.
명동아이들 자금줄 끊을려고 하는일이다. 이번 놈이 명동쪽에 자금을
대는
액수가 커. 명동쪽에서 그돈으로 무기를 구한다는 거야.미리 끊어놓
는 거지."
명동쪽...?
다른 조직인 것 같았다.
"너희들은 구경만 해. 궂은 일은 우리몫이니까."
차는 다시 같은 길을 몇번 돌았고 새벽2시를 기약하며 다른곳으로 향
했다.
"수금하러 간다. 이번 수금은 전액 우리거야. 일끝나고 나면 놀아보자
구."
개구리가 나에게 말해 주었다.
확실히 뭔가가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네."
"어디냐? 정현이야."
"좀 바빠. 왜?"
"아니.. 교생말이야."
"교생이 왜? "
"널 찾더라구."
"그래서?"
"적당히 둘러대긴 했지. 그런데 매일같이 아무시간에나 학교를 빠져나
가긴
앞으로는 어려울 것 같아. 교생이 애들한테 관심이 너무많고 우리 결
과처리
된거 강덕중선생님덕에 징계먹진 않았지만 경비가 강화될거래."
"알았다."
"그래, 그럼. 참, 너 교생하고 아는사이냐? 친한것 같던데?"
"끊어."
"어..어.. 야..."
나는 전화를 끊었다.
"교생이라니?"
진우가 내게 물었다.
"아니다"
"연상이 취미야? 하하.. "
시끄러운 녀석이었다.
우리는 여기저기를 드나들며 수금을 했고 얼만지는 모르겠지만 하룻밤
새
벌어들인 돈치고는 꽤 되는듯 했다.
"이정도면 확실히 놀 수있겠어."
까치가 만원짜리 돈 뭉텅이를 손바닥에 탁탁 쳐댔다.
그리고....
2시가 되었다.
14.
진우가 모는 그랜저는 잘 꾸며진 양옥집앞에 멈춰섰다.
까치와 개구리가 문앞에서 딸깍거리더니 신기하게도 문이 곧 열렸다.
"들어와"
우리는 빠르게 대문안을 들어섰다.
정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잘해놓고 산다니까... 전부 세금하고 상관없이 번 돈이지.."
까치가 중얼거리며 현관문을 땄다.
철컥철컥 너무 쉽게 열렸다.
"며칠동안 다 봐둔거야. 보안 시스템이 꽤 잘돼 있더라구."
"이쪽이 안방이야. 여기엔 아무도 없어. 위장이지. 이쪽으로"
개구리가 우리를 2층으로 안내했다.
까치는 전원스위치를 올리며 실내를 밝히는 중이었다.
"여긴 서재인데 여기서 잠을 자지. "
그러면서 개구리는 서점문을 능숙한 솜씨로 가볍게 따내고 안으로 들
어섰다.
찰칵.
전원스위치를 올리자 안이 밝혀지면서 대머리의 50대남자가 자고 있
는 침대가
보였다.
서재라더니 안은 그냥 방이었다.
"으...음..."
갑자기 쏟아진 형광등빛이 성가신지 남자는 몸을 뒤척이며 깨어나려
는
중이었다.
"이봐, 심사장."
심사장이라는 사람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헉.."
심사장은 기겁하며 몸을 일으켰다.
"윤사장이 보낸거요?"
"당신 제법 간이 커. 우리 사장님하고 거래하다가 돈만져놓고 그돈을
엉뚱
하게 불릴려고?"
"이.. 이거 왜 이러시나... 명동쪽에서 가족을 걸고 협박을 해서...
나하고 윤사장 관계야 세상이 다 아는데..."
심사장이라는 이사람... 거의 울상이었다.
"명동애들이 그렇게 무서워? 이야...우린 만만하고? 그래서 가족 빼돌
리고
혼자 여기 숨어있으면 우리가 못찾아낼 줄알았어?"
"이것보게... 내말을 들어봐."
"안됐지만 우린 들어봤자야. 그건그렇고 명동쪽에 경고하는 의미로다
가
당신 몸 좀 찢어나야겠는데.. 그렇게 알라구."
"뭐... 뭐라구... 컥.."
까치는 재빠르게 칼을 뽑아들더니 심사장의 목을 찔렀다.
놀란 건 나였다. 정말로 목에다 찌른 것이다.
"잘봐. 그냥 찔렀다 빼면 안돼. 이렇게 비틀어서 확실히 동맥을 끊어
줘야 돼."
짤깍-
아직도 숨이 붙어 헐떡이는 심사장의 목에 꽂힌 단검이 뒤틀렸다.
그순간 심사장의 목에선 핏물이 솟구쳤고 동시에 숨도 끊겼다.
"이런데 처음이니까 일일이 설명해주는 거야."
까치가 날보고 말했다.
"명동쪽에 두번다시 우리 줄을 끌어다쓰지 말라는 경고를 해야해.
눈에 확 띄게."
"토막내는 게 어때?"
"시간도 걸리고 귀찮아. 그냥 뱃가죽만 갈라서 창자를 목에 걸어놓자
구."
"그것도 보통일 아닌데?"
까치와 개구리는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왠지 속이 메스꺼워졌다.
영화를 통해 본적은 있지만 정말로 사람을 죽이는 모습은 처음 보았
다.
까치와 개구리는 아무렇게나 배를 잘라내더니 손을 집어넣고 칼질을
시작했다.
사람의 내장은 장간막이란데 붙어 있어서 쉽게 꺼낼 수없다.
그리고 막을 잘라내어 창자를 떼내는 것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이들은 능수능란하게 칼질을 하고 있었다.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으나 이내 꾸불꾸불한 창자를 모두 끄집어
내는 건 포기한 듯했다.
"에이 귀찮아. 이것만 목에 걸지."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 내 눈앞에서 정말로 한사람의 생명이 다한 것이다.
이건 뭔가 아닌것 같았다.
"어때? 기분 묘하지? 처음엔 다그래. 곧 익숙해 질거야."
진우가 씨익 웃으며 내 어깨를 쳤다.
개구리가 날 힐끔 돌아보았다.
"표정이 왜그래? 쿠쿡... "
"킥킥... 쫄았냐? 하지만 알아둬. 깨끗이 죽여야 할때가 있고 경고메
세지를
보내야 할때가 있어. 그건 사장님이 결정할 문제고 우린 시키는대로
할뿐이야. 지금 하는 걸 보고 앞으로 네가 위치에 오르면 신중하게 결
정해서
지시를 내리길 바래."
젠장......
이런 건가...?
나는 결국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들의 행동을 다 지켜 보았다.
하지만 마음 속에서 치솟는 떨림은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젠장....
"야! 눈알도 파버려."
개구리는 칼날을 휘돌리며 한쪽 눈도 파내었다.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이런 일이 내게 생긴다고는 생각치 못했었다.
"어때? 레벨이 다르지? 네손에 이렇게 피묻힐 일은 없을거야.
키우는 놈한테는 깨끗한 기록을 남겨줄려고 하지. 혹시 네가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다른 녀석이 네 전과를 대신 짊어 질거야."
진우가 다시 내 어깨를 쳤다.
"영화보면 사장목숨 한번 구해서 벼락 출세하는 경우가 있지?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일은 거의 없어. 단계가 있고 레벨이 있지.
넌 밟는 과정 자체가 다를거야."
나는 머릿 속이 어지러웠다.
사실 오늘일은 내게는 충격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처리하는 이녀석들이 더 이상했다.
빌어먹을....
어떻게 되어가는 건가....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자, 놀러갈까?"
까치가 그랜저에 오르며 유쾌한듯 얘기 했다.
좀전에 한사람의 숨통을 끊어놓은 놈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힘들었
다.
"어디에 내려줄까?"
"응? 같이 안가고?"
"하하. 난 정우랑 볼일이 있어."
"그래? 그럼 여기서 내려줘. 우리끼리 가게."
"그럴래?"
까치와 개구리가 차에서 내려 어딘가로 사라졌다.
"왜 보내는 거지?"
"생각해봐. 놀때는 확실히 놀아야지. 넌 밟는 코스가 다르다고 했지?
넌 앞으로 저놈들을 이끌어야 돼. 장래의 보스란 말야.
맘대로 놀지못해. 널 신경쓰지 않을 수없다고."
"음....."
"밑에 애들에 대해 알아야 할 부분이 있고 알지 말아야 할부분이 있
어.
일끝나고 무슨 지랄을 하든 그건 애들 맘이야. 그냥 맘대로 놀게 내버
려
둬야 해. 그런데까지 신경쓰면 안된다구."
"알았다. 근데.."
"응?"
"사장이 직접 통제한다더니 왜 널 보낸거지?"
"모르겠어?"
"응"
"난 연수생이잖아. 앞으로 십년쯤후에 너와 난 실세가 된다구.
미리 잘지내라는 배려야. 혹시 알아?
네가 검찰한테 쫓겨서 부산으로 도피라도 할지.
반대의 경우도 있고.. 그럴때 몸을 의탁할 상대잖아.
또 내가 하는 소리 거의 사장입에서 나온 소리고 널 통해 내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싶기도 할테고..."
"날통해.. 뭐?"
"사장은 널 통해 날 볼거다. 어떤 타입인지 너에게 물어볼거야.
그리고 자기가 본 것과 비교할거야.
머리가 있는 사람이지. 보통나기가 아니야."
"그렇군..."
나는 깍지를 끼며 이마를 툭툭 쳤다.
단순히 깨고 부술때에 비하면 확실히 너무 많이 달랐다.
"기억해 둬. 네가 속해 있는 곳은 기업이야. 그것도 대기업이지.
넌 그중 유망한 계열사에 들어간거고... 미래가 열린만큼 책임도 크
지."
미래가 열렸다고.....?
그말은 무슨 마술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진우의 말에 빠져 들고 있었다.
"생각해봐. 너 고등학교 졸업하면 뭐할래?
대학갈만큼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백수?
그러다가 군대가겠지. 2년이 지나 사회에 다시 나오면 학교 다닐때처
럼
마음대로 세상을 휘저을 수없다는 걸 알게 되지."
맞는 말인 것 같았다. 젠장...
"그럼 먹고는 살아야 되니까 더이상 놀수는 없고 학원이나 기웃거리면
서
자격증을 따고 운이 좋으면 시덥잖은 중소기업에 취직하겠지.
그러다가 지나다니는 은행원 아가씨나 밥집아가씨한테 구애하다가 차
이고
나이가 차면 중매로 결혼하게 될걸? "
"밥집 아가씨? 훗."
"웃을 일이 아니야. 그렇게 결혼해서는 애들 낳고 애들 뒷바라지 한다
고
남은 인생 다보내면서 그렇게 늙어간다구.
그러다가 말이야. 문득 길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난거야."
나는 녀석의 얘기에 흥미를 띄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동창은 학교다닐때는 맨날 맞고 사는 녀석이었는데 해외
유학도
갖다오고해서 사회적으로 끝장나는 위치에 있는거야.
그녀석이 학교 다닐때 같으면 감히 너한테 말도 못붙였는데 허름한
잠바입고 손에 기름 묻히고 있는 널보고 약올리는 거야.
'너 고등학교때 그렇게 잘나가던 이정우 아니니? 여기서 이런일해?'
어때? 그렇게 살고싶어?"
"글쎄..."
"돈못벌어 온다고 매일같이 바가지 긁히고 자식새끼 용돈 대주느라
허리휘고 너한테 끽소리도 못하던 놈들이 차굴리는데 넌 대중교통비
올라가면 서민죽이는 정책이라고 데모나하고 동네 아저씨들하고 소주
마시면서
신세타령이나 하고 .... 다 그렇게 되지."
"젠장..."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소리였다.
"하지만 걱정할거 없어.
이제 네 미래는 환하니까."
진우는 키득거렸다.
"거짓말 아냐. 네가 하기에 따라선 검사가 널 집어 넣고 싶어도 집어
넣을
수 없는 거물이 될 거야. 집에다 별장에 골프장회원권에 1억2천만원짜
리
모피코트를 마음에 드는 여자한테 선물할 수도 있어."
"...."
"백화점 수입품코너의 우수고객에 네이름이 낄지도 몰라.
사장도 시내 3개백화점에 골드회원이지. 사장실에 들어가서 봤지?
외제가구들하며... 사장이 입고 있는 양복, 이탈리아산인데 700만원짜
리야.
어때? 재밌는 세상이지? 킥킥... "
정말일까....?
나는 정말 마술에 걸린것 같았다.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 모두 환상은 아닐까...?
나는 진우와 인근 포장마차에서 우동을 먹었다.
그러면서 아침을 맞았고 진우는 나를 학교앞으로 태워다 주었다.
6시가 조금 늦은 시간...
몇몇 부지런한 아이들이 등교하고 있을 뿐 학교는 조용했다.
"안피곤하냐? 밤샘했는데 그냥 여관하나 잡지 그래?"
"됐다."
나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교문안으로 들어섰다.
우선 매점에 가서 캔음료를 뽑아 마셨다.
우리학교 매점아저씨는 게을러서 그런지 7시가 훨씬넘어야 문을 열었
다.
그리고 1-12반, 우리반으로 향했다.
주번이 와서 교실문을 열어 놨으면 다행이고 아니면 교무실까지 가서
열쇠를
가져와야 했다.
"음?"
교실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주번인가?"
나는 중얼거리며 문을 열었다.
6시를 조금 넘긴 이시간에 한번도 학교에 와본적이 없는 나로써는 이
시간에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어? 이정우!"
이런....
윤정임이었다.
아이들 책상을 돌아다니며 메모지 같은 걸 남기고 있었다.
"너 어저께 어디 갔었니? "
날보는 정임의 눈이 둥그래졌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내 사물함을 열었다.
정현이가 내물건들을 알아서 챙겨놨는지 정리가 잘되어 있었다.
"야야.. 사물함좀 깨끗이 써. 그거 챙기느라고 얼마나 애먹었는지 알
아?"
응?
정임이 손댄건가?
"근데 일찍온다.. 야~ 다시 봐야겠네?"
나는 한번 힐끔 정임을 보고 내자리에 앉았다.
정임은 생글거리며 내 옆에 앉았다.
화장품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너어.. 나하고 말하기 싫어?"
"예"
나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니..? 왜 그럴까? 내가 뭐 잘못한거 있니?"
"아니요."
"그런데..."
"그냥 싫습니다. 아는체 말아 주십시오. "
그리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정임이쪽으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정임은 가만히 있었다.
어색한 시간이었다.
"난 그래도 너하고 아는체 해야겠는데? 그리고.. 너 야간자습은 신청
안했다고
하던데.. 그래도 수업끝나고 자습하는것까지 빼먹으면 어떡해?
담임선생님한테 물어보니까 전학온지 3주밖에 안됐다면서?
근데도 벌써 널 포기하는 눈치야."
정임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말투는 타이르는 듯, 다정한 투였고 아까처럼 생글거리지는 않았다.
"고등학교는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야. 졸업하고 후회할 짓을
하는 건 현명하지 못해. 네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
"이런 씨팔! 시끄러워 죽겠네!"
나는 빽 고함을 지르며 자리에서 홱 일어났다.
정임도 놀라며 엉겁결에 같이 일어섰다.
"미래가 어쩌고 어째? 이런 씨팔.. 어차피 난 대학하곤 상관없는 놈이
니까
참견말란 말이야. 친한척하면서 알랑거리지도 마!"
나는 정임의 코끝에 내코끝이 부딪힐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고래고
래 소리를
질러 댔다.
정임의 눈동자가 한없이 커지며 몸은 당황인지 노여움인지 모를 감정
에
휩싸인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저..정우야... 하지만... "
"입닥치고 여기서 나가시지. 교생선생님."
그것은 비아냥이었다.
정임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젠장.. 나가기 싫어? 그럼 내가 나가지. 아침부터 재수없게.."
나는 주절거리며 교실을 나가려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야! 이정우!"
앙칼진 소리였다.
정임의 찢어지는 듯한 외침이 내등뒤를 찔렀다.
나는 쓰윽 뒤를 돌아 보았다.
정임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내가..내가.. 널 포기할줄 알어? 너..넌..."
정임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려 왔다.
그러더니 정임은 무너지듯 주저앉아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
15.
질질 짜기는..
지랄하고 있네...
날 포기하지 않으면...?
어쩌겠단 거야? 두드려 패기라도 할건가?
물론 정임의 말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지만 나는 비뚤어진 눈으로 정임
을
보고 있었다.
억울함과 서러움이 겹친 정임의 눈물은 제법 처량했다.
끼익-
교실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부지런한 한녀석이 등교하는 중이었다.
녀석은 멀뚱거리며 교실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봐도 예사롭지 않은 상황이었다.
정임은 다른학생이 들어오자 수치심을 느꼈는지 눈물을 훔치며 타닥타
닥거리며
교실을 나섰다.
녀석은 물끄러미 날 보고 있었다.
아마 무슨일인지 묻고 싶은데 상대가 나라 묻지 못하는 듯했다.
"별일 아니다."
나는 자리에 앉았다.
"어? 이게뭐지?"
내 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녀석이 책상안에서 뭘 발견한 모양이었다.
메모지였다.
내 책상안에도 정임이 남긴 메모지가 있었다.
'정우에게.
학교를 다니다 보면 힘들기도 하겠지만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다니다보면 재미있을거라고 생각해.
그나저나 날씨 참 좋다. 그지? 애들데리고 자취방에 놀러와.
건강하구.. '
"풋..."
나는 메모지를 쫙쫙 찢으며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렸다.
"야!"
"으응?"
"너한테 뭐라고 적었어? 가지고 와봐."
녀석은 싫은 듯했지만 마지못해 다가오고 있었다.
'진성에게
언제나 공부열심히 하고 말이 없는 멋진남자 봐.
어제 네가 물어본 문제 말이야..내가 잘못가르쳐 준것 같아서...
흑... 미안해 이렇게 실력이 없다니까..헤헤...
그거 강조용법이야. 너도 생각해 봤겠지? 그럼 공부열심히 해.'
나하고 내용이 달랐다.
"너 어제 뭐 물어봤어?"
"으응? 그냥 it..that구문이 가주어, 진주어인지 강조용법인지..."
"뭔소리야? 씨불... 근데 잘못가르쳐 준거야?"
"아냐... 같이 생각해 보자면서 이런저런 방법을 얘기해 주면서..."
"그러니까 잘못 가르쳐 준거아냐?"
"그게 아니고 일부러 내가 생각하게 할려고..."
"뭔소리야? 똑바로 얘기해 봐."
"그냥 자기도 잘모르겠다고 it..that을 생략해서 말이되면 강조된거라
고
자기는 가주어,진주어같다고 장난스럽게 그랬는데... 잘못가르쳐 준
게
아니라 내가 생각할 수 있도록 일부러..."
"야야.. 알았어.알았어."
도데체 말을 끊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옆자리에서 또 메모지를 꺼내 봤다.
그렇게 몇자리에서 꺼내본 메모지엔 모두가 다른 말이 적혀 있었다.
"쳇... "
나는 바닥에 떨궈진 조각난 내 메모지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책상위에 조각을 맞추며 다시 읽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손가락을 책상에다 딱딱 튀기며 메모를 보고 또 보았다.
윤정임...
좋은 냄새다....
지금껏 땀냄새 밖에 맡아보지 못한 나로써는 정임의 화장품냄새가 쉽
사리
잊혀지지 않았다.
"젠장.."
나는 머리속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감상에 빠지지 말자....
나는 사물함에서 충전기를 꺼내들어 콘센트에 꽂았다.
밧데리가 다 된 휴대폰을 충전하며 나는 주먹을 쥐었다.
'내가 가야 할길만 가는 거야. 아무도 날 막지 못해.
난 통이니까.... 내가 선택하는 건 모두 진리야. 적어도 나에겐..'
점심시간이 되자 김인범이 날 찾아왔다.
"이정우. 나좀 보자."
나는 인범과 단둘이서 매점으로 향했다.
매점은 북새통이었고 시끄러웠다.
"여기 좀 시끄럽다."
인범이 한마디하자 어느새 우리 패거리들 열댓명이 고함을 쳐댔다.
"이새끼들 조용히 안해?"
녀석들은 우리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뒤돌아 섰다.
매점에 온 아이들은 우리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밖으로 나가고 있었
다.
그렇게까지 할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괜히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
었다.
"간밤에 현장에서 작업하는 거 봤다며?"
"그래."
"어때? 느낌이.."
"글쎄.."
"처음에는 누구나 거부감을 느껴. 나도 그랬지. 일부러 그런 현장만
처음으로
보여주는 것 같애. 곧 익숙해질거다."
"그말할려고 불렀나?"
"아니, 넌 1학년이라서 아이들 모두 잡는데 한계가 있어.
넌 타학교나 외부에 상징적인 짱으로 남겨두고 우리학교는 내가 계속
경영하는게
어떤가 해서.. 사심없는 말이다."
"그렇게 해."
"물론 경제권은 네가 쥐고 모든 결정은 네가 할거야.
지금 서열은 네가 1위니까... 학년에 관계없이.서열은 분명하게 하겠
다. "
"그렇게 하라구."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들을게 없었다.
"잠깐."
"왜?"
"조만간 전쟁이 있을 거야. 학교는 아니고 명동쪽하고... 준비해 둬
라."
"전쟁? 어떻게 알아?"
"간밤에 경고메세지를 보냈다며? 그런건 그냥 넘어가지 않아.
전쟁이 일어나기엔 적당치 않은 시기지만 형식적으로나마 전투양상은
띌거야.
넌 참관인으로 가게 될거야."
"들은 소린가?"
"아니, 누구나 예측할 수 있어. 마음의 준비를 해둬라.
애들싸움하고는 질적으로 다르니까.."
나는 매점을 나섰다.
참관인라면 또 보고 배우라는 건가?
"어? 정우야"
신경 날카로운 날 누군가 불렀다.
정임이었다.
같이 교생실습나온 친구와 같이 있었다.
아침에 그렇게 나한테 당하고 눈물까지 흘렸으면서 손을 흔들어대며
친한척 하고 있었다.
"매점 갔다오니? "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려 했다.
"넌 도시락 안 싸와? 내가 네껏도 싸다가 올테니까 같이먹자. 응?"
"후--"
갑갑한 마음에 한숨이 나왔다.
"제발 친한척 좀 하지 말지 그래요?"
나는 이번에는 아주 공손하게 말했다.
"어머? 친한데 어떻게 안친한척 하니? 괜찮아,괜찮아.
우리사이 다 이해 할거야."
제법 농담까지 했다.
옆에 있던 친구가 정임이를 놀렸다.
"야 둘이 사귀니?"
"응? 몰랐어? 사귄지 오래 됐는데?"
피곤한 일이다.
삐리리리
전화벨 소리였다. 그소리가 이렇게 반갑게 들릴 줄은 몰랐다.
"여보세요"
"어? 이정우. 학생이 휴대폰이야? 내 거보다 비싼 거네?"
나는 정임의 말을 무시했다.
"나 윤재식이다."
사장이었다.
"네"
"오늘은 푹쉬고 내일 학교앞으로 차를 보낼테니 내일 보자.
이번일은 너에게 소중한 경험이 될것이다."